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신학에서의 부활이해 - 최인식(서울신대 교수)
Ⅰ. 여는말
현대신학의 흐름을 간명히 말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급진적 신학”이다. 이 신학은 모든 종류의 유신론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신 이해와 급기야는 “하나님”이란 말 자체까지도 제거하려 시도한다. 또 한편으로는 “급진적 신학”에 맞서서 “말씀의 신학”과 “역사의 신학”이 서로의 신학적 연대를 위하여 간격을 좁혀나가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와같은 예를 에벨링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상이점들에서 찾아볼 수있다. 그것들은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대립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게스트리히가 지적한 것처럼 에벨링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에 판넨베르크는 헤겔의 전통에 더욱 더 치우친다는 것 뿐이다. 우리는 이 양자 사이의 대립과 연대 속에서 현대신학의 “숨겨진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판넨베르크와 에벨링의 부활이해를 다루는 것은 무신론적 과학주의와 다원주의적 종교신학 그리고 집단적 신비주의란 현대의 신학적 난기류를 뚫고 나가는데 요청되는 하나의 작업 즉 말씀과 신앙의 근거를 확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판넨베르크외 부활이해는 1964년에 나온 기독론 개요(61-112)이래로 여러 방향으로 잘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자료보다는 지난 해 그가 신학적 완성으로 내어 놓은 조직신학 제 2권에서 논의하고 있는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적 상황에서 보다 일찍 소개되어 논의되어야 했을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학이 정당히 평가되기를 바라면서 그가 1979년에 내어놓은 기독교신앙 교의학 제 2권의 부활논의를 보다 상세히 소개할 것이다.
Ⅱ. 판넨베르크의 부활이해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이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의 근원이며 초대 기독교가 형성한 기독론 역사의 출발점이라 본다. 그러나 그가 이 부활사건에서 강조하는 점은 새롭고도 영원한 생명의 발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에 있다. 즉 나사렛 예수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다가 로마인의 손에 처형당했으나 하나님의 일으키심을 받았고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동시에 메시야가 되었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지만 결코 독립적 사건이 아니고 오히려 이 사건으로부터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거꾸로 접근해 갈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같은 입장은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가 한 방향으로만 치우친 불트만이나 W. 퀸네트의 경우를 극복한 것이 될 수 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십자가의 의미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퀸네트는 구원의 근거로서 십자가보다는 부활에 훨씬 더 비중을 둔다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에 비해 근본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부활사건은 정죄당하고 처형된 예수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의로움이 인정된 사건 곧 성령으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은 사건이다.(딤전3:16 롬1:4과 4:25 비교하라) 이로 말미암아 예수에 의해 긴급히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사역 속에서 그리고 이 사신을 믿는 자들에게 이미 개시되었다.라는 주장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신을 받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의 문제는 곧 예수의 인격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부활사건은 그것이 단지 어떤 의미를 알려주는 것으로만 이해될 때 즉 부활사건이 이미 예수의 지상 생애나 예수의 십자가에서 의미적으로 나타났다고 했을 때 부활은 맥없이 터무니없는 일이 되고 만다.
판넨베르크에게는 무엇보다도 부활로 말미암아 이 이전 예수의 생애와 그와 하나님과 관련된 인격이 결정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활은 먼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과 실제적 내용을 갖는 사건(Ereiguis)이어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의 사실성과 관련하여 부활한 예수의 현현과 빈 무덤의 발견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스도교 사신에 의해 주장되는 예수부활의 사성의 신뢰부여를 위해 제자들에게 나타난 부활한 자의 현현사건에 대한 근대 그리스도교의 증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빈 무덤 발견과 결정적으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한 자의 현현에 대한 보도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있어서 그 연대와 역사적 가치성이 상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체험한 현현사건과 이보다 뒤에 나온 복음서 보도 사이의 차이점이다. 바울에게는 하늘에서 복음서에는 땅 위에 걸어다니는 자로 현현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바울의 경험을 보다 원초적 사건임을 두가지 이유로 받아 들인다.
