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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cleansing of the Temple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천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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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가 천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자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배가 쓰렸는데, “너는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고 날마다 가르치시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고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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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1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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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이 구절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본 사람만이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지 않은 신자는 없겠지만,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삼켜 본 사람이라면 그 말씀이 내 생명의 양식인 동시에 내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성경은 꿀같이 달고 위로의 말씀으로 넘치지만, 내가 죄와 교만으로 살면 성경 말씀이 배가 아플 정도로 쓰고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유다인들을 심판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는 기도의 장소였지만, 이제 사람들에게는 밥벌이의 장소이자 인간의 위선과 악행을 덮어 버리는 세속의 공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없애려는 악의를 품은 것도 자신들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약합니다. 숨겨진 치부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회적이고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이들은 나약한 자신의 인간성을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흠결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평생 보속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잘못을 질책하고 고발하기에 앞서 나는 얼마나 내 죄악과 위선을 감추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꿀처럼 달지만 내 배를 쓰리게 하는 성경 말씀을 만나 보셨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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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주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상인들을 내쫓으십니다. 주님의 집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이고, 또한 형제들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많은 시간과 장소들 가운데, 그 사람만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곧 거룩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거룩한 것을 지켜 내려고 우리는 다른 많은 것들을 잘라 내고 포기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만남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거룩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지요. 주님과의 만남은 단순히 몸만 그곳에 가 있다고 해서, 또는 남들이 하는 기도문을 우물우물 따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요. 그 만남은 진실하고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처럼 사랑과 기쁨과 신뢰의 대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전은 얼마나 거룩하게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전의 외적인 면이 아니라, 성전에 다가가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인들이 성전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했듯이, 오늘날에도 혹시 누군가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지키려고, 또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으려고 성전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특권은 그 부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울려 퍼지게 하고, 자유와 정의와 구원을 선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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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백성인 우리의 사명은 세상에 나가, 많은 백성과 민족과 임금들에게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직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신 모든 것을 증언하는 직분입니다. 복음 말씀은 사람들을 달게도, 쓰게도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권력과 재력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당신의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고, 그 집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재력을 가진 상인들과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결탁하여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으니, 정화되어야 함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재물과 권력을 섬기는 자는 죽음의 길로 치달을 것이고, 회개하여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몸이 바로 주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됩니다. 만일 그 성전이 반(反)하느님적인 것으로 뒤덮여 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을 닮아 하루빨리 정화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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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없애려 듭니다. 놀랄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 안에서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율법과 성전이 예수님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했고, 술맛도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웃집 노인에게 원인을 묻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혹시 사나운 개를 키우는 것은 아닌가?” 그가 대답합니다. “무서운 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노인이 다시 답합니다. “누구나 개를 두려워하지. 술을 사러 갔는데, 가게 앞에 사나운 개가 버티고 있다면 쉽게 들어가겠나? 그 개가 원인일세.”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서운 판관이 되어 ‘겁을 주고’ 있습니다. 성전 역시 편안한 곳입니다. 누구나 가서 위안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무서운’ 조건들입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을 사람이 막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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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세 번 세워집니다. 처음은 솔로몬 임금이 세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됩니다. 두 번째는 바빌론 포로에서 풀려나 즈루빠벨 총독의 지휘로 재건된 성전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파괴됩니다. 세 번째는 헤로데가 다시 지은 예수님 시대의 화려했던 성전입니다. 이 역시70년 로마군에게 파괴되고 맙니다.
이처럼 유서 깊은 성전이건만 기도하는 사람 못지않게 장사꾼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성당 안에서도 세상 걱정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성당에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러 성당에 왔으면서도 기도보다는 걱정에 빠져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우리가 성당에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입니다. 온전히 몰두하지는 못해도 가까이는 가야 합니다. 걱정한다고 그 시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밝고 웃는 얼굴로 감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걱정을 거두어 주실 분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성으로 성당에 다니기에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습관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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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무교절 축제 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몰려듭니다. 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동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동물의 수는 축제를 지내러 성전에 온 사람들의 수만큼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밖에서 온 사람들은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성전은 동물들과 환전상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 잘못된 봉헌 제도 때문에 완전히 장터로 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장면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봉헌 예식에 쓸 동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내쫓으십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뻔히 아셨습니다. 성전 당국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은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데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겪게 되는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하고 말한 것처럼,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 안에서 내쫓아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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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로서 성전, 신자들의 모임인 영적 성전, 그리고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몸을 일컫는 성전입니다(1코린 6,19 참조).
오늘날 건물로서 성전은 그 중앙에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가 있고 성체를 모셔 두는 감실이 있습니다. 이곳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자신을 깨끗이 하며, 주님께 위로를 받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드러내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영적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신자들이 만나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친교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과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되는 거룩한 만남이 성전입니다(로마 12,5 참조).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궁전으로서 우리 몸 또한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몸은 성체를 받아 모시고 말씀을 품고 사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신앙인에게 기도하는 공간도, 만남도, 한 개인의 삶도, 모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성당도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하고, 이웃과 만남도 아름다워야 하며, 우리 몸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클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러시아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클레쇼프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를 말합니다. 1920년대 당시 국민 배우였던 이반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다음 장면에서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 준 뒤에 따뜻한 수프가 담겨 있는 그릇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에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가 나오는 영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줍니다.
사람들에게 이 배우의 생각을 읽어보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흐뭇해했으며, 수프를 보고는 배고파했고, 관속의 여자를 보고는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우는 내내 똑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변해서 자신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바뀌어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성전은 주님께서 가르침을 베푸시는 거룩한 장소로 정화되어야 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돈이 주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는 환전상들이 가득한 곳은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의 본래 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래 용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누구보다도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 뜻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저 예수만 없다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모든 혼란이 왔다고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바뀌어서 하느님 집을 하느님 집답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 때문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내세우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나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래의 주님과 온전히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으로 들어간다(김윤나).
나의 성실과 나의 사랑
개미와 베짱이 동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동화를 통해서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의 대명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개미집 안에서 빈둥거리는 개미는 전혀 없을까요? 일개미는 하나같이 다 부지런할까요?
최근 연구를 보면 ‘그렇지 않다’라고 합니다. 부지런한 개미가 많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개미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 관찰 결과입니다. 평균 65마리 정도로 구성된 20개의 개미 집단의 관찰에서, 각 집단의 40%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0%의 부지런함이 전체가 부지런한 것으로 평가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요? 솔직히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더 많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잘해도 전체가 뛰어난 것처럼 평가받지 않습니까?
이는 남의 노력만, 남의 능력만 기대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내가 조정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남의 성실성만 바라지 말고, 내가 성실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의 사랑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꽤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내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 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그런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예수님께 딱 붙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따라다녔으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을 기울였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참된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성전은 언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 슬퍼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 모두도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면 예루살렘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자연인으로 소개된 인물 중에 ‘씨돌’씨가 있습니다. 본명은 김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그는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SOS 어린이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미혼으로 사는 여성이 고아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스템인데 1호 엄마의 1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를 통해서입니다.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다시 SBS 스페셜 제작팀에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방영하여 그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앞에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인물입니다.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군대에서 기압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정연관 상병의 누명을 벗겨준 장본인도 김용현입니다. 17년 만에 정 상병이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밝혀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구조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려고 할 때 사라졌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를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출혈로 병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말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손으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에게 인간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분은 당연히 그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사제들과 종교와 단절하고 산에서 살았을까요? 최근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야. 측은지심이 필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저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분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이분을 끝까지 품어주지 못했던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요한이란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책임도 크겠습니다.
‘기도의 집’이 왜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후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즉, 날마다 진리의 가르침이 지속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고,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세속적 욕심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제보를 받은 제작팀은 4차선 도로 밑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산에서 약초나 떨어진 이삭 등을 주워서 끼니를 때우며 사는 한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와 동생과 누나를 부양하겠다며 돈을 벌러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왔으니 성공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34년을 길거리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고 싶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니 동생도 누나를 만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3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누나는 왜 살아있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그 세월을 허비한 게 아깝지 않으냐며 오열하였습니다. 동생도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제작팀이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그 가족의 마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마음을 알려주어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4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과 항상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 받은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란 말을 다시 듣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전할 말씀을 받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샤워를 하면서 온수와 냉수의 물 조절을 하게 됩니다. 적당하게 조절이 되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게 됩니다. 온수가 과하면 물이 너무 뜨거워집니다. 냉수가 과하면 물이 차갑습니다.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집의 난방도 다시 조정했습니다. 친절한 이웃의 도움으로 요일별, 시간별로 온도를 조절하였습니다. 고속도로에도 속도를 안내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최고의 속도를 제한합니다. 어느 곳에서는 최저의 속도도 제한하고 있습니다. 최고 속도를 위반하면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최저 속도를 지키지 못하면 교통의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뉴스에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분노조절 장애’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습니다.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하고, 난방의 온도를 조절하고, 자동차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마음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和)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밤을 새워 들판을 머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희생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아름다운 성전이 되고 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전 깊숙히 물건 파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마당 빌려, 뜰팡 빌려 안방까지 들어와 주인행세를 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의 용인하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래 의미를 꺼내셨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성서의 가록이다. 그런데 ‘이 성전을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라고 말씀하신다.
본질이 훼손 된 곳이 어디 이곳 뿐이겠는가? 적폐들이 있는 곳은 기득권이 넘쳐나고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예수님을 ‘수석사제, 율법학자 바라사이들이 없애버릴 방도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지못한다. 온 국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 적폐 검찰, 적폐 언론도 또 다른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 온 국민이 나라의 정화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루카19,45-48참조)
속속들이 본질 속으로 들어와 본질을 훼손한 그들이다. 이 나라의 정화도 무수히 산을 넘어 피흘리고 죽어간 사람 덕에 조금씩 이루어 가고 있다. 성전 적폐들을 내쫒으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온 국민과 함께 정화수가 되어 주신다.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훼손된 본질을 되 살리신다. 이 나라에도 아름다운 성전이 다시 복원되고 있다. 그리스도왕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성 요한 외드 사제의 ‘예수님의 나라’에서 (Pars 3,4: Opera omnia 1,310-312)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상태와 신비들을 완성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신비들이 온 교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실상 예수님의 신비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신비들은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완성되었지만 당신의 지체인 우리와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은총과 그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효력으로써, 우리와 온 교회 안에서 그 신비들을 통교하고 확장시키며 또 계속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그 신비들을 우리 안에 완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복된 사도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교회 안에서 완성에 이르게 되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건설에 이바지하며 또한 당신의 신비체 안에서 이루고 심판의 날에 완성에 이를 그 신비적 성숙에 자신이 이바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또 다른 데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으로 채우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상태와 모든 신비들을 우리 안에서 완성하고 다 채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형성되시고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세례와 성체성사를 통해서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당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숨겨진 영적이고도 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가능케 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육화와 탄생과 숨은 생활의 신비를 우리 안에서 계속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당신과 함께 당신 안에서 고난을 겪고 죽으며 부활함으로써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우리 안에서 완성하고자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당신 안에서 하늘의 영광스럽고도 영원한 삶을 영위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스럽고도 불멸하는 삶의 상태가 완성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지니신 다른 모든 상태와 모든 신비들도 우리와 교회 안에서 완성에로 이끌고, 또 우리에게 그것들을 통교해 주시어 참여케 하시며 그 신비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파급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의 완성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가 이를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들도 그분께서 정하신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는 완성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통교하는 성전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자기들 잘못 생각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없애기로 한 지도자들 에긍~!
하느님과 통교하는 성전을 세상재물취득 장으로 쓰니 예수님 화나셨죠.
고집불통 지도자들은 그래도 백성들 눈치는 보고 꾹 참는 것 한심하죠.
세상재물의 삶을 인생살이라 보고 삶을 몽땅 쏟아 부으면 완전 실수죠.
그런데 지금도 종교운영을 돈벌이로 하는 각종 잡교들이 탄생하잖아요.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되신 예수님(하느님 말씀님)을 가톨릭은 전합니다.
가톨릭을 찾아오신 분들은 하느님 뜻과 일치된 인생 사시려고 오십니다.
사실 기타 잡교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을 기피하니까 근본적으로 다르죠.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금요일>(2020. 11. 20. 금)(루카 19,45-48)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카 19,45-48).”
다윗 왕은 왕권을 확립한 뒤에 어느 날 나탄 예언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2사무 7,2).”
이 말은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뭔가 이상합니다. 집도 없이 천막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 딱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것 같은, 마치 생색을 내는 것 같은 말입니다. 그날 밤 하느님의 말씀이 나탄 예언자에게 내립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사실 온 세상 만물의 주님이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성전을 신축할 때, 어떤 의도로 짓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면 안 짓는 것이 낫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솔로몬 왕이 지었는데, 다 짓고 나서 봉헌식을 할 때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29-30).”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지은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할 장소로 지은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축복을 내리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 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1열왕 9,6-8)”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봉헌하던 그때 이미,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성전을 폐허로 만들겠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고는 나중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경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니 ‘성전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집’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 때에만 그렇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솔로몬의 기도와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다시 생각하라고 꾸짖으신 일입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 말은 종교 전반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종교는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꾸짖으신 것은 당시에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강도짓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물용 가축들을 아주 비싼 값으로 팔고, 그 이익금을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나누어 가진 것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고, 하느님과 백성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 것과 같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없앨(죽일) 방법을 찾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크게 흔들어 놓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고, 또 그들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기득권층은 존재하고, 그 기득권층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도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종교적 기득권층에 정면으로 도전한 일, 사실상 종교를 개혁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죽일 명분’을 못 찾은 것입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성의 여론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죽인다면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가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의 기득권도 위험해집니다.
