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續三 / 卿宰
이효장(李孝長) 묘표(墓表) - 김재로(金在魯)
충원(忠原) 이정엽(李鼎燁)은 우리 선영(先塋)이 있는 고장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소탈하며 특히 선조(先祖)를 지성으로 모셔 자신이 포의(布衣)여서 힘이 미치지 못한 것을 따지지 않고 6대조 이하 선조의 표식(表識)이 없는 무덤에 널리 당세 명공(名公) 문사(文士)의 글을 받아서 차례대로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다.
하루는 나를 보더니 서글피 말하기를, “우리 9대조 도관찰공(都觀察公, 이효장)은 두 번이나 문과(文科)에 올라 품계가 아경(亞卿)에까지 올라 당시의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손이 미약해서 사적이 묻혀 어둡게 되었는데, 구비(舊碑)가 마모되어 읽을 수가 없어 슬픕니다. 제가 서둘러 관찰공의 비갈(碑碣)부터 고쳐 세우고 그런 다음 가까운 세대(世代)에 미치고자 합니다.
원컨대 저를 위해 그 대략을 적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그대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선후(先後)를 잘 안다고 하겠다. 그러나 공의 연대가 너무 멀어서 조정에 선 본말과 관력(官歷)ㆍ치적(治績)을 상고할 수 없고 아울러 표덕(表德)이 전하는 바가 없으니, 매우 한스럽다.” 하고는, 삼가 명백히 징신(徵信)할 수 있는 것만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휘(諱)는 효장(孝長)인데 그 선대는 전의인(全義人)이다. 원조(遠祖) 태사(太師) 이도(李棹)는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도와 큰공을 세웠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이구직(李丘直)은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전서(戶曹典書)요, 그 아들 이정간(李貞幹)은 자헌 대부(資憲大夫)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시호(諡號)가 효정(孝靖)인데 나이 80세에 1백 세 된 대부인(大夫人)을 효성으로 봉양해서 노래자(老萊子)란 칭호1)가 있었다.
그 아들 이사관(李士寬)은 가정 대부(嘉靖大夫)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영의정(領議政) 전성 부원군(全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로 아들 일곱을 낳았으니, 그중 다섯은 문과에 급제하고 하나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공은 여섯째이다.
세종(世宗) 정묘년(丁卯年, 1447, 세종 29) 문과에 오르고, 단종(端宗) 계유년(癸酉年, 1453, 단종 원년) 사섬시 영(司贍寺令)으로 경상 도사(慶尙都事)를 제수받았다. 갑술년(甲戌年, 1454, 단종 2)에 내직으로 옮겨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이 되었다.
세조(世祖)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중시(重試)에 합격하니 형 이함장(李諴長)과 더불어 동방(同榜)이었다. 계미년(癸未年, 1463, 세조 9) 4월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6월 28일 영(營)에서 졸(卒)하였다.
≪국조방목(國朝榜目)≫ 및 영남(嶺南) 선생안 2) (先生案)에 의거하면 여기에 그친다. 장지(葬地)는 충주(忠州) 금천리(金遷里) 동점산(銅店山) 경좌(庚坐)의 언덕이다. 정부인(貞夫人)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바로 우리 10대조 관찰사 김의지(金義之)의 딸인데, 공에게 부장(祔葬)하였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원식(李源植)은 후사가 없고, 다음 이원달(李源達)은 별좌(別坐)이며, 막내 이원영(李源英)은 군수이며, 딸은 판돈녕(判敦寧) 윤탄(尹坦)과 첨지(僉知) 최옥호(崔玉浩)에게 시집갔다. 이원달은 아들이 셋인데, 이계우(李繼佑)는 부사직(副司直)이요,
다음은 이계지(李繼祉)와 이계조(李繼祚)이다. 이원영(李源英)은 아들이 넷인데, 이창근(李昌根)은 찰방(察訪)이요, 이창번(李昌蕃)은 현감(縣監)이요, 이창무(李昌茂)는 현령(縣令)이요, 이창연(李昌衍)은 판관(判官)이다. 윤탄의 아들 윤상로(尹商老)는 부사(府使)요, 윤형로(尹衡老)는 영양군(鈴陽君)이다.
이계우의 아들 이유성(李有成)과 이수성(李遂成)은 명종(明宗) 기유년(己酉年, 1549, 명종 4)에 주천(舟川) 강유선(康惟善)과 함께 사화(士禍)를 입었으며 아우 이윤성(李允成) 역시 적몰(籍沒)되어 노예(奴隸)가 되었는데, 후에 모두 신설(伸雪)되었다. 가승(家乘)이 없어진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공의 후손이 부진(不振)하여 간혹 동중추(同中樞)가 된 자가 있고 또 대소과(大小科)에 합격한 자도 있지만 모두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외예(外裔)로 이원영의 사위는 전적(典籍) 박유(朴瑜)요, 윤탄의 사위는 첨지 임맹영(任孟瑛), 별좌 안현(安顯)이요, 이창연의 사위는 감찰(監察) 최황(崔韹)이다.