첫째 신약성서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증언에 의할 때 부활과 예수의 승천은 불가분리의 사건이어서 부활한 자의 자기현시는 하늘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의 제자들이 주님 자신으로부터 바울이 사도직을 부여받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울이 강력히 주장하는 바대로 부활한 자의 현현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이는 곧 바울이 경험한 부활의 주님과 원사도들이 경험한 부활의 주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말한다고 하는 점이다.
다음으로 빈 무덤에 대해서는불트만은 후기 헬라적 전승이라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캄펜하우젠 브라운 풀러 등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면서 빈 무덤전승은 예루살렘지역의 전통으로서 수난사의 원래적 부분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빈무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페쉬의 주장 을 영국 옥스포드의 논리학자 두메트의 이론을 근거로 거부한다.
페쉬의 주장에 따르면 빈 무덤의 전승은 “제3일”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수부활의 신앙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신이 무덤에 아직 있다는 생각을 부활신앙은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 전승은 이미 주어진 사실의 “무대장치”를 위한 “구성적 설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두메트에 따르면 빈 무덤에 대한 내용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에서 이미 사실임이 인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논쟁의 초점이 무덤이 비어있는지의 여부가 아니고 왜 비어있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즉 사도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만하기 위해 시신을 훔쳤기 때문인가가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판넨베르크는 이와같은 빈 무덤의 발견에 초대 그리스도교가 부활신앙의 근거를 설정하지 않고 부활한 자의 현현에 두고 있을지라도 부활사건에 대한 총체성있는 증언을 위해 빈 무덤 전승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전승은 부활 한자의 현현이 단순한 환각현상이란 추측을 불가능케 한다. 둘째 부활절 시신이 영적인 것으로 증발해 버리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예수의 지상적 육체가 새로운 생명의 종말론적 실재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빈 무덤 전승은 부활절 신앙의 부산물로서 설명될 수 없고 또한 현현사건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록 이 전승이 부활신앙의 빛 아래서 시작되었어도 이 빈 무덤의 전승은 현현사건에서 경험된 예수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와 동일한 자인 것을 증명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부활의 역사성 주장에 있어서 판넨베르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관심은 전혀 새로운 종말론적 생명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죽음이 실제도 극복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사실성은 이 세상이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 이르기까지 논쟁의 불씨로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그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실재성 이해가 일반화되어 정의되지 않은 가운데 이 세상에 근거한 실재성 이해와 대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평가란 평가자가 어떤 실재이해에 근거해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실재이해의 성격이 부활의 역사성 문제의 관건이라 본 것이다.
이와같이 실재이해의 성격이 부활의 역사성 문제를 규정하는 전제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판넨베르크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희망이야말로 죽음에서 영생을 향한 부활의 실재의 뿌리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그는 몇 가지의 논증을 제시한다.
첫째 예수의 부활(Auferstehung Jesu)이란 말의 형태는 메타퍼(Metapher; 은유)이다. “깨워 일으키다” 또는 “일어나다”라는 은유적 사용에서 이미 또 다른 은유 즉 죽음을 잠으로 파악하는 유대인들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의 묵시문서에서나 예레미야(57:39) 시편(13:4) 욥기(3:13, 14:12)에서는 죽음의 잠에서 일어난다는 사상이 관련되어 있어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은 단순히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라 본다. 이와같이 예수의 “일어남”에도 같은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죽음의 잠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듯이 여기에서 일어난 결과로서의 생명 역시 은유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곧 새로운 종말론적 생명(고후4:10, 5:4 롬5:10)이자, 종말론적 희망의 내용인 바 예수에게서는 그의 부활과 더불어 현시화된 것이다.
둘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활과 생명의 관계는 크게 두 차원이 있는데 그 하나는 다니엘서에서와 같이 모든 자가 심판에 임하기 위해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다같이 부활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의인과 순교자들이 영생을 얻는 길로서의 부활사상이다.(사26:19, 겔39:1-14) 이와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부활은 지상적 생명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이다.
