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8
광평․성산이씨(廣平․星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광평 이씨(廣平李氏)의 시조(始祖)는 성산(星山 : 성주의 고호)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한 사족(士族)으로 고려 말에 사재 동정(司宰同正)을 지낸 이무재(李茂材)이며, 그의 증손(曾孫) 능(能)이 나라에 공(功)을 세워 광평(廣平 : 성주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지금은 성산(星山)으로 쓰고 있다. 본래 성주(星州)에는 여섯 가문의 이씨(李氏)가 세거(世居) 하면서 조선(朝鮮) 정조(正祖) 이전까지는 다같이 본관을 성주(星州)로 사용했으나, 그 후 각각 성주(星州)․광평(廣平)․성산(星山)․경산(京山)․벽진(碧珍)․가리(加利)로 본관(本貫)을 달리 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호성(好誠)이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지낸 희조(希祖)는 호성의 손자로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양했으며 조부(祖父 : 호성)를 위해 동산정(東山亭)을 세웠다. 순조(順祖)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성종조(成宗祖)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했다. 그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장에서 순절한 령(伶)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명신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와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훈이 있어 훈권(勳券)을 두 차례나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평․성 산 이씨(廣平․星山 李氏) 는 남한(南韓)에 총 16,812가구, 67,5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위이씨(軍威李氏) 군위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0가구 1,4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이씨(金海李氏) 김해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12가구 3,11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주이씨(羅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나주 이씨(羅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철우(李哲祐)는 누대(累代)에 걸쳐 나주(羅州)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평남(平南) 개천군(价川郡) 마장(馬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철우(哲祐)의 증손(曾孫) 의성(義聖)이 중종(中宗)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의성의 막내 아들 지만(枝蔓)이 용양위 첨지중추부사(龍驤衛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외 인물로는 지영(枝榮)의 아들 4 형제 중 맏아들인 기정(起正)이 1507년(중종 2) 초시(初試)에 올라 1546년(명종 1)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한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이씨(羅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886가구, 9,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원이씨(南原李氏) 남원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84가구 2,5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평이씨(南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남평 이씨(南平李氏)의 시조(始祖)는 이동말(李東秣)이다. 그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보조공신(補助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동말(東秣)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남평(南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동말의 손자(孫子) 문장(雯章)이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문장(雯章)의 맏아들 은흥(銀興)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을 거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그외 이괄(李适)의 난(亂) 때 순절(殉節)한 충원(忠元)과 현종(顯宗)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宣略將軍)․절충장군(折衝將軍)․군수(郡守)를 지낸 관(灌)이 대표적이고, 유룡(裕龍)과 정용(禎龍)은 다같이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평 이씨(南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9가구, 1,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서이씨 농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5가구 1,04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농성이씨 농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8가구 1,4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성이씨(丹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단성 이씨(丹城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 현(李 峴)이며 그의 선계(仙界)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후 후손 원발(元發)이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원발(元發)의 7세손 영보(永寶)가 조선(朝鮮)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문공서원(文公書院)의 원장(院長)으로 단성(丹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부터 후손들이 원발(元發)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관향(貫鄕)을 단성(丹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원발의 아들 유거(惟擧)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낸 그의 아들 숭간(崇幹)이 유명하였으며, 우부승선(右副承宣) 종(棕)은 동정(同正)을 역임한 계인(桂仁)의 아들로 그의 아들 승민(承敏 : 직제학을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에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작(綽 : 예조 참판을 역임)․윤(稐 : 감찰을 역임)․체(棣 : 동부승지를 역임)․매(枚 : 공조 참판을 역임) 등이 뛰어났고, 현감(縣監) 백형(伯亨)과 공조 참의(工曹參義)에 오른 철주(鐵柱)가 선조(先祖)들의 뒤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성 이씨(丹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61가구, 2,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양이씨(丹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단양 이씨(丹陽李氏) 시조 이배환(李盃換)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에서 내시진전직(內寺眞殿直)을 지낸 그의 10세손 이방규(李方揆)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해 오고 있다. 배환의 14손인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무(茂)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朝鮮) 개국 후 1398년(태조 7)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왕자의 난(亂)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겸(謙)과 지시(之詩)․입(立) 등이 뛰어났다. 