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할아버지는 지금 수리산자락 아래에 할머님과 함께 묻혀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일을 하시면서 팔 남매를 키우셨고, 외아들인 저의 아버지께 부담을 안 주신다며 돌아가시기 훨씬 이전에 당신 스스로 묻힐 자리를 마련하시고 현재 그곳에 당신의 자손들을 염려하시며 편히 누워계시죠. 헌데 참 가슴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지지난 해 군포시에서 시행하는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도로가 바로 산소 앞을 지나기 때문에 300 평 남짓했던 땅이 2/3 이상 잘려나가고 간신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봉분만 남게 되었네요. 그 할아버지 묘소는 사실 저를 포함해 우리 가족 모두에게 특히 저의 아버님에게는 무척 소중한 의미가 있는 곳이거든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님께서는 할아버지 묘소 한 귀퉁이에 밭을 일구시며 거의 매주 할아버지를 찾아 가셨거든요.
소일거리 하신다며 옥수수 고추 상추 등을 일구셨는데 사실 그보다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더 큰 즐거움이셔서 힘든 농사의 땀방울을 행복한 보람으로 여기는 곳이었습니다.
힘들게 지은 고추며 옥수수며 상추 등을 우리와 손주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할아버지 밭에서 농사지은 거라시며 자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그런데 지난번 성묘하러 갔었을 때 이미 잘려나간 묘소 자리와 그 앞에 벌써 도로를 분주히 닦고 있는 새로 생기는 도로를 보며 더 이상 아버지의 유일한 그런 공간이 없어짐이 못내 가슴 아프더군요. 아버지께서는 그나마 봉분이라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지만 그 한편에 깊은 한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동부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를 끝으로 교편생활을 마치시고 은퇴하신 후
詩作 활동과 할아버지 곁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흙과 더불어 사시는 것이 생애 큰 행복이셨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시창작의 영감과 많은 것을 얻으셨던 곳 인데 얼마 남지 않은 한식날이 가까워 오니 할아버지 묘소 생각과 아버님 생각이 더 나는군요. 아버님께서 할아버지 묘소 귀퉁이에 조그만 밭을 일구면서 쓰셨던 詩 채마일기란 작품 한 편 올려 놓겠습니다.
채마일기 .밭일
사십여 년 속앓이로 밥줄에만 매달리던
그 끈을 풀고
이제 밭으로 간다
선영 발치에 다랑이밭이지만
멀리 푸른 산자락
내 안락한 마음의 터전에
2월부터 씨를 뿌리고
4월에는 모종을 한다
상치 쑥갓 콩 고추 옥수수 호박
씨를 뿌리면
바로 거두는 것 아니라
7,8월 김매기를 할 때
햇볕은 폭포처럼 등때기를 때리고
대춧빛으로 익어 가는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동안
땀을 씻어주는 황혼이 와서
빈 배 속에 산들바람을 불어 넣고
병 바닥에 쬐금 남은 소주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하였거니
어느새 고추밭에 맛이 들었다.
사십여 년 속앓이를 왜 했던가
선영 발치에 다랑이밭이지만
이제 다시 밭일을 하니
목욕한 듯 마음이 개운하다.
미당(未堂) 선생 빈 집에서
내 어린 결혼식에
빨간 넥타이 선물하며
목월(木月) 주례에 내 축사라니?
그래도 왔네 하시던
'창문 너머 관악산이 웃는다'는
아내에게
'당신이 시인이고 나는 대서쟁이야' 하시던
공덕동 살구나무집에 살 때
술 취한 제자 댓자곳자
살구나무를 패버리겠다는 어깃장에
도끼를 들려주는 단호함을 보이시던
우리 쌍둥딸 세배 할 때
내외분 나란히 세벳돈 두둑이 주며
무척이나 아이들을 좋아하시던
‘허허 국민 여러분, 잘 봐 주세요
이 나라 잘 되려면 미래의 꿈나무인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합니다'
진정 인간적인 미당은 나의 스승
그리고,
봉울방 혹은 문치헌 당호만 남고
청청한 조릿대 우거진 빈 집에
이웃집 강아지만 드나든다.