셋째는 생명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는 전달가능성을 부활사신에 대한 전이해와 전달가능성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생명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기다림의 현실성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현현사건에서 만난 자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과 같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본다. 즉 그들이 만난 것은 죽은 자의 영혼(눅 22:37)이 아니고 또한 지상의 삶으로 복귀한 그런 자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의 전혀 새로운 종말론적인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을 드러내 보인 부활생명의 실재성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실재이해의 기본틀이 없었으면 확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희망으로서 부활생명이란 유대인의 실재이해의 틀이 부활절 현현사건에서 체험한 예수의 실재성에 의해 현저한 변화를 띄게 되었다고 전제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관련해서 영생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예수의 생애와 인격이 하나님에 의하여 칭의와 확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메시야”와 “인자”로서 들림을 받게 되었는데 유대인의 전통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인간이 승천하는 일은 알고 있어도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것은 없다. 또한 종말론적 부활이 이 세상의 종국 이전에 개별적으로 있을 것이라고는 유대인들은 예상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현재화된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의인의 부활과 예수와 연합된 자들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살아있다. 즉 예수부활의 실재적 내용은 세상끝에 일어날 죽은 자의 부활 시에 일어나리라고 예상하는 일반적 기다림에 의해 해소될 수 없다. 끝으로 예수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신은 그 사건의 궁극적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죽은 자의 종말론적 부활사상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예수부활이해는 아직 미완성의 인간세계사의 선취(Vowegnahme)에 근거한 실재성 이해와 연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부활사신의 선취적 구조에 대한 통찰은 동시에 예수부활 사건이 곧 종말론적 구원의 선취임을 보게 한다. 이는 마치 예수의 선포와 사역 속에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선취된 것과 같은 유비성이 있다. 예수의 생애가 지니는 선취적 특징은 그리스도교의 부활사신에 부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사신은 과거역사 속에서 발생한 특별한 사건의 선포로써 특징지워지나 미래에 이루어질 인간세계의 변화와 완성에 대한 일반성을 이미 전제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논증에 이어 유대인의 전통을 넘어 전 인류를 위한 구원의 희망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죽은 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부활대망이 최소한 그 윤곽만이라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일반성이 주장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강조한다.
Ⅲ. 에벨링의 부활이해
에벨링에게서 그리스도 신앙이란 예수를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그에게서 사실(Faktum)보다 인격(Person)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양자는 분가분리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에벨링은 부활의 신학적 설명을 위해서 두 가지의 문제를 끝까지 견지한다. 첫째는 과거의 사실에 비추어 한 인간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2천년 전에 살았던 한 개인이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인격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 질문에 대해서는 부활절 사건을 두번째 질문은 승천사건을 그리스도의 현존의 관점에서 다룸으로 부활이해 문제의 신학적 변증을 시도한다. 이 글에서는 첫 질문에 제한하여 그의 부활이해를 고찰한다.
1. 부활사건에 대한 교의학의 과제
역사학이 예수의 부활문제를 다룰 때 “실재성(Wirklichkeit; Realiry)"을 묻는다면 교의학(Dogmatik)은 “당위성”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교의학이 내세우는 예수부활의 실재성이란 “증명될 수 없는 개별적 신앙의 주장”인 하나의 “도그마”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벨링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실재성 문제가 역사학적 관점과 아울러 현재적 지평에서 설명되고 증명됨으로써 교의학은 보다 긍정적 해결점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에벨링에게는 역사학과 교의학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고 보완적 관계인 셈이다.
부활사건에 대한 교의학적 과제의 특징을 에벨링은 대체로 세가지로 본다.
첫째 부활논증은 예를 들면 창조자 십자가 사건 등과 같은 신앙논의와 모순없이 관계맺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세속적 차원의 이해와도 관계를 맺어주는 작업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로 간의 모순되어 보이는 역설이 있을 때 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설을 신앙과 관련해서 연속성을 찾아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학적 과제와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부활의 역사적 전승에 현재의 부활논증이 기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전승을 교의학의 차원에서 고려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에 의해서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에벨링은 최소한 두 가지의 부활전승 접근방법을 거부함으로써 그 기준을 간접적으로 명시한다. 즉 성서문자주의적 방법과 역사주의적 방법에 대한 거부를 말한다. 이에 전자와는 달리 교의학적 바른 자세는 성서의 전승과 증언을 역사적이고 내용적인 차이점들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본문자료들의 다양성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성 아래에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후자의 경우와 달리 교의학적 방법은 역사성을 수용하면서도 (그러나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면서)선험적이란 점이 중요하다.
