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 2021년 10월 15일.
저항파 동지, 신동엽과 박봉우
맹문재
1.
신동엽 시인과 박봉우 시인은 아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하근찬 소설가와 함께 문단의 삼총사라고 불렸습니다. 박봉우 시인은 1934년생이어서 신동엽 시인보다 네 살 어렸지만, 1956년(23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신동엽 시인보다 문단에 먼저 나왔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석림(石林)이란 필명으로 응모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부문 예심을 보았습니다. (본심은 양주동 시인이 보았습니다.) 그해 신동엽 시인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함으로써 문단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두 시인의 인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시를 지향하는 세계관이 서로 상통한 것입니다.
박봉우 시인이 산문 「시인 신동엽」에서 밝힌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 사장 댁에서 열린 신춘문예 시상식이 열리는 날 신동엽 시인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조끼가 달린 조선옷을 입고 부여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날 시상식이 끝난 뒤 안암동 하숙집에서 가서 문학관과 역사관을 털어놓으면서 하룻밤 만에 형제보다 더 친한 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보냈습니다. 오로지 조국과 시와 인간과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눈물로 가슴을 달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겨울 백운대를, 봄에는 수락산과 도봉산을 함께 오르면서 조국과 시를 논했습니다. 무수한 회색분자와 사이비들 속에 결코 멸망하지 않고 시인의 양심과 조국을 지켜나갔습니다. 신동엽 시인에게는 진실과 무지갯빛 역사가 있다고 믿고 사이비 문학, 부정 정치, 부정 경제를 함께 추방해나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동엽 시인은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타계해 박봉우 시인에게 많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습니다. “1969년 4월 7일 신동엽 시인이 타계하자 돈암동 집에 조문을 와 두 주먹에 피가 흐를 정도로 마당 장독대를 두들기면서 통곡했다.”라고 신동엽 시인의 아드님인 신좌섭 시인이 『푸른사상』 2020년 가을호에서 저와의 대담에서 증언했습니다.
2.
그렇다면 두 시인이 가깝게 지낸 문학관과 역사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것은 『조선일보』 1961년 3월 30일~31일에 발표한 「60년대의 시단 분포도―신저항시 운동의 가능성을 전망하며」라는 신동엽 시인의 평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동엽은 이 글에서 향토시, 현대감각파, 언어세공파, 시민 시인, 저항파 등으로 분류해 각각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면은 후에 『대학신문』 1967년 3월 24일에 발표한 「시인․가인(歌人)․시업가(詩業家)」라는 글에서도 향토 시인들, 도시감각파들, 언어세공파들, 시정 시인들, 참여 시인들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분류에서 향토 시의 경우는 S 시인(서정주 시인인 듯)을 필두로 한국 민족의 영원한 하늘 같은 정서가 깃들어 있지만 침략, 실업, 악정, 전쟁 등으로 가득 찬 현실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대감각파는 서구적인 감각과 현대적인 기교를 추구하는 모더니스트 시인들로 유미주의 속에 파묻힌 채 바깥세상을 내다보기에 현실 인식이 약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어세공파는 현대감각파의 이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민 시인은 육성으로 도시인들의 삶을 노래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도시적 지식인 감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모험은 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항파 시인입니다. 동시대는 싸우는 시대이므로 저항파 시인이 필요하다고 옹호합니다. 해당하는 작품으로 「휴전선」을 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박봉우 시인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신좌섭 아드님이 앞의 글에서 진단했듯이 “소위 ‘저항파’의 동지 의식이 아주 강했던” 것입니다.
3.
분단 극복에 대한 문학관과 역사관도 일치하는 동지였습니다. 흔히 박봉우는 ‘휴전선’의 시인으로 불릴 만큼 한평생 일관되게 분단 현실을 인식하고 그 극복을 추구했습니다. 전후의 분단 상황을 황무지로 규정하면서 서정시나 모더니즘 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파로서 분단 극복을 지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면은 신동엽 시인이 「전통 정신 속으로 결속하라― 남북의 자유로운 문화교류를 위한 준비 회의를 제의하며」에서도 여실합니다. 얼마 전 북한 작가동맹 위원장이 남북한 문화교류를 제의해오자 곽종원이 「남북 문화교류 제의의 이면」(『국민일보』)에서 상투적인 정치선전이라고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그와 같은 자세가 수구 정치 세력을 대변한다고, 즉 남한 지식인들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국의 주인임을 각성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날짜를 정해 판문점이나 임진강 완충지대에서 그리운 사람들이 모여 아리랑을 합창해보거나, 비정치적 문화단체나 개인들로 구성된 남북문화교류준비위원회를 마련하자고 구체적으로 제안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동엽 시인이나 박봉우 시인의 분단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극복 방안이 일치했습니다. 그만큼 동지 의식이 강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봉우 시인이 신동엽 시인의 시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을 소개하고 저의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맹문재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기룬 어린 양들』 『사북 골목에서』 등.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 수상. 안양대 교수.
첫댓글 교수님. 감사한 마음으로 제 카페로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