당신께선 저 하늘 어디쯤서 이곳을 내려보실까.
밑글
아버님께서 당신의 스승이신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님께서 고인이 되신 후 선생님을 그리워하시면서 쓰신 詩 입니다.
아버님의 빛바랜 결혼식 흑백 사진 속에는 주례 박목월 선생님 과 나란히 미당선생님이 서 계신 사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국어시험에서 박목월 선생님의 詩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詩에 관해서는 언제나 100점을 맞았던 것도 아마 아버지와 선생님과의 인연 때문이였는지도 모르죠.
어렸을 때 미당 선생님께서 정년 후 집짓고 살만한 시골을 물색하실 때 선생님과 동행한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간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쯤 아마 지금 현일이 나이쯤 된 걸로 기억 하고 있습니다.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녀석 짱구인 것 보니 공부 잘 하게 생겼는 걸 허허“하며 인자한 웃음을 주신 미당 선생님.
비록 교과서를 통해서 작품을 알고 공부했지만 미당 선생님의 詩와 그분의 인생관과 철학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미당 시인은 아버님의 스승이시자 아버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저에게도 큰 스승 이셨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스승의 날이라 학교에 안가고 쉰다고 하더군요.
나의 학창시절엔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께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면서 꽃을 달아 드리고 했는데 (스승의 날 노래와 어머님 은혜 노래를 헷갈려 하면서....... )
스승의 날에는 옛 선생님을 찾아 인사드리는 선배님들도 많이 볼 수 있었고
출근길에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 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잠깐 스승에 대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게 아직도 기억나는 선생님은,중학교 때 무척 저를 예뻐 해 주셨던, 패셔너블 하셨던 최낙순 국어 선생님.......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제게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신동익 국어 선생님,
대학 시절 제게 여가문화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또 제가 학생회 일로 많이도 속상하게 해 드렸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경열 교수님.
지금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제 삶을 충실히 꾸려 나가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도
모두 스승님의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제게 가장 큰 스승은 역시 저의 아버지입니다.
기다리는 행복
허기진 배를 안고
아버지가 들에서 소를 몰고 오실 때까지
밥상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때 맞춰 머슴새가 울고
마음은 왠지 앙금처럼 갈앉는다
줄곧 헐렁한 옷을 물려 입고
현기증에 넘어지던 옛날이
오히려 그리움에
긴 그림자를 딛고 서서
지금은 아들을 기다린다
끼니 걱정 집 걱정 없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이
아빠가 된 아들에게
얘야 을마나 고단하니 어여 밥 먹어라
생각하니
이따금 친정을 찾는 칠십 넘은 딸에게
얘야 얘야 얼굴 잊겠다
늘 그러시던 어머니 만큼 이나 행복하다.
밑글
저의 아버님께서 저를 생각하시면서 쓰신 詩입니다.
“너희들도 자식들 키워봐라 그러면 부모 마음 다 안다“
항상 듣던 이야기인데 이제 저도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 보니 그런 말씀이 정말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장성한 아들도 아직도 언제나 아이 같아 걱정을 하십니다.
때론 아버님께 가슴아픈 말도 하고 속상하게 해 드렸던 일들이 저 자신이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부모님께 부족했던 제가 참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네요.
어제 잠자리 들기전 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초등 2학년이 된 아들녀석에게
"현일이는 엄마,아빠가 건강했으면 좋겠니?"
"응~ "
"왜?"
"그래야 오래오래 효도하지"
아직 애기려니 여겼던 녀석의 입에서 뜻밖에 효도라는 의외의 말이 나오니
그냥 웃음이 나더군요.
