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믿음의 공동체(엡 2장19-22)
성경본문|엡 2 :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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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 어떤 형편에 처해있습니까?
① 현재 한국 교회의 화두는 ‘한국 교회, 다시 성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 교회, 생존할 것인가?’입니다.
서울의 유수한 교회의 교회학교 학생인원이 10년 전에는 5,000명이었으나 현재 2,500명 정도 모인답니다.
그 이유가 출산율 저하 때문입니까? 아니면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 밤거리를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까?
깊이 각성하지 않으면 우리 세대에 예배당이 텅 빈 현장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② 1997년과 1998년에 ‘한국인의 종교의식과 한국 개신교의 신앙의식’에 대하여 ‘한국갤럽’의 조사 자료입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약 370만 명이 종교간 이동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중에서 개신교인이 천주교나 불교로 종교를 바꾼 비율이 무려 58.4%였습니다.
즉 종교간 이동한 사람 10명 중에 6명의 개신교인이 타종교로 갔다는 얘기입니다.
또 개신교든 천주교든 불교든 간에 종교를 가졌다가 현재 무종교를 표방한 사람이 1,094만 명인데 그 중에서 개신교였던 사람이 73%나 됩니다.
따라서 종교간 이동한 개신교인과 무종교인이 된 개신교인수를 합한 교회를 떠난 사람이 1천만 명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2천 2백여만 명에게 만일 앞으로 종교를 가진다면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지 물었더니 개신교라고 대답한 사람은 겨우 20%에 불과했습니다.
즉 10명 중에 8명은 개신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개신교회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③ 2006년 5월 인구센서스 결과가 나왔습니다.
개신교인을 1,200만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과장된 허수였음이 드러나고, 880만 정도밖에 안 됩니다.
더구나 심각한 현상은 다른 종교 종파는 다 증가했는데 개신교만 14만 명이 감소했습니다.
14만 명이 적은 수입니까?
500명 모이는 교회가 280개가 없어졌다는 얘기입니다.
④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감소되었습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쇠퇴하듯이, 조선에서 유교가 쇠퇴하듯이, 근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인터넷상의 anti-기독교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작금 우리 사회일각에서 노골적이며 적나라한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교회는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엡2: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교회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fellow citizens with God's people)'이며 ’하나님의 권속(members of God's household)'입니다.
①‘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란 성도들의 법적인 지위(status)를 규정한 말씀입니다.
해외여행을 하려면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권에 보면, 그 소지자가 시민인지, 영주권자인지, 노동허가를 받은 자인지, 그리고 여행자인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법적인 지위(status)라고 합니다.
그 지위에 따라서 그 나라의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만일 노동허가를 받지 않고 노동을 하여 돈을 벌 경우에는 처벌을 받고 추방되기도 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이주노동자들의 불법체류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성도들은 앞으로 천국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교인이지만 정말 보기 싫다.’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하루 빨리 그런 불편한 감정을 해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가족’이란 성도들의 혈연적인 관계(relationship)를 규정한 말씀입니다.
가족이란 피를 나눈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만 피를 나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형제’라고 ‘자매’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한 가족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만찬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요즈음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만찬에 쓰는 떡을 특별히 만듭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한 덩어리에서 뜯어서 나눴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1890년 후반 강화도 북단 ‘홍의마을’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작명법을 따라 그것도 ‘돌림자’를 넣어서 개명을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집안이 다르지만 한날 한 시에 세례를 받아 한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믿었으니 모두 한‘一’자를 돌림으로 하여 이름을 바꾸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를 받아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권신일의 아들이 권충일이 되었고, 조카는 권혜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강화 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검정 개’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교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으로는 부자간, 숙질간이라 할지라도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같은 자녀일 뿐이다. 우리는 육적인 질서를 좇기보다는 영적인 질서를 좇기로 했다.”
당시로는 아비와 아들이 같은 돌림자를 쓴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파격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육적인 항렬을 뛰어넘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 그토록 소중했던 것입니다.
2. 교회와 예배당은 어떻게 다릅니까?
교회와 예배당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사람’(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가족)을 말하고,
예배당이란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를 말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집(house)이 없이도 가정(home)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예배당이 없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당은 필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도 있습니다만, 예배당이 없으면 신앙을 담아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릇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물이라 할지라도 보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배당은 우리의 신앙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할 때의 봉헌기도를 잘 음미해보십시오.
예배당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상 8:22-53절은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
② 주의 눈이 보는 곳
③ 기도를 들으시는 곳으로 규정했습니다.
왕상8:29절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솔로몬은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사”를 열한 번이나 반복함으로(28,29, 30,32,34,36,39,43,45,49,52) 성전은 기도응답을 받는 곳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3. 교회는 완전을 향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본문 엡2:21-22절을 보십시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가족도 처음부터 온전하고 완벽한 가족이 없습니다.
시집을 온 신부가 가족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교회는 죄인들이 의인되어 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죄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수두룩합니다.
교인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교인과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상처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주세요?”
그랬더니 오히려 목사님이 “그런 교회가 있으면 나에게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설령 그런 교회를 발견하더라도 자매님은 그 교회에 가지 마십시오. 자매님이 가시면 그 교회의 물이 흐려집니다.” 하더랍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교인인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않는데 어떻게 완전한 교회를 찾느냐는 것이지요.
교인인 우리 자신이 완전치 못한 것처럼 우리들의 모임인 교회도 완전치 못합니다.
교인인 우리 자신이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교회도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비난하기보다는 보듬고 격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교회를 진행형으로 표현했습니다.
21절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아직 공사 중’입니다.
때로는 먼지가 날리고, 때로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 만들어져 갑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또 다른 천국의 모델하우스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머니 되는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늘 아버지는 그 사랑을 고스란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멘.
출 처| 김진홍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