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박정희 대통령, 새마을운동 제창
←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 새마을운동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초가집이 주류를 이루던 우리네 농촌이 70년대 들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길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22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함으로써 70년대 우리사회를 휩쓴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근면ㆍ자조ㆍ협동’의 기치 아래 생활태도혁신, 환경개선, 소득증대를 통해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취지로 1971년부터 정부주도하에 전국적 범위에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 전개됐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된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고, 70년대 한국 사회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하천정비, 교량건설, 수리시설확충, 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을 마련했다는 것과 농어촌 전화, 농가소득증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말경 농촌 새마을운동은 한계에 이르렀다. 농축산물 수입으로 농축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쌀 수매가가 동결된 데다 주택 개량 자금 때문에 농가마다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새마을운동의 제창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새마을운동은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를 거치면서 그 초심에서 일탈, 결국 그 끝을 맞이해야 했다. 새마을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사와 한국갤럽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공동실시한 ‘대한민국 50년의 위업’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사망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81)이 1994년 4월 23일 별세했다. 닉슨 전 대통령은 3월 19일 뇌졸중으로 몸의 우측부분이 마비되면서 급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계속 혼수상태였다. 닉슨 전 대통령은 1913년 2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요바 린다라는 한 시골에서 퀘이커교도로 채소상이었던 아버지의 다섯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학을 하면서 듀크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다 2차세계대전 때는 해군으로 복무했다. 소령제대 후 1946년 고향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데뷔한 뒤 극우반공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험프리 후보를 물리치고 대권을 차지해 제37대 대통령(재임기간 1969년∼1974년) 자리에 올랐다. 닉슨은 미대통령으로는 최초로 1972년 중국을 방문하고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나는 등 냉전시대의 국제정치에 `데탕트`라는 동서해빙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월남 종전, 중동평화 발판 마련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제 외교무대에서 화려한 활약을 보이던 그는 1972년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한 것이 탄로나 마침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97년] 페루 리마 인질사태 종결 1997년 4월 22일 페루의 리마 인질사태가 수습되었다.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Tupac Amaru Revolutionary Movement/MRTA) 소속대원들은 1996년 12월 연회가 열리던 리마의 일본대사관에 침입해 각국 외교사절 600여 명을 인질로 붙잡고 투옥 동료들의 석방 등을 요구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팽팽한 긴장상태가 몇 달 간 계속되었다.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이들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한다고 밝혀 협상에 진전이 보이는 듯했지만 MRTA 지도자 네스토르 세르파는 협상을 거부했다. 결국 페루 정부군은 특공대를 편성해 구출작전을 감행했다. 총격전 끝에 MRTA 소속대원 14명 전원과 정부군 2명이 숨졌지만 인질 72명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구출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나 거칠고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국내외의 비판을 받았다.
[1724년] 칸트 Immanuel Kant 출생
1724년 4월 22일 태어남 / 1804년 2월 12일 죽음 칸트는 근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루터교 경건주의 학교에서 라틴어 고전을 공부한 뒤, 1740년 신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쾨니히스베르크알베르투스대학교에 입학해 주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17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5년 동안 무급 강사로 있으면서, 처음에는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쳤으나 차츰 논리학·형이상학·도덕철학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1781년에는 수학·물리학·형이상학의 세 영역에 걸쳐 인간 지식의 기초를 검토한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발표했다. 물질세계의 대상들은 단지 이성의 인식대상으로서 존재한다고 확신한 그는 이 책을 통해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결코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1788년에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발표해 이성과 개인의 근본적 자유에 기초를 둔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했다. 1790년에 발표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은 미와 목적론의 문제를 다룬 저서로, 앞의 두 책과 함께 이른바 비판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인식론·윤리학·미학에 걸친 이러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작업은 이후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793년에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를 출간했는데,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합리적인 태도가 정통 종교와 마찰을 일으켜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 및 저술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1886년] 여운형 [呂運亨] 출생