지금도 자식들 생각에 노구에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우리 부모님들과 떨어져 사신다면 오늘 안부 전화라도 한 통 드려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도 이번 주말엔 아이들 데리고 본가에 찾아 뵙겠다고 전화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의 자리
이름 없는 어머니의 무덤을 모시던 날,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우리는 채일 밑에 송사리처럼 몰려 들었다.채일이 금방 광풍에
휘말릴 듯하다.모두들 사력으로 기둥을 잡고 있었다. 폭우를
피하려는 우리들의 안간힘. 세상살이가 다 그러하지 않더냐.
고희를 넘겨 겨우 해 드린 세 돈 반짜리 금반지를 딸들이
우스갯소리로 달라 하면 손자 몫이니 마다 하신다.
밥 그릇 반은 남겨 늘 손자 앞으로 밀어 놓던 어머니.
그날 폭풍우를 가려주던 채일은 말랐지만 땅 속은 지금도
젖어 있겠지. 신록의 저 새소리는 들릴는지 흰 머리칼이
더는 바래지 않았을까
밀글
아버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우리 할머니를 그리시면서 쓰신 詩입니다
저의 할머니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되어서 여름 장마때 세상을 떠나셧습니다.
비가 무척 많이 내렸던 여름이었습니다..
아버님의 눈물도 모두 그 빗물에 감추어질 만큼 많은 비가 오던 날 할머니는 늘 저를 유난히 이뻐라 해 주셨습니다. 제가 장손이어서 그랬는지 항상 할머니는 고모님들이나 친척분들이 맛난것을 사가지고 오시면 베게밑에 두엇다가 저에게 먼저 항상 주셨었죠 중학교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향수는 돌아가신지 여러 해가 지났어도 여전합니다.
특히 어버이 날에는 새삼스럽게 부모님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께서 영원히 누워 계신곳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 없는 손님
당신이 제일 보고 싶은 손님이 왔어요
아내의 말이다
신이 없는데?
내가 제일 보고 싶은 손님이 누굴까
현영이가 왔어요
현영이가 안긴다
한 살이니 신이 없다
빨간 덧신을 신었다
덧신을 벗겨 문갑 위에 놓고
돋보기를 쓰고
다시 현영이를 본다
안고 뉘기 조심스럽던 아기
모르는 새
꽃 봉오리처럼 눈을 뜨고
안아 달라 칭얼댄다
오늘도 습한 골목길을 돌아
현관에 들어서며
신 없는 손님이 왔느냐
제일 먼저 묻는다.
밑글
우리 큰딸 현영이가 태어 난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손주를 생각하시면서 반가운 마음에 할아버지가 쓰신 동시 입니다.
이때에도 떨어져 살고 있어서 자주 찾아 뵙지 못했었는데 첫 친손주라 부모님께서는 현영이에 대한 마음이 남 다르신것 같습니다.
지금도 아버님의 이 詩를 읽다 보면 아버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함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갈월리에 가면
지금은 아는 얼굴이 없다
내가 살던 집터는 막다른 골목
회벽이 앞을 막아 발목 잡는데
한 줄기 그리움이 길을 내었다
흙냄새 구수한 옛날 그대로
뒷동산에 나무 나무 환호하는
꽃방망이다
손발 따순 계집애와
열 살 적 내 얼굴과 목소리도
그대로 거울처럼 떠오른다.
밑글
제 본적지는 인천시 북구 갈산동 입니다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 났지만. 아버님의 고향이 인천 북구 갈산동, 예전에는 갈월리라 불렀나 봅니다. 아버님께서 고향을 그리면서 쓰셨던 詩 입니다.
언젠가 아버님께서 저와 제 동생 손을 붙잡고 인천 북구 갈산동에 아버님께서 태어나셨던 집터에 데리고 간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아버님께서는 여기가 아버지가 어렸을때 뛰어놀던 우물가이고, 저기가 우리집 밭이었고 여기에 우리 집터였다며 정확히 그 위치까지 발로 표시해가며 설명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 놓으신 이 밭과 집터로 너희들이 여태껏 살아온 것이다" 하시며 그리운 고향 집터를 보며 아버님께서는 그날 많은 생각이 나셨나 봅니다.