(실제로는 ‘온 백성’이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고,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과 한통속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만들어 내는데,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예수님을 고발하게 했고(마태 26,59-61),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성전에서 감히 하느님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 자들이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것은 성전정화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기 떼문이다....주해
김대군 베네딕도
19,45-48은 마르 11,15-19를 대폭 축소, 수정한 것이니 상세한 풀이는 마르코 단락을 보라. 우선 사건 일자를 고쳤으니,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 성전을 정화하신 것을 (마르11,11-12), 입성 당일에 정화하셨다고 한다.( 루카 19,29.41.45)
“상인들을 쫓아내시며”는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마르11.15ㄴ)를 줄인 것이다.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누구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마르11,15ㄷ-16)는 아예 삭제해 버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는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11.17ㄴ=이사56.7)를 고친 것이다. 70년 로마 군대가 성전을 파괴한지 10여 년이 지나 복음서를 집필한 루카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들이 지중해 각지로 전도여행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 마르 11,17ㄴ을 고쳤다.
47절은 마르 11,18ㄱ을 고친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동기를 고쳐, 성전정화사건(마르코)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기”(루카) 때문이라 했다.
루카는 마르 11,18ㄷ의 군중(오클로스)대신 “백성”(라오스)이라 한다. “백성”은 마태오에 14번,마르코와 요한에 각각 2번 나오는데 비해서 루카복음에 무려 36번, 사도행전에 48번 나온다. 루카는 칠십인역에서 이 낱말을 따왔는데 칠십인역에서는 하느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을 뜻한다.
루카에 의하면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와 사도들을 줄곧 반대한 것과는 달리 “백성”은 대체로 환영한다. 예수 수난사에서도 그렇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나 “백성”이 두려워서 못한다(19,48: 20.19: 22.2). 백성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따라간다(특수자료 23.27). 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웃지만 백성은 침묵을 지킨다.(특수자료23.3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본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 성전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성전이 거래와 잇권의 장이 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거친 행동을 하시면서까지 성전의 성전다움을 되찾으려 하십니다.
이 일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지금의 성전 모습은 그들의 기득권이나 재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하지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그분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적대세력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렵습니다.
말씀이신 분 곁에 모여든 백성들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요! 그분 입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이 백성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은 온 존재로 듣는 중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와 백성들 안으로 스며들며 공유됩니다. 과연 그들 모두는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기도의 집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엮어 주는 안식처입니다. 성전이 이 본질을 지킬 때 세상 모든 사물도 자기 자리와 제 질서를 찾습니다. 피조물다움, 사람다움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그는 천사가 명한 대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주님을, 말씀을 입으로 받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입에는 달고 배는 쓰리게 합니다. 말씀은 힘 주어 전하는 이의 입을 즐겁게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 10,11)
말씀을 받아 먹은 그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충실해 해온 대로 듣고 본 말씀을 받아 적고,이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 먹은 이, 말씀을 품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이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주님이신데, 그분이 곧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주님께 뭔가 졸라대고 간청하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지만, 기도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듣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적 상태가 곧 기도입니다. 이처럼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성전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들으려 이곳을 찾으시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관상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성전다움이 차츰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도 조금씩 더 자기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파와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이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전 정화 - 삶의 중심, 기도와 말씀의 집, 사랑과 평화의 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식구, 한가족, 한가정입니다.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입니다. 바로 이게 자랑스런 자모이신 우리 교회입니다. 지연, 학연, 혈연보다 더 깊고 짙은 하느님과의 인연, 신연神緣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은 교회를 사랑할 것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고향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의 영혼 깊이 각인된 삶의 중심과도 같은 고향이요 어머니입니다. 고향집의 어머니를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 성전을 찾는 하느님의 가족들인 형제자매들입니다. 얼마전 퇴임한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어머니의 향기란 진솔한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추석 연휴중 아무도 없는 숲길을 혼자서 걷다가 어찌된 일인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가을밤(찔레꽃)’이란 노래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참 울다 가만 생각하니 75살이나 먹고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어머니 생각을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좀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스며 나왔다. 아마 누가 보았더라면 혼자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이상한 노인네를 보았다고 했을 것이다.‘(생활성서 12월호)
저역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립고 눈물이 납니다. 영원한 순수의 고향과도 같은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이 가장 먼저 교회를 체험하는 것도 신심 깊은 어머니를 통해서 일것입니다. 교회 현실만 봐도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 목격합니다. 그대로 어머니인 교회의 모성애를 반영하는 자매들입니다. 수도원에 봉헌금을, 선물을, 미사예물을 가져오는 것도 거의 대부분 형제들이 아니라 자매들입니다.
고향집의 어머니를 찾듯이 성전을 찾는 믿는 이들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어느 곳이든 성전에 들어갔을 때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던 느낌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선 날마다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면 미사 봉헌할 자리를 물색했고, 새벽 일어나자 마자 강론을 쓰고 함께 미사 봉헌후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미사가 봉헌되는 곳, 바로 거기가 주님이 현존하는 교회요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교회의 성전은 가시적 삶의 중심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도 되고, 사랑의 집, 평화의 집도 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구체적 답도 교회의 거룩한 성전뿐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거행되는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냅니다. 진짜 에버랜드는 ‘늘 와도 늘 새롭고 그리운’ 하느님 성전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성전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염되어 순수를 잃고 속화된다면 정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인한 예수님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노義怒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의 성전을, 교회의 전례典禮를 사랑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사랑이 사라지면 악마들이 들끓듯, 기도가 사라지면 성전은 속화되어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할 수 있음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적대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합니다.
새삼 교회의 성전은 기도의 집인 동시에 말씀의 집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광야 세상, 이런 기도의 맛, 말씀의 맛 아니면 무슨 맛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특히 날로 깊어져야할 맛은, 세상맛이 아닌 기도맛 말씀맛인 하느님맛뿐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과 만나야 영혼도 삽니다. 영혼건강에 저절로 육신건강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공급되는 신망애와 진선미의 은총이 영혼을 튼튼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행복하게 하며, 품위있고 향기로운 삶이 되게 합니다. 영혼의 영양실조, 영혼의 골다공증은 순전히 말씀 결핍으로 자초한 영혼의 병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그대로 말씀 찬가같습니다. 176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시편에 속할 것이며 오늘 화답송은 그 일부에 속합니다.
“72.당신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103.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천사로부터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인생에서 겪는 온갖 고초의 쓴맛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도 말씀의 단맛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오고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하느님 말씀의 힘입니다. 입에는 꿀같이 달고 배를 쓰리게 하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성체’와 더불어 영혼의 평생 최고의 보약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두루마리를 삼킨후 다시 예언직을 수행하게 된 사도 요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예언직 사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요 우리 하나하나 역시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 정화는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보이는 성전 건물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과 더불어 우리 하나하나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화해 주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주님의 성전聖殿’으로 ‘주님의 성인聖人’으로 새롭게 변모시켜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빈집이 깨끗한 집이 아니듯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저의 어릴 때와 비교하여 요즘 제가 많이 불편해하고 불만인 것이 요즘 성전에서의 모습입니다. 옛날에는 성전이라야 안팎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였지만 성체가 모셔져 있기만 하면 너무도 엄숙하고 그래서 거룩했지요.
그래서 가톨릭 신앙이 없는 사람도 성당에 들어오면 흰 미사 수건이 주는 거룩함과 이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성당을 찾은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자연스럽게 거룩함에 젖곤 했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 성당은 옛날보다 훨씬 화려하고, 유명한 설계사와 건축가가 지어 건축대상을 받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거룩함이 느껴지지 않고 난장판처럼 느껴지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신자들이 그 성전에서 보이는 모습 때문입니다.
왜 성당에서 주님과 마주하여 대화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기도하지 않고 신자들끼리 대화하고 심지어 커피까지 들고 들어와 마시는 것입니까?
이들에게는 하느님 현전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고 사람과 만나는 장소라는 의식만 있거나 기껏해야 미사가 시작되면 예배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친교와 대화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친교와 대화는 성당 들어오기 전에 또는 미사가 끝나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굳이 성전에서 남의 기도까지 방해하며 나누는 친교와 대화가 나쁜 것이지요.
이렇게 애기하니 제가 신자들 간의 친교를 경시하거나 지나친 엄숙주의자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하느님 안에서의 친교를 매우 중시하는 저입니다.
예를 들어 전에 미사 중의 평화의 인사 때 평화의 인사를 성대하게 나누는 것을 좋아했는데 교황청으로부터 그렇게 하지 않도록 훈령이 내려와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저입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왜 그런 훈령을 굳이 내렸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몸을 모시기 직전에 우리의 마음이 평화의 인사 때문에 부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고 하느님과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그래서 인간끼리 떠들며 친교를 나누는 것이 성전에서 안 된다면 장사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 과격하게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인데 기도하기 위해 성전 정화도 하는 것이기에 기도야말로 성전 정화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자명한 얘기를 왜 굳이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것이 우리의 정결에도 같이 적용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정결해야 함은 하느님 사랑을 위해서지요. 그런데 하느님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극적인 목적은 놔두고 나의 정결이 나의 최종 목적인 경우가 우리에게 종종 있습니다.
이는 마치 집이 깨끗한 것을 너무도 좋아하여 누가 집에 오는 것도 싫어하거나 집을 더립히는 것 때문에 미워하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하기만 하고 사랑이 없다면 깨끗하기만 하고 성령이 계시지 않는 빈집처럼 될 것이고, 비어있기에 악령이 더 많이 몰려드는 집처럼 될 것입니다.
빈집이 깨끗한 집이 아니듯, 그리고 깨끗한 집이 성전이 아니고 성령이 계신 집이 성전이듯 정결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이 우리를 성전이 되게 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본전 생각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끔 나에게 과도하게 많은 일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 일을 내가 꼭 해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지 혼란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나도 남들처럼 좀 편하고 싶다는 ‘본전 생각’이 나는 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심하게 질책하십니다. 무교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뤄진 그릇된 상행위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돈을 바꾸는 장사였습니다. 유대인은 누구나 성전세를 지불해야 했는데 은화만 화폐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객들의 돈을 은화로 환전해주면서 수수료를 받아 착복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비둘기를 파는 장사였습니다. 성전의 비둘기는 일반 매장보다 15배나 비쌌고, 순례자들은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전과 대제관직을 이용한 최악의 독점 장사였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지적은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본전 생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새기며 물질적인 욕심, 육체적인 편안함보다 주님의 일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나도 모르게 이러한 일깨움을 주는 양심의 목소리를 당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처럼 없앨 방도를 찾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봐야 하겠습니다. 이 눈물은 우리의 회심만으로 거두어질 것입니다.
<곁에 있다는 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곁에
사람이 있다
내 곁에
누군가 있듯이
누군가의 곁에
내가 있다
곁에 있다는 것은
그가 있게끔 하는 것
곁에 있다는 것은
그가 그답게 하는 것
곁에 있다는 것은
그를 살리는 것
곁에 있어도
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곁에 없어도
곁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
필요가 지나치면 악을 만든다.< 루카, 19/45-48.>11/20
이석진그레고리오 신부님
귀하게 받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한 것이 많이 있어 하느님의 자비심으로 살아가야지 내 욕심 과 애착심과 팔요를 충족시키려고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면 얻을 것고 빼앗기고 필요가 오히려 악한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복음에 성전이 기도를 위하여 있는데 먹고 사는 장사꾼의 집으로 둔갑하니 주님은 바로 잡아 주려하니 오히려 죽이려고 한다고 합니다. 불법을사용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해치면서 까지 불의와 다협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필요한 것을 합당한 방법으로 얻어야지 부당한 방법으로 얻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듯이 있어야 할 것은 권력 재력 명예입니다. 이런 것이 합당한 방법으로 필요에 응하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필요에 응하면 악한 결괴기 나오고 많은 이를 고통으로 이끌어갑니다.
어떤 이가 불로 소특이 생겨나면 마가 따르게 됩니다. 돈이야 말로 정의롭고 필요한 곳에 사용하면 행복하게 하는데 불의한 곳에 사용하면 익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요사이 민주의의 모범적 나라가 부정선거에 시달라고 나라가 두쪽이 날 것 같은 위험에 차한 것도 권력이 필요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취할 수없으며 그렇게 되면 나라가 온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깨끗하고 신성해야 할 나라가 더럽고 추하게 됩니다. 이런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인류 미래가 걱정됩니다. 이같이 필요한 것을 바른 정신으로 얻지 않고 욕심 욕망으로 가득하여 얻으려 하면 좋고 필요한 것이 올바른 삶의 길을 막고 숨 막이게 합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눈을 보고 좋은 것을 얻고 길을 바르게 기고 주님의 빛을 받아 또다른 빛이 되어 어둠을 빛이기 위함인데 눈이 어둠만 보고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한 것을 찾아 보려고 하면 주님 말씀처럼 왼쪽 눈이 죄를 짖으면 빼버려라 양 눈을 가지고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한쪽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좋다.“ 하심같습니다.
귀는 좋고 필요한 것이지만 가짜 뉴스만 듣고 가짜 악마의 소리만 듣고 악으로 향하면 듣지 않은 것이 더 좋습니다.
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펴고 살지 않고 오그라든 손은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편손은 봉사하고 나누고 친교를 맺지만 손아 오그라들면 봉사도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고 친교를 맺지도 못합니다.
발도 필요한 것이지만 가야할 곳을 가지 않고 악과 죄가 쌓여있는 쓰레기 무더기를 향하여 간다면 발이 없는 것이 더 낳 다고 생각합니다. 발 거름을 잘못해서 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필요한 것이 지나쳐 악을 만들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없는 것이 더 낳습니다.
오늘 준미은 성전이 기도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면 기도외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성전이 성전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심 같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지나친 욕심과 욕망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법아래 살며 모두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기원전 200년경,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며, 이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전 안에 그리스 신들을 본따 만든 석상들을 갖다 놓음으로써 마치 ‘그리스 신전’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마침내 기원전 165년 예루살렘을 수복한 후 이민족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정비하여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년 12월이 되면 그 사건을 기념하며 8일에 걸쳐 성대한 ‘성전 봉헌 축제’를 지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축제의 순수한 의미는 점점 퇴색되었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행사’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거룩함을 빙자하여 기득권층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성전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성전을 다시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기도의 집’으로 되돌려 놓으시기 위한 ‘정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그 과정은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집어 엎고,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등 다소 과격한 ‘외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정화하고자 하신 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닌, 사람들이 하느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헤아리려고는 하지 않고, 온통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되찾음으로써, ‘대가’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 자체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말이지요.