1886. 4. 22 경기 양평~1947. 7. 19 서울. 호는 몽양(夢陽). 1889~90년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901년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했으며, 1902년 관립우체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수학을 단념하고, 1906년 농사를 지으면서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907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으며,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고향인 양평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다. 1908년 국채보상 단연동맹(國債報償斷煙同盟)을 조직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설했으며, 초당의숙(草堂義塾)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11년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군호를 안 쓴다고 강릉으로 퇴거 명령을 받았다. 1913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및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면서 조국 광복의 웅지를 펼치다가 중국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1917년 졸업했다.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1월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조선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여운형은 '정부'의 구성에 반대했지만, 임시정부의 제1차 내각의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하라[原敬]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일본 조야는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921년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여 한국독립과 중국혁명과의 유기적인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5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여하여 장교와 기사(技師)의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923년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했고, 타스통신사 중국지부에 근무하면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와의 관계도 매우 밀접해져, 1925년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1926년 이후 중국국민당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북벌에 참가했고, 북벌과정에서 '조선병단'의 조직을 기도하기도 했다. 1929년 상하이복단대학[上海復旦大學] 축구단을 인솔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정책을 통렬히 비난했다. 같은 해 7월 상하이 랴오둥[遼東] 운동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930년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32년 7월 출옥했다. 이후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는데, 국외에서와는 달리 합법적인 활동과 비합법적인 활동의 험난한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후 〈조선중앙일보〉의 본사와 각 지부에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배치하여 활동하게 했다. 또한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보도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1940년 일본 도쿄로 세계정세를 포착하고 유학생을 규합하여 해방될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다가,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43년 집행유예로 출옥한 후 은거하며 청년 지도에 진력했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전국에 조직하여 해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 방송이 나가기 전 여운형은 정무총감 엔도오[遠藤]로부터 해방 후 치안을 맡아줄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여운형이, ①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석방, ② 경성에 8~10월의 3개월분 식량 확보, ③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불간섭, ④ 학생들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불간섭, ⑤ 일본 노무자들도 건설사업에 협력 등 5가지 조건을 제시하자 엔도오는 주저없이 수락했다. 그는 8·15해방 후 공백기간의 질서유지의 일익을 담당하며 안재홍 등을 비롯한 건국동맹원들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7일 제1차 부서 결정을 완료하는 동시에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랑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 목적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6일 미군의 남한 진주를 앞두고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계열과 연대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다. 10월 1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경위에 관한 〈매일신보〉 기자의 질문에 응답한 답변내용을 보면, "북한의 소련군처럼 남한의 미군도 행정일체를 조선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라는 희망적 관측을 가졌으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승인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12일에는 건국동맹세력을 모체로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一五會) 등의 단체를 흡수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46년 2월에 결성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참가하여 의장단에 선출된 이후 3월초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여 6월 6일 남조선민주의원을 대표한 김규식과 원세훈, 민전을 대표한 허헌 등과 함께 제1차 회합을 가졌고, 14일 제2차 회합에서 좌우합작 3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7월 21일 4개항의 합의사항이 공동명의로 발표됨으로써 좌우합작기구인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자 김일성과 회동하기도 했으며, 11월 남조선노동당으로의 합당과정에서 이탈한 세력을 결집하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사회노동당 세력의 남조선노동당으로의 대거 이탈과 사회노동당에 대한 북한의 비판적 입장으로,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해체하고 온건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내며,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했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계속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해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1870년] 레닌 [Lenin, Vladimir Ilich, 울리야노프] 출생
본명은 Vladimir Ilich Ulyanov. 1870. 4. 22(구력 4. 10) 러시아 심비르스크~1924. 1. 21 모스크바 근처 고리키.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교육수준이 높고 교양있는 부모의 6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의사의 딸이었으며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는 농노의 아들이었지만 교사로서 장학사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대학시절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17세의 레닌은 혁명적 민주주의 전통 및 마르크스의 문헌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1887년 가을,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2월 불법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다시 카잔으로 돌아왔지만 재입학은 허용되지 않았고 추방된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Das Kapital〉 등 혁명서적을 탐독했다. 1889년 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161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 Alexander Ⅷ 출생 본명은 Pietro Vito Ottoboni. 1610. 4. 22 베네치아~1691. 2. 1 로마. 교황(1689~91 재위). 1652년 추기경, 1654년 브레시아의 주교, 1689년 10월 6일 교황이 되었다. 몇 가지 조치로 교황청과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분쟁을 해결했다. 교황권을 제약한 1682년의 갈리아 조항(Gallican Articles)을 끝까지 단죄했고 얀센주의를 반대했다.
