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 하면 배가 슬슬 고파진다. 갑자기 눈 앞에 현기증이 가물가물 일면서 어린 날 배가 무척이나 고팠던 서러운 기억, 그 지독했던 보릿고개가 떠오른다. 그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가난했다. 먹을 것 또한 너무도 없었다. 끼니 때마다 우물물에 만 보리밥 한 그릇조차 배불리 먹기가 어려웠다.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 꽁보리밥을 배불리 한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쌀밥은 명절 혹은 제사 때나 구경할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게다가 그 당시 시골에서 제법 떵떵거리며 산다는 사람들조차도 오뉴월이 다가오면 쌀이 하도 귀해 보리쌀에 쌀을 조금 섞어서 밥을 지어 먹었으니까. 보릿고개란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지금도 보리밥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내 주변에도 보리밥은 먹은 뒤 방귀 몇 번 뀌고 나면 끝이라며 쌀밥을 고집하는 동무들이 더러 있다. 하긴, 그때 오죽 보리밥에 한이 맺히고 넌더리가 났으면 지금까지도 보리밥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겠는가.
한때 민초들의 주식이자 가난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보리밥. 지금은 그 지독한 보릿고개도 사라졌다. 게다가 보리밥을 주식으로 먹는 가정도 없어졌다. 언뜻 보기에는 보리가 사람들 주변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곡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지긋지긋했던 가난의 굴레와 함께 보리도 아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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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마산시 창동 보리밥 전문점 <오복보리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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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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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다섯 가지 남짓한 반찬과 쌈으로 차려낸 보리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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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 근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리가 사라진 게 아니다. 식당이든 찻집이든 들어가면 대부분 내놓는 물이 볶은 보리를 우려낸 구수한 보리차가 아니던가. 사람들이 음료수처럼 즐겨 마시는 시원한 맥주 또한 보리로 만든 술이 아닌가. 게다가 요즈음 들어 혼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리밥집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눈물겹고 지겹게 여겨지던 보리밥이 건강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보리밥에는 단백질과 비타민 B1, B2뿐만 아니라 섬유질까지 많이 들어 있어 각기병 예방과 변비에 아주 좋은 음식이다. 게다가 보리밥에는 쌀밥처럼 칼로리가 많이 들어 있지 않아 다이어트에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한의학에서 보리는 '대맥'(大麥)이라 하여 "기를 도와주고 위장의 기능을 튼튼하게 하며, 설사를 그치게 한다"고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보리는 오장을 튼튼하게 하며 이뇨작용이 강한 것은 물론 부종까지 없애준다고 적혀 있다. 보리의 효능이 이러하니 어찌 사람들이 보리를 멀리 할 수가 있겠는가.
보리밥 짓는 것도 간단하다. 통보리밖에 없었던 예전에는 보리를 미리 한번 삶은 뒤 다시 밥을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찰보리를 수증기로 쪄서 눌러놓은 '압맥'과 찰보리를 둘로 쪼개 쪄서 다듬어 놓은 '할맥'까지 나와 있다. 그러므로 보리를 그대로 씻어 밥솥에 넣어 밥을 짓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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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철 입맛 돋궈주는 보리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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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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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글보글 잘 끓여낸 강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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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 쌀에 보리를 조금 섞어 먹고 싶은 사람들도 예전처럼 보리를 한번 삶을 필요가 없다. 그대로 쌀과 함께 보리를 섞어 깨끗히 씻은 뒤 밥솥에 넣어 밥을 지으면 그만. 특히 찰진 꽁보리밥을 빨리 지어 먹고 싶을 때는 보리쌀을 하얀 뜨물이 사라질 때까지 깨끗이 씻어 압력밥솥에 넣어 밥을 짓는 것이 조리의 지혜다.
"요새는 손님들 입맛이 하도 까다로워서 찹쌀수제비도 팔고 소고기국밥도 팔고 있지만 예전에는 보리밥 한 가지만 고집했지예. 그때 갓난 애기였던 우리 아들이 지금 서른을 훨씬 넘겼으니까 이 자리에서 30년 넘게 보리밥만 팔았지예. 마산에서 보리밥 하모 우리집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예."
경남 마산시 창동 골목 한 켠에 자리잡은 보리밥 전문점 '오복보리밥'(천영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육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 집 주인 천영태씨가 식당 들머리에 수북히 쌓인 풋고추에 파묻혀 있다. 손님이 들어서는 데도 '어서 오세요'란 말 한마디는커녕 쳐다보지도 않고 풋고추 손질에만 정신이 잔뜩 팔려 있다.
가정집처럼 꾸며진 식당방을 들락거리는 주방 아주머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중 천영태씨의 부인인 듯한 오십대 중반의 아낙네 한 사람이 인사 대신 '몇 분이세요?' 하는가 싶더니 금세 또 주방 안으로 사라진다. 식당방에 올라서자 다닥다닥 붙은 방마다 보리밥을 한입 가득 먹고 있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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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밥은 강된장과 열무김치, 고추장과 각종 나물을 넣고 비벼먹는 그 맛이 끝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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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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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내음 향긋 풍기는 여러 가지 쌈에 잘 비빈 보리밥을 싸서 먹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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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 점심시간이 꽤 지난 오후 2시쯤인데도 앉을자리가 없다. 식당 안은 온통 장터처럼 왁자지껄하다. 음식을 바삐 나르는 주방 아주머니들, 보리밥을 한 그릇 더 시키는 사람, 맛깔스럽게 쓰윽쓱 잘 비빈 보리밥을 마악 쌈에 싸는 사람, 마악 보리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 계산을 하는 사람.
