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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4월 25일 토요정례법회 ○
□ 청년강연
원불교를 만나서 - 청년 1단 박은전 교우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 박은전 교우께서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을 해 주었다.
아직 일년 반도 되지 않았다.
인연이 참 특별하다. 언니, 형부를 통해서 교당에 오게 되고
와서도 일년 반도 안 된 상태에서 이 정도의 강연의 내용,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한 것,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참으로 마음이 흐뭇한 것 같다.
여러분도 그러신가?
이제 스물다섯인데, 내가 25세에 서원을 세우고 출가한 것 같다.
왜 웃는가?
우리 은전 교우는 강원도 컨추리 걸이다.
고등학교에 진학 한 후 그 곳에서 너무 기가 죽은 것 같다.
오늘 강연을 잘했는데, 내가 일년 반 전에 본 은전이는 약자였다.
강릉여고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이후에는 조금 침체기이지 않았나 싶다.
착하니까 성적관리는 했지만 내면에의 소심성, 자신감 문제, 나태가 합리화되는 문제가 의외로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마다 다양한 것 같다.
우리가 산을 올라갈 때도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
은전교우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이 크게 강급은 안했어도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은전 교우 보면 참 착하고 좋다.
그러나 아까 7일간의 출가여행 훈련 가서 눈물이 났다고.
본인도 본인 모르게 쌓인 무자신감, 불만, 원망심들 아니면 나태에 찌든 자기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발버둥친다.
그런데 거기서 은전교우의 장점이 있다.
오기라고 표현했는데, 악착같이 하려고 하는 것. 나도 같이 해보겠다.
입교 한 지 2달도 안 된 사람이 출가여행 가서 하루에 좌선 7-8시간씩 했다.
그런데 나도 저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 그게 함께하는 재미인 것 같다.
함께 하는 것이 무한한 에너지를 주고, 자신의 능력을 배가 시키는 힘이 있다.
더구나 출가여행에 자격이 안 되서 못 가게 하려고 하다가
저 사람은 참으로 하려는 마음이 있구나 싶어 턱걸이 시켜서 데리고 갔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참 묘하다.
올바른 스승을 만난다거나, 교전을 본다든가, 기도를 한다든가 선을 한다든가 하면,
구름 상태의 생각과 구름을 벗어난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신가.
훈련이나 헌배만 해도 다르다. 헌배 전에 찜찜하고 불만 있던 마음이 하고나면 풀어져 버린다.
구름을 뚫고 본심이 솟아나면 다르게 보인다.
기도를 하면 영혼의 충만감, 맑은 영혼을 되찾아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아니하면 이 생각에 머물러 버린다.
이 생각을 중생적 생각이라고 한다.
소아다, 대아다.
작은 나에 얽혀있을 때에는 또는 이 법을 만나기 전이나 초입자들은 이 주말시간에 법회 보는 것에 대해서 “미쳤느냐”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런데 묘하게 이 맛을 알거나 느끼거나 마음이 차분해 지고 본래의 마음이 되찾아지면 참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서도 보는 것이 달라져 버린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안이비설신의 6식에 있을 때는 여기에 묶여버린다.
이럴 때에 더 들어가, 제 7식의 세계로 가야 한다.
6식은 안이비설신의, 제 7식을 말나식이라고 하고, 8식을 아뢰아식이라고 한다.
분별의 세계가 차분해 지면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게 된다.
그 온전한 정신은 성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닌 소리를 막 주장한다면?
자기도 속으로 이거 아닌데? 라고 한다.
이럴 때는 6식까지가 힘을 쓰고 있을 때다.
보통 사람들은 이 뜻이 욕심 세계에 자리하고 있다.
뜻에는 서원의 세계도 있다.
헌배 전후의 마음, 법회 전후의 마음, 훈련 전후의 마음이 달라진다.
뇌구조로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다.
왼손을 잘 쓰는 사람은 우뇌가 발달해 있고 - 이성적 숫자 일에 능통
오른손을 잘 쓰는 사람은 좌뇌가 발달해 있다. - 감성적 직관
깨달은 사람은 우뇌가 아주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아시는가?
공자님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대종사님께서도 좋아하셨다.
우뇌의 세계는 풍요롭고 따스하고 감성적이고 직관의 세계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좌뇌의 세계에서 맴돈다.
우뇌가 발달되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뚫어버리는 것이 법이라든가 훈련, 선의 세계이다.
정신수양은 사리연구를 하기 위해 있다. 사리연구는 실생활에 쓰기 위해 있다.
공부의 출발은 정신수양이다.