셋째 부활의 역사적 전승에 근거를 두고 부활논증을 다루는 교의학적 과제는 역사학적 과제를 반복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에벨링에게서 역사학적 지평에서 나온 경험은 부활논증을 위한 신앙의 언어 속에서 용해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사신은 세속적 경험에 강력한 거부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에벨링은 기독교의 신앙의 관점에서 일반적 경험론의 이해와는 정반대로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요 가시관을 쓴 자가 참된 왕이요 죽은 자가 참으로 살아 있는 자임을 선언하는 것은 교의학적 신앙의 차원에서 가능한 것임을 그래서 역사학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2. 부활의 역사성 : 빈 무덤의 문제
부활의 역사성이란 문제에서 에벨링의 전제는 확정적 사실과 전승된 본문과는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에벨링은 역사학적 견지에서 볼 때 부활사건의 경과를 정확성을 갖고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서본문이 연대기적으로 제시하는 총체적 내용이 역사학적으로 인정되기 어려울지라도 바로 이점이 부여하는 적극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에벨링은 강조한다. 즉 역사학적으로 의미있는 것은 개별적인 사건발생이 아니라 사건들의 전체적 모습이고 부활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부활한 자에 대한 신앙을 형성시킨 과정들이라고 본다.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 에벨링은 한 예를 들어 입증하려 한다. 복음서 전승이 역사적 스토리 구성에 대한 명백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나온 위 복음전승과는 현저한 차이가 날 정도로 부활 자체의 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다 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는가를 보여 주는 한 예가 된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예수가 부활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의 결여로 취급하여 부활의 역사성 논의를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에벨링의 확신인 듯하다.
그러나 에벨링의 관찰은 한걸음 더 나아가 빈 무덤에 대한 보도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중요한 근거로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부활신앙의 근거는 지금 다른 차원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빈 무덤의 발견을 부활사건과 일차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을 두가지 차원에서 어렵게 만들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첫째는 부활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동인이 신앙의 내적 근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부활신앙이 특정의 물질적인 것과 연계됨으로써 부활신앙에 대한 현재적 접근이나 역사학적으로 바른 접근을 완전히 막아버리고마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활로 인해 그 결과 무덤이 비워졌을진데 에벨링의 이해로서는 빈 무덤은 부활의 근거가 아니라 부활신앙의 결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의 전승이 그 내용면에 있어서 역사학적 증빙근거를 충분히 못갖고 있을 경우에도 교의학적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논의는 순수한 비유적 이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즉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ontos egerthe, 눅24:34)"라는 존재론적 주장은 결코 비유적 단계의 교훈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학적 차원에서 해명될 수 있는 주장이라 본다. 단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이다. 첫째 부활논의에 적합한 실재성 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노력이 전승 안의 사고유형을 고려하여 충분히 이루어질 때이고 둘째 자신의 억측으로 된 자명성에 대해 비평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때 부활의 존재론적 주장이 역사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3. 부활신앙의 형성 : 현현사건
빈 무덤을 기초로 한 부활의 역사적 해명은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에벨링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활에 대한 교의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부활 자체에 역사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거나 역사학적 과정으로서의 제 단계가 부활사건의 전체적 모습과 합일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활한 자의 현현(顯現; Erscheinung)에 대한 보도로써 충분히 신뢰할만한 근거에 접할 수 있다고 에벨링은 확신한다. 여기에서 에벨링이 제시하는 중요한 역사학적 자료의 본문은 고리도전서 15장 37절이다.
현현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에벨링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로 중요하다.
첫째 이 사건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렸던 자를 다시 인식하는 경험을 갖게 한다. 즉 현현한 자가 바로 예수임을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이 예수는 더 이상 과거의 인물이 아닌 미래를 보여주는 현재의 예수임을 경험한다.
둘째 전에 왜곡되고 거부되었던 일들이 이해되고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다른 말로 신앙과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갖게 되는 사건이 된다.
셋째 교회가 설립되는 원초적 계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현현사건 자체가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은 예수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가 됨을 보여준다.