그런 예수님의 노력 덕분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 곁을 떠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 박해자들의 손에서 예수님을 지켜내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걱정으로 가득 찬 ‘강도들의 소굴’ 같아서는 참된 평화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기도의 집’이 되어야 세상의 고통과 시련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외국에 나가 있는 교포들의 신앙생활의 한 단면을 엿보자면, 그분들은 주일 날 성당에 와 주일미사에 참례하시면서, 한 주간 동안 못 보았던 친지들을 만나면서 외국 타 민족 사람들 사이에 끼어 살던 이질감을 회복하기도 하고, 또 성당에 와서 구역반모임과 각종 단체활동을 하면서 복음도 나누고 친교와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며, 한 주간 동안 살아갈 양식과 생필품을 장만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당에 오고 또 성당에 와서 여러 가지 일을 다 처리합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하면서 주 하느님께서 지난 한 주간 동안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고, 들려주시는 주님 말씀을 다가오는 한 주간 동안 잘 수행하기로 다짐하면서 기도하는가?
성당에 와서 기도하면서 탐욕과 시샘으로 얼룩진 마음을 주님 사랑 안에서 가다듬고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 마음 속에 미움과 원망, 공포와 불안, 탐욕과 시샘의 불을 담아놓고 있는지?
성당에 와서 기도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기억하여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희생을 봉헌하고 사랑으로 봉사하는지?
성당에 와서 봉사활동이라는 기능적인 일을 하다가, 정작 본질적인 일인 기도와 미사 전례를 소홀히 하는지?
성당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인맥과 이득을 챙기고 있는지?
성당에 와서 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형제자매들에게 주 예수님께서 내려 주신 평화와 축복을 나누고 있는지?
성당에 와서 기도하면서 나와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드러나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과거 제가 사제 연수를 이용해서 베트남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 공산주의 국가이고, 우리나라 70-80년대 느낌이 많이 나긴 하지만, 신앙은 참으로 뜨겁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크다보니, 한 교구가 우리나라 만했습니다. 그리고 한 본당 관할 구역이 한 교구만합니다. 수많은 공소가 있고, 신부님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그 공소를 다 돌아다닙니다. 나라에서 신부 숫자도 제한을 두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정말 많은 교우분들과 함께 기도와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정말 열성적으로 보였던 신자들이 한 순간에 돌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 팔짱을 끼는 겁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많이 놀랐습니다. ‘우리가 혹시 뭐 잘못한 게 있나? 아니면 뭔가? 저 삐딱하고 좋지 않은 자세는 뭐지. 매우 마음에 안 드네.’ 알고 보니, 우리가 아는 그 팔짱이 아니고, 베트남에서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하느님께 그렇게 최고의 흠숭과 존경을 드리고 있었던 것을, 제가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가끔 미사를 봉헌할 때, 자는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은 모자를 쓰고 있거나, 팔짱을 끼고 있거나, 수다떨고 장난치기도 합니다. 물론 조용히 숙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요. 청년들 같은 경우에는 모자를 푹 깊이 눌러 쓰고 아주 편한 자세로 임하는 분들도 계시고, 아주 정말 정말 가끔이지만, 이어폰을 끼고 함께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뭐, 핸드폰은 집어넣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저희 본당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지요. ㅎㅎㅎ
여러분들은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과거 이런 모습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디 버릇없이 하느님 앞에서 그런 모습을 하는가. 생각했지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니, 그들이 그래도 하느님 앞에 나온 것이 어딥니까? 다른 또래들에 비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비록 제가 볼 때 부족한 모습일지 모르나, 그런 모습 안에서 조금이라도 주님께 기도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것이 아닐까요? 정작 뒤에서 하느님은 그런 당신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웃고 계시는데, 제가 앞에서 꽥꽥거리는 건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교우여러분들, 이렇게 우리는 남에 대해 함부로, 너무 쉽게 판단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내 마음이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진정 내 마음이 기도의 집이라면, 그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우분들께서 그러한 마음으로 기쁘게 오늘 하루도 신앙생활 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곧 하느님과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곳이 서로 인간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강도들의 소굴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함께 살아가지만 때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이익을 생각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위해, 자신의 인간관계를 위해, 등등. 거기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는 인간적인 만남이 더 우선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도라면 아버지 하느님의 집의 정체성을 위해 투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거리이다.
절실함과
사무침 사이에
우리의
기도가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기도의 집이
있다.
삶을
되찾아 주는
기도의 집이다.
기도의 집은
치열한 우리
삶의 현장이다.
기도 없이는
진실한 성전을
우리 내면에서
결코 지을 수 없다.
간절한 회개와
절실한 청원이
어우러진 곳이
기도의 집이다.
기도의 집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절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기도와 실천
신앙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영혼을
살리며
참된 평화를
가져다준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왕성한
욕심이다.
기도는
보이지 않고
기도의 집을
이용하는
세속화로 가득하다.
삶과
가까워져야 할
기도의 집이다.
살아있는 기도와
다시 진실된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주님께서 사시는
기도의 집에서
기도드린다.
우리의 삶이란
삶을 통하여
기도의 집을
만들어가는
기도의 여정이다.
사람이 깨어 있는 낮 동안에는 ‘베타파’라는 뇌파가 나오는데, 이 뇌파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래서 낮에는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듣고 본다고 해도 점점 스트레스와 함께 피곤이 쌓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밤에 자는 동안에는 ‘알파파’가 나오면서, 이때 모든 병을 고치는 기적의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분비됩니다. 엔도르핀은 피로를 회복하고, 병균도 물리치면서 암세포를 이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을 푹 자고 나면 저절로 병이 낫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 ‘알파파’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밤의 수면이 중요하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깨어 있을 때에도 ‘알파파’가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할 때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피곤하던가요? 데이트를 하는데 한 시간 정도 하면 피곤해서 “그만 헤어지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들은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있어도 피곤하지 않다고, 함께 있으면 너무나 좋다고 말합니다. 바로 알파파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면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 사람과의 만남이 피곤하다면 사랑의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면 상대방 뿐 아니라 내 자신 역시 커다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부정적인 마음으로 다가설 때가 많습니다. 바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주님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결코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장사하는 것을 허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고, 또한 이곳에서 독점을 하면서 갖은 불법을 자행했던 장사치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님의 사랑을 만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기준이 가득한 곳이 아닌, 세상의 기준만이 가득한 곳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몸 역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사랑이 가득한 곳인가요? 혹시 세상의 기준만이 가득해서 늘 피곤과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이 가득한 거룩한 주님의 성전이 바로 ‘나’가 될 수 있도록 사랑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간은 인생을 이루는 요소이다.(프랭클린)
기도(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위험에서 용감히 맞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이 세상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인생과 사워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근심스러운 공포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자유를 얻을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나이다.
성공 속에서만 당신의 은혜를 느끼는 비법한 자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야말로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하소서.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구원은 무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날로 치면 성전, 성당, 경당, 예배당의 존재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앞뒤도 재지 않으시고 단호하게, 단칼에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루카 복음 19장 46절)
그러나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대 내놓으라고 자랑하던 유다 성전,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시면서, 참으로 비참한 광경, 낯뜨거운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기도와, 영적 생활과, 회개의 삶이 중심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타락할 데로 타락해버린 것입니다. 성전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기도하는 집’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외관상 예루살렘 성전은 휘황찬란, 삐까번쩍,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미 성전으로서의 본래 기능인 ‘기도하는 집’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집’ ‘영적인 집’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가장 세속화된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전 마당에는 ‘성전 봉사자’라는 ‘빛좋은 개살구’들, 유명무실한 사람들,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강도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지역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만 했습니다. 오랜만에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왔으니 당연히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서 제물을 봉헌했습니다.
성전에 봉헌된 제물은 반드시 흠없는 동물이어야만 했습니다. 눈치 백단인 장사꾼들은 즉시 이런 분위기를 알아챘습니다. 회당장이나 성전 관리인들에게 거금을 상납한 후,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제물의 매매에 대한 권리행사권을 따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순례자들에게 흠없는 동물들을 팔면서 바가지 요금을 징수하였고 폭리를 취했습니다. 수익금 중에 상당액의 돈을 회당장에게, 회당장은 또 다시 로마 제국에 상납했던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암암리에 일종의 검은 돈 연결 고리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적이고 본래적 기능이 완전히 훼손되고 변질된 모습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그야말로 진노하십니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오늘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 안에 혹시라도 주님께서 크게 진노하실 모습, ‘강도의 소굴’이 된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은지 걱정됩니다. 진실한 기도, 정성어린 전례, 형제적 친교는 뒷전이고 그저 돈만, 특히 고액환 지폐만 밝히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즉위 직후 가장 먼저 손을 대신 곳이 부패의 온상으로 악명 높던 바티칸 은행의 개혁 작업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시자 마자,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비의 희년을 맞이해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정문을 통과할텐데, 이런 기회에 적지만 통행료를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으셨던 교황님께서 그야말로 진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통행료를 받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무료입니다.”
적절치 않은 방법으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한 한 단체가 바티칸에 큰 액수의 금액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전해들으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주 불쾌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교회에는 더러운 돈이 필요치 않습니다. 부패와 착취로 벌어들인 돈을 거룩한 교회를 위한 후원금으로 받아들일 수 업습니다. 그 더러운 수표를 당장 가져가십시오. 불태워버리십시오!”
변하지 않는 학생이 스승을 죽인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백종원 씨의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 씨가 충고를 해 주는 것들을 그때는 받아들이는 듯 하다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식당주인들이 나옵니다. 어떤 주인은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음식의 장인으로 나온 적도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음식의 달인처럼 소개되었으나 이 프로그램에서는 백종원 씨에게 많은 질타를 받습니다. 그리고 백종원 씨의 충고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주인은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어서 나온 것이지 배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백종원 씨의 충고들이 모두 진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건 자타공인 음식업의 달인으로 인정받기에 식당이 안 돼 힘들어하는 골목식당 사장 입장에서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는 백종원 씨나 손님들에게 원망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우리 고통의 모든 문제를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서 전체에서 재물을 이웃과 나눌 줄 모르면 하느님을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라고 말하며 돈을 사랑하면 믿음도 잃고 고통만 남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다인들은 바뀌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정화하려 하시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며 하느님을 모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만을 지키려하니 성전이 예수님 말대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성당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과 다를 바가 없고 우리 개인도 하나의 성전이기에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강도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으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것을 알려주려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 앞에서 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를 인정받으려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합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분이 주인이 되시면 죽음도 이기게 됩니다. 하느님이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충고해주는 전문가를 무시하는 식당 골목 사장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골목식당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인 음식점 사장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방영을 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모습을 계속 시청자들에게 보여줘 봐야 서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를 가르치는데 변하려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그 사람은 그 배우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살인을 당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유다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변화가 없으면 변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변하려하지 않는 것이 가르치는 이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전문가는 조금씩이라도 변화되어 결국 잘 되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강도들의 소굴이 된 우리 마음에는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운명처럼 망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은 그분이 원하는 대로 변하는 집입니다. 조금씩이라도 그분 뜻에 의해 변하고 있다면 그 집은 기도하는 집이고 영원히 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재물을 미워하고 나눔을 사랑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사회교리를 배우면서 노동시장, 금융시장, 부동산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함께 하는 것이며, 가족을 돌보는 일이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노동은 사고 파는 물건이 아닌데, 우리는 어느덧 노동을 사고파는 물건으로 계산하는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금융은 물물 교환의 불편을 해소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금융이 상품과 시장이 되면서 이익을 창출하는 목적이 되었습니다. 금융이 목적이 되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금융시장의 거래는 실물경제의 거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동산이 시장이 되면서 소유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땅을 소유한 사람과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삶의 질과 가치는 현저한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어쩌면 도저히 깰 수 없는 바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바위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랬고, 성인과 성녀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노동의 소중함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금융과 부동산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먼저이고, 부분은 전체에 속하며, 분열은 일치를 이루는 과정이고, 관념은 실재의 옷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의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미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갈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궁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기도와 봉사의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서두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뜨끔했는데요.
요즘 제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를 기도로 이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신앙교육의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하는 것을 더 많이 고민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공소 건축 때문인데요.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들을 시작하면서 돈 버는 데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 군데 본당이라도 더 모금 강론을 나갈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대림기도 책자를 만들면서도 처음에는 신자들의 유익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지만, 다 만들고 나서는 ‘인쇄비 빼고 100원정도만 남겨서 공소건축기금으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홍보해서 더 많은 본당에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또 요즘 본당 신자들이 자잘한 고구마를 갈아서 묵을 만들 수 있는 가루를 만들었는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묵 장사를 해 볼까..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자매님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어떤 부녀회에서 떡 만드는 기계를 사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직접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질문이 그런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 기계가 얼마나 하냐.. 일반인도 떡을 만들 수 있냐..’
또 저희 성당 뒤쪽으로 본당 소유의 산이 있습니다.
처음엔 우거져 있었지만 십자가의 길을 만든다고 길을 닦았는데요.
길을 닦으니까 등산객들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겨울이라 많진 않지만 아마도 내년 여름에는 더 많아질 거 같습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만 우선은 걱정부터 되더라구요.
성당에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성당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얼마 전에 동기 신부랑 춘천에 갔었는데요.
어느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앞에서 입장료를 받더라구요. 2000천원인가 받았는데요.
