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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과의 분열
전 세계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을 재건하려는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유지를 '객관적으로' 조장하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공산당은 사회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보호하면서 전쟁 동안 부르주아와 연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국제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사회당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독재적인 성격을 지적하면서 이에 응수했고 공산당이 민주적인 사회주의 전통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소련).
유럽의 사회당 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었다.
독일에서는 다시 연합한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결집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독일 노동운동에서 소수의 위치로 전락했다. 처음에 공산주의가 사회당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다시 지배권을 차지했고 공산당은 프랑스 좌익에서 소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공산당·좌파사회당·우파사회당으로 분열함으로써 무솔리니의 권력장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영국의 공산당은 노동당 속에서 거의 성장하지 못했고 급진적 분파 이상의 세력이 되지 못했다.
다른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사회주의 역시 제2인터내셔널의 추종자와 제3인터내셔널에서 조직된 공산당 사이의 강한 분열을 드러냈다.
코민테른은 때로는 혁명노선으로 전환하고 또 때로는 호전적인 사회주의 계층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등 특이한 노선을 보여주었다. 1929년 경제공황이 엄습한 뒤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최후 위기'가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리라 기대하면서 극좌편향했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프로이센 주의회에서 공산당은 나치 운동이 하나의 과도적 현상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사회민주당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나치에 찬성표를 던졌다(나치즘).
동시에 사회당은 이론적으로는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혁명교리에 대한 서약을 포기했다.
이제 사회당은 각각의 민족정부로부터 노동계급의 최대이익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압력단체가 되었다. 독일·영국·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당은 정부에 참여했고 프랑스 등지의 사회당은 마음이 맞는 좌파 부르주아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구체적인 사회·경제 활동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 경제공황이 서유럽과 중유럽의 경제와 정치체제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무능을 드러냈다.
세계 경제공황에 대한 반응
스웨덴과 벨기에를 제외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공황 동안 종합적인 사회주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통적인 예산행정과 공공재정 정책을 따랐고 권력을 얻지 못했을 때는 더 많은 실업보험을 요구하고 임금감축에 반대함으로써 노동자의 즉각적인 이익을 서로 경쟁적으로 옹호했다. 경제위기의 심화에 따라 공산당이, 특히 공황에 의해 가장 심하게 타격받은 실업자와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밖의 노동자들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파시즘의 등장
독일에서 히틀러의 출현은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당 모두를 붕괴시켰다.
공산당은 나치의 승리가 단지 일시적이고 그뒤에는 자신들이 독일 대중을 승리로 이끌기를 희망했다. 공산당의 구호는 "나치 다음에─우리"였다. 사회당은 경제공황이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뒤에는 나치라는 열병이 점진적으로 쇠퇴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분열된 노동운동은 나치의 권력장악을 정지시킬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이 불행한 사태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들의 이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이끄는 혁명정부에 의해 붕괴될 위협에 놓이자 1934년 2월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이론적 기여와 구체적인 업적이라는 2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모범을 보여왔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거의 모든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고 빈 인구 200만 명 중 50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은 거의 전적으로 대도시적이었다. 따라서 1934년 2월 유혈싸움은 빈에만 국한되어 일어났고 이 봉기가 4일 만에 진압되자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정부 속에서의 경험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마지 못해 독일 정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은 내부적으로 분열해 우파인 '다수 사회당'은 조심스럽고 실용적인 방안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카우츠키와 그의 전(前) 베른슈타인 반대자들이 이끄는 '독립 사회당'은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극좌파는 혁명당을 조직하려는 열망에서 독일 공산당을 창당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능가하는 젊은 극단주의자들은 1919년 초기에 좌익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수 사회당 정부와 그들의 동료인 우파 장교에 의해 가볍게 진압되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암살당했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으로 들어갔다. 몇 개월 뒤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좌파와 공산당의 폭동 역시 실패로 끝났다.
