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 예술 영화의 새로운 흐름, 여성 서사와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상품성 높이다

[이용남]

출처 KOFIC 뉴스레터 776호

http://www.kobiz.or.kr/new/kor/03_worldfilm/news/news.jsp?mode=VIEW&seq=3215

해외에서 먼저 주목 받고 상업적 성취까지 이루다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이 개봉 일주일 만인 8월 26일 1만 관객을 동원했다(2020년 9월 5일 기준 1만 4,666명). 최근 몇 해 독립·예술영화 흥행 지표를 봤을 때 ‘1만 관객 돌파’를 ‘흥행’의 기준으로 삼긴 어렵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행 속에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취다. 일례로 <남매의 여름밤>의 개봉 후 평균 좌석 판매율은 4.6%로 한 자릿수를 나타냈지만 이는 다른 화제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테넷> 역시 평균 좌석 판매율 6.7%로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코로나19에도 일정 이상의 흥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남매의 여름밤>이 이목을 끄는 건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의 한국 독립·예술영화 경향성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청년에서 여성 서사로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오랜 기간 홍상수·이창동·김기덕을 잇는 ‘예술영화 장인’들과 함께, 젊은 남성 감독들의 ‘청년 서사’로 채워져 왔다. 여기에서 ‘청년’은 대체로 남성에 국한됐다. 특히 201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Films, 이하 KAFA)를 주축으로 한 남성 청년의 이야기가 한국 독립·예술영화 서사의 ‘기본 값’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여기에는 2만 6,020명의 관객을 동원한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이 큰 기여를 했다. 당시 독립·예술영화의 흥행 기준은 1만 명 선으로,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도 4만 5천명가량을 동원하는 게 다였다. 이후 KAFA는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2013),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2015), 김진황 감독의 <양치기들>(2016) 등 남성을 중심으로 한 액션, 스릴러 장르를 꾸준히 만들었고, 관객은 이들 서사를 환대했다. 특히 <소셜포비아>는 24만 9,169명의 관객을 기록해 2015년 한국 독립·예술영화 흥행 3위에 올랐다. 자기 고백적 서사가 주를 이루는 단편영화에서도 상황은 비슷해 2010년대 한국 독립영화는 대체로 남성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청년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에서 여성 중심 서사가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낸 건 2019년이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쓸며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14만 4,255명의 관객 수를 기록해 독립·예술영화로는 크게 흥행했다. 같은 시기 고아성·김새벽 주연의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116만여 명을 모아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에 자리했고, 김희애 주연의 <윤희에게>,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이옥섭 감독의 <메기>,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다큐멘터리 <김복동> 등,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주인공이 스크린에 등장해 관객은 물론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여성 서사가 ‘대세’가 됐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한 지난해의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서사적 특징은 앞선 몇 년간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를 이끌던 남성 서사에 뚜렷한 균열이 드러난 건 2016년. 그해 이재용 감독이 KAFA와 손잡고 만든 윤여정 주연의 <죽여주는 여자>는 예순을 넘긴 ‘박카스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가져오는 파격적인 서사로 1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한예리 주연의 <최악의 하루>와 박지영 주연의 <범죄의 여왕> 같은 여성 주인공 서사가 등장했다. 특히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10대 소녀들을 주인공 자리로 데려와 4만 8천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2016년은 상업영화에서도 여성 서사가 힘을 발휘한 해로 손예진 주연의 <덕혜옹주>, 김민희·김태리 주연의 <아가씨>, 김혜수 주연의 <굿바이 싱글>이 각각 500만 명과 400만 명, 200만 명을 넘는 관객을 모았다. 또 <미씽: 사라진 여자> <비밀은 없다> 등이 개봉해 평단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최근 양성평등 주간을 맞이해 개최된 ‘벡델데이2020’ 행사에서 조혜영 영상예술학 박사는 2016년이 “한국 영화 주연 성비의 불균형이 가장 적었던 해”라고 밝혔다. 2016년 주연 중 여성 비율은 40.7%, 남성 주연 비율은 59.3%로 2009년부터 2018년까지의 10년간 여성 주연 비중이 가장 높았다. 여기에 2017년부터 본격화된 영화계 내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한국 독립·예술영화 흥행 시장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대중문화 주요 소비층인 20~30대 여성이 드디어 남성 청년이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에 더 큰 공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반응이 국내와 연결되다 

여성 이야기가 지배적인 서사로 자리 잡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경향성은 올해에도 그대로 이어져 <남매의 여름밤>이 개봉한 8월 이전에도 다수의 여성 서사가 극장을 채웠다. 특히 최윤태 감독, 이주영 주연의 <야구소녀>와 김초희 감독, 강말금 주연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코로나19로 흥행 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각각 3만 명과 2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 송지인 주연의 <성혜의 나라>, 조민수·김은영 주연의 <초미의 관심사>, 김희정 감독, 김호정 주연의 <프랑스여자> 등, 많은 수의 여성 서사가 개봉해 호평받기도 했다. 

<벌새>는 여러모로 한국 독립·예술영화계의 ‘주연’이 여성임을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국내 흥행 성과도 눈부시지만 비평적 성과가 더 눈에 띈다. 한때 한국 예술영화는 해외에서 ‘홍상수·이창동·김기덕’ 이름과 동격이었지만, 해외 평단도 이제 한국의 여성 감독에게 주목하고 있다(물론 최근까지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홍상수 감독은 여전히 평단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엔 물론 전 세계 영화제에서 59관왕을 차지한 <벌새>의 김보라 감독의 몫이 크다. 흥미로운 건 <남매의 여름밤>도 <벌새>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두 영화는 개봉 전해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8월 개봉하지 전까지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 초대돼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이 역으로 국내 흥행에 도움을 주는 패턴을 나타냈다. 물론 전 세계 영화제에서 59관왕의 기록을 세운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을 동등하게 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영화제가 취소 혹은 온라인 전환된 올해 <남매의 여름밤>이 선전하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을 수상했고, 밴쿠버국제영화제와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었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선전, 해외 마켓에서의 판매 소식이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이것이 국내 흥행 시장에서 또 다른 ‘마케팅’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임선애 감독·예수정 주연의 <69세>에서도 확인되는 지점이다. 

과거 홍상수·이창동·김기덕 시대와의 차별점은 칸·베를린·베니스 등의 메이저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식만이 화제가 되던 시절과 지금이 다르다는 점이다. SNS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스스로 ‘홍보의 주체’가 되는 것을 자처하는 오늘날의 20~30대 관객(특히 여성 관객)은 메이저뿐 아니라 소규모의 특색 있는 해외 영화제 소식에 빨리 반응하고, 이를 발 빠르게 전달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 서사에 유독 큰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이 이 패턴의 중심에 있다. 이들은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말해줄 한국 독립·예술영화를 그 누구보다 뜨겁게 응원하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