겸(謙)은 집의(執義)를 역임한 맹지(孟智)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사성(司成) 등을 지내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영조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지시(之詩)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서 장원하고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인(龍仁)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의병장(義兵將) 입(立)은 임진왜란 때 소사싸움에서 공(功)을 세워 훈련판관(訓鍊判官)이 되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오랑캐를 무찔러 공(功)을 세움으로써 명나라로부터 상을 하사받았다. 죽은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이씨(丹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537가구, 14,343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양이씨(潭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담양 이씨(潭陽李氏)의 시조(始祖) 이덕명(李德明)은 백제(百濟)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인수(仁壽)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 할 수 없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신평(新平)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덕명(德明)의 아들 춘(椿)이 고려에서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냈고, 손자 화(和)가 상서(尙書)를 역임했다. 그외 상장군(上將軍) 승소(承召)와 산원(散員)을 역임한 예(藝)가 이름났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장령(掌令)을 역임한 견의(堅義)와 현령(縣令)을 지낸 탐룡(耽龍)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담양 이씨(潭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63가구, 1,6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흥이씨(大興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전주 이씨(全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알려진 대흥 이씨(大興李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오른 이연계(李連桂)를 시조(始祖)로 한다. 연계는 태조(太祖)가 용흥(龍興)으로 가려는 것을 만류하다, 양양(襄陽)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1403년(태종 3) 태종(太宗)이 이를 특별히 사면하고 대흥군(大興君)에 봉했으며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환원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렸으나 본관(本貫)을 대흥(大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연계(連繫)의 아들 3형제 중에 맏아들 손귀(孫貴)가 용주부사(龍州府使)를 지냈으며, 막내 손현(孫賢)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대사성(大司成) 맹선(猛船)은 연계(連繫)의 증손(曾孫)이며 종수(縱囚)의 아들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흥춘(興春)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석화(碩華), 참판(參判)을 역임한 규영(圭永), 전서(典書)를 지낸 세정(世情) 등과 함께 고려에서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인로(引路)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그의 동생 인종(仁宗)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후손 기(榿)는 판서(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흥 이씨(大興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50가구, 3,0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산이씨(德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산 이씨(德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존술(李存述)은 고려 명종(明宗) 때 덕풍(德豊 : 충남 예산군 덕산) 호장(戶長)을 지내고, 그의 아들 언후(彦厚)와 손자(孫子) 극보(克甫), 그리고 증손 핵(翮)이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내며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산(德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5세손 유실(瑜實)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그의 아들 겸(謙)이 비서교서랑(祕書校書郞)을 역임하고 겸의 아들 사목(思牧)은 집현전의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영(英)은 존술(存述)의 8세손으로 그의 아들 3형제 중에 장자 유(愉)가 조선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차남 조(造)는 관직에 재직 중 대간의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유배를 당한 후 풀려 나와 이조의랑(吏曹議郞)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사맹(師孟)은 유(愉)의 아들로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거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한편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봉상시정(奉常侍正)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규문(奎文)은 참판(參判)을 지냈다. 그외 근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상만(尙萬)의 아들 종원(宗原)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산 이씨(德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32가구, 7,3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수이씨(德水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高麗) 때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 되었다. 그후 양준의 아들 소(劭)가 고려 고종(高宗)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中面德水里軍壯山) 아래에 있는 그의 묘(墓)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名堂)으로 소문이 난 명묘(名墓)이다. 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인 윤온(允蒕)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 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받들고 누대로 세거(世居)해 온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났고, 도사(都事) 윤번(允蕃)의 증손(曾孫) 변(邊 : 수사재시사 공진의 아들)이 유명했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했던 변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변은 “내 평생 남을 속인 일이 없다.” 고 떳떳하게 자부했다. 그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서 매양 인재를 뽑는데 판서(判書)를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받지 않았으나 판서는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퇴청하였다. 