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빗자루 / 이정록
박한 원고료 모아 아내에게 디지털카메라를 선물했건만,
가슴 쿵쾅거리는 금강산 나들이 전날까지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계 다루는 건 젬병이라 짐만 될 뿐이라고, 게다가
잃어버리기 대장 아니냐고 핀잔만 준다.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가슴에 산하를 담아야지 디지털이 뭐냐고 삐죽거리다가,
제 입방아가 지나쳤다 싶었는지 자정 지나 슬그머니 카메라를
꺼내온다. 이건 절대 건드리지 마라, 이건만 누르면 된다,
출국심사만큼 까다롭다. 아, 눈부시고 가슴 저린 금강산!
그런데 눈짓 몇 번 보내지 않았건만, 삼일은 맘 놓고 쓴다던
충전지가 방전돼버렸다. 가방 깊숙이 카메라를 집어넣고,
아내 말처럼 모름지기 시인이 되어 맘속에다 선녀도 들앉히고
만물상도 차렸다. 사진만 빼놓고는 보람찬 동국여지승람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내는 카메라의 안부부터 챙겼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사진은 없고 온통 개펄 비질 뿐이다.
아내가 갑자기 구룡폭포처럼 웃음 쏟아낸다. 상팔담 하팔담
끊일 듯 에돌며 움푹움푹 대소를 놓는다. 여보, 이건 절대
만지지 말랬잖아. 동영상에다 돌려놓고 산을 탔으니 팔자걸음에
들입다 길바닥만 찍어댄 거잖아. 그 순간 갑자기, 북측 판매원
김용숙의 우렁이손톱이 떠오르더니 내가 그녀의 입을 빌려
똑 부러지게 말 건네는 게 아닌가. 그럼 내래, 분단의 사슬을
뚫고 처음으로 금강산 올랐는데 풍경이나 담아올 줄 알았네?
내래 시인 아니네. 금강산을 가장 밀착 취재한 첫째 시인으로
대접해 달라우. 그리고 고거이 절대 삭제하면 아니 된대이,
하고는 말의 서랍을 콱 닫아버리니 마음 짱짱해지는 거였다.
흘끔, 그 동영상이란 걸 들여다보니 우람하고도 당찬 한 사내가
입김 내뿜으며 조국산하의 삿되고 녹슨 잡귀를 싹싹 쓸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춥고도 매운 대한, 비로봉의 이마가
이곳 남측으로 눈부시게 솟아 올랐겠다. 용숙동무의 우렁이손톱도
잠깐 금강으로 쨍 떠오르는 것이었다.
[출처] 이정록 시인 37|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