그걸 보면서 ‘우리 본당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입장료를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 쪽으로 관심이 쏠리고 에너지를 쏟아 붓는 제 모습을 보면서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과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님이 그런 행동을 하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 영화 마지막에 보면, 모금되는 돈을 관리하는 일과 모임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죠.
또 떼제 공동체에 관한 글을 보니까 그 공동체는 어떤 후원금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한다는 내용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기도와 봉사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더 우선순위에 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시겠죠?
오늘 하루, 기도와 봉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김장의 추억)
어느 시어머니가 배추를 절여 본 적이 없는 며느리에게 배추에 소금 좀 뿌려 놓으라고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시어머니가 와서 보니 배추가 그대로였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며느리가 하는 말이 이랬다.
“아까 맛소금 뿌렸는데요...”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자 기도하는 집이며 거룩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 성전의 본질을 망각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우리 몸 또한 하느님의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 성전의 본질을 역시 망각하고 악마의 놀이터가 되도록 내버려 둘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무엇이든지 본질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가치가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배우는 자세가 학생의 본질이자 정체성인데 놀고먹기만 한다면 더 이상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의 본질이자 정체성인데 복음을 전하지 않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 속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사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늘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그 주님 안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강조하시며 더 이상 그 본질을 망각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의 성령을 모시는 성전임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 거룩함의 본질을 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전 정화 -말씀의 은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말씀도 참 심오합니다. 묵상중 떠오른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이 성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몸으로 모인 우리 역시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괴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없이, 막살면 하느님이 파괴하기 전에 스스로 파괴되는 각자의 성전입니다. 사람이 참 보물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물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이라 고백하지만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건물이, 돈이, 환경이 먼저가, 희망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요 사람이 희망입니다.
구체적으로 수도원을 예로 듭니다. 아무리 수도원 자연환경이 좋고, 건물이 좋고, 돈이 많고, 역사가 오래되었어도 그 안에 수도자가 없으면 다 쓸모없어집니다. 저절로 망합니다. 수도자는 거금을 주고도 스카웃 해올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건 만들어 내듯 단기간에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 하나 키워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투입되는지요. 그러나 오늘날 인스탄트 시대, 얼마나 많은 아까운 사람들이 1회용 소모품처럼, 쓰레기처럼 취급되는지요!
그러니 말그대로 수도자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귀한 선물들입니다. 그러니 각자 스스로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의 성전인 자기를 늘 잘 돌보고 가꾸는 수행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젠가 수도형제에게 한자로 써준 사자성구 ‘자중자애自重自愛’란 글귀도 생각납니다. 바로 ‘말이나 행동, 몸가짐 따위를 삼가 신중히 하는 것’을, 또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을 뜻합니다. 어제 받은 어느 분의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소설小雪입니다. 날씨가 추워져갑니다. 옷따뜻하게 입으시고 건강에 신경쓰세요. 신부님의 몸은 신부님 한사람 것이 아니잖아요. 하느님 대리인으로 신자들의 영혼의 건강을 책임지고 계시니까요. 열심히 기도드릴께요. 영육간에 건강하세요.”
카톡 메시지 받고 어제가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임을 알았습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내 몸이기전에 하느님의 것이자 공동체의 것이기도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정화에 우선적인 것이 각자 성전의 끊임없는 정화입니다. 내적정화가, 내적쇄신이, 내적혁명이 우선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회개를, 끊임없는 정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의 여정, 정화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외부의 영향으로, 돈이 없어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와 분열로 망합니다. 언젠가 수도자 모임에서 수도생활에서 세가지 문제가 언급되었습니다. 1.수행정신의 이완, 2.성소자 감소, 3.재정 문제입니다. 셋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수도자가 수도자답게 제대로 충실히 살 때 수도성소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재정문제도 잘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된 우선순위일 것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안에서부터 부패, 분열하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하여 언제나 수도원의 개혁은 원천으로 돌아감으로 시작됐습니다. 부유함에서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고독으로, 여기서 가난과 고독이 상징하는 바 사막입니다. 사막의 고독과 가난에서 시작된 개혁입니다. 사막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이탈의 자유요 그 자리가 바로 세상 안의 사막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확연히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참 성전이요 우리 각자 역시 성전입니다. 참 성전인 예수님을 평생 보고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평생공부가 예수님 공부요 말씀공부입니다. 내적 성전 정화에 말씀의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참으로 내가 말씀의 은총으로 정화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도 저절로 정화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은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질타하신후 본질적 사명에 몰두하십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합니다. 말씀자체이신 주님은 진짜 성전인 각자를 말씀으로 정화시키시고 보양시키십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통해 말씀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배워 실천해야 하며, ‘날마다’ 일용할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셔야 하고,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이래야 항구한 성전정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지만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장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영혼의 식이자 약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영혼의 식이자 약인 주님을 모시고자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통한 끊임없는 내적 성전 정화가 우선입니다. 이래야 정화된 순수한 마음에서 분별의 지혜도 나오고 열정의 용기와 항쟁도 나옵니다. 제1독서의 요한 역시 말씀의 사람, 말씀의 예언자임을 봅니다.
“이것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킨후 예언자로 파견되는 요한입니다. 우리 또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을 받아 삼키고 주님의 예언자로 파견됩니다. 말씀이야 말로 영혼의 식이자 약입니다. 말씀은 꿀같이 달았어도 일상의 삶에서는 이런저런 쓰라린 아픔들도 많이 겪겠지만 결국은 말씀의 은총이 우리 영혼을 정화하고 건강하게 할것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도 우리를 고무시킵니다.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바로 이런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내외적 성정전화에 이 거룩한 미사 수행 은총을 능가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 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은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이요, 성전에 있다는 것은 당신 면전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성당에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성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시고 어떻게 하실까?
대체,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 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인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 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나를 쫓아내시기 전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주님께서 저나 사제들도 쫓아내시는 겁니다.
저나 사제들이 지금 성전의 주인인 듯이 성전 안에서 설쳐대고 마음에 안 드는 신자들을 제 멋대로 성전에서 쫓아내곤 하는데 이런 저와 사제들을 주님께서 이 성전은 내 성전이라고 하시며 가차 없이 쫓아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관광지에 가면 안내자와 해설사가 있듯이 사실 저나 사제들은 하느님의 성전을 찾는 주님의 자녀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해주고 하느님의 집은 어떤 집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하는데 하느님의 집을 하느님이 아니라 내 집인 듯 설쳐대면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성 때문에 저희를 쫓아내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묵상을 하고 상상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성전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우리가 바로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했는데 저를 하느님의 성전에서 내쫓지 마시고 제 안에서 나쁜 것들을 내쫓으시라고 애걸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 몸의 주인은 너라고 네가 주장하며 네가 나를 너에게서 쫓아내 이제 내가 너를 어쩔 수 없으니 네가 네 소유권을 포기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여쭈니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는 거였습니다.
네 욕심을 포기하고,
네 주장을 포기하고,
네 고집을 포기하고,
네 호오를 포기하는 등
네 안의 더러운 것들은 네가 쫓아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주님의 성령을 내 안에서 쫓아내고 내가 이 더러운 것들로 나를 채웠으니 나의 소유권이 진정 내게 있고 그래서 그 소유권을 내가 포기한다면 이것들을 내가 스스로 치우고 성령을 내가 모셔 들이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진정 나의 주인이 되려면 주님께서 당신 성전에서 나를 쫓아내시기 전에 내가 내 안에서 하느님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쫓아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성전 정화를 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참사람의 매력>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1. 23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목소리가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는
부드러운 손길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쫓겨난 이들을 보듬는
넉넉한 품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작고 낮은 이들을 섬기는
소박한 마음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불의한 이들을 꾸짖는
정의로운 몸짓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탐욕에 눈먼 이들을 깨우는
있는 그대로 사람 됨됨이가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제 힘에 취한 이들을 맑게 하는
하느님을 드러냄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신부님, 제가 기도할 줄을 몰라서 그냥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보니까, 이러 저러한 것은 하지 못해도 한 시간 동안 앉아 있다 보니까 마음이 참 평안해 지더라고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 하느님 앞에 앉아 그분의 현존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저 내 모든 것을 펼쳐드리며 주님께서 나를 어여삐 보아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그 순간이 평화스러워지게 됩니다. 많은 분이 성당에 평화를 얻으려고 오신다고 하지만, 정작 주님의 평화를 얻으려고 주님 앞에 앉아서 평화가 깃들기까지 기다리는 분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저 기도랍시고 묵주기도나 자기가 하고 싶고 바라는 것을 고하고 그냥 가버리기 때문에, 어쩌면 주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할 시간마저 기다리지 못하고 가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제 어떻게 또 변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특정한 시간과 조건이 펼쳐지기를 바라지도 못한 채 그냥 자기 할 말을 자기 소원을 다 고해버리고 응답도 받지 않고 가버립니다. 그러니 어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여러분의 성당은 여러분에게 어떤 곳입니까?
친구 만나는 곳?
미사와 기도는 고사하고 레지오 마리애 회합이나 단체 활동하는 거점?
마치 자신의 하루를 이웃과 함께 여유를 갖고 보람차게 보냈다는 친교와 사교클럽?
회합을 하더라도 본질적인 선교와 이웃 사랑은 고사하고, 마치 뭔가 했다는 자신의 성취와 의무를 다하는 모임과 종교적 시스템으로 만족감을 주는 곳?
정녕 우리가 매일 오는 이 성당이 주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하고 기도 중에 들은 그분의 말씀을 실현할 힘을 얻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그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하고 양성되는 곳인지 스스로 되새겨 봅시다.
기도의 집 <루카 19, 45-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생활하려고 거처를 마련하고 집이 없으면 모든 계획을 실천하는 데 불편합니다. 가정을 꾸리는 사람은 집이 있어야 하고, 나라도 집이 있어야 각 기관이 자기 할 일을 모여 의논하고 실천합니다. 교회도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있어야 하느님께 공동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자동차를 타고 수도원에 들어오는 중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기에 “미군 부대 근처입니다.” 거의 다 와서 “저기 수도원 있는데 저기까지만 갑시다.” 하고 “수도원이 머 하는 곳인지 아십니까?” 하니 천주교를 모르고 믿음도 없다고 하는 운전사가 “기도하는 집이지요.” 내려서 방으로 가면 ‘수도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수도자는 이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나를 위한 삶의 거처이고, 살아가기에 편리한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는 곳이라고 다짐해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십니다. 묵상 중에 살기에 편리한 장소, 이제 나이 들어 의지하면서 사는 장소로만 여기고 산다면 수도원의 존재를 잘 이해 못 하는 사람이니, 더 깊은 의미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침실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며 컴컴한 복도를 지나 성당에 들어가 묵상 기도와 독서 기도, 찬미 기도를 드리고 묵상 후 미사 전례기도 후 아침 식사와 하느님의 일을 각자 자기 일터에서 시작하면서 기도하며 일을 합니다.
광안리 수녀원에서 지도 신부를 할 때 침상에 18년 누워서만 생활하던 수녀님이 저를 보고 “저는 이 집에서 가장 큰일을 하는 수녀입니다. 이 침상에 누워 온종일 기도합니다. 결코 불쌍하게 보지 마시고 무용지물로 보지 마세요.” 하시며 기도의 삶을 자랑하고 당당하게 사시는 모습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기도의 삶은 고귀하고 높은 것이네’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기도밖에 할 일이 없지만, 기도의 집에서 기도하는 삶이 가장 고귀하고 참삶인 것을 실천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깊고, 높고, 넓고, 큰 기도의 집은 가장 작은 곳,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는 곳에 있는 각자의 마음속에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는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주님을 자신 안에서 만나 깊은 친교를 나누는 데 있음을 알고, 깨닫고, 체험하면서 기도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 되어 많은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사랑과 진실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 행복합니다.
성체 앞에 나가서 인사하며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로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19, 47)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남은 잎들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겨울 준비를 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들도 죽음에 대한 준비를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9, 45~48)에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19, 47)는 말씀이 나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서 사람들 가르치셨습니다. 대자연 안에 신비롭게 감추여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쳐 주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와 뜻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하는데,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씀하시고, 그 정화된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루카 19, 45~47)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정작 성전에서 일해왔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루카 19, 47)
참으로 아이러니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일해왔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으면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외면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형식주의적이거나 율법적이었기 백성들의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그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루카 19, 48)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백성들을 위로하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백성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바로 성전의 주인으로서 제자리를 찾으신 것입니다. 그 동안 성전을 차지하고 있었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제사나 바치고 율법으로 강요하고, 또 백성의 지도자들도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일이기에, 그분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간청했어야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정반대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모색하였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보다는 사람의 권위와 인간의 말에 굴종하도록 하는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모습이라고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에서 마땅이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선포를 백성들 한 가운데서 이루심으로써 성전이 참으로 성전다운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성당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성당에 무엇 하러 갑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제병영 신부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성전인 우리 마음을 정화해야 할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냥 매일 일상에 묻혀 무엇이 성전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을 벗어 던지고 그분께로 마음을 돌려보자!
그러면 참이 무엇인지 빛으로 알아 볼 수 있을진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19,46)
'성전 정화!'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삼키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래야 할 성전이 성전으로써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고 분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지 주변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같은 지적과 분노를 하시지 않을까?
나의 성전, 우리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잘하고 있는가? 다시말해 성전 안에서 하느님을 잘 만나고 있는가?
성전의 개념을 좀 넓게 이해한다면 성당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방만이 아니라, 나의 몸과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로까지 확대할 수 있겠습니다.
'워룸(war roo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몇년 전에 개봉된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긴급한 위기상황이 벌어졌을 때 모여 회의하는 '전략실'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지만, '기도방', 곧 '성전'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성전(워룸)은 매일매일에 삶 속에서 지쳐있는 나에게 꼭 필요한 장소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영적 밧데리를 충전하는 곳이고,
내가 죽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부활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의 성전과 나의 워룸은 어디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을 찾아보고,
그곳을 만들어 보고,
그곳을 늘 깨끗하게 정화하고,
그곳에서 힘을 얻어,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스도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은 그리스도이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결정적으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 전 생애에 걸쳐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1항)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전정화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성전을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삶을 정화시켜주는
기도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삶을
달래어주는
성전의 본질은
분명 기도에 있습니다.
