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9월 7일,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 순국
▲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安武,1883~1924) 장군
▲ 안무 장군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4년 9월 10일 자 기사. '전사'라 쓰고 있다.
1924년 9월 7일,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安武,1883~1924) 장군이 용정(龍井) 자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된 그는 일제의 치료를 거부하고 죽었다. 향년 41세.
자유시 참변(1921) 이후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전날, 일경의 습격을 받아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하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었다. [관련 글 : 1921년 오늘-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일제의 치료 거부하고 순국
안무는 함경북도 경성 사람이다. 호는 청전(靑田), 본명은 안병호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하여 해산(1907)될 때까지 교련관으로 일하였다. 이후 경성의 함일학교(咸一學校)와 무산의 보성학교(普成學校)의 체육 교사로 학생들에게 병영식 체조를 가르쳤다.
경술국치(1910)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북간도 명동촌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이동휘와 김약연 등을 만나 1919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했다. 안무는 국민회의 직속 군사 조직인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 300여 명의 훈련을 담당하면서 군사훈련과 무기 확보에 힘썼다.
▲ 안무가 이끌던 대한국민회의 직할 독립군 부대 국민회군의 주둔지. 길림성 연길시 의란진 춘흥촌.
대한국민회의 군사조직은 국민회 산하단체인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직속 부대인 안무의 국민회군으로 나뉘었다. 대한독립군은 국내 진입 작전을, 국민회군은 국민회 관할구역 안의 북간도 지역을 순회·주둔하면서 경찰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듬해 1920년 5월,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및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했다. 연합독립군은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켜 강력한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연합부대 부관으로 봉오동 전투 지휘
이 무렵 연합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1천 2백여 명이었다. 사령관은 최진동(1882~1945), 안무는 부관을 맡았고, 연대장 홍범도 아래 네 개 중대가 있었다.
6월 7일, 연대장 홍범도는 700여 명의 연합독립군 부대를 지휘하여 일본군 남양수비대 제19사단을 화룡현 봉오동에서 공략하여 적 150여 명을 살상, 패주 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이 봉오동 전투다. [관련 글 :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에서 지다]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로 독립군과 간도 지역 동포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승전의 기운은 4개월 후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이어졌다.
봉오동 전투 이후 드러난 독립군의 전력에 당황한 일제는 대규모 병력으로 독립군에 대한 이른바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이에 대비하여 국민회군 2백50여 명은 같은 해 8월 의란구의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 말께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지역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하였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고자 본영을 떠나 이도구와 삼도구(三道溝) 서북 지방의 밀림지대로 진군했다. 당시 이 지역에 집결한 독립군 병력은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2천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 정규군 2만여 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니 이 싸움이 청산리 전투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는 10월 21일부터 밤낮없는 6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관련 글 : 청산리 전투, 큰 승리로 막을 올리다]
이때 안무의 국민회군은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어랑촌 전투와 완루구 전투, 고동하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지만, 독립군 측 전사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른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최대의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지청천 장군의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1933)[관련 기사 :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와 함께 한국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된다. 청산리의 승리는 독립군은 물론, 임시정부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사기를 드높였지만, 독립군 부대와 재만 한인들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 '간도 학살'로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가 불에 탔다.
봉오동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약 두 달 동안 독립군의 근거지라고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했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가 불에 타는 ‘간도 학살’(경신참변, 1920)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장기적인 항전 기지를 찾아 이동할 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등 연합부대도 밀산(密山)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밀산은 대규모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하기는 곤란한 지역이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1910년 전후부터 국외 항일기지가 되어 20만이 넘는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러시아령 연해주로 넘어가기로 했다.
국경을 넘기 전에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장기항전을 다짐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와 김좌진 등이 선임되어 대오를 가지런히 하였다. 밀산에 집결하였던 지청천, 최진동, 홍범도, 김규식 등과 함께 안무도 노령 이만(Iman)을 거쳐 1921년 6월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북간도로 귀환해 활약하다 전사한 잊힌 영웅
자유시에서 독립군단은 안착도 하기 전에 위기에 맞닥뜨렸다. 일부 부대가 군권 쟁탈전을 벌인 데다 일본과 어업조약을 체결한 소련이 일본에 약속한 독립군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독립군단과 소련 적군(赤軍) 사이에 교전이 발생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 후 쇠약해진 소련도 일본과 불화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약속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고 이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과 적군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전투로 독립군이 포로가 되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대한독립군단은 와해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불리는 자유시 참변이다.
당시 제야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던 안무의 국민회군은 다행히 이 참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북간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무는 왕청현 나자구 일대에서 독립군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경신참변 이후 초토화된 북간도 지역에서의 무너진 독립군을 재건하기는 쉽지 않았다.
안무는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 논의와 독립운동 진영의 민족 대단결을 꾀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국민회군 대표로 참여하여 10인의 국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간도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 유적지. 지금은 현재 용정시 인민 정부 건물로 사용 중이다.
1924년, 용정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안무의 동정은 용정의 일본영사관에 탐지되었다. 9월 6일 안무는 일경의 습격을 받고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다음날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었다.
안무의 부음에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간도의 한인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하소설 <두만강>에 안무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한 작가 이기영은 소설에 당시의 조시(弔詩)를 소개했다.
하늘에 사무친 유한은 구름 빛을 시꺼멓게 물들이고(遺恨充天雲色黑)
땅 위에 거꾸러진 충혼은 피꽃이 붉게 피었더라.(忠魂塗地血花紅)
▲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안무의 시신은 용정 일본영사관 지하실에 6일간 보관됐다가 용정 시내 영국덕이에 묻혔다. 그것은 장례식 때 유혈 폭동을 우려한 일본 경찰의 선제 조치였다. 그만큼 안무는 일본에 두려운 존재였다.
안무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숨은 영웅이었다. 그가 두드러지지 못한 것은 그 전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에 가린 이인자였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주역은 이들 지휘관뿐 아니라 전투에서 스러져 간 숱한 무명의 전사들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부에서 안무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것은 1980년이었다. 이 서훈은 김좌진(대한민국장, 1962)과 홍범도(대통령장, 1963)보다 17~18년이 늦었고, 그가 전사한 때로부터는 56년 뒤였다.
2017. 9. 6.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