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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예절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은석
아래 자료는 2010년 도산우리예절원 상반기 답사 시에 수련생 여러분들께 제공되어지는 자료집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송은석 배상
전통예절과 생활사례 -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한지마을 - 제2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2010. 4. 17(토) - 18(일) 제6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2010. 5. 1(토) - 2(일) 陶山우리禮節院 (http://cafe.daum.net/dosanyaewon)
【 목차 】 도산우리예절원 전통예절과 생활사례(답사) 연혁-------------1 도산서원(陶山書院)---------------------------------------3 소수서원(紹修書院)--------------------------------------15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21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26 병산서원(屛山書院)---------------------------------------31 길제(吉祭)------------------------------------------------40 알묘(謁廟)와 봉심(奉審)----------------------------------41 小學구조와 읽는 自矜心----------------------------------42 退溪 詩 吟味--------------------------------------------55 도산우리예절원 전통예절과 생활사례(답사) 연혁 ◯ 전통예절지도자과정 제1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2005.4.1(노송정종택, 퇴계종택, 퇴계기념공원, 퇴계산소, 이육사문학관) - 상반기 6. 25 (안동지방, 하회마을, 학봉종택, 張太師齋舍) - 하반기 11. 12 (상주지방, 우복종가, 정기룡장군사당, 사벌왕릉) 제2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6.6.10-11 (학봉종택, 경당종택, 서애종택, 하회마을, 국학 진흥원) - 하반기 2006.10.21 (사벌왕릉, 정기룡장군사당, 우복종가, 유교박물관,세재박물 관) 제3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7.6.22-23(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산소, 퇴계태실, 이육사 문학관, 농암종택, 국학진흥원) - 하반기 2007.10.27 (화기리 인동장씨종택, 소수서원, 괴헌고택) 제4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8.5.24-25 (도산서원, 소수서원, 부석사, 괴헌고택) - 하반기 2008.10.25 (농암종택, 학봉종택, 임천서원) 제5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9.4.18-19 (도산서원, 소수서원, 부석사, 괴헌고택) - 하반기 2009.10.24 (동춘당고택, 우암사적공원, 돈암서원, 명재종택, 종학당) 제6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10.5.1-2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안동 한지마을) - 하반기 (실시예정) ◯ 생활예절지도자과정 제1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2009.10.25 (농암종택, 퇴계산소, 임청각, 안동댐, 독립기념관) 제2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10.4.17-18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안 동 한지마을) - 하반기 (실시예정)
도산서원(陶山書院) [자료출처 : 유교문화권 역사체험 안동(http://tour.koreastudy.or.kr)]
◯ 퇴계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도산서원과 도산서당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창건한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으로 구성되었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1561년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기와집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지원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지었다. 여기까지가 도산서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1574년에 지은 것으로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일종의 도서관격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박약재(博約齋)와 동재 홍의재(弘毅齋), 원장실과 강학 공간인 중앙의 전교당(典敎堂), 퇴계 선생과 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하는 제사공간인 상덕사(尙德祠),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인력이 거주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공간인 상고직사(上庫直舍)로 구성되었다. 