마침 그 날 판서가 그 고기로써 맛있는 성찬을 차려 변을 대접하자 그는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얼얼의 고기입니까”하며 힐책하자 판서가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고 한다.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재상이었다. 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았다. 중자가 형에게 “얼얼(거위 우는 소리)하는 것을 왜 받으시오”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의 어머니가 그 거위로 국을 끓였다. 중자는 그것을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오더니 “이것은 <얼얼>의 고기로구나”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변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판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변의 손자 거(琚)는 1480년(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果川) 등지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속칭되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인범(仁範)의 후대에서는 그의 현손(玄孫)인 홍산 현감(鴻山縣監) 의석(宜碩)의 증손 율곡(栗谷) 이(珥)가 빼어났다. 1536년(중종 31) 아버지인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 꾸었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 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었기 때문에 어릴 대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다. 율곡(栗谷)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하며, 겨우 세살 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하니,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라고 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주야로 울부짖던 율곡은 어느 날 우연히 불가(佛家)의 글을 보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 바 있었고, 또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 일을 버릴 생각을 하였다. 열아홉 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여러 벗들에게 글을 보내어 고별하고, 이내 절(寺)에 살면서 계(戒 :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定 :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어 버렸다. 그후 얼마 안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 듯 하면서 진(眞)을 혼란하게 한 곳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그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했다. 22세 때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처가에 갔다오는 길에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을 찾아 갔다와서 그 해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천도책(天道策)>이란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하고 초시(初試)․복시(覆試)에 아울러 아홉차례나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웠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초임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에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율곡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하여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선(朝鮮)의 유학계(儒學界)의 거봉(巨峰) 퇴계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자로, 장구(章句)의 분석적인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통찰함을 학문 연구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 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해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근본 사상으로 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여, 이 시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또한 율곡은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모두 능했다. 율곡의 아우 옥산(玉山) 우(瑀)도 어머니 신씨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詩)․서(書)․화(畵)․금(琴)에 모두 능하여 <사절(四節)>로 불리웠다.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명신(明晨)의 손자 의무(宜茂)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떨쳤는데, 맏아들 권(卷)은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했고, 둘째 기(芑)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셋째 행(荇)은 좌의정을, 넷째 령(笭)은 군수(郡守)를, 막내 미(薇)는 대사헌을 지냈다. 키가 10척이나 되고, 얼굴이 모나고 수염이 많았던 행(荇)은,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문형(文衡)에 올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평생에 다섯 번을 귀양갔다가 유배지인 함종(咸從)에서 죽은 기구한 일생이었다. 그가 생전에 남산(南山) 아래에 있는 청학동(靑鶴洞)에 서당을 지었는데, 명(明)나라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등이 모두 시(詩)를 지어 보냈고, 스스로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고 호(號)를 지었다. 길을 끼고 좌우에 소나무와 전나무․복숭아․버드나무를 심었고, 공무에서 나오면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를 한가하게 하여 마치 야인과 같았다. 어느 날 해가 저물었는데 녹사가 보고할 일이 있어 찾아가 보니,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떨어진 옷을 입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동구 문을 나오는 지라,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 가다가 “정승 계시오”하고 물었다. 이에 행(荇)이 천천히 돌아다 보면서 “무슨 일이냐, 내 여기 와 있다”하니 녹사가 깜짝 놀라 말 위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행의 증손 안인(安仁)은 임진왜란 후 면천(沔川)에 초당을 짓고 끝내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행의 현손(玄孫) 식(植 : 안성의 아들)은 광해군(光海君)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과 형․이․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이름 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으며, 한문학(漢文學)에 정통하여 <한문사대가(寒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가문에 쟁쟁한 무맥(武脈)을 형성한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을 들 수 있다. 1545년(인종 1) 한양(漢陽)에서 정(貞)의 셋째 아들로 출생한 순신(舜臣)은 1579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이르렀고,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순신은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壯)으로서 임진왜란 때 싸움마다 승리를 했으며, 적병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全羅道)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무인(武人)으로서 글씨에도 능했던 그는 후손들에게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에 아첨하여 한 때의 영화를 도적질 한다면 나는 심히 유감스러울 것이다.