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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중에 허리 치료를 위해 나갔습니다. 만추에 젖은 인창동을 3-4k 뛰면서 컨디션이 나아진 것 같기는 합니다. 뛰는 것과 허리 통증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빨대(추미애) "와 "쭉쭉"(부승찬) 발언으로 민주당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가운데, 초선 "쭉쭉"은 징계를 하고 "빨대"는 아무런 페널티를 주지 않는다는 야당의 지적질에 "빨 대" 발언의 당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야고보가 경고하는 "말의 권력, 혀의 폭력"(약 3:1-1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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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전환과 도입 권면(1-2)
a.권면,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1
b.이유, 말로 넘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2
부연1, 말과 혀 사용에 대한 설명1(3-8)
a.혀의 기능과 중요성:3-5a
b.혀를 잘못 사용하는 위험성:5b-8
부연2, 말과 혀 사용에 대한 설명2(9-2)
a.일관성 있는 혀 사용에 대한 권면:9-10
b.일관성 있는 혀 사용을 위한 예증: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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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혀도(8a)
작은 지체로되(5b)
큰 것을 자랑하도다(5c)
보라(5d)
어떻게(5e)
작은 불이(5f)
어떻게(5g)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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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는 곧 불이요(6a)
불의의 세계라(6b)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6c)
온 몸을 더럽히고(6d)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6e)
그 사르는 것이(6f)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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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말로 세상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말로 세상을 왜곡합니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언어가 사유를 열어 주기도 하지만, 세간의 떠도는 말인 '빈말(Gerede)'로 전락하면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보았습니다. 야고보가 경계하는 선생의 위험도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말이 만들어 내는 결과에는 무책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관점에서 지식과 권력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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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자의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는 힘을 갖습니다. 따라서 선생이 되려는 욕망에는 진리를 전하려는 열심뿐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욕망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선생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러한 권력의 문제와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인다는 것이 단순히 말을 줄이고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침묵 역시 불의 앞에서는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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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윤리에서 타자는 나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언어의 윤리는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뿐 아니라 누구의 고통 앞에서 말해야 하는가까지 포함합니다. 야고보가 지적하는 가장 심각한 모순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진정성은 예배의 언어가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언어에서 검증됩니다. 다만 한 번의 말실수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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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자신도 우리 모두가 실수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언어를 성찰하고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려는 책임입니다. 말은 단순히 마음의 거울이 아니다. 말은 관계를 만들고, 상처를 남기며, 때로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타인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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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고보의 경고는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배울 책임부터 감당하라는 요청입니다.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순간 가르침은 권력이 되지만, 자신도 여전히 배우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가르침은 비로소 사랑이 됩니다. 말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재와 관계를 만들어 가는 행위인가? 가르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권위인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윤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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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거짓말 2회>입니다. 이가경을 인질로 잡았던 케이크 배달부는 사토 히데오와 총격전을 벌입니다. "탕! 탕! 탕!" 같은 날 사토 신이치를 노리던 소란-필립-스즈키는 총소리를 듣고 각자 움직입니다. 이 과정에서 스즈키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배달부(석중)는 총을 놓치며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손들어!" "아부지 거기 계셔요!' "허튼짓하면 쏜다" 그때 소란이 이 남자를 향해 총을 쐈고 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달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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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태웅이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사토 신이치가 히데오를 향해 총을 겨눕니다. 2층에 숨어 있던 가경은 경찰에 끌려나가지만 히데오가 나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합니다. " 그 여자는 범인이 아닙니다" 경무국장 후쿠다(김중희)는 가경이 도망친 암살자와 한패가 아니냐고 쏘아붙였고 히데오는 이 여자가 경무 총감과 자신을 구했다고 증언합니다. 