에벨링에게 각별히 중요한 대전제는 부활절의 핵심적 내용은 부활을 경험한자들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이다. 즉 배척당했던 자가 환영받는 자로 바뀌고 비천하게 낮아졌던 자가 영광스럽게 들림을 받은 자가되고 죽었던 자가 살아난 자가 되고 과거의 인물이 다시 올 미래의 인물이 되고 없어졌던 자가 현재 함께 하는자로 변한 사건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네마디로 압축하면 “죽임을 당하여 장사지낸 바 되었으나 부활하여 나타났다.” 이것은 다시 “죽으셨다가 부활하였다.”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무덤으로 증명되고, 죽음의 부록(Appendix)이 무덤에 장사지냄이라면 현현은 예수부활의 부록이 된다. 그러므로 결정적 사건자체는 죽음과 부활이고 이 사건의 통지는 무덤과 현현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의 경우 이 사건은 공개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성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한”사건인 것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그 의미는 감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성경에 의하여 연역되는 사건의 의미의 익명성은 부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현현사건에서 알려지긴 했어도 오히려 현현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선포의 행위 가운데 공개적으로 분명해졌다. 이 사실은 에벨링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현현자체는 일종의 환영(Gespenst )이었다고 주장될 수도 있고 또한 현현의 사실을 구체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난점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현사건이 구두전승으로 선포의 행위도 조금도 손색없이 경험이 성경에 의하여 의미있고 명확한 언어에 부합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같은 논증을 근거로 에벨링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정검한다. 예수에게 발생했던 사건들은 성경에 의해 언어화―(지지)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언어는 소급하여 성경자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므로 에벨링에게 있어서 부활논의의 핵심은 개개인의 독립된 현현사건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과 연관된 성경의 증언 그리고 그 결과 십자가에 달린 자를 주님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고리도전서 15장 37절 뿐만 아니라 복음서들의 현현사건 보도에도 나타나며 더 나아가 신약성경 전체에 의해 확증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에벨링은 이로써 부활에 관한 모든 논의가 확정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니라 본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된 사실이나 현현사건이 죽은 자의 부활을 고지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자명성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에벨링은 적합한 해석학적 노력이 요청됨을 피력한다.
4. 부활 해석:십자가와 부활
“그가 부활했다.”라는 표현은 죽음을 전제한 지상적 삶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죽음과는 관계없는 삶의 차원으로 나아간 것이라 에벨링은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부활의 삶은 일반화시켜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만일 일반화시킨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가사설과 같은 것으로 거부당하고 말 것이다. 에벨링의 판단에 따르면 이러한 일반적 부활이해에는 구약성경과 묵시록적 사상에 정초하고 있는 부활사상의 순진한 의미가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벨링은 죽은 자의 부활사상은 본래적으로 종교적인 것이고 신개념과의 관련 아래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런 범위에서만 부활논의는 본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부활해석도 이런 관점에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같은 시작에서 우선적으로 부활의 삶 또는 생명은 이 지상적 삶의 연장이 아닌 완전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관점에서 죽음이란 이 세상적 삶과의 분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라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부활의 삶도 하나님과 더불어 계속되는 삶을 말한다.
부활해석에 있어서 에벨링의 집요한 관심은 예수가 하나님과 관련성 속에서 과연 어떠한 존재였고 지금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있다. 이 점을 밝히는 일이야 말로 부활한 자의 현현사건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해석해 내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특히 에벨링은 부활사건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다른 한편 에벨링에게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 해명의 기본적 관건은 십자가 사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죽음이 현시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죽은 예수가 함께 하나의 전체적 통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바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관점에서 예수와 하나님과의 합일성을 주장하거나 또는 하나님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마22:32)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신적 존재성을 명백히 하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 하나님이심이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의를 일반적 진리의 체계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본다. 그래서 에벨링은 덧붙이기를 그것은 오히려 기적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다. 즉 신개념에서 비롯되는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부활해석의 초점으로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에벨링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즉 십자가에 달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은 죽은 자의 부활로써 확인되었고 이 부활사건은 예수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자명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과 연관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양면적 행동양식 즉 내어주고 받아들이며 죽이고 살리는 행동의 상관성 안에서 부활사건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한 신적 사건이라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일체성이 간주될 때 비로소 부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적 사건으로 해석함이 가능해진다 에벨링은 이 사실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들리우다”(요3:14, 8:28, 12, 32, 34)라는 말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십자가의 들림과 부활의 들림이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부활의 밀접한 관련성 문제에 있어서 에벨링이 마지막으로 주의를 기울려 해석하려는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 13절이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니라” 여기에서 에벨링은 바울이 부활에 대한 세속적 관점의 전제 위에 예수의 부활논증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예수부활 신앙에서 나온 결과로 보고 있다.