(大丈夫生用則效死 不用則耕於野足矣 若取楣權貴以竊)>라는 유훈(遺訓)을 남겨 대대로 지키도록 당부했다. 충무공 순시의 조카 완(莞)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를 위하여 시체를 배 안에 숨겨두고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라 이 괄(李 适)의 난군을 토평하여 의주부윤(儀註府尹)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의주(義州)에 쳐들어온 청병(淸兵)과 접전하다가 손가락에 적의 화살을 맞아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하며 개탄하고는 탄약을 쌓은 위에 종제인 신(藎)과 함께 누워 불을 질러 폭사했다. 순신의 5대손으로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했던 봉상(鳳祥)은 형조 참판(刑曹參判)․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권신(權臣) 이광좌(李光左)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좌천되어 영조(英祖) 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난군에게 피살되었다. 장신에는 길고 장엄한 수염과 호탕한 음성으로 주위를 압도하였던 그의 죽음에 어머니 정씨(鄭氏)는 “내 아들이 선조의 유훈에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통곡할 필요가 없다”하고는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외 한성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집이 영조(英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이 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경종실록(景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로 선원(善源)에게 입양했던 덕흠(德欽)은 윤 증(尹 拯)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만년에 성력(星歷)․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명망을 떨쳤다. 1772년(영조 48)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에 올랐던 은(병조 판서 주진의 아들)은 왕명(王命)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가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5천 여 권을 구득하고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연(演)의 아들 병모(秉模)는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춘영(春英)이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凋零)․달천(撻川)․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으며, 민화(敏華)와 일영(鎰永)도 항일투쟁과 방공전(防共戰)에 혁혁한 훈공을 세워 명문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0,580가구, 43,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순이씨(德順李氏) 덕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24가구 2,6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덕은이씨(德恩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은(德恩)은 충청남도 노산군 은진면(恩津面)의 일부를 이루는 지역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에는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덕은군(德恩郡)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고려 초에는 덕은(德恩)으로 고쳤다가 1017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고, 1406년(태종 6)에 시진현(市津縣)과 합하여 감무를 두었으며 1419년(세종 1) 은진(恩津)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덕은 이씨(德恩李氏)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자영(自英 : 진위 이씨 시조)의 5세손 이 전(李 荃)을 시조(始祖)로 한다. 전(荃)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덕은(德恩 : 은진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은(德恩)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진위 이시(振威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은 운생(芸生)이 전(荃)의 아들로 조선(朝鮮) 개국(開國)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으며, 덕진군(德津君)에 봉해졌다. 한편 선조(宣祖) 때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한 기수(麒壽)는 형손(亨孫)의 아들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형 인수(麟壽)는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 훈련원 참봉(訓鍊院參奉)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진해 현감(鎭海縣監)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은 이씨(德恩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12가구, 2,321명이 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東城․泗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동성(東城)은 사천(泗川)의 옛 지명으로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物縣) 이었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사수(泗水)로 고쳐 고성군(固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 사주(泗州), 조선 태종 때 사천(泗川)으로 고쳤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동성 이씨(東城李氏)의 선대(先代)는 중국 농서(隴西)의 분파로 사천(泗川)에 세거(世居) 하였다. 시조(始祖) 이 식(李 軾)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국자진사(國子進士)로 송악 군수(松岳郡守)를 역임했으며, 그의 6세손 자가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낼 때까지 모두 6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지냈고, 후손들이 사천(泗川)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사족(士族)으로 토착 세거(土着世居) 하며 동성(東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후손 정(楨)이 일찍이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의 대가 송인수(宋麟壽)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하여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그후 선조대(宣祖代)에 이르기까지 4조(朝)에 걸쳐 나라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아 퇴계(退溪) 이 황(李 滉)과 친교가 있었으며 「성리유편(性理遺篇)」을 저술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성․사천 이씨(東城․泗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01가구, 7,0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이씨(密陽李氏) 밀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49가구 4,4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배천이씨(白川李氏) 배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24가구 1,82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벽산이씨(碧山李氏) 벽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1가구 1,9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벽진이씨(碧珍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시조(始組)는 이총언(李棇言)은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군(碧珍郡) 태수(太守)를 지내고 왕 건(王 建)을 도와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건匡)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총언(李棇言)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벽진(碧珍)으로 삼게 되었다. 