[1983년] ‘아기공룡 둘리’ 탄생
만화 캐릭터에 대한 심의가 유난히 까다로워 만화가들이 활동하기 어려웠던 1980년대. 만화가 김수정(金水正)씨는 소재 선택이 자유로운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자유롭게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3년 4월 22일, 전무후무한 국산 만화 캐릭터 ‘아기 공룡 둘리’가 탄생했다. 둘리는 당시 최고의 월간지 ‘보물섬’에 연재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후 TV용 애니메이션 만화로도 제작돼 당시 KBS TV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한 1996년에는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이라는 만화 영화로 다시 태어나 35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만화영화대상, 한국영화비평가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부천 명예시민이 되어 주민등록증(830422-1185600)까지 발급받는 등, 둘리 얼굴이 새겨진 캐릭터 상품만도 1000여 가지가 넘게 생산됐다. 이로써 ‘아기공룡 둘리’는 국산 캐릭터 산업의 원조이자 수많은 창작 캐릭터들의 기폭제가 됐다. ‘아기공룡 둘리’의 인기 비결은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발상과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활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기공룡 둘리’는 그동안 ‘무서운 용’으로만 인식되어왔던 ‘공룡’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 천방지축 젖먹이 희동이에게 꼬리를 잡혀 질질 끌려다닐 만큼 ‘연약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1451년] 이사벨 1세 Isabel Ⅰ출생 (영)Isabella Ⅰ. 별칭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 1451. 4. 22 카스티야 마드리갈데라스아틀라스토레스~1504. 11. 26 스페인 메디나델캄포. 카스티야(1474~1504)와 아라곤(1479~1504)의 여왕. 1479년부터는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카스티야의 페르난도 5세)와 함께 두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들의 집권기에 스페인의 영구적인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이사벨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스페인의 해외식민제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초기생애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2번째 왕비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 태어났으며, 그녀가 출생한 지 3년 후 이복 오빠가 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알폰소가 있었고, 어린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아레발로에서 조용히 보냈는데도 그녀는 곧 카스티야의 정치무대에서 주목을 끌었다. 13세 되던 해 왕의 눈에 들기 위해 궁정에 진출했다. 엔리케 4세의 반대파들이 처음에는 알폰소의 주변에 모여들었으나, 1468년 7월 알폰소가 죽자 당연히 이사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사벨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떠맡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총명함이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됨으로써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으로 알려진 합의를 통해 왕위계승자로 인정을 받았다.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가 된 이사벨의 장차 혼인문제는 국내외적으로 외교적 중요성을 갈수록 더해갔다. 포르투갈과 아라곤, 프랑스가 제각기 결혼상대 후보를 내놓았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과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와의 혼인을 원했던 듯하다. 자신의 주변에 있던 고문관들로부터 자문을 받은 이사벨은 프랑스의 신랑후보자를 제쳐두고 포르투갈과 아라곤의 후보감 가운데서 아라곤의 페르난도를 택했다. 마침내 1469년 10월 바야돌리드에 있는 후데비베로 궁전에서 엔리케 4세의 승인 없이 페르난도와 혼인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를 배우자로 삼은 것은 카스티야 내에 반아라곤 파벌의 성장을 초래했으며, 이들 파벌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를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로 옹립하고자 했다. 당시 후아나는 그녀의 진짜 아버지가 알부케르케 공작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라 벨트라네야로 불리고 있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이 자신의 동의 없이 페르난도와 혼인함으로써 왕권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를 들어 1468년의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을 파기함으로써 반아라곤 파벌을 적극 후원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왕위계승권을 거부하는 대신 후아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기엔 공작의 도움을 청했다. 엔리케 4세와 이사벨이 어느 정도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그간 오랫동안 우려해오던 왕위계승전쟁이 즉각 일어났다.
