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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프랑스 혁명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들끓게 했던 프랑스혁명에 대해 공부할까 합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발발과정, 그리고 혁명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등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 되겠는데요. 프랑스혁명이 오늘의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을 표방하며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프랑스혁명. 프랑스혁명은 절대주의적인 구체제를 타도하려 했던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그림1-“구체제의 악을 분쇄하라는 명령서를 헤라클레스에게 전달하는 미네르바 여신")
구체제의 악을 분쇄하는 것을 상징하는 "혁명의 알레고리". 혁명기에는 이러한 상징적인 그림들이 유행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서 당시의 낡은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완성시킨 세계사의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이 근대사회를 정립시키는 중요한 분수령으로서 19세기 유럽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프랑스혁명이 반봉건적이고 반귀족적인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중요한 그러나 미완의 과제를 지구상의 전 인류에게 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프랑스혁명을 보는 입장은 결코 일치된 것이 아닙니다. 종래에는 프랑스 혁명을 반봉건적, 반귀족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정통주의적인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견해를 반박하고 정치 혁명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축소시키려하는 수정주의적인 해석이 정통파 해석의 입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에 하나의 사회, 경제적인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귀족과 부르주아는 오히려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동질에 입각하여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혁명은 민중이 개입함에 따라 우연히 나타나게 난 하나의 일탈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우연한 사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라 혁명 이전의 체제였던 프랑스의 구체제 내지 절대군주제를 보다 심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연구하려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무튼 프랑스혁명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분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주로 정통파의 해석에 기반을 두었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를 다소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프랑스혁명의 원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구체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 즉 구체제의 사회에는 아직도 근대적이지 못한 요소가 잔재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한마디로 절대주의적인 구체제에 있었던 건데요. 이 구체제의 모순은 무엇보다도 신분제로 요약됩니다. 절대주의사회의 구조는 여전히 봉건적인 틀을 유지하여 각 신분간의 구분이 뚜렷했던 거죠. 그럼, 그 체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까요?
(1) 신분제 : 구체제의 사회구성
제1, 제2, 그리고 제3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던 신분제는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성직자인 제1신분은 당시 2700만 프랑스 인구 중에서 10만 명을 이루며 막강한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생활 이외에 교육, 구빈 사업을 독점했고 언론 및 출판을 통제하면서 국민들의 정신생활마저 통제했던 것입니다. 또한 프랑스 전 국토의 10% 정도가 교회소유였던 만큼 고위성직자들은 귀족들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2신분은 귀족집단으로서 전 국토의 20%를 소유하며 면세특권 뿐 아니라 제반 명예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인구는 약 40만 명에 달했는데 구귀족과 신귀족으로 구분됩니다. 구귀족은 중세 기사들의 후예로 출생과 혈통에 의해서 귀족의 신분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귀족은 관직과 재산을 통하여 귀족신분으로 상승한 사람들로 원래 부르주아 출신입니다. 구귀족의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했던 반면, 신귀족들은 재력과 교양을 통하여 왕의 측근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절대주의 초기, 양 귀족집단의 알력이 심각했으나 절대주의체제가 쇠퇴해 가던 18세기 중엽 이후 이들은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왕권에 맞서면서 귀족집단을 폐쇄화하고 그 특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는 귀족들의 사회, 경제적 몰락을 만회하려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3신분은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한 나머지 프랑스인 모두를 지칭합니다. 사실, 제3신분의 구성은 대부호에서 걸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합니다. 최상층에는 이른바 대부르주아로서 거의 귀족에 가까운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귀족의 작위를 받고자 했는데 구체제 말기에 귀족으로 상승하는 통로가 제한되면서 불만과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제 3신분은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채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전담하고 있었지만, 그 상층부에는 영지나 관직 등을 통해서 제반 봉건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시 제3신분의 대다수를 이룬 집단은 단연 서민이었습니다. 도시 민중은 흔히 ‘상퀼로트’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중세도시장인들의 후예로서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은 소유와 자본의 집중에 대해서 큰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고통도 컸는데 이런 이유로 도시대중들의 폭동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2) 구체제의 모순과 농민의 반란
도시의 서민들이 이런 불만을 가졌던 것처럼 농촌의 제3신분인 농민들의 불만도 매우 컸습니다. 프랑스혁명 전야에 프랑스의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 국토의 1/3 이상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부유한 자영농으로부터 생계마저 힘든 영세자영농, 소작농, 농업노동자 등 그 구성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으로 존속되고 있는 봉건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이미 농노신분으로부터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주들은 토지의 원래 소유자였다는 이유로 상급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제반 부담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또 농민들은 국가재정에 대하여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프랑스는 중앙집권화가 미비하여 지역마다 과세율이 달랐습니다. 지방삼부회가 남아있어 귀족들의 발언권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과세율이 다소 낮았으며,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과세율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이러저러한 부담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생활은 몹시 힘들었고 설사 자영농이라 하더라도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 소작 또는 날품팔이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살기 어려운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유랑의 길을 떠나거나 구걸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1, 2신분이 사회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3신분의 시민계급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성장했다는 겁니다. 구체제의 사회구조는 봉건귀족의 특권을 옹호하며 자본주의외 시민의 성장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는 등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거죠. 여기에 절대왕정의 행정적 무능력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오랫동안 만성적인 적자로 허덕이던 프랑스 재정이 결국, 결정적 위기에 도달한 것이지요.