에벨링에 따르면 고린도의 영지주의자들도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죽음이 없는 영적 부활만을 주장하는 데에 문제가 있음을 바울이 지적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고린도 적대자들과의 근본적 차이는 부활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에벨링은 단호히 십자가의 신학은 부활의 유토피아적 원리를 극복하고 죽은 자의 부활은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인 차원에서 참된 의미가 제대로 드러남을 역설한다.
결국 에벨링의 부활해석에 대한 주요 논지는 예수에게서 실현된 참된 생명이 십자가의 죽음없이 생각할 수 없는 생명이듯 영원한 생명 역시 시간선상의 사망함이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Ⅳ. 마무리말씀과 신앙
판넨베르크에게서 부활사건의 의의는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소급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접근해 나갈 수 있도록 한 사건임에 있다. 이와같은 의의가 진정으로 확보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활이 실제적 사건임이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임을 밝히기 위해 판넨베르크에게 중요한 전승은 빈무덤의 발견이다. 빈 무덤의 역사성 평가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평가자의 실재이해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증거물을 근거로 한 보편사적 실재이해 위에 부활의 역사성을 수립하려 하지만 부활의 빛에서 나타난 실재성과 일반적 실재성은 대립의 관계임을 인정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대인의 종말론적 희망이 제공하는 실재이해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부활논의의 핵심은 빈 무덤의 역사성 문제가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의 논의의 마지막에 가서 종말론적 실재이해의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종말론적 실재이해가 보편사적 실재이해와 대립적 관계에 있는 한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고서는 종말론적 실재이해를 갖는 것은 어려워진다 이와같이 될 때 빈 무덤의 역사성은 희미해지고 이 역사성에 근거한 부활신앙은 그 터전을 잃게 되고 만다.
판넨베르크는 빈 무덤의 전승을 보편사적 실재이해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건임을 입증하고 이해시키려 했으나 결국 서로 다른 실재이해가 원초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어려움에 부딛히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우회하여 종말론적 실재이해의 일반화를 주장하면서 그 위에 빈 무덤의 일반화를 주장하면서 그 위에 빈 무덤의 역사성을 세우려 시도했으나 이것은 판넨베르크가 부활의 보편사적 증명을 포기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여전히 남는 문제는 신앙의 도움없이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어떻게 종말론적 실재이해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판넨베르크와는 달리 에벨링에서는 부활에 대한 역사학적 과제와 교의학적 과제가 명확히 구별되었다. 에벨링에 비추어 볼 때 판넨베르크는 확실히 역사학적 결과를 교의학적 내용과 혼동하고 있다는 평을 할 수밖에 없다. 이와같은 관찰은 김영한 교수나 고 김이태 교수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전자는 판넨베르크가 “인식론적 관점과 존재론적인 관점을 혼동하고”있다. 했고 후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앙의 실재에의 자연스런 접근의 가능성을 가정함으로써 합법적인 증명서도 없이 인식론적 경계선을 넘어섰다” 그래서 전자와 같이 “인식의 형식(지평)과 존재론적 실재를 혼동”했다고 비평한다.