가경이 후쿠다에게 무언가 털어놓으려는 순간, 소란은 통증을 호소하며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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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야! 나 좀 도와줘!(소란)" "움직이지 마!(후쿠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내 처와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총독부에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필립)" 수색이 길어지자 필립은 계속 의심하면 오늘 일을 기사화하겠다고 공갈을 때립니다. "잘 판단해! 60원 받고 싶으면(소란이 가경에게)" "부인께서 곧 안정을 되찾으시길 바라오!(신이치)" 소동이 끝난 뒤 암살 작전이 실패하자 소란은 가경을 원망합니다.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아니?(소란)" "남 탓하지 마세요. 저도 죽을 뻔 했잔하요(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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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일본 땅인데... 내가 꼭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까?(가경)" 가경은 가경대로 돈 벌려다가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했다며 화를 냈고, 필립은 가경을 그냥 보내기 불안해 총을 겨누지만 소란은 보내주라고 말합니다. "훔친 게 있으면 얌전히 내놓고 가세요!(필립)" 필립은 가경이 쓰리 한 소란의 미국 여권만 돌려받고 길을 터줍니다. "너 미국 못 가!(소란)" "그 자는... 아마 독립군 같은데 어디서 온 자인지 궁금합니다(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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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은 오늘 나타난 암살자의 이름이 금석중 전 남편임을 밝힙니다. 금석중(유소란의 남편)은 13년 전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군에 붙잡혔고, 당시 어린 딸 금서희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는데 그 학살 지휘를 사토 신이치가 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금석중은 왜 찾아온 것일까? "당신 진짜 이집 안잠자기가 맞습니까?(태웅)" "마님 약 사러 심부름 나왔어요(가경)" "시간 낭비니까 그만하죠.. 돈은 갖고 지갑 안에 든 거 만 돌려주시라! (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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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당신을 우리 집 안잠자기로 알고 있으니 오늘 밤우리와 함께 있어야 해요(필립/가경)" 소란은 구국 단원들이 있는 한의원으로 옮겨진 뒤, 작전 실패를 알리고 총격 전 충격으로 유산한 것으로 위장합니다. "괜찮으시겠죠?(가경)" "아이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의사)" "똑똑똑! 아버지! 유필상의 부인이 하혈로 급히 병원에 실려갔습니다!(히데오)" 병원 시퀀스에서 소란이 커튼 사이에 가경을 두고 상 탈해 험한 등짝을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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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의 반달 펜던트와 가경의 반달 펜던트의 사연도 궁금합니다. 한편 총독부는 금석중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또한 구국단 핵심 요원 한철룡(김인권)이 상해에서 돌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구국단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사토 신이치는 이번 사건을 구국단 소행으로 몰아 조직을 뿌리째 뽑으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소란이 유산한 것으로 믿는 가경은 미역과 쇠고기를 사 들고 다시 찾아갑니다. 자신 때문에 유산한 것이 속상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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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이 건넨 100원 중 장 본 값을 뺀 나머지를 돌려주며 다시는 엮이지 말자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가경의 속마음이 궁금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 남편이 되었어도 여전히 나는 우리가 아니네요(소란/필립)" 가경의 움박집입니다. "너 그거 못 봤냐? 종이...전당포...꽃님아! 여기서 종이 가져갔어? 아...살았다 다행이다... 아니지 절대 못 돌려줘... 아서라 돈 100원 벌려다 절대 죽으면 안 되지(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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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가 총 맞았으니 영어 통역은 히데오가 맡고 외신 기자 필립을 감시하라고 명령합니다. "저는 믿으십니까?(너는 내 아들이다) 근데 왜 총을 겨누셨습니까? 아버지한테서 버려질까 봐 발버둥 쳤습니다. 또다시 총을 겨누신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사토 부자)" 조센진을 믿지 않는다는 양부의 말에 히데오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떠난 날과, 전 날 밤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던 아버지(사토)의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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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제 딸의 이름입니다... 기미년 그날..." 유소란의 과거는 기미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만세 운동이 벌어진 뒤 일제는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는데, 당시 계암리에 있던 사토 신이치는 금석중에게 공범을 불지 않으면 딸 서희를 죽이겠다고 했고 서희는 총탄에 맞아 즉사했어요. 이후 아내가 타깃이 되자 나병순-최만춘-김풍산을 불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날아가버리고 죄 없는 계암리 주민들이 불타 죽는 학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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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었던 계암리 사건 현장을 이렇게 보게 되니 만감이 교차하더이다. 히데오는 정무총감을 대신해 의원을 찾아 위로를 전하고 가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며 행방을 묻습니다. 필립은 그 아이가 겁을 먹고 일을 그만뒀다고 둘러대지만 히데오가 가경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합니다. 원수는 늘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가경이 총알을 팔기 위해 들른 종로 전당포에 히데오가 우연히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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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은 달아나려 하지만 히데오는 발을 걸어 그를 붙잡고, 허리를 감사 안은 채 "잡았다 소매치기!"라고 말합니다. 둘의 출생 비밀은 무엇일까? 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역사와 폭력 앞에서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2.