잠시 얼쩡거리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자 거무스레한 보리슝늉이 한 그릇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슝늉을 한 모금 후루룩 마시자 금세 입맛이 되살아난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그 슝늉 맛이다. 구수한 슝늉을 몇 번 후루룩거리자 이내 식탁 위에 15가지 남짓한 맛깔스런 반찬과 함께 거무스레한 보리밥(5000원)이 턱 놓인다.
"이 집 보리밥에 쓰는 보리쌀은 직접 농사를 지은 겁니까?" "진주에 있는 방앗간에서 직접 보리쌀을 찧지예. 요즈음 그곳에서도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이 잘 없어예. 그래서 보리농사를 지으면 우리가 다 가져가는 조건으로 미리 부탁을 한다 아입니꺼." "보리밥은 무엇보다도 찍어먹는 이 고추가 맛 있어야 하는데." "한번 드셔보이소. 그 고추가 그리 맵지도 풋냄새도 나지 않고 먹기에 딱 좋을 낍니더."
그랬다. 된장에 고추를 푸욱 찍어 한입 베어물자 매콤하면서도 고추 특유의 알알한 뒷맛이 그리 맵지 않다. 근데 반찬이 하도 많아 젓가락을 어디에서부터 대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잘 구운 조기도 맛깔스럽게 보이고, 파아란 돌나물과 파래나물,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스레 보이는 열무김치도 집어먹고 싶다.
우선 보글보글 잘 끓여낸 강된장부터 맛본다. 맛이 구수하고도 깊다. 싱싱한 생굴을 넣고 버무린 깍두기도 사각사각 씹히는 게 아주 상큼하다. 하지만 보리밥은 뭐니뭐니 해도 비벼먹는 그 맛이 아니겠는가. 커다란 대접에 보리밥을 푸짐하게 담아 내놓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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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치에 보리밥을 올리고 강된장을 얹어 먹는 맛도 그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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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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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싱한 생굴을 넣은 깍두기도 사각사각 상큼한 바다맛을 선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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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종찬 |
| 널찍한 대접에 담긴 보리밥 위에 강된장을 몇 수저 떠넣는다. 그리고 열무김치와 콩나물, 돌나물, 무나물, 파래나물, 시금치 등을 올린 뒤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려 쓰윽쓱 비빈다. 입에 군침이 절로 돈다. 향긋한 봄내음이 나는 쑥국을 한 수저 떠서 입을 축인 뒤 보리밥과 함께 풋고추를 된장에 푸욱 찍어 베어물자 몇 번 씹을 틈새도 없이 그대로 목을 타고 꾸울꺽 삼켜진다.
식탁 한 쪽에 푸짐하게 쌓인 채소도 입맛과 봄맛을 한꺼번에 돋군다. 잘 비벼진 보리밥을 상치에 올려 한입. 양배추에 올려 한입. 미나리에 올려 한입. 다시마에 올려 한입. 어느새 커다란 대접에 담긴 보리밥 한 그릇이 게눈 감추듯 뚝딱 비워진다. 그 구수함, 그 상큼함, 그 매콤함. 한그릇 더 먹고 싶다. 하지만 이미 배가 너무 부르다.
"한 그릇 더 드시지예. 그라고 더 필요한 기 있으모 퍼뜩 말씀만 하이소. 더 시켜먹는 거는 돈을 받지 않아예."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보리밥이 이렇게 맛깔스러운 줄 몰랐네요. 어머니의 손맛 그대로네요." "다음에 오실 때는 찹쌀 수제비도 한번 드셔보이소. 쫄깃쫄깃한 기 그냥 밀가로로 빚은 수제비보다 훨씬 다른 맛이 날 끼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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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지고 곱슬한 보리밥 이렇게 지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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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된장, 고추장, 참기름과 함께 쓰윽쓱 비벼먹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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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비빈 보리밥 |
ⓒ이종찬 | 재료/통보리, 된장, 멸치다싯물, 매운고추, 마늘, 대파, 고춧가루,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 열무김치.
1. 통보리를 깨끗한 물에 잘 씻어 1시간 정도 물에 불린다. 이때 통보리를 깨끗하게 잘 씻어야 밥맛이 좋다.
2. 물에 불린 통보리를 솥단지에 담고 밥물을 쌀밥을 할 때보다 2/3가량 더 부은 뒤 센 불에서 팔팔 끓인다.
3. 뚝배기에 된장을 한수저 담고 멸치 다싯물을 부은 뒤 송송 썬 대파와 매운고추, 찧은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센불에서 한소끔 끓여 강된장을 만든다.
4. 밥솥의 밥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중간불로 낮춘 뒤 보리가 푹 퍼질 때까지 30분 정도 더 끓인다.
5. 밥이 다 되면 불을 끄고 10분쯤 두었다가 솥두껑을 열고 보리밥 위에 물을 촉촉하게 뿌린 뒤 약한 불로 5분쯤 더 끓인다.
6. 밥솥에서 김이 폴폴 피어오르면 10분쯤 뜸을 들인 뒤 주걱으로 골고루 섞어 밥그릇에 담는다.
7. 보리밥은 강된장과 열무김치, 고추장, 참기름에 쓰윽쓱 비벼 한수저 입에 떠넣은 뒤 매운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한입 베어먹어야 제맛이 난다.
※포인트/잘 비빈 보리밥을 상치, 양배추, 미나리 등의 쌈에 싸먹어도 보리밥 특유의 곱슬한 맛을 맘껏 즐길 수 있다. / 이종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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