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신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신채호
신라가 발흥하던 시대부터 곧 동해 바깥에 한 사나운 종족이 나타났으니, 일본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이 바다 가운데 외딴 섬에 고립하여 큰 바다가 천연의 요새를 만든 까닭에 다른 나라가 일본에 침입할 일도 없었으며 일본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간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직 우리나라와는 지세가 조금 가까운 까닭에 고대부터 서로 왕래하기도 하고 침략하기도 한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 가장 심했던 시대가 신라 백제 시대이다.
그러나 백제는 일본과 동맹한 나라요 신라는 일본의 원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읽어보면 신라는 일 년에 거의 한 번씩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백제는 일본과 통신이 빈번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고대 일본은 또한 추장들이 분립하여 자웅을 결정하지 못한 시대인데 그런 가운데 바다에 연해있는 부락들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와 접촉할 때 백제를 보니 크나큰 나라라 감히 야심을 품을 여지가 없었고 시나를 엿본즉 동쪽에서 가장 약한 나라이므로 이에 그 무기를 자주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이미 커진 후에도 항상 쳐들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때에 일본도 이미 여러 부락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룩한 때문이다.
일본이 대국을 이룬 뒤에도 백제를 침략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일본의 온갖 것이 백제로부터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문자도 백제에서 수입했으며 미술도 백제에서 수입하였을 뿐더러 또한 그 인종이 백제인으로 많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와 일본은 틈새가 없었던 것이다.
곧 백제와 일본 사이에 통혼한 사실이라는가 무령왕 이후에 여러 박사들이 빈번히 파견되는 것이 그 증거다. 이 까닭에 옛날 임진년에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일본에 잡혀 있을 때 그곳 토착 주민들이 백제의 후예라고 스스로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들이 어찌 헛되이 그들의 보계(譜系)를 속였겠는가?
이 때문에 신라 태종대왕이 백제를 쳐들어가기 위해 먼저 경병(輕兵)으로 대판(大阪)에 바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뒤엎고 항복의 강화를 맺은 뒤에 남방(곧 백제)에 이르렀으니 아아 영웅의 소견이 마땅히 여기까지 미쳤던 것이다.
고사에 의하여 연구하여 볼 때 당시 신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이와 같을 뿐인데 근래에 이르러 어찌하여 다른 설들이 수없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것의 대략만을 들어서 이를 비판하려 한다.
(1) 일본의 여황(女皇) 비미호(卑彌乎: 즉 그들 역사의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침범한 일은 우리 역사에는 실려 있지 않을뿐더러 곡 그들의 역사를 보아도 “콘 고기가 배를 끼고서 조수에 밀려 나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의 황당한 얘기에 지나지 않거늘 근래 역사가들이 신공황후가 쳐들어왔다고 하는 구절을 허둥지둥 받아들이며
(2) 더욱 가소로운 것은 미사흔(未斯欣)이 일본에 인질로 갔다는 것은 곧 실성왕이 형제 사이의 오래 묵은 원한을 품어서 그를 다른 나라에 쫓아 보낸 것이거늘 이제 비미호가 쳐들어왔다는 것과 신라의 굴복을 억지로 증명하고자 하여 신공왕후가 신라를 쳐들어왔을 때 신라왕이 그의 동생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냈다고 하였으며
(3) 고대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한치의 땅도 점거한 일이 없는데 말하기를 일본이 대가야를 없애고 임나부를 두었다 하여 일본이 우리나라 국토를 점거하는 일이 역사상에 항상 있는 관례인 것처럼 보이었다.
아, 그 망령된 주장의 대략은 위와 같고 그 밖의 잗다란 착오는 낱낱이 들기 어렵다.
어떤 자는 이러한 말들을 교과서에 엮어 넣으니 청년들의 머리를 어지럽고 혼란되게 함이 어찌 끝이 있으리요?
우리나라 중세 무렵에 역사가들이 중국을 숭배할 때,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오만한 특성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을 깎아 내린 역사서술을 우리나라 역사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일반의 비열한 역사를 지었던 까닭에 민족의 정기를 떨어뜨려 수백 년간이나 나라의 수치를 배양하더니 요즈음의 역사가들은 일본을 숭배하는 노예 근성이 또 자라나 우리의 신성한 역사를 무함하고 업신여기니, 아아 이 나라가 장차 어느 땅에서 탈가(脫駕)할 것인지.
여러분 여러분들이여 역사를 편찬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일본사람들이 비록 망령되나 어찌 역사의 기록을 날조하겠는가?