그런데 정신 수양 전에 서원과 믿음의 세계가 중요하다. 작은 내가 아닌 큰 나로 인하여 살아야 한다.
과한 욕심, 아니면 소아주의. 더 적절한 말은 “무식”이다.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만약 원불교 만나기 전에 이런 말 들었으면 무척 좋았을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부동산 투자, 좋은 여자, 부자가 될 것인가, 영어 잘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은 많지만
자기 자신에게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러니 여러분 왼손 왼발도 좀 쓰시라.
그리고 선을 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신에게 속아 넘어 가는데, 중요한 것은 속아 넘어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선은 자기를 객관화하면서 속고 산다고 할까,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것이 닫혀져 있다. 그래서 뻔뻔하다.
원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이 정시선, 기도, 요가 등을 하고 나면 참 좋다.
이 세상에서 정신 수양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기도와 좌선이다.
서서 내가 정신 수양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음을 외부 환경에 빼앗겨버린다.
누워서 한다면? 나도 모르게 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중간인 앉아서 하는 단계를 선택한 것이다.
정신은 적적성성이라 한다.
성성이란 이 생각, 저 생각 돌아다니는 것이라면, 적적이란 고요한 것이다.
정신이란 적적성성이요, 성성적적이다.
그렇다면 적적성성을 하기 좋은 외적 자세가 무엇인가?
바로 좌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성에 빠져 있고, 아니면 마음을 놓아버려서 앉아서 졸고 있기 쉽다.
내가 본마음을 회복해야 내가 예뻐진다.
우리 도안 교우 같은 경우는 염불이나 헌배가 낫다.
소양 체질이나 열이 있는 사람, 적극적인 사람은 활동적인 것이 좋다.
그러나 태음 체질들은 좌선이 좋다. 편안하다.
적적성성한 정신 상태로 가면 구름 낀 상태를 벗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평소에도 습관이 된다.
내가 원불교에 들어와서 정말 선을 열심히 했다.
내가 선한 지 25년이 되었다.
25년간 선을 빠진 적이 별로 없다. 졸아본 적이 열 번도 안 된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어 버린 것을 느낀다.
경험의 세계를 떠나서, 내 여러 가지 상황이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되어버린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현실적으로는 당장 책보고, 일 하고, 영어공부 하나라도 더 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그런데 처음에는 정시선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무시선의 힘을 얻어버릴 수 있다.
그러면 교당 와서만 구름 낀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장에서나 운동을 하면서도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안의비설신의 육근에서 이 마음을 넘어서서 적적성성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능력이 달라져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중에 돈 벌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이런 생각을 한다.
이 구름을 넘어서버리면 그 순간이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안하나 모른다.
처음에는 아픔이 있다. 잠도 오고, 허리도 아프다.
세상에 영어 하나만 하려 해도 얼마나 정성이 필요한가.
그런데 무형의 마음을 기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내실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념 공부를 실답게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어-날마다 조금씩 하여야 영어가 내 것으로 된다.
날마다 조금씩 분별을 넘어서 내 마음을 챙길 수 있는 기회,
그렇다면 날마다 영어공부를 한 사람이 영어가 늘 듯이 얼마든지 무시선을 얻어갈 수 있다.
내가 그 증거다.
나는 처음에 와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나는 겸손하다는 생각도 없다. 겸손해야지 하는 것도 치심이다.
그런데 내가 보니 내 역량이 커져버린 것이다.
왜 커졌는가. 삼학공부이며 사은에 대한 감사심이다. 감사심만 하여도 이것을 툭 끊고 올라갈 수 있다.
어느새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내가 달라져 있더라.
화가 박수근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판화가 김철수 씨는 중졸인가 고졸인가 된다.
대종사님은 서당 중퇴이다.
정산종사님은 서당 졸업이다.
우리 좌산종법사님 대학 안 다니셨다.
그분은 이 쪽 관련, 지속적인 지혜의 세계로 관장을 하다 보니 학력과 관계없이 역량이 열려버린다는 것이다.
에디슨이 학교를 다니다가 짤린 사람이다.
대종사님은 하늘 천 따 지 하니까, “왜 하늘은 파란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 원리를 물었더니 훈장님이 오히려 꼴통이라고 했다.
우리의 뇌세포가 150억-200억, 보통 10%, 7% 정도 쓴다고 한다.
뇌세포를 쓸 수 있는 방법은 선밖에 없다. 정신수양이라는 말이다.
정신수양을 해야 사리연구가 터지고, 그래야 취사가 힘을 얻는다.