삶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힘든 시간에도
기도의 성전과
함께 했습니다.
기도하는
본연의 자리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과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결코 둘이 아닙니다.
성전정화는
기도를 통한
자기정화이기도 합니다.
기도로 우리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work)과 중독자(holic)의 합성어로 미국의 경제학자 W. 오츠가 그의 저서 ‘워커홀릭’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가정이나 다른 것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쩌다 주일을 맞이해서 곤한 낮잠을 자고 나면 기분이 찝찝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가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는 주일을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으로 큰 후회를 합니다.
그래서 월요병이란 새로운 병이 생긴 것이지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기쁨보다는 주일을 헛되이 보냈다는 후회를 통해 새롭게 맞이할 월요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월요병이 단순히 심리적인 병일까요? 학자들은 이 월요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하는 경우가 이 월요일에 제일 높기 때문이지요.
결국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각종 물질과 세상의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 또 세상의 지위 역시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항상 무엇인가를 채울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새로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과 물질 그리고 세상 지위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과연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의 장소만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이라고 하셨지요. 바로 우리 각자의 몸 자체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몸을 기도의 집으로 만들고 있나요? 아니면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나요? 만약 일에 파묻혀 살면서 물질 그리고 세상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내 마음을 채운다면 그 모습이 바로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늘 주님께 겸손되이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거룩한 기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을 기도의 집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지금의 나를 향해 주님께서는 ‘기도의 집’이라며 칭찬하실까요? 아니면 ‘강도들의 소굴’이라며 채찍을 드실까요?
잘 보낸 하루는 편안한 잠을 이루게 하고, 잘 지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다빈치).
간단한 방법
어떤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회사를 알리기 위해 홍보용 전단지를 인쇄했는데, 글쎄 가장 중요한 메일 주소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사 사람들은 이 문제 때문에 여러 방법을 강구했지요. 일일이 수정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시간 없으니 얼른 수정해서 다시 찍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입 사원이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틀린 메일 주소로 메일 계정을 새롭게 만들면 되잖아요.”
새롭게 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사용하면, 굳이 홍보용 전단지를 수정할 필요도 또 다시 인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기에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위해 많이 공부하고, 또 많은 일을 합니다. 돈과 지위에 대한 욕심을 채워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합니까? 채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비워 두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작가인 버나드 맬러머드는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여백을 두면 더 많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인데,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그 방법을 쉽게 선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기준 삼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 말씀은
사랑과 용서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집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 말씀이 서로를
비추어주고 기쁨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이 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근심과 슬픔마저
하느님께 내어드릴 때
얻게 되는 강렬한 우리의 체험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삶은 결코 변화 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집에서는
'숫자'에 집착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자체이지
더 높고 더 웅장한
성전의 숫자 표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작아지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기쁨이
탄생되는 기도의 집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힘이
넘쳐 흐를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과
신앙의 목적 의식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며칠 전,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옷장을 살펴보다가 옛날 옷들을 발견했습니다. 좋은 옷들이지만 오랫동안 입지 못했던 옷이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제 몸에 딱 맞았지만, 지금은 몸이 불어서 도저히 맞지 않는 옷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20년 전과 비교할 때, 20Kg 정도 차이를 보이니 어떻게 맞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꺼내 입었습니다. 역시나 옷이 맞지 않네요. 바지는 완전히 쫄바지가 되어 있고, 윗도리는 목 부분의 단추가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옷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젠가는 살을 빼서 이 옷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옷장 안에만 있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과거의 제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 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옷들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지금이라는 현재를 더욱 더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연연해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거의 명예, 과거의 재능과 능력, 과거의 호화로움, 과거의 행동과 습관.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시간일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에 맞게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니까요. 그리고 사고파는 가운데 이권이 작용하게 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소외와 차별을 겪게 되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사실 성전에서 장사가 이루어진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전에서는 상거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즉,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바꾸기 위해 환전상이 필요했고, 성전에 봉헌할 재물을 구입하기 위한 장사꾼들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오래되었지만 잘못된 전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올바른 모습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가장 올바른 일들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내가 정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묵상해보셨으면 합니다.
과거의 짐을 지고 가지 마라. 미래에 살지 마라.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를 진실하게, 온전히 사는 것이다. 지금의 삶이 어떠하든, 지금 이 순간 전력을 기울여 살아라.(찬치)
오늘을 산다(장장식, ‘행복한 동행’ 중에서)
잡지에서 읽은 좋은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살아가는 데 우선순위가 돈과 명예보다 ‘오늘’에 있다면 믿을까. 내일을 위해 뛰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오늘을 버린 채 내일을 쫓기에는 인생이 짧다. 젊었을 때는 행복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의 행복이 무엇이며, 오늘의 고통을 어찌 감내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곤 했다. 게다가 오늘 흘린 땀이 내일의 열매로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수정했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다는 나름의 철학으로 말이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듣고 하루살이 인생관이나 소비적 향락주의라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을 찾는 것은 하루살이의 행복이나 향락주의와 분명 다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 아니던가.
우리 인생에 과연 내일이 있을까. 누가 행복한 내일을 장담할 수 있을까. 다만 그럴 것이라는 낭만적 믿음이 낳은 허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난 오늘에 집중한다. 오늘 행ㅂ고하기 위해 최선의 하루를 살고, 오늘 기쁘기 위해 순간을 노래한다. 옛 사람이 하루의 근검으로 오늘의 삶을 강조한 것처럼 오늘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백수가 과로사할 만큼 바쁜 현대에 웬만한 것은 버린다.
유니세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동료는 “좀 더 넉넉해지면 돕겠다.”라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작은 나눔은 가진 것 없는 이의 호사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넉넉한 내일이 되어야 돕겠다는 것은 허망한 약속이다. 내일이면 더 넉넉한 내일이 그리워지니까.” 오늘 행복하기 위해 오늘의 빈 주머리를 털어 행복을 나눠야 한다.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 명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포가 망설이고 있을 때 스승 우그웨이가 한 말이다. “어제는 역사(History)이고, 내일은 수수께끼(Mystery)이며, 오늘은 선물(Present)이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역설해 주는 말이다.
몽골 경찰청 앞에 붙은 표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고,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를 새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제는 대학 수학능력평가가 있었습니다. 수능을 치르느라 고생했을 수험생들, 그리고 그 수험생들 못지않게 많은 기도와 염려와 함께 했을 그 가족들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마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기를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바랄 것입니다. 높은 점수를 맡기를,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아도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기쁨이 내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분은 지금의 수능과 달리 수시가 없었던 예전 학력고사 세대입니다. 즉, 학력고사 결과로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였지요. 아무튼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재수를 결심하고서는 떨어진다는 마음으로 그냥 지원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대학이라고 하는 서울대를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글쎄 미달로 합격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어떠했을까요? 그 분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기뻤지요.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결국 1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스스로 그만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꼭 나를 절망으로 만들 수도, 또 기쁨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늘 좋은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는 믿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한 순간을 바라보고서 미래까지도 스스로 결정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로 기울어지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그러하셨을까요?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었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먼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도하는 곳에서 장사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생활했을까요?
지금의 만족만을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로 죄로 기울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한 순간의 만족과 편함을 생각했기 때문에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생활이 옳지 못하다면서 막는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해서 지금의 악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죄로 기울어질 때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내 마음 안에 주님을 없애고, 지금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늘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한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보이지 않는 눈이 갑작스레 보이게 되었다는 건 기적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불행 속에서 그 불행을 이겨내고도 남을 만큼의 축복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이다(소노 아야코).
진짜, 가짜
위조지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쇄술이 너무나 발달해서 위폐를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위폐감별사는 어떻게 위폐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첫 번째 원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화려해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하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이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진짜 신앙인들은 어떨까요? 절대로 앞에 서서 신앙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낮은 자세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가짜 신앙인들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데 집중을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진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억지로 꾸민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진짜 신앙인일까요? 가짜 신앙인일까요?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한 영화 제목인데, 남녀 간의 사랑이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있기 때문에 흔히 사랑과 음식이 비교될 때 ‘달콤 쌉싸름하다’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초콜릿을 위한 물처럼(Como agua para chocolate)’이란 소설인데, 초콜릿을 탈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멕시코 시골의 명문 가문 데 라 가르사 집안에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 막내딸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보며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의 세 딸 중 막내딸인 티타는 페드로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어머니 엘레나는 이 전통을 내세워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페드로에게 큰딸 로사우라와 결혼하기를 강요합니다. 오로지 막내 딸 티타 곁에 있고 싶어 로사우라와 결혼한 페드로의 마음을 이내 티타도 알게 되지만, 처제와 형부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둘의 관계 때문에 티타는 자신의 마음을 오직 요리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티타는 부글부글 끓는 슬픔 마음을 요리로 표현하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그 티타의 마음처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어머니가 페드로의 가족을 다른 도시로 보내버립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티타를 의사인 존 브라운이 사랑으로 보살피고 이내 티타의 마음은 존에게 기웁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페드로 가족이 돌아오자 티타는 다시 페드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몇 년 후 언니 로사우라가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듯 했지만 결국 행복도 잠시, 페드로 또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곧이어 티타는 성냥을 하나씩 씹어 삼키기 시작하고, 티타의 몸에서 타오른 불길에 집과 목장이 전부 타버립니다. 이 화재에서 남은 것은 오직 티타의 요리책뿐이었습니다.
티타는 가문의 전통 안에 살아갑니다. 그 전통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전통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오로지 불살라버리는 고통을 이겨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또한 우리가 당신 나라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욕망을 살라 바치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땅과 바다를 디디고 있는 한 천사의 손에 놓여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런데 그 천사의 말대로 그것을 삼키니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참으로 ‘말씀’을 먹으면 입에는 달고 큰 깨우침으로 기쁨이 솟아나지만, 정작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말씀이 나를 괴롭혀 삶을 변화시키게 만들고 복음적 삶으로써 그 진리를 증거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그 말씀을 깨달아 참 구원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맞기야 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괴롭혀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면 실상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의 힘으로 일곱 봉인을 떼어낸 참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면 나는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 내 안엔 오로지 말씀만이 남게 만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을 잉태하셨을 때도 마니피캇을 부르시며 참으로 기뻐하셨지만 결국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꿰뚫리는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이제 당신을 지배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에 의해 당신이 십자가에서 성령으로 불살라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남겨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자캐오도 예수님을 받아들여 기쁘기는 하였지만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남게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은 마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그 맛으로 그것을 먹는 사람을 불살라 아프게 만들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봉사팀을 만났는데 그 팀의 리더가 “저는 저희 팀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 같은 것을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이 주시는 그 은총으로 쓰라린 삶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생명의 두루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삶의 쓰라림은 내 삶을 차지할 말씀이 주실 약속된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은 모든 인간이 어떻게 말씀으로 구원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나 봅니다. 상사에게 찍히지 말아야 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지 말아야 하고, 여러모로 주위의 시세에 따라야 하는가 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그대로 따르자니 어딘지 모르게 손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밀려나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기도 하는 등등의 부담이 나를 주님보다는 세상에 물들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 믿는 이의 몸이 ‘성령의 성전’(1코린 6,19) 이라면, 기도와 사랑의 사람이어야 할 터인데, 우리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주 하느님의 말씀과 주님을 향한 열정 이외에도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이 오늘 아침 우리를 촉구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우리 시대 성전(聖殿) 정화(淨化)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간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처럼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백성의 삶의 중심지이지요.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성전 자체이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집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두는 분리와 차별의 장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우선시 되어 평등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힘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좌우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부당한 일을 종교의 가면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성전인데도 여전히 성전은 건물과 장소에 국한하여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의 한복판이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따라서 성전 정화는 건물 청소에 한정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일만은 아니겠지요. 성전정화는 개인 차원, 교회 차원, 사회 차원에서 하느님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차별, 배타심, 독선과 탐욕, 이기심과 같은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분제도, 계층적 분리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성전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로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조를 산출하는 자유로운 종교를 생활화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주님의 성전인 우리도 미움, 분노, 교만, 이기심, 세상재물에 대한 애착과 탐욕, 허영, 사치, 무관심과 냉대, 차별 등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체의 것들을 청산함으로써 스스로 정화해야겠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지나친 이상 추구, 과거 감정에 대한 집착, 독선 등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이 사회가 독선과 차별을 버리고 사랑으로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성전정화.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후 맨먼저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중심’인 성전이 세상에 속화俗化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전 사제들이 늘 염두에 둬야 할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며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신후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합니다. ‘날마다’란 말마디 또한 ‘오늘’처럼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두가지 예가 생각이 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ㄴ).
“날마다 저희에게 일요할 양식을 주시고,”(루카11,3).
기도와 말씀의 수행은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의 평생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기도의 집이자 말씀의 집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더불어 보이는 가시적 성전의 정화는 물론 주님의 성전인 우리 역시 정화됩니다. 날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정화와 성화 은총보다 더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정화를 실행하시는 예수님은 그대로 예언자의 모습이십니다. 이런 성전정화의 용기는 바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천사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천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 사도가 받아 삼켰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라렸다 합니다. 그대로 주님과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 중,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구절과 일맥상통합니다. ‘말씀의 맛’과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의 맛’이요 바로 이것이 참맛이고 이런 참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음선포의 예언직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요한처럼 예언자적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빛과 어둠, 꿀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빛에 어둠이 따르듯 꿀맛같은 삶만 있는게 아니라 쓴맛의 삶도 함께합니다. 쓴맛의 삶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어둠의 영역은 하느님께 맡기고 용기를 내어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을 보십시오.
