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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천상의 기쁨을 얻는 방법 : “조금만”을 이해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만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또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할 것이고 곧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아기를 가진 엄마는 세상의 모든 기쁨을 끊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새로운 생명을 보며 기뻐합니다.
사실 아기를 낳는 것도 고통이지만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낳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다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예수님의 발현을 보는 기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만나게 되는 예수님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성령은 나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가 볼 수 있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이 기쁨이라 여기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 먹기 위해 살아요.”라고 말하는 ‘로리 스트라이커’란 여자가 있습니다.
나이는 45세이고 몸무게는 107kg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기 3일 전에 결혼 서약을 했습니다.
남편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지겠다고 약속해 줘!”
그녀는 남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트니스 트레이너인 에릭을 만나러 갔습니다.
에릭은 로리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자신이 먼저 당신과 똑같이 살을 찌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건강과 기분까지 망쳐가며 살을 찌웁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을 찌우며 로리를 닮아가려고 하는데 로리는 술을 마시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하지만 로리는 먹는 욕구를 절제하지 못합니다.
몇 주 뒤 망가져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에릭은 지칠 대로 지치고 이 일을 포기하고 싶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몇 발짝만 뛰어도 숨이 차는 그런 몸이 되었습니다.
살을 21.5kg이나 찌워 106kg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둘이 함께 빼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트레이너 에릭과 남편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사력을 다하지만 또 무너지곤 합니다.
그러면 에릭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에 화가 나 로리는 더 먹습니다.
그러다 점점 마음 안에서 남편과의 약속이 더 자신을 절제하게 만들면서 휴가 동안에도 몸무게가 줄었습니다.
결국 남편과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렇게 첫 8주 동안 약 30kg을 감량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제 산도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인생이 달라졌어요.
이 표현을 마지막으로 쓴 게 테드가 병을 진단받았을 때인데 부정적인 의미였죠.
지금은 긍정적인 표현이에요.
몸도 훨씬 가벼워졌고 정신적으로도 좋아졌어요.
개인적인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이 실험에 참여하는 이유가 달라졌어요.
여전히 테드를 위해서지만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누굴 만날지도 모르죠.
그의 이름은 밥이고 좋은 남자예요.
절 행복하게 해주죠.
테드도 좋아할 거예요.
테드가 죽기 전에 대화가 가능할 때 저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짝을 찾으라고 말이죠.”
8개월 동안 목표는 79.5kg이었는데 75kg이 되었습니다.
8개월 만에 처음 그녀를 본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출처: ‘32kg 감랑! 죽은 남편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정’, 유튜브 채널, ‘라이프타임’]
로리는 에릭과 함께 세상의 즐거움을 끊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남편 테드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끊음을 통해 테드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테드가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처럼 살라고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처럼 살면서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뀐 자신을 보면서 그분을 만나고 기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과 죄를 이기고 당신께 나아오게 하는 방식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다른 이들로부터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흥분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 견디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통, 죽음, 병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어려움은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도구라고 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참 행복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자신 안에서 우리를 위해 박해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을 닮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세상의 행복을 거슬러봅시다.
남이 먹을 때 굶고, 남이 편안함을 찾을 때 깨어 있고, 남이 일하지 않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남이 기도하지 않을 때 성당으로 가봅시다.
분명 그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을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 모를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남이 밥을 먹을 때 굶었고, 남이 잘 때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저에게 말씀하셨고 그 기쁨은 지금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쁨을 거스르지 않고 천상의 기쁨을 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천상의 기쁨을 얻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성령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기쁨을 역행하면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6절)
다시 본다는 것, 단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다는 것,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떠나간,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배우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나 가족들이 생각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런데 오늘따라 스승님께서 작별을 예고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조금 있으면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당혹해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 말씀이 한없이 따뜻하고 희망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0절)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재 예고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은 물론 재산, 청춘까지 포기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의미요 희망, 전부였습니다.
그런 스승님이 떠나가신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믿기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제자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버릴지언정.
결국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당신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꿈에 그리던 부활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순간 제자들은 세상 그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는 완전한 기쁨, 충만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올라오는 기쁨, 이 세상 그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곧 영원한 기쁨이며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가 그간 겪어온 모든 혼란과 유혹, 고통과 슬픔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임박설은 초세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고민을 던져주는 하나의 도전이요 과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지도자들이 이 재림 임박설을 남용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멸망으로 몰고 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그와 결부된 종말론적 미래는 언제나 개방적입니다.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으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령을 통해 지금 이 순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의 말씀과 전례, 성사(聖事)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재림은 지속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해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 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지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우리 앞에 놓인 힘든 일은 그만큼 큰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스승과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통이 끝난 뒤 반드시 새로운 기쁨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 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바람처럼 성령처럼>
오늘 사도행전은 복음 선포가 반대를 받자 바오로 사도가 아주 미련 없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발의 먼지는 왜 터는 겁니까?
그저 집착이든 미련이든 분노든 그런 것들이 내게 있으면 그 감정들을 털어버리면 되는데 왜 굳이 발의 먼지를 터는 동작을 하는 겁니까?
동작이 감정 정리에도 도움이 되기에 그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정의 정리를 감정에다만 맡기면, 그 감정이 옅다면 모를까 그 감정을 털어버리기 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감정에 다른 감정까지 덧씌우기 십상이지요.
그러므로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면 감정 해소를 위해 의지와 이성까지 협력해야 할 것이며 발의 먼지를 터는 동작은 그런 의지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동작보다 더 유효한 것이 행동 또는 행위입니다.
이는 수도자들이 세속을 단호하게 끊겠다는 표시로 삭발의 행위를 하거나 더 나아가서 삭발을 예절로 하는 것처럼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떨쳐버리게 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감정들을 털어버림은 물론 사람들까지 확실하게 지워버립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월 피정을 걷는 피정으로 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와 같은 환경에서 피정할 경우 생각이나 감정을 떨쳐버리기 힘들고 그래서 환경을 바꾸기 위해 다른 장소로 가는데 그럴지라도 자리만 옮겨 똑같은 고민을 계속 이어서 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면 걸으면서 새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것이 눈을 통해 제 안으로 들어오면 제 안에 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빠져나가면서 감정의 정화가 이뤄지고 생각이 새로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심기일전하거나 우리 안에서 안 좋은 것을 빼내는 가장 좋고도 적극적인 방법은 밀어내기 방식 곧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안에 있던 옛것을 밀어내는 방식인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정신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정신이 우리에게 있으면 바오로처럼 과감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 갈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열정으로 새로운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런 미래지향적인 정신이 없을 경우, 이 과감성이 부족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 자리에서 미적댈 것이며 악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같은 사람들과 계속 씨름할 것입니다.
이 미래지향적인 정신의 다른 이름, 신앙적인 이름이 바로 주님의 영이요 성령입니다.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데 성령께서 바로 그러시다고 하셨습니다.
미래지향적인 정신과 성령은 미적대지 않습니다.
자리에 연연하거나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리뿐 아니라 악감정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지 감정에 이끌리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지 욕심에 이끌리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기에 오늘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그 근심에도 머물지 않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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