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자아의 비밀 (삼상 14:1-3)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이 시간에 “새 자아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새 자아란 변화 받은 성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옛 자아가 자행자지하며 내 뜻대로 사는 삶이라면, 새 자아는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단은 새 자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나단의 이름은 '여호와가 주시는 자', '여호와가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삼상10:9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요나단의 이름부터 새 자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바로 새 마음이고, 새 자아입니다.
구체적으로 새 자아란 어떤 것일까요?
1. 새 자아는 자기를 포기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입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잘못으로 왕이 되지 못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윗을 돕고 받드는 천사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즉 요나단은 장차 기울어 가는 사울 왕조의 왕세자이고, 다윗은 장차 세워질 찬란한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시기하거나 대항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셔서 기름 부어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된 마음은 나를 내려놓고 말씀대로 하는 사람이요, 자기 분수를 아는 마음입니다. 내가 왕이 아닙니다. 자아는 내가 왕이 되려는 것이 특징인데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중심입니다.
성경에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의 사람, 주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옛 자아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지만 아직 내 중심의 사람입니다. 아직 옛 자아의 사람입니다. 마지막 신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새 자아의 사람으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는데 이 고백이 새 자아로 사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새 자아의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고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2. 새 자아는 예수님과 코드가 맞는 사람입니다.
본문 삼상 14장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과 단둘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면서 블레셋을 치러가는 내용입니다. 6절에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동역하는 믿음과 용기의 사람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도 그렇게 믿음의 코드가 맞아서입니다. 삼상18:1-2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 것은 다윗이 목숨 걸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골리앗과 싸운 것을 보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코드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 자아는 예수님과 코드가 같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삽니다. 그리고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여 자기가 입었던 왕자복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다윗에게 주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과 열심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걸 사울이 알고 어떻게 했습니까? 삼상20:30-31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하면서 사울이 요나단까지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도 요나단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코드가 맞은 새 자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새 자아는 나는 온전히 죽고 주님만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삼상 31장을 보면 길보아산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사울은 물론 요나단이 전사합니다. 먼저 나는 온전히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요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겸손이요 새 자아의 모습입니다.
4. 새 자아는 주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삼하4:4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요나단이 어린 아들 하나를 두고 떠났는데 므비보셋은 두 발 다 쓰지 못하는 장애자였습니다.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 선량한 요나단도 죽고 그 자손도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보면 안 됐지만 영적으로 보면 새 자아의 완성적 모습입니다.
요나단이 남긴 므비보셋은 마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된 것을 연상시킵니다. 창32:26에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며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새 자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자아가 다른 무엇과 연합되면 10배 100배로 어려워집니다. 가령 이단사상에 물들었다면 이단 사상에서 헤어나오지 않고는 그가 순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욕심 죄 시험 감정 거짓 잘못된 지식 등 이런 것과 결합되어 있을 때 이걸 처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 자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기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대속사역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따를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맘대로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나 다시 사신 주님을 본받아 더 겸손하고, 더 복종하고, 더 죽고,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새 자아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