그대로 빛과 어둠이, 꿀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온 백성은 그분의 꿀맛같은 말씀을 듣느라고 그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빛 속에서 주님의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모습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반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주님의 꿀맛같은 말씀을 듣는 빛의 백성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쓴맛같은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이런 쓴맛의 어둠의 세력에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진리와 사랑, 정의에 따라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하였습니다. 사실 이들 어둠의 세력들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 속합니다. 우리가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하느님께서 친히 이 나머지 어둠의 세력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의 수행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되어 깨끗해지고 거룩해 지는 성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해 주시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말씀과 성체의 두루마리를 받아 모심으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성전聖殿뿐 아니라 온 세상世上을 끊임없이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기도의 집
윤경재 요셉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5~46)
천주교 교우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스스로 기도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이냐 반문하면, 조리 있고 능숙하게 말하며 듣는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내용이 나와야 훌륭한 기도라 생각한다고 답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오 복음 6장 5~7절에 올바른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요약하면 ‘1,숨어 계신 아버지께 직접 개인적으로 기도하라. 2,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3,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4,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네 가지 원칙에 맞는 기도법이 천주교에서 전해오는데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 단계에서 수동적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영적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구송(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를 점차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줍니다. 첫번째 단계인 영적독서는 주님을 만나러 내 생활에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마련하는 단계입니다. 묵상은 우리와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계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 오신 육화를 떠올리며, 복음 말씀을 상상하고 추리하는 단계입니다.구송은 하느님을 향한 단순한 열망이 응축된 뒤 솟아난 마음속 울림을 표현합니다. 마지막 관상 단계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단계이고, <애정 어린 응시>, <황홀한 주의>, <앎을 넘어선 앎>의 단계가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 아래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고 하여 개신교 쪽에서 배척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신교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는 어느새 말을 유창하게 하고 열정과 감동을 주는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영향이 알 게 모르 게 천주교에도 미쳤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도 귀중한 자료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8,26~27)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바오로 사도의 이 가르침은 참된 기도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기도에 임하여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성령의 움직임을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지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중죄인이었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고백할 때 기도의 위력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막다른 절벽으로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생기게 합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느님께 매달릴 힘을 줍니다.
용기는 인간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원동력입니다. 용기를 품는 순간 인간이 자기로부터 빠져나가는 출구를 발견하게 되고,용기가 있어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공언하게 하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실존을 변모시켜주는 출발점입니다.
기도를 잊어버릴 때 우리 안에 에고의 우상을 만들게 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알량한 죄의식마저 허물어집니다. 그러니 강도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기도의 집은 하느님을 만나러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생긴 필요적 공간입니다. 처음엔 건물을 유지하고 필요한 인원을 거느리고자 헌금을 받았습니다. 속죄와 간구를 바치기 위하여 몰려든 유다인들이 봉헌금과 여행 경비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수적으로 장사꾼이 생겨났습니다. 신앙이 외적 형식으로 기울 때쯤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인간 집단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질병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태가 처음부터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강력한 경고를 성전 정화라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교회에게 미리 내려주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제부터인가 저의 이름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저의 이름인 ‘조재형’은 거의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자분들은 제가 ‘사제’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가지고 저를 ‘사제’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게 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 아픈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어제는 수학능력 시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며, 수학능력 시험은 무엇을 평가하는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12년을 배웁니다. 대학교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16년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배우면서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직 지식을 배우는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그것도 수학, 영어, 국어와 같은 주요과목의 비중이 절대적입니다. 역사, 사회, 문화, 음악, 미술, 윤리, 철학과 같은 과목은 배우는 시간도 짧고, 학생들도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식만 배워서는 학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봉사와 희생, 인내와 절제와 같은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난 사람은 똑똑한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음악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난 사람도 중요합니다. 든 사람은 지식을 많이 가진 전문가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이끌어 가고 있기에 든 사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이 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든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 중에서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성전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가진 능력을 더욱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덧 우리의 마음에는 ‘욕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것들이 들어오곤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강도의 소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 하는 집이라 불릴~ "
이영근 아오스딩신부님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가신 곳과 맨 먼저 하신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어 맨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 때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은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성전이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기도의 집’이요, 성전에 있다는 것은 당신 면전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교회와 성당을 화려하게 지어놓고 그곳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 십자가와 감실을 만들어 놓고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이라 하여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렇게 믿고싶은 게지요.
옛적에 임금들이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듯이, 대통령이 청와대, 백악관 등에 살듯이 하느님도 그러한 집에 머무시어 우리가 필요로 할 때 만나주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곳이 정말로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라면 예배와 미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가서 기도하며 그분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요?
정말로 하느님의 집이라면 그곳에 언제나 자유롭게 들낙거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이고 특별한 권세를 누리는 사람일까요?
사실 하느님은 교회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시죠.
그분은 당신을 찾는 이에게 어디든 달려가시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라고 예수님 친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성당과 교회가 함께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한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속적인 이익이나 집단적 선민의식으로 모인 비즈니스를 위한 집이 되어버리면 그곳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청와대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과 행복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곳이 되어야 참으로 대통령이 사는 집이지, 사리사욕으로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면 가짜 대통령이 사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사는 집은 하느님의 집인가요?
내가 다니는 교회는 하느님의 집인가요?
내가 다니는 직장은 하느님의 집인가요?
우리나라는 하느님의 집인가요?
아니라구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사람의 매력>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목소리가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는
부드러운 손길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쫓겨난 이들을 보듬는
넉넉한 품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작고 낮은 이들을 섬기는
소박한 마음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불의한 이들을 꾸짖는
정의로운 몸짓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탐욕에 눈먼 이들을 깨우는
있는 그대로 사람 됨됨이가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제 힘에 취한 이들을 맑게 하는
하느님을 드러냄이
참사람의 매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루카,19/45-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어 그 모습을 보존하도록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와 악으로 본 모습을 잃고 오늘 복음에 성전이 그 목적대로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을 하려면 자기 힘으로만 되지 않고 주위에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서로 대하여야 합니다. 전에 전두환 대통령시대 두 나라 사람이 자기나라 자랑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다리 없는 사람이 축구를 제일 잘한다고 자랑하고 한국 사람은 머리 없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서 대통령을 흉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농담을 들으면서 이런 말은 이 나라의 부끄러운 일이라 전대가리 하던 나의 말을 바꾸어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시작부터 부정 선거란 말을 하면서 “닭대가리” 닭 그네 하면서 욕하더니만 진짜 닭대가리모양 무식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말하든 “박 언니, 박아줌마, 박보, 라고 네트진 들이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방송에서 박 근혜 라고 칭하든지 대통령도 아니다 하는데 아직 헌법상으로 탄핵도 받지 않고 하야도 하지 않았으니 대통령이고 또한 내가 듣기 싫은 말은 이것이 나라냐? 하는 말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싶습니다. 남이나 자신을 비하하여 사람의 아름답고 성스러움을 잃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강의 하는 사람에게 반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반응이 없으면 말의 힘을 잃고 있으면 말에 힘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서 있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이가 나는 집안식구 중 이런 사람 아들 갖지 않고 딸 갖지도 않다고 아들과 딸을 원망하는 사람에게 그들에게 대한 사랑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여 하느님의 모습으로 거듭나야하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 성전을 정화 하듯 우리 안에 죄로 넘치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루카 19, 4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됩니다.
성전은 매일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맡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성전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된 우리의
신앙을 아프게
질책하십니다.
기도는 비겁한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용기있는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전의 고유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깨어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전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충만한
사랑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성전의 충만한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성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로 식별하는
우리들이
되게하소서.
내 마음속 성전
김수만 신부님
가끔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냇물은 흐르기 때문에 큰 강이 되고 큰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담아내고 또 비워낼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쉽게 안주하려 합니까! 또 얼마나 쉽게 나태함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까! 잠깐 쉬어갈 수 있지만,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되새기면서, 계속해 그 큰 바다로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강물을 닮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십니다. 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을까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익에 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예수님은 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되게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가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도 일어났으면 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어떤 영양분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은 과연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그리고 머리에게 물어봅니다. 아파트 평수, 통장의 돈, 자동차 배기량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가슴에게 물어봅니다. 세상의 것을 얼마나 품고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어떤 감동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깃들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현재 진행형’인지 아니면 ‘현재 완료형’인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하느님을 마음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집착·이기심·명예·탐욕 등은 그분께 맡겨드리고, 당신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마카베오 항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성전 재건과 수호를 통해 드러냈습니다.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주님이 머무시는 성전과 우리 마음의 성전에 큰 사랑과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가 내 마음의 성전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 들어찬, 기쁘고 즐거운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능동적인 신자
안문기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성전에서의 상행위와 환전행위 등을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제관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합법적인 권한이었는데 그 안에서 비리와 부정부패가 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행위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성전인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관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청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 사람은 우선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당에서 드리는 최고의 찬미와 감사제는 미사입니다. 성경을 알고, 능동적으로 미사 전례에 참례하면 비록 성당에서 지상의 전례에 참례하고 있지만 천상의 전례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몰아내야 할 것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성가를 즐겨 부르고 부를 때 가사를 많이 음미하며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가사들에 대해 가끔 시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사의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나의 생명 드리니 모두 받아주소서.”하는 가사에 대해 생명이 과연 나의 것인가 하고 시비를 걸고,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이라는 가사에 대해서는 “주님이 계시면 다 큰 궁전이지 작은 궁전이 어디 있어!” 하고 시비를 겁니다.
사실 궁전이 궁전인 것은 외양이 크고 재질이 고급이어서 궁전인 것이 아니라 임금님이 머무시기에 궁전인 것입니다.
궁전의 본질이 임금님이라면 성전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껍데기는 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너무도 과격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이 산이다, 예루살렘이다’ 하고 예배드릴 때 어느 특정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고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영적으로 어디든지 자유로이 계시니 어디서고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면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주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과 사람들에 대해 오늘 왜 그렇게 분노하시며 치워버리셨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생각과 태도에 대해 주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필요 없다고 부정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로 삼지 않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도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면 성전에서는 더더욱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성전의 본질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영적으로 예배드리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다 허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성전에 하느님은 아니 계시고 허접스런 다른 것들이 성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불교에서 경전이 집착하게 하면 경전을 태워버리듯 하느님보다 더 집착하게 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가린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성화와 성상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꽃 장식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촛대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도 치워버리니 성전을 복마전으로 만드는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전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패거리 짓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사교장으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자기 활동 무대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탐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근심걱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허영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수없이 많은 계획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What else?
마음을 깨끗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대전교구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정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은 서로 명문가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첫 영성체를 하며 그 깨끗한 마음을 오롯이 그리스도께만 드리기로 서원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처음부터 결심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수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님께서 혼인을 주례하시고 두 사람은 서로 오누이로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10번 가량 동정을 잃을 위기가 닥쳤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지킬 수 있었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 분은 동정의 순결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과 동시에 부부로서의 인간적인 사랑 또한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문 케이스의 분들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박해 상황이 아니니 이런 혼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임을 삶으로 보이신 분들입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하고 정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으며, 20살에 순교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옥중 편지는 항상 어머니와 누이들을 걱정하는 말들뿐이었습니다. 휘광이가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스스로 옷을 벗고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든 것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교님은 단순한 교리만 배웠지만 이러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던 한국의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보면 많은 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시는 당신 자신이 부끄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곳에 함께 참석하였던 신학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순교자들은 단순한 교리만 가지고도 그렇게 큰 믿음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많이 듣지만 이유는 바로 땅에 있을 것입니다. 씨는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그 열매는 서로 다르게 맺혀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풀 위에 내린 똑 같은 아침 이슬이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이단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잡으려 하였지만 군중들 때문에 잡지 못하였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배반함으로써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도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우리 각 개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안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안다고 교만해진다면 공부를 포기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배우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도를 지녔다면 다시 시작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한다면 영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 안 쓰던 커다란 상을 꺼냅니다. 잘 보관해 놓아서 먼지도 없는 것 같은데 음식 그릇을 놓기 전에 먼저 행주로 상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면 정말 더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놓은 다음에 닦는 것은 더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죄의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닦아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성전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구나"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질타를 묵상하면서 참된 성전이란 과연 어떤 성전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대성전은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부속성전, 친교의 공간, 휴식공간, 기타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성전 역시 좋은 성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짱짱한 음향설비는 물론이고, 사방이 휘황찬란한 고가 예술품으로 장식된 품위 있고 고상한 성전 역시 기도하는 분위기가 나는 좋은 성전이겠습니다.
매주 수 만 명이나 되는 미사참례자들이 줄을 잇고, 매주 수 천 만원의 거액이 오고가는 초대형 본당 역시 좋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조건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성전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거나 열악할지라도 기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참된 성전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몸으로 직접 살려는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한 봉사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 구성원간의 상호 원활한 의사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복음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나눔이, 이웃과의 사심 없는 빵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참된 성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가 구현되는 공동체, 인간 중심의 육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자신의 욕구나 의지대로만 살지 않고 이웃의 의지,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생활 전체를 맡기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선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로 서고자 염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그러자 환자가 온몸을 찌르며 대답합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요.”
한참 이것저것 검진하던 의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손가락 끝이 약간 삐었을 뿐입니다.”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면 온몸이 아픈 듯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즉,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삐딱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온통 삐딱하게 보이고, 또 반대로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으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것이 당연히 내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숫자만 봐도 잘 알 수가 있지요. 그 숫자가 1만 3천여 명에 달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거의 3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혹시 이 순간에도 자살을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니겠죠?). 이런 현상은 우리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말씀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주님의 성전이 되어야 할 내 마음을 정화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기도하는 집, 즉 주님을 소중히 모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모실 때, 행복도 역시 함께 우리 마음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군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렇게 거대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음...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다.” 긍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마세요.
