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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7)-
동광원의 추억
이신웅
77살 봄부터 나는 광야가 그리워졌다. 인적이 없고 어떤 불빛도 없는 그곳에서 하늘을 보고 싶었다. 낮에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밤에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길 원했다. 우주를 느끼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창세기도 새롭게 이해되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로코에 가서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볼까, 중앙아시아 고원에서 쓸쓸한 밤을 지내볼까, 몽골의 대평원에서 밤하늘별을 볼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내년 봄에 러시아의 고도에 있는 오래된 수도원들을 방문하는 여행계획을 세웠다.
지난봄에 남원시 대산면에 있는 동광원에 찾아가 원장으로 계시는 김금남 누님께서 한 아름 안겨주신 책을 읽다가 나의 무의식이 찾고 있는 광야가 지리적인 곳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영혼에 영향을 주었던 곳, 가치관과 인격형성을 주도했던 분위기, 가르침들, 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동광원이었다.
동광원(東光院)은 좀 별난 기독교 수도공동체이다. 해방되기 몇 년 전에 전라북도 남원읍에서 태동한 신앙운동인데 이현필(李鉉弼 1913-1964) 선생이 중심이 되어 신앙을 실천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광원 식구들을 접하고 살았지만 이현필 선생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내가 훨씬 자란 뒤였다. 그분이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출신이라는 것, 그 고장의 현자 또는 성자로 불리는 이공(李空, 이세종) 선생에게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심지어 젊었을 때 잠간 결혼했다가 해혼(解婚)하신 부인이 내 친구 백석윤의 이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종누님 김금남 원장이 주신 책을 읽고 난 후였다.
내가 느끼고 이해하기로는 동광원 사람들은 선택한 가난과 걸식으로 겸손과 온유의 자아를 형성하고 하나님과 이현필 선생에게 순명(順命)하는 사람들이었다. 철저한 자기희생과 자기비하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이웃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분들이었다. 별난 일은 육식을 금하고 결혼과 가정생활을 금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한 분들은 해혼하거나 출가를 했다. 모든 죄악의 근원이 성적욕구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항상 극히 검소한 옷차림으로 끊임없이 노동하여 자급자족하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의 신앙의 영향으로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과전문의가 된 후까지 예수를 잘 믿으려면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강부남 권사님은 1남 4녀 중 막내딸이었는데 남원에서 처녀 때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위로 세 언니를 전도했으나 막상 동광원에 출가하지 못하고 남은 분은 우리 어머니뿐이셨다. 위로 강화선 강남순 강차남 이모님들은 남원 오북환 집사의 삼일목공소에서 시작한 동광원의 초창기 멤버셨다. 말하자면 네 자매가 모두 출가를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억세어서 어머니의 출가를 막은 것이다. “너희 어머니 머리채를 잡고 남원 견두산을 내려왔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기록을 찾아보면 이현필 선생이 1945. 8. 15일 남원을 세 번째 방문하여 서리내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때 그 현장에서 우리 어머니가 끌려오신 것 같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고 마침내 어머니는 출가를 단념하고 남원읍 교회에서 전도부인의 일을 하시게 되었다. 그러자 동광원 식구들에게 우리 집이 개방되었고 오가며 들르시기도 하고 이현필 선생이 오셔서 며칠 머무르며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7-8분의 지역 동광원 식구들이 모이고 거의 금식하며 종일 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때 나는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집 골방에서 형뻘 되는 모르는 소년 한명과 나를 두고 이현필 선생께서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신 일이다. “한 소년과 누나는 각기 바구니를 들고 산으로 산딸기를 따러갔다. 산기슭에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려있었다. 소년은 잘 익고 실한 딸기만을 찾아서 온 산을 헤집고 다녔고 누나는 산딸기나무 하나에서 모든 딸기를 다 따고 다른 나무로 옮겨 딸기를 땄다. 누나는 많은 딸기를 따게 되었고 소년은 얼마 되지 않은 딸기를 따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노년이 된 나는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뜻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께서 해방 전부터 소중히 쓰시던 나무로 만든 ‘손 궤’가 있는데 동광원 오집사가 만든 것이라고 했고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셨다는 ‘장롱’은 군데군데 부서져서 고친 흔적이 있다. 어머니께서 동광원에서 잡혀와 폭행을 당하실 때 부서진 가구의 흔적이다.
