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항상 맑은 날만 있을 수 는없다. 쨍하고 해가 뜨는 날이 있으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복길이엄마’로 유명한 탤런트 김혜정은 자신을 춥게 만드는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그녀의 하늘에는 해가 떴다.
취재_윤혜진 기자 사진_임효진(studio lamp) 촬영 협조_스페이스 화수목(02-792-5571)
탤런트 김혜정에게서는 은은한 꽃 향기가 난다. 드라마‘전원일기’의‘복길이 엄마’에게서 는 고향의 냄새가 났지만 실제 그녀에게서는 꽃 향기가 난다.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그윽한 난 꽃 향기. 세월이 흐를수록 꽃 내음은 깊어져 간다. 이제 그녀가 감추려 해도 절로 배어날 정도다.
올해 나이 마흔여덟, 연기 인생 27년의 그녀는 만개를 앞뒀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꽃 향기는 대중에게 낯설다. 탤런트‘김혜정’을 떠 올리면 고향의 냄새가 꽃 향기보다 먼저 떠오 른다. 이제 그녀는 조금씩 세상에 다가갈 필요 를 느끼고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 한 걸 음 .............
일, 그림 레슨, 봉사활동으로 꽉 찬 일주일
“일만 하는 삶은 재미없어요”
2002년 종영한‘전원일기’이후 한동안 브라 운관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녀 의 안부를 전하는 기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브라운관에서 종종 그녀 의 모습이 보인다. 최근에는 드라마‘식객’에 서 깐깐하지만 정 많은‘운암정’매니저 역을 맡아 모처럼 현대적인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전원일기’에서 오랫동안 함께 출연했던 최 불암 선생님과 이번 작품에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저한테 조언을 많이 해주셨던 분이라 함께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또 제가 좋아 하는 요리를 주제로 한 드라마라 여러모로 현 장에 오는 게 재미있어요.”
그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했다. 일주일에 두 번 그림을 배우러 가고, 하루는 봉사활동을, 하루는 불교방송 텔레비전‘삶과 수행’의 MC를 맡아 녹화를 한 다. 여기에 드라마 촬영까지 하고 나면 일주일 이 빠듯할 정도. 중견 화가에게 배우고 있는 그림 레슨도 한 달 8번 중 6번 가기도 벅차다. 그래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요즘 생활이 그녀는 즐겁기만 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취미 활동으로 수채화를 그렸었는데 사생대회에서 상도 받고 그랬어요. 그림을 배운지 이제 3개월 됐네요. 그런 데 막상 배워 보니 열심히 하려는 단계에서 마음대로 표현이 안 되니까 속상하기도 하고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하긴 3년 후면 연기한 지 30년인데, 지금도 연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3개월 배운 걸로 잘 그리겠어요(웃음)?”
그녀는 지금 자신의 나이가 좋다고 한다. 서른 일곱이 되면서부터 작은 변화들이 생기기 시 작했던 것. 사람을 대할 때 작은 것에도 감사 하게 됐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됐다. 더불어 그녀는 삶에서 주인은 자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한물간 배우로 느끼 더라도 상관없단다. 그저 향기가 있는 사람, 봐도 또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 두 걸 음 .............