크게, 길게, 온몸으로 웃자(김서곤, ‘행복한 동행’ 중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종종 무엇을 깨달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깨달음’이란 단어는 10여 년 전에 출간된 ‘의식혁명’에 나오는 의식의 지도를 떠올리게 한다. 의식의 지도에서는 대수의 수치가 200이면 긍정의 감정에 도달한 용기의 수준으로 보고 700~1000이면 성인의 수준, 즉 예수나 부처님의 경지에 달한 것으로 본다. 겨우 200이 될까 말까 한 나는 깨달음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럽기만 하다.
경영자라면 누구나 조직원들에게 긍정적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 회사 역시 긍정적 사고를 하도록 하는 교육에 집중해 왔지만 그 효과는 항상 의문이었다. 생각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생각을 바꾸고 습관을 만드는 일은 만만치 않다. 공동체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올해 초 나는 우리 조직원들에게 한 가지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고 싶어, 고심 끝에 ‘웃음’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매출 증대나 제조 생산성 향상’ 이전에, 오직 ‘웃어라’에 초점을 맞추고 교육 예산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크게, 15초 이상 길게, 온 몸으로 웃는 웃음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직원들은 비싼 돈 들여 웬 웃음 교육이냐고 의아해했지만 나는 웃음의 효과를 굳게 믿었다. 나를 비롯해 부서장들부터 아침에 출근하면 ‘하하하’, 식사하기 전에 ‘하하하’, 회의 시작 전에도 ‘하하하’하고 마구 웃어 댔다. 그렇게 시작된 웃음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전 직원에게 퍼져 갔다.
지금 모든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에 몰리고 있다. 우리 회사도 얼마 전 자금 유동성을 걱정하던 중 한 기관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투자 받았다. 그 투자 기관 임원의 말에 의하면 투자를 위해 회사 탐방을 온 날 우리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온 직원들의 웃음 잔치를 보고 ‘이 회사에 투자해도 안전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투자 유치의 결정적 사유가 되진 못했겠지만 분명한 것은 웃음이 바로 긍정의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앞서 나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세상을 향해서, 또 자신을 향해서 크게, 15초 이상 길게, 그리고 온 몸으로 ‘아하하하’ 웃어보자. 그 웃음이 우리에게 행운으로 혹은 능력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내적 성전 관리
이승준 신부님
하느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려야 하는 성전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 요한 복음에서는 그분의 행동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에 따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요한 2, 17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성전이 본래 가져야 하는 신성함과 경외심을 가지기보다 자신만의 이익과 안위를 얻으려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 19)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작은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으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예수님의 질책을 받게 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쁜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을 잊고 나만의 안위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 짧지만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이들
원영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나라를 가나 중세 이래 건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문화유산의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다.관광객다운 호기심 충족보다 성지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외심을 새롭게 하는 은혜로운 경험을 한다. 열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그림 같은 마을에 십자가 첨탑을 높이 세운 교회가 긴 세월 동안 이정표이며 구심점이었음을 본다. 큰 도시의 대성당은 너른 광장을 앞에 펼치고 우뚝 솟아 시민들의 자긍심을 북돋우며 위용을 자랑한다. 성화와 조각상 등 예술 작품을 품은 다양한 양식의 건축이 날렵한 현대식 건물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어우러져 있다. 그 고풍스런 자태 속에 위대한 신심 표현이 이어진다.
그런데 막상 육중한 성당에 들어서면 미사시간에도 신자들보다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이 더 많아 주객이 뒤바뀐다. 성당이 개신교 예배당으로 바뀐 건 그럴 수 있다 싶지만 대부분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현실이다. 심지어 성당 내부를 개조해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한다니 서구 사회의 세속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벗어나고 있는 오늘의 유럽에서는 지난날 찬란하게 꽃피웠던 신심이 역사를 등지고 쇠락하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을 듣는 유다인들의 폭력적 위선은 이 시대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신심의 황폐화보다 증상이 더 심각한 듯하다. 하늘의 선택받은 백성이란 자부심을 가진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팽개치다 못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니! 성전이 거룩하다는 것은 건물의 웅장함이나 장식의 아름다움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 말씀과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모인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등한시하는 세속화의 현장이 될 유혹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몰아내고 세상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칼날 같은 틈을 엿보고 있다.마음을 열어 예수께 집중하는 일만이 우리가 그분을 지켜드릴 수 있는 길이다. 성전을 가리켜 ‘기도하는 집’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나 성전이 될 수 있다.
유럽 여행 도중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심성당(Sacre Coeur)을 밤늦게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은은한 촛불 빛을 받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들어 올려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된 듯 깊이 빠져 있는 모습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참된 기도의 힘으로 성전을 밝히는 신앙인들이 있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구원의 사명을 다하게 되리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쇠약해가는 서방 교회는 외적인 모습일 뿐,그 너머에 성전을 지키는 이들의 믿음을 하느님은 보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날마다 날마다
장재봉 신부님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그른 길을 그르다고 선포하며 속지 말 것을 당부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날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었음을 밝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감동을 받는 무리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역행하는 무리가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용돌이는 지금 세상에서도 여전합니다.
과연 자신의 자리는 어느 쪽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구성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단답형의 답을 알려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근본이 인간이 느끼는 절망적인 삶의 문제에 있는 까닭이라 싶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답은 하나 일 수 있다는 뜻이라 짚어봅니다.
모세가 홍해를 만났을 때에는 물이 많아서 문제였지만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는 오히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삶의 들쑥날쑥한 문제이며 고민이 아니겠는지요?
인생이 겪는 숱한 난관들이 미궁처럼 혼미하고 미로처럼 복잡할 수 있지만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참을 알고 따를 수 있는 ‘가치의 확신’이 필요한 이유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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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하늘의 천사에게 받아먹은 말씀은 입에서 꿀같이 달콤했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일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달콤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쓰고 아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주님께서는 쓰고 아프고 괴로운 처지야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위대한 과정이라 이르십니다.
당시 기득권층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 응징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날마다 날마다 ‘속지 마라’고 이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듣느라고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우리들이 세상을 지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아멘
기도는 곧 성전 정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저의 말씀 나누기에서 오류가 있었음을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대목이 한 곳 뿐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도 눈물을 흘리셨지요.
정정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 그래서 겁나고 더욱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지식상의 오류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그릇되는 것이겠지요.
성전이어야 할 내가 복마전이 된다면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성전(聖殿)과 복마전(伏魔殿).
이것이 갈리는 것은 껍데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속 내용에 의해서입니다.
건물의 재료를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건물의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주님께서는 그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예언하십니다(루카 21,5-7).
재료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써 성전을 잘 지었어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성전이 가득 차 있다면 파괴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성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성전 파괴는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성전 청소를 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잡다한 물건들은 깨끗이 치어지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집, 머무시는 분과 데이트가 이루어지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성전의 정화입니다.
그런 다음 깨끗해진 성전에 주님을 모셔 들임입니다.
날숨, 들숨과 같습니다.
날숨으로 내 안의 모든 악령적인 것을 토해내고 들숨으로 내 안에 성령을 들이키는 것, 이렇게 하느님을 숨 쉬는 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성전정화 사건
홍금표 신부님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중 하나가 선거입니다. 그러나 과거 비자금 정국을 보면 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좀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의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지는 많은 문제가 선거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 결과를 우선하는 가치관의 혼란, 법과 규정 보다는 집단의 힘과 큰 목소리가 우선하는 모든 것들이 선거와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차단된 상태에서의 선거란 좋은 이상이겠습니다만,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때 우리가 좀 더 발전된 사회를 위해서는 뭔가는 모르지만 이러한 부정적 모습을 차단하면서 선거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대중 투표가 아닌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제도 보완을 검토해야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을 전해 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만 들어가는 이스라엘 마당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방인 마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고 환전상들이 있던 장소는 이방인의 마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상인들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환전을 해주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한 점이 있는 제도였습니다.
첫 번째 편리한 점은 순례자들이 먼 곳에서부터 살아있는 제물을 가져 올 필요가 없이 가까운 곳에서 제물을 구입하여 봉헌할 수 있기에 이는 경제적 시간적으로도 매우 편리한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환전도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당시 통용되던 로마은전과 그리스 은전에는 인물상과 황제 숭배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성전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은전인 세겔로만 성전세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유일신 신앙을 지켜 갔고, 이러한 결과가 환전이 필요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전과 상행위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두 가지 모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행위와 환전 자체에서 오는 어두움입니다. 환전과 상행위의 이면에는 이익창출이라는 마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익창출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요, 인간 삶의 필수 불가결한 무엇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익이라는 면만이 강조되고 여기에 자제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 가세할 때 너무나 많은 폐해가 발생합니다. 이익만을 탐하는 자리에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과 신심이 차지할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검은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허가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임대차와 관계하여 검은 돈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오가게 되고, 또 사제들과 성전관리자들은 성전시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입한 예물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적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전 시장의 독점을 가져오게 만들고, 검은 공생관계에서 얻어지는 이득은 검은 거래의 당사자들이 나누어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전과 성전시장은 편리와 실용이라는 그럴싸한 포장 뒤에 인간의 물욕과 검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부정부패의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질타하고(마태 21, 13)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상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이기심과 간사함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끝없는 욕심으로부터 성전을 정화하여 성전이 가지는 첫 의미의 회복,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체험하는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전의 본 의미를 회복하고 싶은 당신 열정의 표현입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자가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부릅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손자에게 조용히 말씀하세요.
“얘야,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먹어야 한단다.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복이 달아는 거야.”
그리고는 계속해서 조용히 식사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손자도 할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했지요. 식사 후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래. 아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이니?”
손자는 아깝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합니다.
“이미 늦었어요. 할머니 국에 파리가 빠졌는데 이미 할머니 뱃속으로 들어갔어요.”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요. 그러다보니 아이들 앞에서는 항상 자신의 지혜로움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처럼 항상 어린이보다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어른도 한 명의 인간으로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혜가 느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 느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허락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에 흠집이 났지요. 또 한 가지는 장사를 허락함으로써 거둬들였던 물질적인 이익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무서워서 차마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 함께 모여 찾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앨 방법만 찾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선 이야기처럼 참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와 고집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즉, 사람들에게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달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현대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드러내려고 하는 권위와 고집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제는 그 권위와 고집은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세우고 있는 권위와 고집은 무엇입니까? 조용히 내려놓으세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1986년 미국 최대의 부동산 중개 회사인 웨이처트 부동산에 중개인으로 입사, 1993년 1천만 달러 이상의 계약액을 달성한 신디 로즈메이즐. 그녀는 웨이처트 부동산의 8천여 명의 중개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의 실적을 이뤘다. 그녀의 성공 비결은 바로 자신과 인연을 맺은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한다.
그녀의 서비스는 고객에게 집을 팔고 난 뒤에 시작된다. 낯선 곳에 이사를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을 위해 그녀는 근처의 병원, 치과, 세탁소 등을 소개해 준다. 아기 봐 줄 사람까지 찾아서 알려줄 만큼 그녀의 서비스는 구체적이며 정확하다. 이런 서비스 덕분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은 곤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그녀를 찾는다. 고객을 단순한 고객 이상의 친구로 만들어 버린 그녀의 서비스에 친구가 된 고객은 또 다른 고객을 앞다퉈 그녀에게 소개한다.
또한 그녀는 매년 성탄절 연휴에 성대한 파티를 열어 고객을 초대해 자신을 기억해 줄 작지만 성의 있는 선물을 준비한다. 그녀 나름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인 셈이다.
상품을 파는 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갖고 끊임없이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 역시 최고의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소통
서현승 신부님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소통 안에는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이 포함되곤 합니다. 실상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는 말 없는 것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서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머무는 경우도 있을 테고, 혹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 또한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소통의 관계 안에는 서로간의 마음이 열려 있느냐 없느냐에 있겠죠.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 계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도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온갖 거래와 모략들을 일거에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기도할 때는 사실 내 청을 아뢰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성전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내 삶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럼으로써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분의 ‘표현’들을 하나씩 내 삶 안에서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성전인 것입니다
나의 집
정애경 수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전해 준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는 동안 제물로 바칠 짐승한테 상처가 생기면 상처 나지 않은 짐승과 교환하기 위해, 또는 미처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로마 돈을 성전화폐로 바꾸어야 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환전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성소를 지배하게 되었고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파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제사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장사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좋은 마음과 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을 이해관계로 그르친 적은 없는지, 탐욕에 눈이 멀어 더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내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가? 나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는가? 혹시 내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심, 명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이제는 주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바꿈해야겠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신 후 백성들을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며, 악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ㄴ)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
최금자
나는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서 구절을 읽으면서 두 성전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나는 바티칸 교황청이 있는 널따란 베드로 광장을 지나 처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웅장함과 경건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성전은 긴 세월에도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를 지니며 기나긴 교회사의 사건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성전 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가슴에 안고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피에타 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리고 성전 여기저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순례객들을 보면서 이곳이야말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최근에 읽은 「나가사키의 노래」에 등장하는 우라카미 성당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방사선과 의사이며 그 자신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린 나가이 다카시는 성전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우라카미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원폭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사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십니다.
