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다. 이 땅의 며느리와 딸들에게 설은 명절 외에 특별한 ‘무엇’이다. 숙제를 앞에 놓은 기분이다. 오죽하면 ‘명절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을까. 당신은 명절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아니, 어떻게 치르는지.
“그래 명절 동안만은 죽었다고 생각하자”라고 생각하는 마당쇠형부터, “저 아무 것도 못하는데요”하는 모르쇠형까지…. 이 여성들의 여러 독백 속에 명절을 보내는 지혜가 있을 것이다.
1. 차라리 기쁘게 일하자 - 나 아니면 누가 해
◇ 심보경 (35ㆍ명필름기획이사):
영화 기획 때문에 평소에는 자정쯤, 촬영이 많을 때는 심지어 아침 7시에 집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시댁에는 빵점짜리 며느리. 그러나 종가의 종손 며느리다.
3일 동안 20~30명씩 다녀간다. 손님 치르는 게 쉽지는 않다. 물론 1992년 결혼 후 처음에는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마음을 바꿨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다. 차라리 기쁨이라고 마인드를 바꾸어 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은게 2년쯤. 이제는 설과 추석 때만은 기쁜 마음으로 일해 보자, 이렇게 생각한다.
◇ 김경아(가명ㆍ33ㆍ주부):
3년 전 설 무렵 임신을 해서 입덧이 심했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전 부치고 만두를 만들고 설거지까지 다 했다. 그래도 누구하나 쉬라고 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눈물이 났다.
고스톱을 치면서 꼼짝하지 않는 남편과 아주버니들이 야속했다. 친구들이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 정소영(가명ㆍ39ㆍ방송사홍보실):
외며느리여서 명절 휴일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보낸다. 회사일 핑계 대고 부산 시댁에 늦게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시댁에 안 간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낸다.
시어머니가 장을 보고 음식재료를 미리 다듬어 놓으면, 난 만두 빚고전 부치고 등등 조리를 한다. 시누이들이 설거지는 번갈아가며 해주는 편.
고스톱을 치지 못해서 고스톱 판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는 심부름을 도맡아야 한다. 인터넷으로 차례상을 주문하고 싶어도, 시어머니께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2. 저, 일 잘 못해요 - 미리 용돈을 두둑히
◇ 박민정(29ㆍ컨설팅사 근무):
직장 일이 얼마나 바쁜가를 연중 내내, 틈나는 대로 남편과 시댁에 주지시킨 상태라 명절 전에 일하러 가지 않아도 별 비난이 없다. 대신에 먼저 봉투를 두둑히 보내 드린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만 다녀오는 시간과 이런 저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손해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 이진아(29ㆍ컨설팅사 근무):
결혼 전 남편과 서약서를 작성하면서 “설이나 추석 때 시댁에 가서 마구잡이로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남편이 “우리 집에 먼저 내려가서 일 좀 거들어 드리지” 하면 서약서를 상기시켜 준다. “신성한 결혼서약서를 어기지 말자”고 은근히 겁을 준다.
◇ 김정수(가명ㆍ33ㆍ홍보대행사과장):
솜씨가 없고 일이 서투른 척해서 내게 일을 시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대신 용돈을 많이 드려서 반발감을 무마한다. 밤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졸립다는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 잠그고 함께 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명절 연휴가 끝나고 직장에 복귀해서 일 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3. 머리를 써 볼까 - 어머, 임신이네
◇ 김만희(30ㆍ주부):
명절에 일 하고 안하고는 머리 쓰기 나름이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만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내가 할 일을 줄인다. ‘송편 예쁘게 빚기’ ‘만두 예쁘게 만들기’ 등 이벤트를 만들어 경쟁을 유도한다.
‘누가 장보기 빨리 하나’ 게임도 벌인다. 쇼핑 목록을 공평하게 나눠 얼마나 빠른 시간에 사 오는가 시간을 잰다.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은 설거지를 시킨다. 평소에 인간관계를 잘 닦아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 박소영(28ㆍ주부):
‘다행히도’ 임신 3개월째여서 시댁에 내려가지 않아도 될 그럴싸한 핑계가 생겼다. 입덧도 심하고, 의사도 조심하라고 해서, 이를 핑계 삼아 시댁에 가지 않기로 했다.
딱 한번 치러본 명절(지난해 추석)에는 “나죽었소” 하고 설거지만 하다 온 기억이 있다. 지난 추석에는 시부모님께 30만 원을 드렸으나, 이번설에는 내려가지 못하는 대신 50만 원을 드리려고 한다.
올 추석도 출산이 임박한 때여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도가 된다. “내년 이맘때쯤 둘째를 가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4. 어머니 손맛 최고예요 - 일 못하면 말품으로
◇ 이윤선(35ㆍ가수 매니저):
보통 명절 하루 전쯤 시댁에 가서 음식을 만든다. 시동생이 요리사 출신에다 손빠른 시어머니가 둘 다 일하는 며느리들이라고 많이 배려해 주시는 편이다.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데다 네 살짜리 딸 시중 들다 보면 사실 ‘말’만하게 되는 편이다. “와 정말 맛있어요.” 정작 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절대 일부러 꾀를 부리지는 않는다. 기껏 하루 이틀에 몇 시간인데 뭘.
◇ 강유정 (33ㆍ프리랜서):
어릴 적부터 사과도 내 손으로 깎아 본 적이 없다. 시댁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어 할 일이 별로 없다. 오로지 “어머니 너무너무 맛있어요” “세상에 이런 걸 어떻게 다 하세요” “제가 먹어본 것 중 최고예요” 등 갖가지 찬사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리면 만사 오케이.
5. 집집마다 음식분배 - 못가면 선물로
◇ 김지영(45ㆍ공무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집에서 명절을 쇠면서, 간소하게 치르기 시작했다. 손위 동서는 전이나 나물을 준비해 가고, 큰집에서 과일이나 생선 등을 준비한다. 미리 얼마간의 돈을 내놓고, 그냥 간다.
큰집에 모여도 음식 장만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일이 많지 않다. 가끔 설거지나 하면 되는 편. 일손이 달릴 때는 동서들이 부르니까, 그때 가서 하면 된다.
◇ 최유라(35ㆍ방송인):
음식에는 자신 있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몸으로 때운다. 더군다나 남편은 장손. 그러나 생방송이 있어서 시댁에 가지 못하면 선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