1920년대 초기에 독립 사회당은 다수 사회당과 다시 연합했다. 1919년 새 국민의회 초대 선거에서 다수 사회당은 대다수인 39.3%, 독립 사회당은 8%의 지지를 얻었다. 사회당 정부는 독점산업 사회화의 필요성을 비롯한 급진적인 조치들을 공표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선거로 비(非)사회당 내각이 출범했고, 사회당원이 몇 명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각의 성격은 비사회주의적이 되었다. 중간계급이 권력을 잡았고 1925년 에베르트 대통령이 죽자 보수적인 국가주의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기 혼란상태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극우와 극좌 모두에 반대하는 공화국 적법성의 보루였다. 여러 주(州, Länder), 특히 프로이센에서 사회민주당은 정부를 장악했고 많은 개혁주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국 정치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28년 5월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출현했다. 다수득표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지도자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고, 그들의 재정전문가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직면하고 있던 경제공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했다(대공황). 사회민주당 정부는 정통 통화수축정책에 입각하여 세금을 저축하기 위해 실업수당을 감축하고 예산적자를 감소하려 했으나 이런 정책은 효과를 보지 못해 1930년 물러나야 했다.
이 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참여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였고, 그 직후부터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23년 총선거에서 5년 앞서 사회주의 계획을 채택했던 노동당이 다수를 얻어 여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1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은 몇 개의 온건한 개혁조치를 취한 뒤 1924년 10월 선거로 물러났다. 노동당 내각이 단명한 것은 어느 정도는 '볼셰비키주의자 위협'이라는 조작된 공포로 유권자들이 갑자기 우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1929년 6월 노동당은 2번째 기회를 얻었다. 노동당은 하원의석 총 615석 가운데 288석을 얻었고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2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역시 불경기, 특히 솟아오르는 실업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원대한 사회개혁을 약속했지만 이 개혁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런던으로부터 도피된 자본의 양은 대격변을 불러일으켰고 기업측은 균형예산과 실업수당의 감소를 요구했다. 맥도널드가 기업의 요구 몇 개를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격렬히 반대했다. 이 문제로 분열한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과의 전국연합을 결성했고 이때문에 노동당은 1930년대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19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총 550만 표 중 200만 표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규모 파업, 대중시위, 공장점령, 토지재산의 자발적 몰수 등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0년 8월 임금협상이 깨진 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혁명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0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령했고 생산을 계속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극좌세력이 파업 확대를 주장했으나 분열된 사회당 지도자들이 주저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실망하여 기세가 꺾였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이 노동계급의 모임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우파 당원들은 사회당과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좌파는 이를 거부했다. 무솔리니의 테러단은 점점 더 산업 중심지로 침투해 들어갔다. 노동조합이 일으킨 총파업은 형편없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그 직후 무솔리니는 로마 행진(1922. 10)을 감행하여 권력을 잡고 총리에 취임했다. 1926년 이탈리아에서 의회제 정부는 완전한 종말을 고했고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실제로는 점진주의를 택했지만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전(戰前)의 정책을 고수했다.
1930년대 중반 호전적인 우파집단이 제3공화국을 위협했을 때 사회당은 그들의 정책을 전환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이 이끌었으며 좌파 공산당부터 중도파 급진사회당까지 포괄했다(프랑스 급진사회당). 마침내 공산당은 '사회 파시즘' 교리를 버리고 기꺼이 중도파·좌파 정당과 연립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승리는 공장에서의 연좌농성파업과 함께 일어났다. 이 파업은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정부를 급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전까지 프랑스 고용주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집단교섭권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며 사회보장과 전반적인 노동조건도 매우 개선되었고 주 40시간 근무가 의무화되었다. 블룸 정부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프랑스식으로 실시하려 했으나 처음에 가졌던 열정이 퇴색한 고용주들은 정부를 자극해 전통적인 재정·예산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7년 6월 연립정부의 중간계급 출신 각료들은 블룸의 긴급재정권 요구를 거절했고 블룸은 사임했다. 사회당은 급진사회당이 이끄는 차기 정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블룸은 별도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성했고 이 정부는 1938년 약 1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1939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쟁을 반대했던 공산당은 불법화했다.
1940년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 사회당은 비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되었다.
스웨덴에서만이 사회당은 정부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 노동당 정부는 1932년에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유럽의 사회당과 달리 스웨덴 사회당은 정통 재정정책을 버리고 경제계획에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을 강조했다.
광범한 공공업무는 유효자본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실업의 감소를 도왔고 경제를 장려했다. 개인소비의 감소에 따른 상쇄효과를 이용해 공공투자가 이루어졌고 1933년에 16만 4,000명에 이르렀던 실업자는 꾸준한 경제팽창정책을 통해 1938년에 사라졌다. 스웨덴의 혁신은 제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가 실시했던 경제정책의 본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