통치기 당시 이사벨은 그녀의 왕위계승을 지지하는 곳인 세고비아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카스티야의 중요 귀족집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멘도사 추기경과 카스티야 성주(벨라스코), 그리고 페르난도의 모친과 인척관계에 있던 해군제독 엔리케스 등이 있었다. 후아나를 왕위계승자로 추대했던 반대 진영에는 톨레도의 대주교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군사조직인 칼라트라바의 대장, 그리고 젊은 나이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비에나 후작 등이 있었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아폰수 5세는 성급히 카스티야를 침공하고서 후아나와 약혼식을 올렸다. 이러한 가운데 이사벨 통치기의 첫 4년은 내란의 연속이었으며, 이 내란은 1479년 2월 24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반대파와 아폰수 5세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같은 해 아라곤의 후안 2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공동통치제로 묶였다. 이제 스페인은 단일한 국가로 출범했으나 이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개인적 결합이 카스티야와 아라곤 두 왕국의 실질적인 정치 통합으로 이어지고 나서의 일이었다. 실제로 페르난도는 1475년 작성한 자신의 첫번째 유언장에서 이사벨을 아라곤의 상속자로 하는 한편, 카스티야와의 통합으로 인해 자신의 백성들이 얻게 될 이점을 공공연히 천명했다. 그러나 두 왕국은 계속 제각기의 고유한 제도로 통치되었다. 분명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은 스페인 내에 남은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오랜 과정을 마무리 짓는다는 데 목적을 두고서 맺어졌다. 그러나 1482년 시작한 그라나다 정복은 까다로운 일이었으며 예정보다 시일이 오래 걸렸고 카스티야를 극심한 재정난으로 몰고 갔다. 그라나다 정복전쟁은 몇 가지 점(예를 들어 전투 대형)에서 중세적인 양상을 지녔으나 새로운 면도 있었다. 이사벨은 전쟁과정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물자 보급 방법의 개선과 군병원의 설치 등을 관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491년 두 사람은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목전에 두고서 산타페에 전위 본부를 설치했으며, 이듬해 1월 2일 그라나다가 함락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사벨이 산타페에 있는 동안 그녀 자신과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그곳으로 이사벨을 방문하여 장차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정착으로 이어지는 항해의 지원을 구했다. 이 항해에 대한 재정 지원을 위해 이사벨이 자신의 보석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또한 콜럼버스가 이사벨로부터 제한적인 재정지원밖에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사벨과 그녀의 고문관들은 항해 승인결정을 위해 차관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개척을 위한 항해 비용과 궁극적인 성과의 배분 문제 등 구체적인 조건들은 1492년 4월 17일 수립되었다. 이처럼 이사벨의 결정을 거쳐 이루어진 항해로 발견된 신대륙은 앞서 카나리아 제도와 같은 대서양의 새로운 발견지들이 귀속되던 관행에 따라 교황의 추인을 받고 카스티야 왕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이사벨과 그녀의 고문들은 당연히 이 항해의 결과를 그리스도교 신앙전파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예상하지 않은 발견은 이사벨에게 새로운 문제점들을 안겨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이 발견된 '인디언'과 카스티야 왕과의 관계였다. 이사벨과 고문들은 콜럼버스보다도 더욱 기꺼이 신대륙 원주민들의 권리를 인정해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사벨은 콜럼버스가 노예로 데려온 원주민 가운데 일부를 풀어주도록 명령했으며, 1504년 사망할 때까지 이같은 문제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쏟았다. 한편 1480년 안달루시아에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는 중세말 카스티야에서 빈번히 행해진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교도가 된 의심스런 개종자들 및 비(非)그리스도교도를 탄압하려는 오랜 움직임이 그 정점에 달한 것이었다. 종교재판소 설치의 당연한 결과로 개종을 거부하던 유대인들이 추방당했다. 종교적·정치적으로 확고한 통합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유대인 추방은 당시로서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경제적인 결과만을 놓고 볼 때, 당시 스페인 사회의 중요한 요소를 잃게 한 중대한 실수임에 틀림없다. 