그러니 우리 석이가 공부한다고 하는데, 저 친구가 공부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기도도 해야 한다. 선을 안 한 것보다 한 것이 점수가 더 나온다.
종교 안다니고, 선 안했더니 더 잘되던데요, 하는 말은 따지기 좋아하는 소리다.
만약 그 사람이 선을 했다면 더 좋아질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참으로 무섭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이것을 대종사님은 네가 본래 부처라고 표현하였다.
이 상태일 때는 자기도 모르는 능력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대종사님이 왜 거짓말을 하셨겠는가. 인내력 테스트하려고 그렇게 하셨겠는가.
분명히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해 보아라, 처음에는 어려우니 10분, 15분 하시라.
내가 지금 진행하는 법회 식순을 제대로 따라서만 하면, 심고가 끝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것이다.
내가 독경할 때 속도 음감 모든 것을 조절하여 하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따라온다면 바로 좋아질 수 있다.
어떤 행사나, 단회 전에도 입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뇌가 편안할 때는 기억도 잘된다. 하지만 뇌가 복잡할 때는 막혀버린다.
선은 사치가 아니고, 교당에서 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이다.
나중에 증거를 보여주고 싶다. 나같이 멍청한 사람에게 이러한 역량이 나오는 것?
자기도 모르는 역량들이 틔워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발명을 하는 사람은,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좌뇌도 잘 쓰게 된다. 언어 계산 능력이 뛰어나게 된다.
우뇌를 개발시키면, 좌뇌만 공들이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은 잘 모르는 것.
어느 집에서 보면, 삼촌이 아이에게 돈을 준다. 그러면 무척 좋아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삼촌을 고맙다고 하면서 엄마 아빠는 고마움이 크지 않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많이 주어야 1000원짜리에 잔소리뿐인데, 삼촌이 큰 액수의 용돈을 주면 너무 좋아한다.
어린시절 추석 때 나에게 삼촌이 만원을 준 적이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50만원이다.
나는 그 때의 상황이라든가 기분을 다 기억하고 있다.
원불교를 다니다가 역량이 터지면 자기가 잘나서 터진 줄 안다.
그러나 사실은 대종사님 덕 때문에 선을 통해서 커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 은혜에 대해서 너무 당연시하여 알지 못할지 모른다.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환영받고 역량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은 대종사님 바람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보이지 않게 쌓이고 엮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에너지가 되어서, 내 능력이 곳곳에서 환영받고 박수 받고, 웃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뒤집어서, 내가 이것을 만나지 못했다면?
부모가 없다면 내가 3만원 받을 기회가 없었겠죠.
육신의 부모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 은혜의 1/10만 알아도 효녀 효자다.
정신의 부모인 대종사나 스승의 은혜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고시 합격하고, 건강하고 이것을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로 알면 오산이다.
나도 내가 잘나서 출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1000일 기도 하였고, 나를 위해 교무님들이 좋은 책들을 다 보내주셨다.
나를 바라보며 공들였던 교무님들, 이것을 내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낳아주고 길러주고 원불교에 출가까지 시켜주셨다.
전생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내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이며, 원인 없이 되는 것 없다. 당연하게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은혜다.
우리가 먹으면서, 그 하나가 처처불상 공부했듯이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고 하였다.
어떤 존재도 내 생명의 근원이다.
차분히 지혜가 열리고, 교법을 아는 사람은 교법에 대조하여 보면 답을 자기가 안다.
자기가 주인으로 서면 어떻게 되는가. 달라진다.
자신감이 생기고 든든하고 편안하다. 그러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은혜가 보이고, 내가 여기에서 할 일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사람은 안 보인다.
왜? 자기에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툭 열려지면 보인다.
내가 때로는 찾아서, “교무님, 제가 할일 있습니까”하고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닫아 지면 교당 다니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본심을 놓쳐버리면 자기가 당해버린다. 이것이 묘한 것이다.
법문을 법문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사실은 그 안에 정말로 극절하신 스승의 자비가 있다.
아직 내가 이해를 못했을 뿐이지, 하다 보면 내가 스스로 느끼게 된다.
내 맘대로 하기도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뻔뻔하면서 튕긴다.
내가 일을 맡은 것이 부담스럽다 한 것은 자기가 다 속은 것이다.
그런데 한 마음이 바뀌면 해결방안까지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내가 주인이 될 것 같으면, 적적성성한 마음이 회복되면,
내 마음에 돌리는 마음이 생기고, 내 역량이 점점 커진 줄 모르고 커지게 된다.