미스 MBC 출신‘복길이 엄마’
나를 키운 8할은 유년 시절 조부모님과의 추억
오똑한 코, 커다란 눈망울, 세월을 거스른 호 리호리한 몸매. 그녀는 전형적인 서양형 미인이다. 지난 1981년 김청, 이휘향과 함께 미스 MBC로 선발된 후 그해 MBC 탤런트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 별 기대 없이 맡은 역할이‘전원일기’의 복길이 엄마다. 당시만 해도 연기자 김혜정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청이랑 휘향이랑 정말 예뻤어요. 특히 휘향 이는 당시 찢어진 청바지를 입을 정도로 감각이 뛰어났어요. 그런데 전 스물셋 어린 나이에 ‘복길이 엄마’를 시작했죠. 한창 어릴때 맡았지만 역할이 싫진 않았어요. 연기력으로 알려 진 분들하고 연기하는 거라 좋은 기회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어린 마음에‘전원일기’때문에 다른 작품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가지기도 했다. 한 4~5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하나에 열심히 몰입해도 제대로 그 인물을 표현하기 힘든데 그 같은 교만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연기자는 단거리 선수가 아니다”라며“나이 들어서도 연기자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이 안 에서 숨 쉬며 살아가야 한다”는 연기자에 대 한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까지‘복길이 엄마’타이틀이 절 쫓아다닐지 몰라요. 하지만 브랜드 네임은 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무명 배우들도 많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강점을 갖고 있는 거지요.”‘복길이 엄마’는 확실한 강점이었다. 한 제과업체의 대표 품목인‘초코과자’시리즈 광고에 첫 번째 타자로 출연하는 등 CF도 여러 편 찍었다. 그렇다고 돈이 된다고 무조건 OK한 것은 아니다. 밤무대 제의도 많 았지만 모두 거절했단다. 자신을 돈에 얹어서 파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엔터테이너 김혜정’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엔터테이너들은 무엇을 하든 세상 의 중심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짊어지고 가야 한단다. 너무 고급이거나 저질이어도 안 되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녀는 감을 유지하는 것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타고난 감각이 없다면 힘든 일이라 는 말도 함께. 한 사람이 성공하는 데에는 노력해서 되는 것도 있고 타고난 DNA가 어느 정도 작용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녀는 엔터테 이너로서의 감을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엄마가 저를 낳고 몸이 안 좋으셔서 초등학 교 3학년 때까지 조부모 밑에서 자랐어요. 저의 95%가 그 시기에 완성됐죠. 가만 보면 저 는 할머니가 가지신 다재다능함과 열정, 할아 버지의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하는 점을 닮았 어요.”
전라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동경제국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몽상가였다. 논을 하나 팔아서라도 중국, 일본 등에 여행을 가는 식이었다. 할머니는 다혈질에 음악, 스포츠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랑‘박치기 왕’김일의 레슬링 경기를 보러 다닌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단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장구와 춤추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색소폰을 잘 불던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지금은 은퇴한 축구 선수 유상철이 그녀와 조카 사이인데, 유상철도 할머니를 많이 닮았단다. “상철이가 고모 딸의 아들이에요. 고모가 육상을 하셨고, 형부는 복싱을 하셨죠. 그 끼와 체형을 상철이가 고스란히 이어받았어요. 한 번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상철이와 가진 가족 모임에서 자리를 함께했던 제 지인이 ‘집안 사람들이 거란이나 말갈 계통의 후예 같아’라고 한 적도 있어요. 체형이 크고 정열적 인 우리 가족들을 보며 그렇게 느꼈나 봐요.”
사실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예쁜 외모를 지닌 그녀로부터 그같은 끼를 단박에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또 하고 싶은‘열혈’배우다. 어려운 일 일수록 도전의식이 생긴단다. 힘들기로 유명한 마라톤도 하프 코스를 두 번이나 완주했 다. 그녀는 스스로를‘호기심 천국’이라고 칭했다.
# 세 걸 음 .............
5년 전 이혼, 37%에 달하는 전신 화상
뼛속까지 아픈 고통이 없으면 행복한 것
그녀의 눈은 투명한 옅은 갈색을 띤다. 호기 이 많은 이유도 그녀의 눈을 보면 알 것 같다. 사람의 일이란 말로 다 설명할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사람의 인연 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냥 바람처럼 곁에 머물수 있는 것이고, 인연이 다했다 해도 그인연을 무자르듯 싹둑 잘라 낼 수는 없지않나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진실한 마음이 느껴진다. 눈이 참 진실해 보인다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류시화 시인의 잠언집에 있는‘눈물’이란 시를 좋아한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로 돌아온다면 눈물로 돌아오리라. 너의 가슴에서 잉태되고 너의 눈 에서 태어나 너의 뺨에서 살고 너의 입술에서 죽고 싶다. 눈물처럼.’사람은 가슴과 가슴으 로 만나야 해요. 진실함은 기본이죠. 단순히 자극적인 어떤 것을 위해서 만남을 가지는 태 도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지난 2003년 환속 스님이자 시인인 황청원씨와 이혼하고 현재 혼자 살고 있다. 1988년 결혼 당 시 환속 스님과 탤런트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 았던 두 사람은 1997년부터 별거를 시작해 결혼 생활 15년 중 11년을 따로 떨어져 지냈다. 그런데 5년간 가슴에 묻어 온 이혼 사실이 최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새삼 이슈가 되 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했다.