이사벨의 집권기에 페르난도가 이룩한 업적들로부터 이사벨의 개인 공로를 따로 떼어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궁정이 세력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데 그녀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푸른 눈에 금발의 머리칼, 보석으로 치장하고 눈부신 의상을 입은 그녀는 놀라운 용모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이와 함께 그녀의 외양은 종교적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신앙의 조언자로 그녀가 선택한 인물들은 에르난도 데 탈라베라와 시스네로스 추기경과 같이 특이하고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스페인에서 교회개혁 정책은 15세기초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사벨과 탈라베라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1492년 탈라베라가 그라나다의 대주교가 되자, 탈라베라가 하던 여왕의 신앙조언자 역을 시스네로스가 도맡게 되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1495년 시스네로스를 톨레도의 대주교라는 중요한 직책에 오르도록 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교구사제의 개혁에 관심을 쏟았으며, 수도회의 개혁에도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사벨이 죽었을 때 아직 개혁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는데, 후임 통치자들과 시스네로스는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품었던 목적의 달성을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수행했다. 신앙에 관한 한 대단히 경건하고 정통주의를 고수했으며, 특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페르난도와 함께 '가톨릭 부부왕'(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했지만, 이사벨은 교황과의 관계에서는 당당하고 끈질긴 면을 발휘했다. 교황이 스페인에 불리하게 성직자를 임명한 것은 스페인 교회에 대한 관례적인 스페인 군주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여긴 데서 그녀의 이같은 면이 잘 드러난다. 일례로 이사벨은 1478년 쿠엥카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교황이 이탈리아 추기경을 쿠엥카 주교로 임명한 것을 거부했다. 4년 후 교황은 스페인 출신의 성직자를 쿠엥카 주교로 임명했다. 뒤이어 이사벨은 교황의 조카를 세비야의 대주교에 임명하려는 데 대해 퇴짜를 놓았다. 카스티야의 주교구들에 대한 성직임명권을 통제하려 했던 이사벨이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에만 고무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녀는 인품과 학문적 수준이 높은 성직후보자들을 물색했다. 그녀가 탈라베라와 키스네로스와 같은 인물들을 선택한 것을 볼 때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 실질적인 측면을 크게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종교분야 만큼이나 교육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능숙한 수준의 라틴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30세가 넘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다. 이사벨은 피에트르 마르티레 당기에라를 귀족자제들을 위한 궁정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는 등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여 학문을 장려했다. 그녀의 통치기에 나온 안토니오 데 네브리야의 〈카스티야어 문법론 Gramática Castellana〉(1492)과 같은 탁월한 저서 가운데 다수가 자연히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스페인과 플랑드르의 미술가들을 적극 후원했으며, 그녀가 소장했던 상당수의 미술작품 가운데 일부가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사벨 집권기의 마지막 10년은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 후안의 사망(1497)을 비롯해 가족을 둘러싼 슬픔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1498년 포르투갈의 왕비인 그녀의 딸 이사벨이 분만도중 숨졌으며, 1500년에는 외손자인 미겔도 죽었는데 미겔은 오래 살았더라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을 가져올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한편 이사벨의 또다른 딸로서 필리프 1세의 아내이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어머니인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상속자가 되었으나, 이마저도 후아나가 1501년 정신이상 증세를 보임에 따라 이사벨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나중에 후아나는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지막 10년간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는 단연코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군사조직체인 알칸타라 기사단와 칼라트라바, 산티아고 등에 자신들의 권한을 확대시키고, 이에 따라 이들 조직이 보유한 막대한 자산과 후원세력들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사벨의 선도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들 군사조직은 너무나 오랫동안 귀족들에게 이용되어왔으며, 각각의 조직체 대장에 선출되려는 사람들간의 치열한 다툼에도 동원되었다. 1487년 페르난도는 칼라트라바의 대장이 되었으며, 1499년에는 알칸타라 기사단과 산티아고의 대장까지 겸했다. 그라나다 정복으로 이들 군사조직의 주요임무가 완수되었으며, 따라서 이들 조직을 왕의 지휘권 아래로 흡수시킨 것은 당연하고도 현명한 귀결이었다.