한번은 이 선생님 머리가 너무 길어서 흉하게 보이자 우리 아버지께서 바리캉으로 이발을 해드린 일이 있다. 마당에서 의자에 앉아 이발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선생님의 머리를 꼭대기에만 남겨놓아 배추처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선생님은 좋다고 괜찮다고 하시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목포에서 기차로 오셨다는 동광원 선생님 한 분은 검정 신사복을 입고 근엄한 분이셨는데 나를 학교 근처 이발소에 데려가 이발을 시켜주신 일이 있다. 동광원 식구들의 명단을 보아도 어느 분이셨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나자 우리는 ‘에끼재’라는 산골로 피난을 갔다. 수지면 갈보리에 계시던 강남순 이모께서 많이 아프시다는 전갈을 받고 외삼촌과 어머니는 문병을 가셨다. 한 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무서 서원들이 둘러서서 총을 겨누고 고함을 쳐서 깨어나셨다. 전쟁 통에 외지인이 왔으니 첩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거울로 비행기에 신호를 보내는 첩자가 아니냐고 다그쳐 죽을 번했으나 내무서에 동광원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UN군이 들어와 수복된 후 얼마 지나서 우리 집에 흰머리 미국 할머니가 동광원 식구들과 온 일이 있다. 미국 여자를 보는 것도 신기했지만 동광원 식구인데 달걀과 명태국을 끓여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동광원 식구가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자료를 살펴보니 남원읍 교회에서 이현필 선생과 유화례 선교사가 전도 집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우리 집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유화례(Florence E. Root) 선교사는 광주에서 일하시던 미국 남장로회 파견 선교사이신데 6.25 때 피난을 가지 않고 동광원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77일간을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서 피신하여 살아남으신 분이다. 순남 누나의 말에 의하면 산에 나무를 하는 것처럼 산에 올라가 밥을 날랐다고 한다. 전쟁 통에 동광원 식구들이 8분이나 순교하셨다. UN군들이 들어와 수복된 후에도 패잔병들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기 때문에 낮에는 경찰력이 미쳤으나 밤에는 인민군 빨치산이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도암면 도구밖골 문바위에서 기도하시던 우리 이모 강차남씨, 문재현씨, 서울 어머니가 빨치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어 순교의 피를 땅에 뿌렸다.
1959년 내가 전남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하여 첫 학기 강의를 듣는데 국문학개론, 철학, 경제학개론, 영어, 라틴어까지 배우고 희한하게 전학기에는 기독교개론, 후학기에는 불교개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의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들기 위해 최상채 총장이 계시던 전남대학교는 인문학 교육에 열을 쏟았다. 기독교개론을 강의한 교수는 광주 동부교회 백영흠 목사님이셨다. 그래서 자연히 동부교회에 다녔고 같은 과에 다니던 목사님 아들 백석윤이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처제분이 이현필 선생의 부인이셨던 것을 알게 되어 놀랐다. 백영흠 목사님은 광주의 기독교 유지들과 함께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설립하여 ‘동광원’이라 했고 고아원이 해체되자 고아원을 운영하던 이현필 선생의 수도공동체가 동광원으로 불려졌다.
의예과에 다니던 때 몇 번 방림동에 계시던 이현필 선생을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 나는 어느날 일기를 이렇게 썼다.
1960. 3. 29 화요일
‘순남 누나와 함께 아침 일찍 동광원에 갔다. 이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 우상숭배자라고. 허영은 우상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의사가 되더라도 슈바이쳐처럼 되지 못할 바엔 별수 없이 의사도 도둑이 된다고. 착한 돈이 없는 사람은 병에 죽어가고 악한 돈이 많은 자는 좋은 약과 의사의 정성으로 다시 악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의사가 되자고 결심을 했다.’