도산서원은 1575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뿐만 아니라 한국 유학의 연원이자 구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원 공간의 형태와 구성, 각 공간의 기능과 의미, 관리와 운영 체계 등 모든 면에서 도산서원의 것을 표준으로 삼아 성장, 변형, 발전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몇 가지의 특징을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도산서원의 모든 공간은 그것이 석재이거나 목재이거나 관계없이 방형적(方形的)이고 직선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퇴계가 늘 주장한 ‘곧고 반듯하다[直方]’는 마음가짐을 이러한 직방의 이미지로 가득 찬 공간에서 부지불식간에 체득하기 위한 심리환경적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또 불교시대인 고려의 화려한 장식적 건물과는 달리 조선의 건물은 담백하고 검소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서원에 단청을 하지 않지만, 도선서원만큼은 단청을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도산서원이 공적이고 특별한 예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대부분의 서원 묘당이 맞배형임에도 불구하고, 도산서원의 상덕사는 팔작지붕을 한 것, 삼태극(三太極)의 문양을 도산서원의 상징으로 하여 다양하게 배치한 것, 가로 건물(전교당, 정문, 누문)과 세로 건물(동재와 서재)의 칸 수를(보통 가로 건물은 홀수, 세로 건물은 짝수의 칸 수) 반대로 한 것 등이 특징이다. ▶ 주향(主享)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 한다.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구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 도중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퇴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蓬)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깊은 의미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배향(配享) 조목(趙穆, 1524~1606)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예안현의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 건축 이야기 1969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에 “도산은 선생이 진리를 강론하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하여 서당 뒤로 두어 걸음 나아가 땅을 개척해서 짓기로 하여 조성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7월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이 창건되었고,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받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 이듬해인 1576년 2월 정축일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뜻의 ‘진도문’과 만나게 된다. 진도문 양쪽에는 진리의 빛을 밝혀준다는 뜻의 도서관인 ‘동서광명실’이 자리 잡고 있다. 진도문의 정면에는 바른 것을 가르치는 강당이라는 뜻의 ‘전교당’이 서 있다. 전교당 동북쪽에는 신성한 사당을 지키는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다.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사 건물이 바로 ‘상덕사’이다. 제사 시설인 상덕사와 교육 시설인 전교당이 서원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 또한 상덕사를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켜 서원의 전체 구성이 수직 구조를 가지게 하였다. 도산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 시설인 강당이 앞에 있고 제사 시설인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 배치형태로 후대의 많은 서원이 본받았다.
▶ 현판
상덕사(尙德祠) 굵직하고 탄탄하며 그저 편안한 해서체이다. 사당의 이름으로 덕을 높이 여긴다는 뜻이다.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 진리인 도(道)의 세계 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라는 뜻이다. 『근사록』과 『심경』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광명실(光明室) 도산서원의 장서고에 붙여진 현판이다. 주자의 사언(四言) 가운데 만 권의 서책이 나에게 광명을 안겨준다는 구절이 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친필이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근면 성실하게 생활함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남당(南塘) 진무경(陳茂卿)이 지어서 자신을 경계한 글이다. 전교당의 벽면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원규(院規) 도산서원 원생들의 일생생활을 규정한 원규이다. 그 가운데 눈여겨 볼 규정은 다음과 같다. 하나, 유생들이 독서하는 데는 사서오경을 본원으로 삼고, 『소학』과 『가례』를 문호로 삼아야 하고 ……. 하나, 유생들은 늘 각 방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오로지 독서에 정신을 기울이며 ……. 하나, 책은 문밖에 나갈 수 없고, 여색은 문 안에 들어올 수 없으며, 술은 빚어서는 안 되며, 형벌은 쓸 것이 아니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이 현판은 선조 임금의 사액 현판으로 당시 명필인 석봉 한호가 어전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약재(博約齋) 전교당 앞 동쪽 기숙사인 동재의 현판이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로 학문을 넓히고 예를 지킨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홍의재(弘毅齋) 전교당 앞 서쪽 기숙사인 서재의 현판이다.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구절로 넓고 굳센 마음가짐을 갖고 학문에 임하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사물잠(四勿箴) 이천(伊川) 정이(程?)가 지은 경계해야 할 4가지 가르침이라는 글이다. 전교당에 걸린 현판이다.
도산서원견각신치제문(陶山書院遣閣臣致祭文) 임자년 3월 24일 가신 이만수가 왕명을 받들어 국왕이 직접 지은 제문을 받들고 도산서원에 와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때의 제문이다.