에벨링의 경우 부활에 대한 역사학의 관점이 교의학적 내용구성으로 넘어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양 차원의 밀접한 상관성 유지는 부활논증을 위하여 견지되고 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판넨베르크와는 달리 처음부터 부활신앙이란 것은 예 수 신앙이지 사건에 대한 신앙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사건의 역사성 증명 유무가 신앙의 긍정 혹은 부정에 직접적으로 영향 미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앙의 차원에서는 “사실성”이 “당위성”에 앞설 수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에벨링의 입장에서 볼 때 판넨베르크는 교의학적 과제를 역사학적 분석이나 비평적 작업으로 환원했던 “역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빈 무덤의 역사성 문제는 일견 비관적인 듯하지만 에벨링의 역사학적 관점은 개별적 사실의 확인 이전에 성경이 전체적으로 전승해 주고 있는 부활과 관계된 사건들의 집합에 있었고 그리고 교의학적 관점이 드러나야 개별적 사건의 역사성이 정당하게 평가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빈 무덤의 역사성은 결코 포기된 것이 아니다.
빈 무덤의 역사성 문제와 관련해서 한가지 특이하게 대조적인 주장을 판넨베르크와 에벨링 사이에서 보게 된다. 판넨베르크가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을 증명해 준다고 한 반면 에벨링은 역으로 예수의 부활이 있음으로 빈 무덤이 가능한 것이기에 빈 무덤은 부활의 부록(Appendix)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결론적 입장으로 기독교의 부활변증을 위해 에벨링의 논증이 판넨베르크보다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본다. 예수의 지상생애와 죽음 가운데 존재론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아 들임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역사적 연속성에 의거할 때 “제3일에” 부활하리라는 약속의 실재성 인식 가능성은 이미 신앙 안에서 선취적으로 경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빈 무덤의 역사성 문제는 부활신앙을 앞지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빈 무덤의 역사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부활신앙에 문제가 생긴다면 역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그에 근거한 부활신앙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끝으로 제자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고 하신 현현하신 주의 말씀을 에벨링과 더불어 이해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보는 것과 신앙은 서로 연속적인 관계라 할 수 없다. 신앙이 본 것의 결과가 아니요 또한 신앙의 결과로서 보는 것이 아니다. 에벨링에 따르면 부활 신앙은 부활한 바에 대한 신비적 황홀경의 직접체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전승에 근거를 두면서 부활사신(Osterbotschaft)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가능해진다 복음의 소식을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부활신앙의 길(Medium)이다. 부활신앙이 오직 말씀 즉 부활한 자에 대한 선포의 계승으로써만 가능하다 했을 때 부활사신은 실증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일 수 없다.
부활신앙이 부활절사신에 근거한다. 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실(factum)이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는 말씀(verbum)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용이 현재적으로 완료된 상태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다른 어떤 가정에 의하여 축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은 또 다시 말씀으로 파악이 되어 그결과 말씀은 예수의 죽음 지상의 생애 그리고 성서전승의 전체적 선포와 일치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부활의 처음 증인들에 대한 신앙이란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깨닫게 하는 하는 말씀으로서의 부활절사신은 말씀을 듣는 자로 하여금 부활의 컨텍스트에 참여케 하여 그 상황이 듣는 자에게 실재로 받아들여지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적 경험이 되게 한다. 이와같이 말씀을 듣는 자가 부활전승의 종말론적 실재를 경험함으로써 verbum과 factum이 한 지평에서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들의 부활신앙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확인하게 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있음을 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주)
1. Chr Gestrich, Neuzeitliches Denken und die Spaltung der dialektischen Theologie, Zur Frage der naturlichen Theologie, 1977, BHTh 52, 10
2. 상게서 11