언젠가 아버님께서도 이제 고단한 짐을 벗으면 고향땅을 찾을 수 있겠지 하셨지만 아직 그 꿈은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소사에 있었던 복숭아 밭 마저도 할아버지께서 정리했던 것처럼 아버지께서도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향의 전답을 정리 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언젠가 그 그리운 고향 땅 몇 평 이라도 다시 돌려 드릴 수 있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흙. 1
어머니는 쑥대밭 억새밭을 갈아
밭을 만들고
아버지는 갈대밭 갈아
논을 만들며
터잡아 흙벽 치고 수수깡 울타리 쳐서
손수 집도 지었다
석양빛이 빛나는 언덕길에
어머니를 마중할 때
머리에 인 거름 동이에선
호박잎 쌈 싸 먹는 된장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등걸잠뱅이와
어머니의 베적삼은 황토색 간간한 소금맛
흙이 사는 길이다
손주새끼 다루듯 황소빛 논밭은
땀과 거름발에 차츰 옥토가 되었다
손자 손도 일손이라 나 또한
장난감 같은 지게에 건초를 날랐다
소나기 뒤에 무지개 서는 언덕에서
해금내와 건초냄새 맡으며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흙을 섬기며
그리 애쓰신 어머니 아버지
구슬을 녹여 큰 그릇을 만들
소망으로 한평생을 끝내셨다
이제 나는 식탁에 간장종지쯤은 되는지.
흙. 2
사는 길이 흙에 있다
어머니 아버지 묘소 앞에
절하는 곳 역시 흙밭이다
흙에는 사 계절이 있어
하늘빛도 색색이다
산물 또한 풍성하다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공평한 자연의 섭리
천우와 신조가 허락한 땅과
흙을 사랑하리라
흙은 원금(元金)이다
가꾸고 받는 이자 같은 작물로 연명하니
흙을 밟고 하늘을 보는 때를
고맙게 여기며
육 척 단신이나마 언젠가는
천둥소리 들리지 않고 번갯불도 없는
흙 속에 보시하리라.
흙 . 3
하늘에 새들
산에 짐승들
물에 물고기
땅에 사람들
논두렁 밭두렁을 제초제로 불지르고
산허리를 뭉개는 사람들
생령들이 가엾다 가엾다
보리 베고 그루밭을 가는데
굼벵이가 있다
지렁이도 반갑다
흙이 아직 살아 있구나
풋고추를 따는데
사마귀 메뚜기 여치 새끼들이 튄다
고추밭도 살아 있구나
나이를 모른는 흙
살갗이 눈부시다
물 흐르고
멋진 맛내는 흙
꽃이 피고 열매 맺으며
일과 땀과 길이 있어
흙을 밟고 가는 길이 평화롭다
구슬을 가루 내어 흙을 만들고
구슬을 팔아 흙을 섬길 것이다.
밑글
아버님께서는 땅 보다 흙을 무척 사랑하십니다. 토지(土地)가 본디 땅과 대지를 의미하겠지만 그 안에 기본의 흙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땅의 금전적 경제 가치보다 그 근간을 이루는 흙에 대한 의미로 땅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아버님께서는 어린 저를 산과 들로 강가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속에서 자연의 고마움과 산의 맑은 공기와 들녘의 넉넉함과 감사함,강가에 구르는 돌의 이치를 많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현영이,현일이게도 자연에 감사 할 줄 아는 아이 흙을 만질 줄 알고 산과 들녘의 푸르름과 강가의 돌멩이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 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아버님께 땅이 아닌 흙을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현영이 현일이에게도 땅이 아닌 흙을 밟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