◯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
▶ 내력과 기능 향사일 춘기향례(春期享禮)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이고 추기향례(秋期享禮)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이며, 국기일(國忌日)이나 유고가 있을 경우는 하정일(下丁日)로 늦춘다. 향례(享禮) 봄과 가을 두 차례 퇴계 이황을 추모하는 제사인 향례를 갖는다.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낸다. 향례 3일 전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동서재에 들어와 예를 갖추는 입재(入齋) 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담당 역할을 나누고 제수를 준비하고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기까지 12단계의 경건하고 복잡한 의식을 집행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 내력과 기능 서원의 기능은 존현에 대한 향사와 교육이다. 상덕사가 존현의 향사 기능을 지닌 사당이라면, 전교당은 교육을 담당하는 강당이다. 1969년 보수하였다. 전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평면은 좌측칸을 2통칸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한존재(閑存齋)라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6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을 구성하였다. ◯ 도산서당(陶山書堂)
▶ 내력과 기능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을 위해 건립하였다. 뛰어난 성리학자였던 퇴계 이황은 동시에 훌륭한 건축가였다. 퇴계는 집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알맞은 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1557년에 도산 남쪽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는 성리학으로 무장된 자연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도산서당을 지은 과정은 선생의 제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599)가 쓴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에 적혀 있다. 1558년 퇴계는 그 이듬해에 건축설계도라 할 수 있는 「옥사도자(屋舍圖子)」를 몸소 그렸다. 그리고 집 짓는 일을 맡긴 목수 승려 법련(法蓮)과 집의 제도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퇴계는 자신이 공부하며 거처할 집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방향은 어떻게 놓여야 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법련이 죽자 승려 정일(淨一)이 맡아서 1561년에 도산서당이 완공되었다. 법련과 정일은 서당에서 멀지 않은 용수사(龍壽寺)의 승려였다.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의 부속 건물로 제자들의 숙소로 쓰기 위해 지은 집이다. 도산서당이 완성되기 한 해 전인 경신년(1560) 음력 11월에 완성되었다. ‘농운’은 일반적으로 ‘언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로, 양나라 때의 은자(隱者) 도홍경(陶弘景)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은 후 ‘은자의 처소’라는 뜻으로 쓰였다. 산에는 무엇이 있는가 / 山中何所有 언덕 위엔 흰 구름이 많지 / 隴上多白雲 다만 홀로 즐길 만할 뿐 / 只可自怡悅 그대께 바칠 만하지는 않네 / 不敢持贈君 '농운'이라는 이름은 이 시구의 '농상다백운'에서 취한 것이다. 농운정사(隴雲精舍), 역락서재(亦樂書齋)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부속건물 격이다 ▶ 건축 이야기 도산서당은 3칸의 작은 집이다. 온돌방이 하나, 마루방이 하나 그리고 부엌 하나가 있다. 온돌방은 퇴계 자신이 방 크기를 가로 8자, 세로 7자로 잡았다. 한쪽 벽에는 천여 권 책과 벼루며 붓, 혼천의 등을 놓을 선반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벽에는 침구를 둔 벽장이 있었다. 남쪽으로 작은 창 하나가 나있어 은은한 빛이 방 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마루로 나가는 왼편은 3짝의 큰 문이 나서 이곳을 통해 방에 드나들게 하였다. 책과 문방용품을 올려놓을 선반을 내기 위해 온돌방 북쪽 벽을 물리었다. 마루방인 암서헌의 방 크기는 완락재와 같지만 이곳은 탁 트이고 시원하다. 온돌방으로 통하는 오른쪽 3짝 문 외에 북쪽 벽은 찬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로 막고 널빤지 창을 달았다. 남쪽과 동쪽은 개방되었다. 특히 동쪽은 반 칸 정도를 지붕을 덧대서 비가 들이쳐도 마루까지 미치지 않게 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도록 했다. 부속건물인 농운정사는 도산서당 서쪽에 있는 8칸의 건물로 도산서당과 함께 퇴계가 세운 건물이다. 농운정사는 당시 문도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인데 제자들이 자율적으로 심체(心體)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던 퇴계의 정신을 반영하여 工자형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자료출처 : 영주시 홈페이지, 소수서원 홈페이지 등) -명칭:소수서원(紹修書院) -소재지:경북영주시순흥면내죽리152-8 -건축주: 풍기군수주세붕(1495-1554) -건축시기:1543년(중종38),백운동서원 -사액시기:1550년(명종5),소수서원 -문화재: 사적 제55호 ◯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3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 ·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 ·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 창건유래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 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 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 남짓 땅 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 4,000여명의 인재를 배출 소수서원에서는 창건 이후 350여년 동안 임진왜란 때 경상도우병사로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성일, 선조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 등 퇴계 문하생 대부분과 유생 4,000여명이 공부했다. 