(3) 재정위기와 삼부회의 소집
1788년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누적되었던 구체제의 사회모순과 절대왕정의 행정적 무능력이 결정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절대왕정체제는 왕권의 유지를 위하여 많은 비용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절대주의국가였던 프랑스는 이러한 경비를 국가의 세금 뿐 아니라 작위 및 관직의 판매대금, 그리고 국가부채 등으로 조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프랑스 왕실은 더 이상 이러한 기능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워낙 부채가 많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1787년 2월 국왕 루이16세는 이러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특권계급에게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동의를 얻고자 명사회를 소집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삼부회의 소집은 곧 절대왕정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삼부회는 프랑스 왕권이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폐기해 버린 신분제 의회였으나, 이제 귀족들의 주장대로 다시 소집하면서 왕실 스스로 절대권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1789년 5월에 소집된 삼부회는 1신분 성직자대표 294인, 2신분 귀족대표 270인, 그리고 3신분의 평민대표 578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삼부회는 소집초기부터 1, 2신분과 3신분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차이를 보였습니다. 1, 2신분은 신분별 표결을 주장한 데 비해, 3신분은 머릿수 표결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4) 삼부회의 결렬과 테니스코트선언
표결을 둘러싼 신분별 갈등은 미래의 프랑스 정치체제에 대한 노선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분별 표결을 주장했던 입장은 귀족과 교회 즉 봉건집단에 의해서 사회가 통치되고 지배되며 또한 권리가 신분별로 구분되던 중세의 봉건적 체제로 복귀하자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머릿수 표결을 주장했던 제3신분은 신분과는 상관없이 재산과 교양에 입각하여 실제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 전체의 의견을 대표해야 한다는 일종의 영국적인 대의제 노선을 지향했지요.
이후 삼부회의 지속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1789년 6월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따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여 머릿수 표결이 관철되기까지는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하게 됩니다.
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집단이 서로 갈등과 반목을 보이며 분열하게 된 것이지요. 이 결과 하층민중의 움직임이 확대되었습니다. 흉작과 식량난에 허덕이던 하층민들은 이미 삼부회의 소집에 즈음해 정치적 동원의 양상까지 보였던 겁니다.
(5) 바스티유의 함락과 대공포
1788년에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흉작은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했고 1789년 봄까지 농촌과 도시에 걸쳐서 식량소요가 나타났습니다. 농민들은 영주의 성을 습격하여 식량을 탈취하는가 하면, 도시민들은 빵 가게나 곡물상의 가게를 습격하여 탈취한 식량을 나름대로 정당하게 생각된 가격으로 판매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의 소요는 여느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삼부회의 소집이 결정된 후 프랑스 전역은 삼부회에 보낼 대표를 선출하고 제출할 진정서를 작성하는 등 민중이 보다 자주 모이고 부르주아지식인과 접촉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평소의 식량 폭동이나 징세 폭동의 양상을 넘어서서 정치적 동원이 이루어지는 양상이 뚜렷해졌습니다.
삼부회의 결렬과 함께 루이16세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하여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파리의 민중은 당시 절대왕정에 의한 압제와 전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습니다. 이것이 1789년 7월14일 밤에 일어난 사건으로 프랑스인들은 이 날을 혁명기념일로 기리고 있습니다.
민중의 개입은 도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촌에서는 7-8월의 여름 동안 이른바 ‘대공포’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혁명을 분쇄하려 한다는 ‘귀족계급의 음모’에 대한 의구심과 ‘비적떼에 대한 공포’가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프랑스 곳곳에서 무장한 농민들이 영주의 성을 공격하고 귀족들의 봉건특권을 증빙하는 문서들을 소각시켰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민중이 누구를 선택했는가가 분명해졌고, 주도권을 확보한 국민의회는 혁명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