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8월 8일 김기춘(오른쪽) 전 법무장관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후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요즘 국회 주변에서는 '박근혜 시대는 원로(元老) 전성시대, 올드보이 전성시대'라는 얘기가 나돈다. 3선(選) 국회의원 출신의 허태열(許泰烈) 대통령비서실장 후임으로 70대(代)인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장관이 등장하면서 국회의원이나 보좌진 사이에는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세재개편안에 대해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며 사실상 현오석(玄旿錫) 경제팀을 질타하자, 80대인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장관(새누리당 상임고문)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으로 발탁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김용환, 김기춘 두 원로(元老)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으로 알려진 '7인회'를 같이 하고 있다.
출범 6개월 된 박근혜 정부. 과거 같으면 집에서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소일할 것 같은 원로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특히 관료 출신의 60~70대(代)가 적지 않다. 청와대에는 김기춘(74)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김장수(金章洙·65·국방장관) 국가안보실장, 박흥렬(朴興烈·64·육군참모총장) 경호실장, 주철기(朱鐵基·67·駐프랑스 대사) 외교안보수석 등이 있다.
현직 기관장으로는 남재준(南在俊·69·육군참모총장) 국가정보원장, 현경대(玄敬大·74·검사 및 정치인)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이경재(李敬在·72·언론 및 정치인) 방송통신위원장, 김동호(金東虎·76·문화부 차관) 문화융성위원장, 이원종(李元鐘·71·도지사)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 등이 있다.
원로 자문그룹 7인회 소속의 김용환(金龍煥·81·관료) 새누리당 고문, 최병렬(崔秉烈·75·언론 및 정치인) 전 한나라당 대표, 김용갑(金容甲·77·군 및 정치인) 전 총무처 장관, 안병훈(安秉勳·75·언론인) 기파랑 대표, 강창희(姜昌熙·67·군 및 정치인) 국회의장 등의 정치적 중량감이 대단하다.
"80살이든 90살이든 나이 중요하지 않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이 많은 옛 인물들을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언론사 간부 출신으로 지난 대선(大選)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성 지도자는 심리학적으로 나이 많은 참모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20대 초반부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따르는 참모들과 같이 호흡해 왔습니다. 퍼스트 레이디로 국정에 참여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고민도 같이 했어요. 그게 몸에 뱄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참모가 80살이든 90살이든 상관하지 않아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 9년 동안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했던 '대통령 전문가' 김충남(金忠男) 박사도 "박 대통령은 참모의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야인(野人) 박근혜' 시절부터 옆에서 그를 지켜온 한 원로급 인사는 지난 3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용인술'과 관련해 "비서는 철저하게 비서다. 언론이 긁지 않는 한, 절대 튀지 않는 한 그와 함께 간다. 튀면 죽는다. 나이가 적고 많고도 관계없다. 70이 넘은 비서도 있고 어린 비서도 있다"고 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사결정의 핵심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경험 많은 사람을 활용하는 특징이 있다"면서 "박 대통령은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권력 분할정치'를 한다. 따라서 김기춘 실장 본인이 2인자라고 생각하면 큰일 날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튀는 것을 싫어하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과 관련해 한때 '정치인 박근혜'의 핵심참모 역할을 했던 윤여준(尹汝雋) 전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일종의 관리형 리더십이다. 그에겐 '실수는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경험 많은 김기춘 전 장관을 비서실장으로 골랐을까. 김 실장과 동년배인 박찬종(朴燦鍾) 변호사의 말이다.
"김기춘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간 것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아 당연히 들어갈 녀석이 들어갔구나'라고 봅니다. 김기춘이는 1960년 사법고시 최연소자 동기고 군대도 같이 갔다 왔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 들어온 이후에는 줄곧 옆에서 보좌했고 7인회 때도 열심히 조언했지요. 서면보고나 구두(口頭)보고할 때 상관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지요."
"고통 없이 털 뽑는다, 그게 말이 돼요?"