그 후에도 몇 번 이현필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씀을 들었다. 움막 같은 어두운 방에서 절을 못하게 하고 무릎을 꿇고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간디, 프란체스코, 슈바이쳐 이야기를 하셨다. 그해 11월 6일 일기에는 동광원에 갔으나 이선생님은 안계시고 어느 젊은 분이 슈바이쳐 이야기, 자기도 의사가 되려 했으나 목표가 변하여 현재상태로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썼다. 아마 김준호 선생이었던 것 같다.
그해 여름방학 때 강남순 이모님이 계시던 갈보리와 강화선 이모님이 계시던 서리내에서 며칠 지난 일이 있다.
1960. 8. 17 수요일
책을 몇 권 싸들고 수지면으로 왔다. 논길을 지나고 물을 건너서 땀을 흘리며 걸었다. 이모님이 계시는 이곳은 항상 바쁘고 일이 많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이모님이 수고하시는 것을 볼 때 내 자신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동남쪽 견두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을 쏘이며 뒷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별을 구경한다.
1960. 8. 21 일요일
작은 동네 교회에 나가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재를 넘어 강화선 이모님이 계시는 서리내에 가기로 했다. 견두산에 오른다. 땀이 나고 숨이 가빠진다. 젊은 나도 이렇게 힘든데 이모님들은 왜 이렇게 사시는지 새삼스럽게 이모님들을 생각하게 됐다. 풀꾼들은 산 위에서 노래를 하며 풀을 한다. 간신히 능선을 올라 허리까지 휘감기는 풀숲을 지나서 칡넝쿨 속을 거쳐서 큰 이모님 집에 왔다. 서리내. 동네도 없이 산 가운데에 홀로 서있다. 산골짜기 건너편에 집이 두 채 보일 뿐이다. 이모님의 거처는 돌과 흙으로 쌓아올리고 아카시아로 지붕을 얹은 그야말로 산간의 작은 움막이다. 시원한 골짜기 샘물에서 몸을 씻고 감자와 잡곡밥을 먹었다.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고 오직 예수의 길만 따르는 이모님으로부터 무한한 무언의 교훈을 얻는다.
1960. 8. 22 월요일
아침밥을 먹고 산을 내려왔다. 산 능선에 다 오르기까지 이모님은 그 자리에 서서 내 뒷모습을 보고 계셨다. 서글픈 광경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늙은이 혼자 기도하고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이모님을 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산을 내려오기는 오르기보다 쉬웠다. 중턱쯤 내려왔을 때 홈실 동네 사람들이 길을 고치러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순남 누나, 이모님, 길순씨와 함께 무우를 심기 위해 땅을 팠다. 지금은 밤이다. 오후부터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더니 태풍이 되어버렸다. 날리는 소리, 찢어지는 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벽이 흔들린다. 문으로 비가 몰아쳐 들어온다. 온 방안에 물이 고인다. 밖으로 나가서 문을 가마니로 막는다. 밭의 모든 것은 쓰러지고 날아가 버렸다. 바람이 들어와 촛불을 꺼버린다. 이불을 몸에 감고 앉아 있지만 찢어진 문을 뚫고 빗줄기는 이불 속으로 날아든다. 금방이라도 집이 무너질 것 같다. 큰 방으로 가서 이모님과 함께 떨고 앉아서 기도하고 찬송했다.
긴 밤이 지나고 가마니로 가려놓은 창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지붕이 새어 종이와 흙이 떨어진다. 방안이 온통 물이다. 비를 맞고 나가서 집을 살펴보고 쪼르르 젖은 옷을 입은 채 아침예배를 드렸다.