교회의 희망
백광현 신부님
1998년 여름 파리 세계 청소년 대회 때 어떤 신문 기자가 한 젊은이에게 “당신은 왜 파리에 갑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젊은이는 “교황님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는 “당신의 교황은 저렇게 늙고 지치고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매력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갑니까?” 하고 묻자, 젊은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갑니다. 교회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를 만나기 위해서 파리에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은 교회를 없애 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교회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이세형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제가 인사말에서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가슴에 불덩어리를 지니고 사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와 인간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입니다. 저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동시에, 제가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인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소망을 헛되게 만든 영적인 눈멂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이미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하셨던 말씀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너는 나를 우습게 여겼다..... 너는 등을 돌리고 나를 떠나갔다가 내 손에 맞아 죽게 되었다. 너를 불쌍히 보아 주는 것도 나는 이제 싫증이 났다.”(예레 15,6)
예수님은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셨는데, 성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누리는 특권의 모든 것은 시온산 위에 있는 성전 덕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십니다.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쫒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꾸짖으셨다.”(요한 2,15-17)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거래상들과 이 거래를 허용하고 그럼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유대 당국자들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예레 7,11)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써뿐 아니라 특히 행위로써 예언자들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즈가 14,21)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그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지고 재물을 섬기는 일이 배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로 인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느님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 중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신 분이 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재 : 충남 금산군 진산면) 출신의 유학자로서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과는 외사촌 사이였습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였다는 죄로 그의 먼 일가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사형을 받게 되면서 당시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조선후기의 역사에, 그리고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금한다는 것은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유교적인 윤리와 관행을 끊는다는 것은 효도를 가장 기본적인 윤리로 강조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대부분 신자들은 제사를 포기하기보다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대로 윤지충(바오로)에게도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을 권유하였던 외사촌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도 이미 교회를 떠났으며, 이승훈과 그 외의 중심인물들도 그러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으로서도 천주교 신앙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그도 커다란 갈등에 빠졌었겠지만 그래도 윤지충(바오로)은 신앙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명령대로 부모님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처럼 그가 제사를 폐하고 신앙을 선택한 행위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의 행위였으며, 부모에의 효성을 나라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하였던 당시에는 반역의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는 1791년 음력 10월경에 체포됩니다.
유림에서는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파격적 행위가 국가적으로 큰 물의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들은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었지만, 정작 윤지충은 조금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윤지충(바오로)는 전라 감사 정민시의 문초에 응하여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천주를 공경하고 높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사대부 집안의 나무로 만든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죽을죄를 얻을지라도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 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사대부가 아닌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도 엄히 금하는 일이 없으며, 가난한 선비가 제사를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물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이며 나라의 금법도 어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지충(바오로)이 전통적인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로서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으로 그가 사형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하였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 결정 하나로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상 세상의 법과 천주의 법이 정면에서 상충될 때 천주의 법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증거자였으며,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제사문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의 가르침 가운데 그 어떤 요인들이 윤지충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을까?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땅에서 만큼은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쉽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서 윤지충(바오로)처럼 극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기로 결단을 내렸으면서도, 이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런 신앙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제사문제가 일단락되었지만, 그 대신 지금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과의 결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예로 돈, 명예, 자존심, 이기심, 안락함,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는 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정한 짓도 서슴지 않는 태도 등을 청산하라고 신앙이 요구한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신앙인의 정화
이재화 신부님
교구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한 해에 예닐곱 개의 크고 작은 성전을 신축하고 있습니다. 성전 신축을 하려면 예산문제·설계·건축 등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지만 담당 신부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신앙과 일치입니다. 곧 건물을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건물을 사용할 교우들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몇몇 본당에서는 성전을 지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갈라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건물은 훌륭한 건축사와 시공사가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건물을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명동성당에서 예비신자들을 담당할 때의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분들께 이 성전이 아름다운 진정한 이유는 100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고 위로받고 회심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전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성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건물의 정화가 아닌 ‘신앙인의 정화’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기준에 맞추어 정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그대에게
옥봉성당은 근대문화재 1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8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성당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꾸며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큰 나무, 사철 피는 꽃들이 성당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온갖 인생풍랑을 겪으면서 자신을 깎고 다듬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른 어르신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분들은 젊거나 싱싱하지는 않지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다소곳이 기도하는 어르신들에게서 은총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저는 생기발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 성당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금은보화보다 고귀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성당의 꽃이자 보배입니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고, 강도의 소굴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치켜세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욕망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드나들면 그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초라한 천막이지만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성당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만듭니다.(一明)
너희가 곧 성전이다.
박상대 신부님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가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원전(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長途)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當日),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가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바게트(baguette) 빵을 아십니까? 프랑스빵의 일종으로 길고 딱딱한 원통형의 하드 타입 빵입니다. 고소한 맛에 사람들이 즐겨 먹는 빵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그렇게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빵을 먹다가 입천장이 벗겨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빵을 먹는 방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딱딱한 부분은 혓바닥 쪽으로, 그리고 부드러운 부분은 입천장 쪽으로 두고 먹으면 입천장이 다치지도 않으면서 빵의 본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냥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먹으면서 ‘입천장을 다치게 하는 질기고 딱딱한 이 빵을 도대체 왜 먹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평과 불만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렇게 빵 하나도 먹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방법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요? 방법도 모르면서 또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불평불만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런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고 또한 예수님을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군인신학생이 휴가를 나왔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년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의젓해지고 말 하는 것도 많이 자신감이 생긴 것 같더군요. 이렇게 1년 사이에 바뀐 이 군인신학생을 보며, 저는 과연 1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었고, 그럼으로 인해 내 자신을 얼마나 변화시켰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평불만만을 일삼으며 사는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러셀).
내가 니꺼잖아
아내: 여보세요? 자기야?
남편: 응, 왜?
아내: 있잖아. 궁금해서 물어 보는 건데.
남편: 뭔데, 물어봐.
아내: 우리집 누구 이름으로 돼 있어?
남편: 내 이름.
아내: 우리 차는?
남편: 내 이름이지.
아내: 머야, 내껀 하나도 없잖아?
남편: 내가 니꺼잖아.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고 하지요. 특히 부부 간에는 더욱 더 그렇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가 될 때, 행복 역시 함께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
안승태 신부님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시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그러한 성전에서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 마음에 흡족한 제물을 바쳐드려야 한다는 여러 율법 규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과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로 성전 마당은 여느 시장을 연상하게 되는 풍경이었을 것이고, 세속적인 속임수도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장사치들의 거짓됨을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시기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매주 또는 매일 미사를 드리는 성당에만 머물러 계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어 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 아닌 내적인 우리 마음, 우리의 일상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들었던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거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욕정과 탐욕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려는 침묵의 태도 안에 주님의 성전은 아름답게 우리 안에서 지어질 것입니다
문명의 전환
이대훈
하느님의 정의가 실종될 때 강도의 소굴과 똑같아진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 소굴은 종종 정의로운 곳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문명’이라는 착각도 마찬가지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과 세계체제가 근본적인 벽에 부딪혔다고 말한다. 정의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가부장제와 성차별, 인종차별, 인권 경시, 빈부 격차 뿐만 아니라 군비경쟁과 군수 무역, 불공정 무역, 거대 기업의 독점과 횡포다. 또 속도와 팽창만을 앞세우는 경제성장과 행복관이 강도의 소굴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더 잘 보게 된다. 특히 비서구세계에서 이러한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평화를 정의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열매가 우리의 일상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체제를 정의롭게 개조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세계와 문명의 전환은 오늘날 지구촌 정의 구현의 첫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 힘든 여정의 첫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까? 아픔을 아는 사람들, 고통의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공유가 정의구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통해 연대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바로 슬픔이다. 슬퍼하는 마음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없다. 서로 깊이 연관된 세계에서 나 자신이 진정 홀로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슬픔은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슬퍼하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고통은 나눌수록 줄기도 하지만 나눌수록 힘과 자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귐은 적고 일이 너무 많다.
김찬선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분노하시며 정화를 하십니다.
그리고선 성전을 차지하시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없애려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뭐가 뒤바뀌어도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수석사제들은 없애야 할 잡동사니들은 놔두고 오히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객을 뒤바꿔놓는 것은 백성의 지도자와 수석사제들만이 아니라 저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물 받은 꽃다발을 제 방에 갖다 놓으려다 제 방이 아니라 성당에 갖다놓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성당 제대 앞에 꽃다발을 갖다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갸륵하다는 생각이 한 편 들면서도 다른 한 편 뭔가 더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뭘까 생각해보니 꽃은 성당에 갖다놓고 저는 성당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꽃을 봉헌한 것 분명 저의 기도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성전에 주님과 꽃만 있고 제가 성전에 없다니, 그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저는 꽃을 갖다놓은 것으로 기도를 다했다고 하고는 꽃에게 ‘이제 네가 내 대신 주님을 모셔라.’고 하는 듯하였습니다.
성전에 물론 주님이 계시고 꽃도 있어야지만 저도 꼭 있어야 하지요.
그래도 이것은 낫습니다.
어떤 때 제 마음성전은 이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제 마음성전에 주님이 아니 계십니다.
주님 대신 잡동사니들이 있으며, 어떤 때는 기도와 헌신의 영은 없고 온갖 계획들과 근심 걱정들만이 가득합니다.
기도와 헌신의 영이 없기에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대신 성전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니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은 밀어내고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겁니다.
주님과의 만남이나 사귐은 적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그저께 저녁부터 어제 낮까지 눈앞에 뵈는 것 없이 살았습니다. ‘눈앞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죠? ‘이 신부가 막무가내로 살았다는건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로 눈앞에 뵈는 것이 없었습니다. 글쎄 안경을 이틀 동안 쓸 수가 없었거든요.
이틀 전, 강화지구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눈앞이 너무나 흐리다는 생각이 들었고, 휴지로 안경알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안경 코받침 중의 하나가 똑 하고 부러진 것입니다. 이 코받침이 없다고 해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썼습니다. 하지만 코받침 없이 안경을 쓰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코가 눌려 아프다보니 잘 보이지 않더라도 안경을 쓰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안경점가서 수리를 했던 어제 저녁때까지 불편한 상태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한쪽의 안경 코받침이 없었을 뿐인데, 너무나도 불편한 생활이었습니다. 안경에서 앞을 보게 하는 렌즈와 귀에 걸을 수 있는 안경다리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가장 작은 부분처럼 보이는 코받침도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네요.
생각해보니 나도 이렇지 않을까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재능과 능력.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능력과 재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듣던 당시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수석 사제, 율법학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성전에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허락을 했기 때문에 바로 자신들에게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 말에 기분 좋았을 리가 없겠지요. 이제까지 누구나 다 자신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싫은 소리만을 계속해서 퍼 부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예뻐 보였을까요? 사랑스럽고, 그런 말씀을 해주는 예수님이 감사했을까요? 아니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았습니까? 물론 나중에는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찾았지만, 이 순간에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 구절에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가장 소외된 사람들만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없애지 못하도록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을 축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하지만 나의 이 부족함도 주님을 지키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경 코받침도 생활하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설마 나의 이 몸뚱이가 코받침보다는 못한 것은 아니겠지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귀하게 창조된 나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판단력(조용헌)
세계 역사상 대단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던 인물은 로마 천년의 스타였던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가 내렸던 판단의 황금률은 이것이다. “나(카이사르)에게 유리하면서도 로마에도 유리한 일을 나는 결정한다.” 보통 일을 하다 보면 자기에게 유리한 일은 전체에 해가 되기 쉽고, 반대로 전체에 유리한 일은 자기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기 쉽다. 카이사르는 이 두 토끼를 모두 잡았다.
내가 만나본 기업가들 중에서 교보문고를 창립한 대산(大山) 신용호(愼鏞虎·1917~2003)도 두 토끼를 잡는 판단을 내린 사람이다. 신용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독학(獨學)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다. 오로지 책이 그의 선생이었다. 고독한 독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정규교육 과정을 대신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게 할 수 있을까? 그의 염원은 책이었다.
1981년 서울시 한복판에 23층의 교보빌딩이 완공되었을 때, 금싸라기 땅인 지하매장에 과연 어떤 점포를 입주시킬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산은 그 자리에 서점을 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사무실 임대료 수입에 비해 서점을 낸다는 것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대산은 책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으므로 눈앞의 타산을 뛰어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눈앞의 구체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미래의 추상적인 선(善)을 선택하는 결정은 어려운 판단이다.
그 판단 덕택에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는 세계적인 서점이 되었다. 대산의 이 결단은 ‘자리이타’(自利利他·자신에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다)의 모범을 보여준 판단이었다.
갑곶성지에서 차를 타고서 한 10분 정도 가면 성지 소유의 예쁜 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새벽 묵상 글에서도 썼었던 사제관으로 사용했던 집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옆집도 얼마 전 성지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앞으로 순례객들의 숙소 및 피정 장소로 사용할 예정이거든요. 그런데 전에 사제관으로 사용했었던 그 집은 일 년 중에서 단 며칠만 사람들이 묵었고 대부분 비워 있었답니다. 반면에 이번에 매입한 옆집은 일 년 내내 어떤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집이 더 낡았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계속 살고 있었으니까 더 낡을 것 같지요? 하지만 우리들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더군요. 글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이 더 낡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의 마당에는 풀도 무성하게 자라고, 화단도 무너지고, 건물의 외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반면에, 그동안 쭉 사람이 살았던 그 집은 모든 것이 다 새 집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똑같은 사람이 이 두 집을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요? 딱 한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는 사람이 살았고, 또 하나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은 집 두 채 중에서 하나는 사람이 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지요. 사람이 살아야 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개가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요. 개집입니다. 그럼 닭이 살면? 닭장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야 할 때, 개집이나 닭장이 아닌 진정한 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제발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을 내쫓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이 이들 때문에 진정한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장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의 장사 덕분(?)에 불의가 넘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살아야지만 집이 망가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계시는 교회에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냐 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교회 내에 가득해질수록 이 교회는 망가지지 않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닌 강도가 들어올 때, 교회 역시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진정한 교회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집을 잘 가꿉시다.
소중한 오늘을 위하여(박성철, '소중한 오늘을 위하여' 중에서)
세상은 좋은 일을 했다고
꼭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했다고
꼭 나쁜 결과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을 했음에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삶은 상처 입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는 아닙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가 노력한 만큼
꼭 그만큼의
눈에 보이는 결과는 주지 않을지라도
항상 우리에게
그에 합당하는 많은 것들을 줍니다.
세상은
항상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꼭 노력한 그만큼의 성장을
우리에게 약속해 줍니다.
세상이 주는 시련과 실패는 우리를
부유하게는 만들지 않지만
인내와 지혜를 선물합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노력한 그만큼 세상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준다고..
만일 오늘을 우리가 성실히 돌본다면
세상은 우리의 내일을 돌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