지난 8월 5일 청와대 비서진 개편으로 김기춘 실장이 전면에 등장하자 7인회 같은 원로급 인사들은 언론 접촉을 꺼려 하고 있다. 권력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7인회 멤버로 알려진 몇몇 인사에게 연락했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사정을 하자 한 인사는 "나는 세상 일 잊고 사는,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니까 내 말에 의미를 절대 두지 말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귀찮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와요. 인터뷰 안 한다고 해도 또 전화해."
-누구는 원로 전성시대라고 하고, 누구는 올드보이 전성시대라고 해요.
"아무튼 나하고는 상관없어요."
-박근혜 대통령과는 가끔 연락하십니까.
"취임하기 전까지는 좀 했는데, 그 이후에는 뭐 할 이유가 있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 전 청와대 비서진을 생각보다 큰 폭으로 개편했습니다.
"김기춘이는 7인회하고 상관없이 발탁된 거요. 다른 사람도 대통령께서 필요하니까 자리를 맡긴 거고요. 괜히 7인회가 무슨 권력행사하는 사조직처럼 비쳐서는 안 돼요."
-대통령의 인사(人事)스타일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죠.
"인사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겠소. 사람 쓰는 것은 대통령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청와대나 장차관 자리에 관료 출신이 많다는 평가에 대해서는요.
이 인사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관료라도 능력이 있어야지요. 공무원들요? 눈치 보는 거 잘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일 때는 슬쩍 빠지고?. 경력, 학력 좋더라도 어떤 정무적 상황에 부딪히면 판단력이 꽝인 사람이 많아요. 조원동 경제수석 그 사람 말이야, 세제개편안(案)도 개편안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고통 없이 거위 털을 뽑는다고요? 그게 말이 돼요?"
-청와대에 그런 의견 전달하셨습니까.
"뭐, 그런 걸 전달합니까. 혼자 중얼거릴 뿐이지. 이제 그만 합시다. 나는 망각의 세월에 사는 사람이오."
"朴대통령, 이념적 동질성과 恩怨관계 중시"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인 출신보다 행정 경험이 많은 관료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청와대 비서진과 정무직 자리에는 관료 출신이 두드러진다. 언론에서도 '관료 공화국'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때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가 지금은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있는 한 인사는 "지난 정부에서 청와대 인사의 60~70%가 캠프(정치권) 출신이었는데 지금은 정치권 출신이 30% 수준에 불과하다"며 "대부분의 자리를 관료, 직업공무원들이 채웠다. 박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은 '관료들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관료 중심' 국정운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관료 출신들이 장차관에 임명되는 것을 적극 반대해온 황주홍(黃柱洪) 민주당 의원은 "중앙정부 장차관을 비롯해 청와대 수석 자리에 전직 관료들이 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20~30년 동안 편하게 철밥통 자리에서 반질반질한 돌멩이처럼 처신하며 산 사람들이 관료들이다. 그들은 윗사람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못한다"고 했다. 황 의원은 또 "박근혜 대통령의 용인술은 기준은 이념적 동질성과 은원(恩怨), 즉 은혜와 원한 관계"라며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인재풀이 협소해 포용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李源宗) 인하대 초빙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판단과 기준을 일단 믿어야 한다"면서도 "관료가 많으면 창조적 사고가 힘들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포용력, 관용이 있는 사회적 리더십이 필요한데 관료집단은 이 부분에 약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전문가' 김충남 박사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의 말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환경은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사회 여론도 인터넷, SNS를 통해 순식간에 바뀝니다. 관료사회는 급변하는 민심에 즉각 반응하고 대안을 내놓는 데 부족해요. 박근혜 대통령이 정무적 판단을 잘해야 해요. 이번에 문제가 된 기재부의 세제개편안 번복 사례를 봐요. 발표하기 전에 청와대가 정부안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전에 조정했어야 해요. 관료적으로 접근하면 문제가 계속 터질 겁니다."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권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용태(金容兌) 새누리당 의원은 "청와대와 여당 간 의사소통이 안 되다 보니 청와대 비서진 개편 소식을 당에서 사전에 안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이명박 대통령 때 만기친람(萬機親覽·왕이 모든 일을 챙긴다는 의미)을 많이 지적하지 않았나. 지금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정치권 문제는 국회에서 알아서 하라, 이런 식의 모습을 보여 걱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