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한 방울 **
몇몇 고교 선배들과 만나는 모임
에서였다.
선배 한분이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
어령 교수였어.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
에 두보의 시를 써 놓고 해설을 하는데 황홀했었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
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대한민국의 지성의 아이콘
이 됐다.
그리고 22년 2월에 돌아가셨다.
말하던 그 선배가 덧붙였다.
“그 양반은 낮았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거야.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라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된 천
재들이 있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
족주의로 잡고 교육에 헌신했었
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의 정신
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남겼었다.
이어령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
직을 할 무렵의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잡지를 보고 메모를 해 둔 것
이 아직 남아 있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
도 때가 되면 물러앉아야 해요.
새잎들이 돋는데 혼자만 남아 있
는 건 삶이 아니죠.
갈 때 가지 않고 젊은 잎들 사이
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쭉정이
를 보세요.”
그는 아직 윤기가 있을 때 가을바
람을 타고 땅에 내려오는 것이 좋
다고 했다.
귀중한 철학이었다.
죽음에 적용해도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화면에서 본 이어령 교수
의 얼굴에 골깊은 주름이 생기고 병색이 돌았다.
어느날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이 보이고, 얼마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병을 맞이했고 죽음 앞에서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불
현듯 들었다.
현자의 죽음은 많은 걸 가르쳐 주
기 때문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어령 교수
의 부인이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
오는 걸 봤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 데 항암
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
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고
민했는데 남편은 할 일이 너무 많
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어요.
남편은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날
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 그날 생각나는 걸 가장 자유
로운 양식으로 쓴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손가
락에 힘이 빠져 더블클릭이 안되
는 거예요.
남편은 손글씨로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
놓고 했는데 점점 손가락에서 힘
이 빠지는 거예요.
그림도 없어지고 갈수록 글씨도 나빠졌어요.
건강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는 거죠.”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
떻게 했을까 ?
그에 대해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
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
았을 때 그렇게 펑펑 울더라구요.
그 머리가 좋던 남편이 기억이 깜
빡 깜빡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치매가 온다고 생각하고 또 펑펑 울었죠.
남편은 두 발로 서서 인간으로 살
고 싶다고 했어요.”
중년의 미남이었던 그의 장관 시
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금가루라도 뿌린 양 번쩍
거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녹
이 슬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순서인 죽음을 그는 어떻
게 대면했을까?.
인터뷰 진행자는 이어령 선생께 질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
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
라고 하신 말씀에는 변함이 없으
신가요?"
이 질문에 이어령 선생은 그의 생
각이 여전히 변함없음은 물론, 생
은 선물이며 내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간
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여태껏 살아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해왔다며, 진
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
기에 슬픈 거라고 하시며 인사 말
씀을 덧붙이셨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
웠어요. (... 중략) '인간이 선하다
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
과 작별합니다. "
이어령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로 가시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
까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통사람보다 열배 스무
배 예민한 예술가였어요.
죽음 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
꼈어요.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
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죠.
남편은 노트에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라고 썼
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
려고 했죠.
그런데 노트 스무장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어요.”
듣고 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물
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찾은 거죠.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썼어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제목으로 정한 ‘눈물 한 방울’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자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예요.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게 진정
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남편은 남긴 거예요.”
거실 깊숙이 2월의 햇살이 비쳐 들어온 어느 날.
선생은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의 온기를 즐기셨다.
그리고 2022년 2월 26일 정오
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
인 채,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셨
다.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앞에 정직
해져야 할 것 같았다.
지인이 보내 준 윗글을 읽으면서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 가 떠올랐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
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
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
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
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
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
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
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
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매시간, 일생을 통해 계속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
니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
합니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
합니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명나라 시인 진계유는 “뒤에야 알았네.” 라는 당신의 시에서 이
렇게 말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
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
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
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
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시인은 ‘후회’의 감회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후회는 선택한 뒤에 따르는 경험
과 연륜에 따른 진솔한 반성, 돌
이킬 수 없는 애잔한 마음의 표현
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각하며 사
는 우리네들의 삶은 같다는 생각
이 듭니다.
백수의 김형석 교수님도 어느 시
절로 되돌아가고 싶으시냐고 묻
는 기자에게 철없는 젊은 시절보
다 모든 것을 알고 인생의 철이 든 6.70대가 좋다고...
우리는 지금 황금시기에 놓여있
지요?!
예, 놓여있어요.
혹여 후회와 자책으로 세상의 슬
픔과 아픔에 지지말고 힘을 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오늘도 소소한 감사와 소소한 사랑으로 채우며 기쁨을 누려요.
화이팅!! 열심히 삽시다.
그래서 행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