벽진장군 통언의 아들 영(永)도 18세로 왕 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그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긴 왕 건이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했다. 그 후 영(永)은 대제학(大提學)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 총언의 10세손으로 공부사(工部事)를 지낸 옹(雍)의 맏아들 견간(堅幹)이 고려 충렬왕(忠烈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1317년(충숙왕 4) 사신(使臣)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산꽃의 말(山花之語)〉이란 시(詩)로 이름을 떨쳐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리웠다. 한편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지(審之 : 견간의 증손)의 아들 맹전(盟專)은 1427년(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丞文院正字)와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거창 현감(巨創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 갈정리(善山綱正里)로 돌아가 은거(隱居)한 후 청맹(靑盲)으로 행세하면서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손님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기를 30 년이나 계속했다. 청맹으로 행세하다 보니 자연히 집안이 궁색하고 아이들이 많아 밥을 먹을 때 수저가 모자라 차례를 기다려야 했으며, 앉을 자리 하나 없어도 그의 장님 행세는 계속 되었다. 강호산인(江湖山人) 김숙자(金叔滋)와는 일찍부터 도의(道義)로 시귄 친구였으나 청맹으로 집안에 묻힌 만년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질 않았다. 오직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과는 비밀이 없을 만큼 친숙하여 찾아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 속으 말을 하였고, 혹은 시(詩)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일선지(一善志)」에 의하면 한 집안에 살고 있는 처자들까지도 그의 거짓 청맹을 알지 못하였다가 그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맹전의 아우 계전(季專)은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항 성종(成宗) 때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참판(參判) 신지(愼之)의 손자 승언(承彦)은 성종 때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로 문종(文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했던 약동(約東)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지평(持平)․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등을 지내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 관아 이속들의 부정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시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제주 목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재임시 사용하던 채찍마저도 공용물이라 하여 관아의 벽에 걸어놓고 왔다. 그의 청백한 정치는 그 곳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었기로, 그들은 이 채찍을 청백의 상징으로 삼게 되어 새로운 목사가 올 때마다 그 내력을 말하고 채찍을 바치곤 하는 것이 관속(官俗)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제주를 떠나오는 뱃속에서 뱃사람들이 금(金)으로 만든 갑옷을 그에게 바쳤다. 맑은 덕(德)을 감사한 섬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배를 타기 전에는 받지 않을 것 같아 뱃사람에게 맡겨 전해주도록 한 것이었다. 약동은 그 금갑옷을 받아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 금갑옷이 던져진 바다 여울목을 투갑연(投甲淵)이라 하며 지금도 그 곳 섬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기묘 8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장곤(長坤)은 참군(參軍) 승언(承彦)의 아들로,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에 올랐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젊어서부터 용모(容貌)가 기걸스러워 장수(將帥)감이라고 일컬어졌던 장곤은 절의와 지조(志操)가 있어 연산군은 그가 항상 반정(反正)할 뜻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였고, 장곤도 또한 죄를 더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변장을 하고 함흥(咸興)으로 피신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다시 기용되어 사기독서(賜暇讀書)를 하고 교리(校理)․장령(掌令)․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장곤은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으로 죄인들을 가볍게 다루었다고 하여 파직당한 후 여강(驪江)에 살면서 호(號)를 우만(祐灣)이라 하였으나, 모재(募齋) 김안국(金安國)이 강호(江湖)에 사는 선비의 고아한 칭호가 못된다고 우(祐)를 우(雨)로 바꿔 우만(雨灣)이라 고쳐주자, 비(雨)는 싸늘하고 차가와서 병골(病骨)인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하여 김안국이 다시 외로울 우(踽)로 고치니 그건 조롱한 것이라고 거절하자 다시 우(寓)로 고쳐 장곤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부자(夫子)가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경(厚慶 : 호조 참판 엄의 아들)은 학행(學行)이 뛰어난 영남(嶺南)에서 이름난 유학자(儒學者)로 추앙을 받았으며, 희선(喜善)의 아들 상길(尙吉)은 절행(節行)으로 유명했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했던 상길은 광부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회양 부사(淮陽府使)와 안주 목사I安住牧使)를 니냈고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서(耆老所)에 들어갔다. 1636년(인종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갔던 상길은 청병(淸兵)이 강화를 육박해오자 종묘와 사직에 통곡해 재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길의 아우 상급(尙伋)은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가 적과 대전 끝에 장살되었으며, 그의 손자 지걸(志傑)은 숙종(肅宗)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거쳐 영덕 현감(盈德縣監)으로 나가 토호(土豪)세력과 관권의 치열한 싸움 끝에 토호 세 사람을 죽임으로써 남형(濫刑)이라 하여 유배당하기도 했다. 