이곳 사료 전시관에는 안향의 일대기를 적은 "회헌선생실기", 서원 원장 등 각 직책을 맡았던 원임들의 인사기록인 "원임제명목",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적은 "입원록", 서원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인 "심원록" 등 160여 점이 전시 되고 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 입학정원이 10명이었으나 사액을 받은 후 30명으로 늘었다.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에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면 퇴원당했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에 들어서면 평균 300~500년 이상된 소나무군락이 "학자수"가 되어 선비의 굳센 기상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서원 앞 500년 된 은행나무는 서원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영주의 옥토를 적셔 주는 낙동강의 원류이며, 서원 옆 죽계천변에는 경자바위와 서원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경렴정, 취한대가 있다. 소수서원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쓰인 강학당, 왼쪽에 문성공묘, 전사청, 그리고 강학당 바로 뒤에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우측으로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서원 뒤편에는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이 있다. ▶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 이 건물은 원생(院生)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강당(講堂)으로 중종(中宗) 3년(1543) 주세붕(1495~1554)선생이 건립하였다. 길러낸 원생은 4천 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선생 문하생(文下生)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八作)지붕에 넓은마루, 작은 마루와 작은 온돌방이 있다. ▶ 학구재, 지락재(學求齋·至樂齋)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자리로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칸을 꾸몄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工'자 형으로 지여져 있기도 하다. 학구재(學求齋)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스승의 숙소와 나란히 세우지 않고 뒤로 물려, 방바닥 높이까지 낮추어 지은 것이 특이하다. 지락재(至樂齋)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일명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하며, 광해군5년(1613) 창석 이준(蒼石 李俊)이 세웠다. ▶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원장·교수들의 집무실로서 양재(兩齋)가 한 동(棟)으로 이뤄진 독특한건물이다.일신재(日新齋)는 일반교수,원임(院任)들이 쓰던 방으로서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으로[대학](大學)에서 딴 것이며, 건물 우측 직방재 (右側 直方齋)는 원장(백운동주,白雲洞主)이 쓰던 방으로서 안(內,心) 과 밖(外,行)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의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이다. ▶ 일영대(日影臺) 상·하부(上·下部)의 석재로 이루어진 해시계이다. 맑은 날, 상부석재 위에 꽂은 막대기그림자가 하부석재위의 12간지(干支)에 드리워지므로 시간을 재던 곳이다. ▶ 관세대(盥洗臺) 사당참배시 대야를 올려놓고 손을 씻기 위해 만든 석조물(石造物)이다.
▶ 정료대(庭燎臺) 요판(燎板)·요주(燎柱)·요대(燎臺)3개의 석재(石材)로 이루어져 밤에 서원(書院)을 밝혀주던 것이다. 함지박 모양의 상부석 재위에 관솔을 태워 정원(庭園)을 밝혔다. ▶ 회헌영정 (국보 제111호) 이 그림은 조선 명종(明宗) 14년 (1559)에 그려진 회헌 안향(1243~1306)의 영정(影幀)으로 규격은 88.4*53.7cm이다. 옷의 윤곽과 주름은 유연한 선으로 간절히 요약하고, 음영(陰影)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안면(顔面)은 붉은 선으로 윤곽을 잡고, 역시 가는 선으로 오관 (五官)을 나타내고 있어 예스러움을 보여 주며 전체적으로 학자의 차분한 풍모(風貌)를 잘 나타내고 있다. ▶ 주세붕 영정(보물 제 717호)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그려진 주세붕(1495~1554)의 영정으로 크기는 134*62.5 cm 이다. 안향 영정과 이제현 영정등 고려시대의 초상이 우안팔분면(右顔七分面)을 취한 자세를 보이는데 비해 이 주세봉 영정(周世鵬 影幀)은 왼쪽 얼굴이 70%정도 보이고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을 취하고 있으나, 상반신만을 그린 반신상이라는 점과 화면상단의 공간을 남기고 있는 화면 구도 등으로 볼 때 안향 영정의 전통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