평가 이사벨의 훌륭한 식견과 정치적 능력은 그녀의 유언장과 유언 보충서에 똑같이 잘 반영되어 있다.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유언장은 그녀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한다. 이사벨은 유언장에 자신의 열망과 함께 자신과 페르난도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는 점을 잘 요약해놓는 한편,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정치 계획의 기본토대를 설명했다. 즉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통합,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통제권의 유지,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세력확대 정책,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정의로운 통치, 국내 교회의 개혁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전반적인 느낌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계획이 단편적이라는 감을 지울 수 없지만 그녀가 후임자들에게 비범한 문서를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같은 사실은 학자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이 이사벨을 자신들의 군주 가운데 최고의 인물로 여김으로써 이 출중한 여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J. R .L. Higfield 글)
[1992년] 부산지역 종교인 시민단체 대표 34명, 이인모 송환탄원서 통일원에 제출 인민군 종군기자로 참전하였다가 체포되어 34년간의 옥살이 끝에 출감한 이인모(76세) 씨의 귀향을 요구하는 부산지역 각계인사 34명의 탄원서를 접수하고 이를 통일원 장관에게 보내다. 이 탄원은 최초로 이인모 씨의 귀향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으로 후일 이인모 씨 송환운동의 계기가 된다. (한국교회인권선교20년사) NCC인권위원회
[1370년] 바스티유 요새(후에 바스티유 감옥) 공사 시작 바스티유(Bastille)는 1370~1382년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건설된 요새로, 17,18세기 국사범(國事犯)을 수용하면서 유명해졌다. 바스티유란 본래 중세기에 성채(城砦)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1370년 백년전쟁 때 파리 방위를 위해 이 요새가 건설된 이후 고유명사가 되었다. 루이 13세 때 정치가 리슐리외가 감옥으로 개조하고, 1649년 1월 프롱드의 난 때는 파리 시민들이 난입하여 일시 시민군이 장악하였다. 루이 14세 친정(親政) 이후에는 귀족 ·문필가 등의 국사범을 투옥하였다. 이후 바스티유는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변모하여 시인 볼테르, 사상가 디드로 등도 한때 이곳에 구금되었다. 1783년 반(反)철학파 학자 랑케가 바스티유감옥의 비밀을 공개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 점령하였으며 그 뒤 감옥은 혁명정부의 명령으로 철거되었다. 1880년 이 날을 국경일(바스티유기념일)로 정하였다.
[1766년] 프랑스계 스위스의 여류 평론가, 소설가 스탈(Staël, Germaine de, 1766~1817) 출생 별칭은 Madame de Staël. 파리 출생. 루이 16세 때의 재정가 ·정치가인 J.네케르의 딸로서, 주불 스웨덴 대사인 스탈 남작과 결혼하였다. 소녀 시절에 어머니의 살롱에 모이는 계몽사상가들과의 교유에서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사상을 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 입헌 군주주의를 신봉하여, 여러 번 국외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입헌사상의 획기적 저서인 《입헌 정치론》으로 유명한 B.콩스탕과 친하게 지냈고, 자유사상을 탄압한 나폴레옹과의 불화로 1803년 국외로 추방되어, 독일 ·이탈리아를 거쳐, 장기간 스위스의 코메에 체재하면서 그 곳에서 작품을 썼다. 소설은 《델핀 Delphine》(1802) 《코린 Corinne》(1805)이 있고, 논문은 《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고찰한 문학론 De la Littérature considérée dans ses rapports avec les institutions sociales》(1800) 《독일론 De l’Allemagne》(1810)이 있다. 그녀는 예술적 감성보다도 해박한 비판적 지성을 지니고 있어, 그 문학론은 사회환경과 문학의 관계에 착안하여, 19세기의 H.A.텐 등의 실증적 비평의 선구가 되었으며, 《독일론》은 북방문학으로서의 독일문학을 발견하고 초국가적인 유럽 문학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은 비평사상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진다. 이 책에서 낭만주의적인 게르만 문화를 소개하여, 프랑스 낭만주의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1884년] 우정총국 직제 반포
1884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정총국 직제가 반포됐다. 병조참판이면서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홍영식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미국 등지를 돌아보면서 우정사업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인식, 고종에게 이를 건의한 결과였다. 그후 조직, 법령 제정, 우표발행 준비 등을 거쳐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5문(文) 10문(당시 화폐단위)의 우표를 발행하면서 우정업무가 본격 시작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잔치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우정업무가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우정총국이 생기기 전까지 우편제도는 사대부들이 하인을 시켜 소식을 전달하거나 군사 또는 공무용으로만 활용됐으며 일반 백성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우정총국 이후의 근대식 우정제도는 누구나 일정 요금만 내면 지역이나 거리에 관계없이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였다. 이처럼 우정제도의 도입은 오늘날의 디지털혁명처럼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근대식 행정제도의 효시가 됐다.