뒤에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영조(英祖) 때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아들 세근(世瑾)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구한말에 척화양이지론(斥和攘夷之論)의 국수적 이론으로 가장 의로운 인맥을 형성한 화서(華西) 항로(恒老)가 유명했다. 3세에「천자문(千字文)」,6세에「십구사략(十九史略」, 12세에「상서(尙書)」를 읽었다는 거학(巨學) 항로(恒老)는 1808년(순조 8) 17세 때 부모의 명(命)을 받들어 반시(半試)를 보로 갔다가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 곳은 선비가 머물 곳이 아니라며 되돌아왔고 다음 해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 연구에만 진력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장원시 별제(掌苑署別提)에 천거되었던 화서는 전라 도사(全羅都事)와 지평(地坪)․장령(掌令) 등을 역임했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나, 사직상소(辭職上疏)에서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 실정을 반대하여 노여움을 샀다. 그후 다섯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상소에서 시폐의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자(學者)로서 조선 말기 성리학(性理學)의 결론을 맺었다. 특히 화서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등에게 역설하여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하게 상소했던 우면(愚冕)과,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때 유림(儒林)에서 궐기하여 파리장서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덕후(德厚)는 「정학통록(正學通錄」과「오도가(五道歌)」의 저자 태일(泰一), 대구 고등검사장(大邱高等劍事長)으로 검찰행정의 기초 확립에 이바지했던 우익(右翼), 대구대학장을 지낸 우창(遇昶), 자모(慈母)의 병환을 단지주혈(斷指注血)로 간병했던 종기(宗基) 등과 더불어 의절(儀節)과 학맥(學脈)의 전통 가문인 벽진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09가구, 80,6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성이씨(保城李氏) 보성은 상고할 수 없다. 보성이씨 시조는 낭장(郎將) 이윤창(李胤昌)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4가구 1,06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보은이씨(報恩李氏) 보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1가구 1,3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봉산이씨(鳳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봉산 이씨(鳳山李氏)의 시조(始祖) 이 수(李 隨)는 태조(太祖)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태종(太宗)이 인재를 구할 때 성균관의 천거로 뽑혔으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퇴하였고, 이듬해 충녕대군(忠寧大君 : 세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특히 그는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았고, 봉산(鳳山)의 토지(土地)를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봉산(鳳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수(隨)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귀종(龜從)이 세종(世宗) 때 태학(太學)에 천거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고 차남 서종(筮從)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삼남 복종(福從)은 평산 부사(平山府使)를, 막내인 길종(吉從)은 참봉(參奉)을 역임하여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그 밖에 조선조(朝鮮朝)에 현령(縣令)을 지낸 즙(楫), 병마사(兵馬使)를 역임한 팽구(彭丘)와 경차관(敬差官)을 지낸 영(坽)은 봉산 이씨(鳳山李氏)를 문(文)의 가문(家門)으로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 이씨(鳳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3가구, 6,5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안이씨(扶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부안 이씨(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지발(李之發)은 1471년(성종 2) 장사랑(將仕郞)에 올랐고, 평북(平北) 용천(龍川)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며, 그의 후손 봉정(奉禎)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保安 : 부안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부안(扶安)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지발(之發)의 아들 계란(季蘭)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무(茂)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정추(廷樞)․윤섭(允燮)․명근(命根) 등은 학문으로 덕망이 높았으며 응규(應奎)는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방혁(邦赫)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여 문명(文名)있는 가문(家門)임을 널리 알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 이씨(扶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9가구, 1,0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평이씨(富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시조(始祖) 이희목(李希穆)은 고려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올랐고, 그의 증손(曾孫) 정공(靖恭)이 1062년(문종 16) 시예부외랑(侍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삼례도(三禮圖」․「손경자서(孫卿子書)」를 신조(新彫)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받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치사(致仕)하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부평(富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공(靖恭)의 아들 3형제는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맏아들 도(璹)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차남 위(瑋)는 고려 선종(宣宗) 때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부사(判上書部事)에 오르고 계양군(桂陽郡)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뒤에 광국공신(光國功臣)․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받아 계양공(桂陽公)에 봉해졌으며, 정공(靖恭)의 셋째 아들인 순(珣)은 고려 때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라, 뒤에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다. 