네 집의 자손이 아주 많은데, 현달한 자는 참판 박민헌(朴民獻)ㆍ정두경(鄭斗卿)ㆍ윤문거(尹文擧)ㆍ박황(朴潢)ㆍ박세모(朴世模), 판서 조연(趙衍)ㆍ이경휘(李慶徽), 의정(議政) 이경억(李慶億)ㆍ신익상(申翼相)ㆍ서문중(徐文重)ㆍ이세백(李世白)ㆍ윤증(尹拯)ㆍ신완(申琓)ㆍ조상우(趙相愚)ㆍ서종태(徐宗泰), 참판(參判) 이인환(李寅煥), 판서(判書) 신임(申銋)ㆍ서문유(徐文裕)ㆍ이인엽(李寅燁)ㆍ이만성(李晩成),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의정(議政) 이태좌(李台佐)ㆍ심수현(沈壽賢)ㆍ이의현(李宜顯)ㆍ서명균(徐命均)ㆍ조문명(趙文命)ㆍ조현명(趙顯命)ㆍ유척기(兪拓基), 판서 신사철(申思喆)ㆍ윤혜교(尹惠敎)ㆍ이재(李縡)ㆍ이기진(李箕鎭)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정엽(李鼎燁)은 바로 이윤성(李允成)의 6대손이다.
각주
1) 노래자(老萊子)는 초(楚)나라의 현인(賢人). 중국의 24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이 70세에 어린애의 옷을 입고 어린애 같은 장난
을 하여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음.
2) 선생안(先生案) : 각 관아에서 전임(前任) 관원의 이름ㆍ직명(職名)ㆍ생년월일ㆍ본적 등을 적은 책.
--------------------------------------------------------------------------------------------------------------------------------------------------------
[原文]
忠原李生鼎燁, 余丘墓鄕人也。 端良有疎, 致尤於奉先有至誠, 不計身布衣力不逮, 六代以下先墓之無表識者, 遍求當世名公文士之筆, 將次第營豎。 一日見余, 愀然曰: “吾九代祖都觀察公, 再登文科, 秩至亞卿, 爲時名臣。 而子姓殘微, 事蹟茫昧, 墓舊有碣, 而刓不可讀, 竊悲之。 今欲亟改觀察公碣, 迺及於近世墓刻, 願爲我記其大略。” 余聞而歎曰: “如君直可謂能孝, 而其亦知所先後矣。 雖然, 公之年代踔遠, 立朝本末、官歷、行治, 無由考稽, 竝與表德而無傳, 是甚可恨。” 謹以明白徵信者, 麤敍如左。
公諱孝長, 其先全義人。 遠祖太師棹, 佐麗祖有大功。 入我朝, 有諱丘直, 嘉善大夫、戶曹典書。 生諱貞幹, 資憲大夫、中樞院使, 諡孝靖, 年八十, 孝養百歲大夫人, 有老萊子之稱。 生諱士寬, 嘉靖大夫、漢城府尹, 贈領議政、全城府院君。 配淸州韓氏, 領議政尙敬之女。 寔生七子, 其五文科, 其一武科, 公序居第六。
世宗丁卯, 登文科。 端宗癸酉, 以司贍令, 拜慶尙都事。 甲戌, 內遷繕工副正。 世祖丁丑, 以政府舍人中重試, 與兄諴長同榜。 癸未四月, 以嘉善出爲慶尙道都觀察黜陟使。 六月二十八日, 卒于營。 據《國朝榜目》及嶺南《先生案》者止此。 葬在忠州金遷里銅店山員庚之原。 貞夫人淸風金氏, 卽我十代祖觀察使諱義之之女, 祔葬于公。
擧三男二女: 男長源植, 無后: 次源達, 別坐: 季源英, 郡守。 女適判敦寧尹坦、僉知崔玉浩。 源達三子: 繼佑, 副司直: 繼祉: 繼祚。 源英四子: 昌根, 察訪: 昌蕃, 縣監: 昌茂, 縣令: 昌衍, 判官。 尹坦子商老, 府使: 衡老, 鈴陽君。 繼佑之子有成、遂成, 明宗己酉, 與康舟川惟善同被士禍: 弟允成亦沒爲隷, 後皆伸雪。 然家乘之一皆蕩失, 實由於此。
公之後仍而不振, 間有爲同中樞, 亦有中大、小科者, 而皆未顯。 外裔則源英女典籍朴瑜, 尹坦女僉知任孟瑛、別坐安顯, 昌衍女監察崔韹。 四家子孫俱多顯者, 參判朴民獻、鄭斗卿、尹文擧、朴潢、朴世模, 判書趙衍、李慶徽, 議政李慶億、申翼相、徐文重、李世白、尹拯、申琓、趙相愚、徐宗泰, 參判李寅煥, 判書申銋、徐文裕、李寅燁、李晩成, 錦平尉朴弼成, 議政李台佐、沈壽賢、李宜顯、徐命均、趙文命、趙顯命、兪拓基, 判書申思喆、尹惠敎、李縡、李箕鎭, 餘不能盡記。 鼎燁卽允成六代孫也。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