그밖에 2004년 명상록 쓴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두상 요르단서 발견 2004년 한일 공동연구진, 정자없이 난자 2개로 생식 성공 2004년 북한 신의주인근 룡천역(용천역)서 대규모 열차 폭발사고 발생 2003년 심은하, 동양화가로 데뷔 2001년 박세리 미국 LPGA 투어 롱스드럭스챌린지대회 우승 2001년 미국인 현각 스님, 현정사 주지로 취임 - 한국 사찰의 첫 외국인 스님 1997년 페루 일본대사관 인질 구출 1995년 르완다 난민학살사건 1994년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사망 1993년 경원전문대 입시부정 비리로 29명 구속 1993년 명왕성외곽서 소천체 발견 1993년 인터넷에 혁명을 가져온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 탄생 1991년 움자긴 체덴발 전 몽골공산당 서기장 사망 - 32년간 몽골을 통치 1989년 미국 물리학자 세그레 사망 1986년 루마니아 종교학자 머시아 엘리아데 사망 1984년 영국-리비아 국교단절 1983년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하인스 사망 1983년 월성 원자력발전소 3호기 준공 1983년 고리원자력발전 2호기 최초 발전 1983년 대만조종사 중국으로 망명 1982년 말레이시아 총선, 연합국민전선 재집권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1982년 강원대생 200여명, 성조기 태우며 반미 시위 1980년 유럽연합(EC), 미국인 인질사건 관련 대 이란 집단제재 조치 1979년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 내한 1974년 미국 팬암기 인도네시아서 추락 107명 사망 1971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아이티 독재자 뒤발리에 사망 1967년 한국, 프라하 세계여자농구대회서 준우승, 첫 여자농구 세계 준우승 1964년 뉴욕서 세계박람회 개막 1961년 한일통상협정(현금결제) 조인 1958년 영국군 아덴 보호령 기습 1955년 한미 민간구호활동에 관한 협정 체결 1945년 소련군 베를린 입성-제2차 세계대전 종식 1931년 이집트-이라크 상호우호조약 조인 1930년 미국-영국-일본- 런던 해군 군축조약 조인 1930년 국제결재은행 설립 1915년 독일, 인류 최초로 독가스 사용 1906년 훈련원서 최초의 자전거대회 개최 1904년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한 미국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출생 1899년 러시아 출신 영미소설의 대표적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출생 1896년 러시아인, 노원-경성의 광산권 획득 1854년 벨기에의 국제변호사 라퐁텐 출생 - 국제평화국 국장(1907~1943)으로서 191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 1834년 1959년 최초로 축전지를 만든 프랑스의 물리학자 플랑테 출생 1821년 영국의 풍경화가 크롬 사망 1688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대 총장인 디킨슨 출생 1520년 왕자 호를 세자에 책봉함 1500년 포르투갈 카브랄 제독, 브라질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