정공(靖恭)의 16세손인 세화(世華)는 조선(朝鮮) 때 문과에 올라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공조․형조․병조․이조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가문을 빛내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좌승지(左承旨) 세유(世維)의 아들인 정제(廷濟)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사간(司諫)으로 이 유(李 濡)․김창집(金昌集) 등 중신(重臣)들을 탄핵하다 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평 이씨(富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8가구, 5,090며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산이씨(商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상산 이씨(商山李氏)의 원조(遠祖) 이 환(李 煥)은 원래 중국(中國) 하간부(河間府) 출신으로 고려 말에 동래(東來)하여 공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고 상천(常川 : 상산의 별칭)으로 사적(賜籍)했다고 전하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이지환(李之煥)의 아들 민도(敏道)가 조선(朝鮮)에서 좌명개국이등공신(佐命開國二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상산(商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민도(敏道)의 아들 진(蓁)이 순화군(順化君)에 봉해졌으며, 진(蓁)의 아들 창윤(昌胤), 손자 공무(恭茂)는 다같이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져서 명망을 떨쳤고, 현감(縣監)을 재냈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신무(信茂)(상상군 창윤의 둘째 아들)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후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봉해진 아들 귀년(龜年)은 군수(郡守)를 지낸 인홍(仁弘)과 함께 상산 이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상산 이씨(商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11가구, 1,3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주이씨(尙州李氏) 상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45가구 6,22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림이씨(西林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서림 이씨(西林李氏)는 문충공(文忠公) 이익존(李益存)을 원조(元祖)로 하고, 서림군(西林君)에 봉해진 효사공(孝思公) 세공(世公)의 손자이며 악존의 18세손인 언충(彦忠)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언충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좌우정승(左右政丞)을 역임하고, 공신(功臣)으로 서주(西州 : 서천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서림(西林)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당림(唐林)과 호정(戶靖)․강(剛)․자춘(子春)을 들 수 있다. 당림(唐林)은 언충(彦忠)의 아들이며 추충여절이익위공신(推忠勵節翊衛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봉익대부(奉翊大夫)․지밀직사(知密直事) 겸 대장군(大將軍)을 지냈고, 언충의 손자인 호정(戶靖:일명 인정)은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자춘(子春)은 언충(彦忠)의 증손(曾孫)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자춘의 아들 강(剛)은 봉정대부(奉正大夫)와 예빈첨정(禮賓僉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내 가문(家門)을 빛낸 세헌(世憲)은 언충(彦忠)의 10세손이며, 후손 봉명(鳳鳴)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학자(學者)로 이름난 우규(禹奎)․석진(錫晉)․석태(錫泰)와 함께 서림 이씨(西林李氏)를 덕망 높은 가문으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림 이씨(西林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77가구, 1,5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산이씨(瑞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서산 이씨(瑞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영모(李永謨)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그의 선계(先系)와 득관유래(得貫由來)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덕원(德源)이 고려(高麗)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고, 손자 공환(公環)과 증손(曾孫) 규서(圭瑞), 규서의 손자 맹상(盟祥)이 모두 상서(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한 맹(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하였으며, 응운(應運)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들과 함께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밖에 항일운동의 선봉자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진룡(鎭龍)이 서산 이씨(瑞山李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의하면 서산 이씨(瑞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25가구, 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이씨 서울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6가구 2,1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천이씨(舒川李氏) 서천이씨 시조는 호부상서 이익존(李益存)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2가구 1,9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성이씨 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58가구 1,8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산이씨(星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始祖)는 이능일(李能一)로 선조(先朝)는 누대(累代)에 걸쳐 경산(京山 : 성주의 고호) 지방(地方)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해 온 사족(士族)이었고, 능일(能一)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을 할 때 공(功)을 세워 태조(太祖)로부터 삼한통일(三韓統一)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처음의 이름 능(能)자에 일(一)자를 더해 능일(能一)로 사명(賜名)받았으며,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에 녹훈되어 대광사공(大匡司功)에 봉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대경(大卿)을 지낸 능일의 5세손 견수(堅守)와 정당문학을 지낸 우당(宇唐), 판서(判書)를 역임한 영(英),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를 지낸 여량(汝良) 등이 고려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우(友)가 세종(世宗) 때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냈고, 세인(世人)은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여량(汝良)은 증손 항(沆)은 연산군 때 등과하여 중종(中宗) 때 호당(湖當)에 뽑혔고, 이조(吏曹)․예조(禮曹)․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지낸 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그의 현손(玄孫) 복(馥)은 효종(孝宗)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 중에 석구(碩九)와 석문(碩文)이 유명했다. 석구(碩九)는 군자감정(軍資監正)과 집의(執義)를 지냈고, 석문(碩文)은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변을 당할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세자를 업고 극간(極諫)한 충신(忠臣)으로 훌륭한 성산 이씨(星山李氏) 가 문을 더욱 빛냈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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