우중에 허리 치료를 위해 인창동으로 나갔습니다. 만추의 빗속을 3~4km 뛰었더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것 같습니다. 몸이 움직이니 마음도 따라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존재입니다. 물론 달리기가 허리 통증을 치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몸의 상태가 달라지면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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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에서는 말 한마디가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빨대'와 '쭉쭉'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공방을 보면서 야고보서 3장의 경고가 떠오릅니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 이상 말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고, 공동체의 갈등이 되며, 때로는 권력의 정당성을 시험하는 기준이 됩니다. 야고보는 혀를 작은 불씨에 비유합니다. 작은 불이 숲을 태우듯 사소해 보이는 말 한마디가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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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을 조심하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만들어 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입니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언어가 사유를 열어 주기도 하지만, 세간의 떠도는 말인 '빈말(Gerede)'로 전락하면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보았습니다. 푸코에게 언어는 권력과도 연결됩니다. 특히 공적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은 단순한 의견을 넘어 타인을 평가하고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힘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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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력자의 말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말은 정의롭고 상대의 말은 악하다고 확신하는 순간 누구나 언어의 폭력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혀의 위험은 특정 집단에만 적용되는 경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향한 자기 성찰의 요청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 <100일의 거짓말> 2회 역시 말과 권력,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가경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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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전이 벌어지고, 암살 작전은 실패하며, 그녀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구국단은 가경을 의심하고 책임까지 묻습니다.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일본 땅인데, 내가 꼭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까?" 가경의 이 항변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실존적 질문입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하지만, 그 선택은 언제나 자신이 만들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경은 식민지 조선에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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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폭력의 세계에 던져졌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해방이라는 대의는 개인에게 어디까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가경의 생존 욕망을 비겁함으로 단정한다면, 정의를 추구하는 조직조차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회차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총격전이 아니라 13년 전 계암리의 학살입니다.금석중은 아내의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동료들의 이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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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말은 가족을 구하지 못했고, 무고한 주민들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야고보가 말한 혀의 파괴력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석중의 발언이 참극의 계기가 되었더라도 학살의 책임은 협박과 살해를 실행한 식민 권력에 있습니다. 고문과 협박으로 강요된 발언을 자유로운 선택과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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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토 신이치는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대면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그의 언어는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며, 그의 질문은 진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폭력입니다. 반대로 사토 히데오에게는 또 다른 모순이 존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양부 사토 신이치의 말은 보호와 사랑의 약속처럼 들리지만, 아들을 향해 겨누었던 총구는 그 말을 배반합니다. 히데오가 느끼는 불안은 단순한 가족 갈등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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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출신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이 끝내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체성의 균열입니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으로 보면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구인지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히데오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해야 현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인정에 의존하는 그의 삶은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자기 존재의 근거를 타인의 승인에 맡긴 불안정한 삶이기도 합니다. 유소란이 가경에게 보여 준 상처투성이의 등 역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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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의 흔적을 몸으로 증언합니다. 고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있지만, 언어만으로 모두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소란의 몸에 남은 상처는 식민 폭력이 지나간 뒤에도 그 폭력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소란은 남편 금석중을 향해 말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한마디는 복수와 정의 사이에 균열을 만듭니다. 원수를 죽이면 정의가 실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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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싸우는 폭력과 구별될 수 있는가? 아렌트의 사유를 빌리면 폭력은 때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이번 회차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경의 변화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총알을 훔쳤던 여인이 자신 때문에 유산했다고 믿는 소란에게 쇠고기를 사 들고 찾아갑니다. 돈이 전부였던 가경의 세계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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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기 위해 총알을 훔쳤던 여인이 자신 때문에 유산했다고 믿는 소란에게 쇠고기를 사 들고 찾아갑니다. 돈이 전부였던 가경의 세계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경이 갑자기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는 엮이지 않겠다며 돌아섭니다. 바로 이 모순이 인간적입니다. 연민은 생겨났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책임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존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윤리적 변화는 언제나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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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가 전당포에서 가경을 붙잡습니다. "잡았다, 소매치기!" 총격과 학살, 배신과 복수의 무거운 서사 속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잠시 숨통을 틔웁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장면의 긴장은 더욱 깊어집니다. 야고보는 혀가 작은 지체지만 큰불을 일으킨다고 경고합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누군가의 말은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의 거짓말은 생명을 구하며, 누군가의 침묵은 폭력을 지속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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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말의 윤리는 단순히 거짓말하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해 말하는가, 어떤 권력 아래에서 말하는가, 그리고 그 말의 결과에 누가 책임지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한다고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거짓말한다고 언제나 악한 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강요한 자백을 동일한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의 진정한 가치는 그 말이 얼마나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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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빨대·쭉쭉' 논란에서는 추미애 지사의 사과, 부승찬 의원의 사과와 당의 조사 지시가 보도됐습니다. 부 의원에게는 조사가 지시된 반면 추 지사에 대한 별도 조치가 없어 형평성 논란이 제기됐습니다. 다만 당사자의 속마음은 알 수 없으며, 조사와 징계 확정도 구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공직자의 언어에 일관된 책임 기준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타인을 지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존엄을 지키고 있는가?
2026.10.23.fri.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