1960. 8. 24 수요일
양손에 짐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큰 바람에 전신주가 쓰러지고 가로수가 뽑혔다. 집에 와서 신문을 보니 ‘카르멘 15호’. 태풍을 갈보리에서 강남순 이모님과 함께 맞은 것이다. 우리가 태풍의 길목에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주예수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 인턴 때 예수병원 인턴이 4개월간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어 있었다. 제중병원 원장은 카딩턴 선교사였는데 내과 의사였고 주말에는 시내 전도를 나가서 다리 밑의 거지, 폐병환자들을 데려와 입원 치료시켰다. 카딩턴 선교사(고허번, Herburt A. Codington Jr. 1920-2003)는 1949년 7월에 한국에 와서 목포 결핵요양원에서 일하다가 제중병원으로 왔다. 그는 한국인들 특히 어려운 사람들, 결핵환자들을 사랑했고 헌신적이었다. 자기 아이들의 장난감을 고아들이 입원 중인 영아실로 가져왔고 막상 자기 아이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환자들이 사주는 붕어빵을 기쁘게 받아먹었다. 한번은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는 길에 서대전 역에서 병든 거지 한명을 편지를 써서 보냈다. 당당하게 응급실에 도착한 거지가 내민 편지에는 이 분이 도착하면 입원시켜 잘 치료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나치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카딩턴을 다른 선교사들은 ‘품위를 손상 시킨다’고 싫어했고 외과 의료선교사는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제중병원에는 일반병실 외에 심한 결핵환자만 격리 치료하는 결핵병동이 있었다. 군용 콘세트 막사 세 채를 결핵병동으로 사용했는데 40-50 명의 중증 결핵환자들이 치료받고 있었다. 폐에 구멍이 뚫리고 수시로 각혈을 하고 약을 먹어도 결핵균을 배출하는 ‘Open Tbc'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우 선생이라는 내과 레지던트가 카딩턴을 도와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환자들은 가족들로부터도 외면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입원기간 6개월이 되어 퇴원해야 할 때 갈 곳이 없었다. 카딩턴과 뜻을 같이 했던 이현필 선생은 퇴원환자들을 수용하여 무등산 중턱애 움막을 짓고 그들을 보살폈다.
내가 소아과를 돌 때 많은 고아들이 입원해 있었는데 푸른 유니폼을 입은 몇 명의 처녀들이 간호보조사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간호조무사라는 직업이 없을 때였는데 동광원 식구들이 무보수로 병원 일을 도운 것이다. 또 병원의 남은 밥을 수거하여 물로 씻어서 말린 다음 그것으로 죽을 만들어 움막의 결핵환자들을 먹여 살렸다. 동광원은 자체가 기독교 수도공동체였지만 고아들을 키우고 버려진 중증 결핵환자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기관의 기능을 감당했다. 이현필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동광원 식구들이 결핵에 감염 되었으나 믿음으로 극복해냈다.
어느 책에 보니까 6.25 때 카딩턴 선교사가 일본에 피난했다가 돌아왔다고 기술한 곳이 있었는데 바르지 않은 기록이다. 내가 예수병원 원장 닥터 크레인(Paul S. Crane)과 수술을 같이 할 때 들은 이야기로는 자기는 예수병원의 모든 장비를 닷지 차에 싣고 커버로 씌우고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서 짐도 풀지 않고 기다리다가 UN군에 의하여 전주가 수복되자 바로 돌아와서 병원을 열었다고, 또 선교사 중에 유일하게 부산에 남아서 혈액은행을 운영하며 전상환자를 도운 분은 카딩턴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현필 선생과 카딩턴 선교사는 신앙으로 서로 통하고 지향하는 목표가 같았기 때문에 각별한 사이였고 그래서 카딩턴은 동광원 사업을 많이 도왔던 것이다. 1979년 카딩턴 선교사는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한국의 전문 의사들이 많이 배출되자 방글라데시로 떠나 다카 북부의 도시 빈민촌에서 흙벽돌로 지은 진료소에서 일하며 한국에서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전도했다고 한다.
이제 나도 노년의 나이에 나의 영혼의 깊은 바닥을 이루고 있는 동광원 사람들, 그 가르침이 그리워진다. 이현필 선생은 평생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여 고뇌하고 기도하신 분이시다. 성인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지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도 사람에게 보이려 하면 죄다”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