3. W Pannenberg, Grundzuge der Christologie, 1964. 김이태,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의 방법론적 구조비판, 1985.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1982, 272-283, 350-360
4. W. Pau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Ⅱ 1991, 385-405(이후로는 ST로 표기)
5. G. Ebeling, Dogmatik des christeichen Glaubens Ⅱ 1979 1982, 256-362 특별히 이 글에서는 279-344를 에벨링의 논지에 따라 소개한다.(이후에는 DCGT로 표기)
6. ST, 385
7. ST, 385, R. Bultmann, 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 Ⅰ 1960(U Aufl), 44:Ponlmann, 교의학 이신건 역 1989, 280 재인용
8. WKunaeth, Theologie der Auferstehuug, 1951, U Anfl, 132f:Pohlmann 280 재인용
9. J. Jeremias, Die Verkundigung Jesr Ner kofamenteiche Theologie Ⅰ 1971, 285, UWilkens, Auferstehung Das biblische Anferstehuugs zeugnis historisch und erklart, 1970, 160 ff 비교하라; ST, 386
10. St, 386, 불트만은 바로 이런 사상을 대변한다.(상게서). 이와 비슷하게 바르트도 그의 로마서 주해재판(1922)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예수의 부활은 그의 생애와 죽음과 같은 지평(neben)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역사적 범위 안에서의 어떤 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전 역사적 삶이 원초적으로 하나님과 맺는 비역사적 관련이다.”(Romerbrief, 175 : 이에 대하여 판넨베르크의 Dialektische Theologie, in:RGG Ⅱ 1958, 168-174 중 특히 170f 참고하라) 바르트는 불트만과는 반대로 예수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 이후의 독특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KDⅢ2, 531 ff 중 특히 537, KDⅣ1,335 ff 비교하라 그러나 여기에서 이 사건의 내용으로서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이 지나간 선상에서 감추고 있던 비밀의 계시”를 말하고 있다.(KDⅢ1,345 11ST, 395
12. 이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J. E. Alsup의 The PostResurrection Appearance of the Gospel Tradition(1975)에 의존한다.
13. E. Schillebeeckx, Die Auferstehuug Jesu als Grund der Erlosuug, 1979, 90, Pannenberg, Grunzuge der Christologie, 1964, 89
14. ST, 397
15. H. V. Campenhausen, Der Aflauf der Osterereignisse und des leere Graf(1952), 1958(2판), REBrown, The Virginal Concaption and Bodily Rosurrection of Jesus, 1973 RHFuller, The Formation of the Resurrection Narratives, 1971
16. R. Pesch, Das Markusevangceliuan 2(1977), 1980 2판 522-540
17. R. Pesch, Das leere Grab und der Glaul and Jesu Anferstehnng, in:Internationale Katholische Zeitschrift Communio 11, 1982, 620 특히 17;ST, 398.
18. 상게서 14
19. MDummett, Biblische Exegese und Auferstehuug, in:Internationale Katholische Zeitschrift Communio 13, 1984, 271283
20. ST, 398
21. ST, 402
22. ST, 404
23. ST, 404
24. C. F. Evans, Resurrecfion and the New Testament, 1970, 20ff
25. ST, 388
26. ST, 389
27. ST, 389f
28. ST, 391f
29. U. Wilkens, 상게서 134ff
30. ST, 392
31. ST, 393
32. ST, 394
33. DCG, 285
34. DCG, 285
35. 에벨링은 역사학적 과제를 세 가지로 본다.(1) 자료조사를 위한 출처발굴 (2) 전승의 여러 형태로 변이된 배경설명을 위한 해명작엽 (3) 본문과 상황간의 일치와 차이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또한 여러 의미로 사용된 언어들을 살아있는 의미로 파악하기 위해 또 다른 면에서는 현대적 경험과 이해와 관련을 맺게 하고 성급한 동화작업을 막기 위한 해석작업(DCG, 286ff)
36. DCG, 288
37. 성서문자주의적(biblizistisch/biblisch)와 구분 방법에서는 성서자료를 무비평적으로 종합하여 이로 형성된 전체적 윤곽을 통해 예술의 부활은 어찌해야 된다는 결론을 얻고자 한다. 반면 역사주의적(historistisch/historisch)와 구분 방법에서는 교의학적 과제를 역사학적 분석이나 비평적 작업으로 환원하려고 한다.
38. DCG, 290
39. DCG, 292
40. DCG, 294
41. DCG, 296
42. DCG, 296
43. DCG, 297
44. DCG, 301
45. DCG, 302
46. DCG, 302f
47. DCG, 303
48. DCG, 303
49. DCG, 304
50. DCG, 306
51. DCG, 308
52. DCG, 309
53. DCG, 313
54. DCG, 313
55. 김영한 상게서 306
56. 김이태 상게서 250
57. 상게서 249
58. 본문 Ⅲ2항을 참조하라
59. DCG, 311
60. DCG, 312
출처: 천기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