이러한 사실들이 반드시 있는 것이므로 우리역사에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일본인들의 말을 망령되이 믿으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라.
옛날에도 우리나라 학사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풍속과 역사를 탐구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수은 강항이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모리휘원(毛利輝元)이 백제의 후손임만 들었고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한 일을 듣지 못하였으며, 김세렴이 8월에 뗏목을 타고 일본에 들어갔을 때 신라 태종이 대판을 정복한 것만 기록하였고(金世濂의 乘槎錄에 말하기를, 이 사실은 일본 년대기에 의거하고 있다고 한다) 저 신공왕후 운운한 일은 애초에 없었으니, 무슨 까닭으로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본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전자만 들을 수 있었고 후자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물며 일본역사에 나타난 것을 맹목적으로 믿을진대 즉 그들의 요즘 글들은 나오면 나올수록 더 괴이하여 단군이 소잔명존(素戔鳴尊)의 동생이라 하며, 고래는 원래 일본의 속국이라 하여 마귀의 씨부림과 여우의 주장이 어지러우니, 그들의 얘기를 모두 믿으면 곧 우리의 4천년 역사는 일본역사의 부속품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저 맹신자여 내가 헛되이 기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추세를 볼 때 실로 꿈속에서도 혼이 자주 놀라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이에 말이 미치매 나의 머리 끝에 강렬히 자극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
무릇 허무한 일도 날마다 말하면 확실한 일인 것처럼 된다. 곧 삼국지 수호지 등을 누가 소설로 모르리요마는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 사이에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꿈꾸며 말하기를 제갈공명의 금낭삼계가 이러저러하다 하며 무송이 경양강에서 호랑이를 때려 죽인 일이 이러이러하다 하여 매우 빨리 사실로 서로 인정하게 되거늘 하물며 저 일본인은 모든 역사책에 이러한 말들(즉 고려가 원래 일본의 속국이었다 하는 따위)을 실어서 대대로 전하고 암송할새 학교 강의에도 어린 학생들이 기뻐 뛰며 한가로이 책을 읽던 장부가 기세가 솟구쳐서 옛날부터 한국이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 같이 인정하여 일반 국민들의 대외 경쟁사상을 고취하니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국민의 정신을 진작시킴에는 이것도 혹 하나의 방법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비록 그러나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저들은 날마다 속이고 우리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니 아아 이것도 또한 작은 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삼국이 모두 하나의 동맹을 맺은 나라를 가졌었다.
고구려에는 말갈이 있었고 백제에는 일본이 있었고 신라에는 중국이 있었는데 말갈은 오로지 속국이 될 속성을 가졌을 뿐이고 중국은 최초부터 신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가 아니라 다만 뒤에 와서 김춘추 김유신 등이 한때 외교적 수단에 의해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고 할 때 비굴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 그들과 결합한 것이다.
그런즉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고구려와 말갈의 그것과 같은가, 신라와 중국의 그것과 같은가?
나는 생각하여 보건대 백제가 일본을 대우하는 것은 비록 고구려가 말갈을 부리는 것과는 조금 다르나, 일본이 백제를 우러러봄은 말갈이 고구려를 숭배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어찌 그들을 항상 이끌고 수백 년 동안 신라를 침략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어찌 그들을 써서 수자리를 지키는 병졸로 삼았으리요.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였을 때 성안에 일본병들이 가득차 있었던 따위)
대개 일본이 문화 병법 상공업 등의 기술을 모두 백제로부터 배웠으니 자연히 백제의 부림을 받은 고대 미개인에게는 항상 있었던 예인 것이다.
뒤에 와서 백제가 장차 망하려 할 때에 왕자 복신이 일본에 인질로 들어가 구원병을 요청함에 이르러 어떤 사람은 일본의 문화와 무력이 이미 왕성한 이후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인질이라고 한 것은 곧 저 중국 고대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인질을 보낸 예와는 같지 않고 단지 이웃나라에 여행을 하거나 혹은 방문하러 가는 일들을 “모두 인질로 보낸다”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황룡국은 고구려의 속국이나 왕자 해명을 ‘인질로 보내었다’고 하였으며 낙랑은 고구려보다 약한 나라이나 왕자 호동을 ‘인질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질이라고 일컬은 것은 중국 전국시대의 이른바 질자(質子)와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왕자 복신이 인질이 됨도 또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구원을 청하고자 하여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것과 같은 예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백제와 일본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관계는 고구려 말갈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