그런데 아까 현실에 묶이고 내 마음이 갇혀 있으면, 자꾸 불만이다.
만사가 다 부담스럽고 힘들다.
그러면서 해결책 찾는 것이 적적성성한 마음이 아니다. 술이며 잠이다.
그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악순환의 고리로 또 들어가는 것이다.
직장이든지 집이든 교당이든 개선책이 보이지 않고 현 상태만 유지하고 있다면 마음이 묵은 상태이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내 안의 삶이 변화가 없다, 개선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마음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잊혀져 버린 것이다.
이 좋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소개는 해 드리지만,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려있다는 거 잘 아시죠.
질문하시죠.
☆ 질문과 답변
Q. 안효정 교우님 :
우뇌를 쓰기위해선 좌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책을 보고 자세를 어떻게 잡는지는 알겠는데
그 상태에서 어떤방법으로 정신을 가다듬는지가 궁금하다.
A. 교무님 :
일단 기본적으로 정전에 나와 있다.
단전주법으로 나와있는 것을 한번 읽어보시고 그다음에 단회때 단장이나 단원들한테
아니면 아침에 선하러 나오시는 분들게 물어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때 물어보면 가르쳐 주겠다.
Q. 허석 교우님 :
의식을 의식적으로 보고 교전공부로 한다던지, 유무념으로 잡아서 마음을 잡는다던지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나 무의식의 정신세계로 가야지만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건지 궁금하다.
A. 교무님 :
맞는 말이다.
내가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사은의 은혜에 대한 느낌이 있어야하고
또 하나는 선을 통해서 7식 8식 세계에 직접 내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느끼는 것이다.
생각으로 그리 해야 겠다 하면 안된다. 왜냐면 표면 의식세계에서 놀아나게 된다.
7식 8식 잠재의식 세계에 가질 못한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실질적인 시간투자가 되어야 한다. 실지로 하지 않게 되면 당해버린다.
수박 먹어본 사람하고 맛있다고 설명 들어서 맛있다고 듣는 것이 같겠는가.
Q. 박순명 교우님 :
사교형의 특성을 살려 이성적인 부분을 더해서 조금 보완하면 각각의 개성있는 부처님이 되지 않는지가 궁금하다.
A. 교무님 :
그것이 원만성이다. 너무 우뇌만 발전해도 과유불급이다.
여러사람들은 감성적으로만 처리하려 한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버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야지 서로가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어떤 하는 일을 하는데 잘 처리 못하면 어떻게 되죠?
누구한테 혼나게 되면 여유롭게 적적성성한 상태를 유지 못하게 된다.
일처리를 해야만 칭찬을 들어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도 마찬가지다.
감성만 많아도 안되고 이성만 많아도 안된다.
감성이 이성을 받춰주고 이성이 감성을 받춰줘야 한다. 그게 원만성이다.
Q. 김형준 교우님 :
A. 교무님 :
서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소아와 대아의 대립이라 설명할 수 있다.
동시에 소아를 안은 대아라, 두 가지 다 생각해야 한다.
소아의 욕심을 키운 것이 대아다.
부처님은 욕심 많으신 분이다.
서원은 변한다.
그것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넓어지기도, 깊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때론 약해지기도 한다.
초반에 세운 것이 신심을 바탕으로 한 서원일수도 있다. 큰 힘이 있다.
감사생활로 돌릴 때도 서원의 힘으로 지혜로 돌릴 수도 있다.
우주만유를 그냥 그 자체도 신앙으로 돌릴 수 있다.
서원도 욕심의 확장이다. 더 큰 욕심이다.
한편으로 둘이 전쟁을 할 때는 서로 대치한다.
서원이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은 개인, 또는 가족, 집단이나 국가, 세계주의.
원불교 서원은 우주만유에 대한 서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퍼센티지를 생각해줬음 좋겠다.
나의 변화도, 쉽게 말해서 원불교를 만나기 전보다 못할 때가 분명 있다.
그렇지만 퍼센티지를 보라.
아무리 뛰어난 투수도 홈런 맞고 강판 당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승률, 방어율로 보면 어쩐다고 나오는가.
똑같다.
원불교를 만났다고 모든 것이 다 승리하느냐
그러지 않다. 때로는 내가 더 비참하게 무너져 내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 승률은 올라가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Q. 김형준 교우 :
올바른 서원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A. 교무님 :
좋은 질문이다.
서원은 성불제중, 일원상, 제생의세의 서원도 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ㅁ'
감사합니다.
뉴스진행에 강연에 후기까지.. of the 은전, by the 은전, for(?) the 은전이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