“이혼 사실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인터뷰 제의가 있어도 계속 피해 왔어요. 살다 보면 비오고 바람 부는 시간이 있잖아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어요. 잔잔해질 때 까지.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대중에게 약간의 친근감을 줄필요는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서서히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이혼의 구체적 사유에 대해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미 5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자꾸 얘기해서 좋을 게 없다고, 스스로 이혼 사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했 다면 진작 이 점을 내세워 인터뷰를 하고 그랬을 거란다.
“사람의 일이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이 있어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 지 않아도 그냥 바람처럼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이고, 인연이 다했다 해도 그 인연을 무 자 르듯 싹둑 잘라 낼 수는 없지 않나요.”
지난 상처의 기억이 되살아난 듯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던 그녀는 이내 차분히 이 정도는 괜 찮다고 했다. 뼛속까지 아픈 일이 있는 게 아니 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모든 걸 이겨 냈기에 지금 자신은 담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 아문다. 5년이란 시간이 그녀를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나 보다.
지금 그녀에게는 2년 전 큰 화상을 입어 여배 우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가 더 생생하 게 다가오는 아픔이다. 요리를 하다가 상반신의 37% 가까이 화상을 입은 그녀는 2개월 동 안 입원해 매일 매일을 고통 속에 보냈다.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매일 칼날로 화상을 입은 부위를 긁어 냈다. 이때 조금만 움직이면 칼에 베일 위험이 있어 주먹을 꽉 쥐고 부동자 세로 혹독한 고통을 참아 내야 했다. 치료가 끝나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야속한 의사는 죽을 각오로 참아 내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김혜정씨는 참는 겁니까. 통증을 모르는 겁니까”라고 물어 오곤 했다.
“의사가 처음에는 가망이 없다고 했어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래요. 하지만 계속해서 화상 상처가 살 속을 파고드는데 어떻게 앉아 있어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나는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결국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다리만 건너면 보이는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하루 두 번 아침에 5km, 저녁에 5km를 걸었다. 화상 부위에 밴드를 했어도 걸으면 피고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하루에 7~8번씩 고름을 닦아 내고 굳은살을 직접 긁어 냈다. 차츰 새살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녀가 화상을 입었었는지조차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완쾌가 된 상태다. 슬쩍 보여준 팔에는 약간의 흉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화상이라는 걸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그렇 게 고통스럽고 어려울 줄 몰랐어요. 행복이 별 거 아니더군요. 신에게 감사드려요. 삶이 더 소중해졌고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미리 알게 해주셨잖아요.”
그녀는 올해부터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기증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직접 학교에 찾아가 특강을 하기도 했다. 결손 가정 학생에게 꿈을 심어 주는 강의였다. 곱기만 한 그녀가 과연 결손 가정의 아픔을 알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그녀는 자신도 중.고교 시 절 졸업 앨범 살 돈이 없어 결국 찾지 못하던 가난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고통스러 울 만큼 가난한 환경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 고 잘될 것이란 확신에 차 지냈다. 물론 잘되 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2년 전 한양대 엔터테인먼트 과정을, 1 년 전 성균관대 경영자 과정에 입학해 수업을 들었다. 내년에는 대학교에 편입할 계획이다. 전공 과목은 사회복지나 가정복지 분야. 석사 까지 완성한 후 55세 즈음 이르면 아름다운 무언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꿈꾸고 있다. “이래도 시간은 가고 저래도 시간은 가요. 내 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하죠. 행복 이란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저는 지금의 이 상황을 훌륭히 해내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정말 노력하면 내 인생의 정점이 쉰다섯쯤에는 오지 않을까요.”
그녀는 인터뷰가 끝나자 가지고 온 디지털 카메라로 기자와 사진기자를 담아 두고 싶다고 했다. 오늘의 소중한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 보고 싶을 때 꺼내 보며 추억을 더듬기 위해서란 다. 현재에 충실히 오늘을 기억하는 그녀. 그 녀와 헤어진 후로도 한참 동안 그윽한 꽃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첫댓글 힘센소 원기소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