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캄보디아와 중동을 공부하는 시간
글 | 고경태
월남전은 끝났다
휴전 오늘 상오 9시 발효
1973년 1월 27일 하오7시(한국시간)
평화협정 역사적조인
파리국제회의센터서【파리27일=정종식특파원】
미국사상 최장의 전쟁이며 동서진영의 신예무기의 실험장이 되어오기도 했던 월남전을 끝맺기 위한 역사적인 월남전휴전협정이 27일 상오 11시6분 (한국시간 하오7시6분) 전쟁당사자인 미?월남?월맹?‘베트콩’의 외상들에 의해 ‘파리’ 개선문이 바라보이는 국제회의‘센터’에서 18분만에 조인을 끝냈다. 월남 땅에는 28일 상오8시(한국시간 상오9시)를 기해 휴전이 발효되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비록 불안하기는 하나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27일 1차조인식에서 ‘윌럼?로저스’ 미국무장관, ‘트란?반?람’ 월남외상, ‘구엔?두이?트린’ 월맹외상, ‘구엔?티?빈’ ‘베트콩’(월남임시혁명정부)외상은 총9장23조로 된 협정문과 “휴전합동군사위” “포로?정치범석방” “국제휴전감시위원단”등 3개의 부대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길고 지리했던 월남전과 4년8개월간의 험난했던 ‘파리’협정의 막을 내렸다.
또한 이날 하오3시45분(한국시간 하오11시45분)에 거행된 2차조인식에는 ‘로저스’ 미국무장관과 ‘트린’ 월맹외상만이 제4의 부대의정서인 “기뢰봉쇄해제에 관한 의정서”에 조인했다.
이날 협정조인시간보다 15분 먼저 도착한 4개 전쟁 당사자 측의 외상들은 아무런 의식절차없이 국제회의 ‘센터’의 1층 회의실에 있는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첫 페이지에는 미국과 월남 두 번째 페이지에는 월맹과 ‘베트콩’이 각각 따로 이중복합서명을 끝냈다.
조인식과 때를 같이하여 월맹측은 미국 측에 미군포로명단을 수교했다.
조인식을 끝낸 4당사자 측 외상들은 ‘샴페인’을 나누면서 서로를 치하했다. 제2차 조인식에는 미국과 월맹만이 서명했는데 월맹은 ‘베트콩’의 동의를 얻어, 미국은 월남의 동의를 얻어 각각 서명하는 절차를 택한것이다.
(1973년1월28일치 <한국일보>)
파리에서 열린 위의 베트남전 휴전협정은 1972년에 본격화한 미-소, 미-중 화해무드의 결과물이었다. 파리 휴전협정을 통해 미국은 남아있는 병력을 60일 이내로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북베트남은 수백 명의 미군 포로를 석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두 배인 700만톤의 포탄을 베트남을 퍼부었지만, 국내외의 반전여론에 부닥친 닉슨 행정부는 이 전쟁을 계속 끌고 갈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후원을 얻어 휴전협정을 성사시켜야 했다.
8년간 연인원 32만명(전투병력은 5만명)을 파병한 한국군도 철수했다. 1973년3월21일치 신문은 파월 장병들의 귀국풍경을 사진으로 전한다. 따뜻한 환영 물결이다. 별 세 개 달린 아빠의 볼에 여고생이 뽀뽀하는 사진은 눈에 익다. 설명을 보니 “주월군사령관 이세호 중장의 2녀 이진희양(16?중경고1)”이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휴전 2년 뒤인 1975년3월10일부터 거꾸로 남하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조여들어왔다.
월(越)데모 유혈화
가톨릭교도?경찰 충돌 40명중경상
야당 의원들은 대법원 건물 점거
【사이공31일로이터합동=특약】월남가톨릭교도의 ‘반부패운동’을 중심으로하는 반정부시위자들은 31일 사이공중심가로 행진해 들어가던 도중 이를 저지하던 수백명의 경찰들과 2시간동안의 충돌을 벌여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이 충돌에서 가톨릭반부패운동지도자인 트란?후?탄신부와 도?심?투의원도 부상했다고 반부패운동 대변인이 이날 밝혔다.
이날 일찍 약5천명의 가톨릭교도들은 사이공 교외에 있는 한 교회에 운집했으며 트란?후?탄신부는 교회에 모인 2천명의 군중 앞에서 티우 대통령은 사임하고 국민에게 권력을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한편 월남불교도의 ‘민족화해운동’ 의장인 부?반?마우 상원의원이 거느리는 일단의 야당의원들은 철조망바리케이드를 뚫고 대법원건물을 점령했다고 소식통들이 말했다.
(1973년11월1일치 <한국일보>)
다낭 실함(失陷)으로 북반부 상실
월남 최대위기에
-티우 어제 계엄령선포
난민수송중단, 퀴논?나트랑까지 위험
유엔이 휴전주선?구호 호소
【사이공30일로이터UPI=종합】월맹군을 주축으로 한 공산군은 29일 밤 월남 제2의 대도시이자 월남군의 유일한 북부거점 다낭시를 마침내 완전점령 입성하여 중부고지대에 이어 북부 해안지대마저 석권, 월남북반부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이제 티우 대통령의 월남정부관할지는 수도 사이공 일원과 메콩삼각주의 일부 지역으로 크게 축소되어 월남정부자체의 존립이 위기에 처했다.
탱크를 앞세운 월맹군과 베트콩은 계속 여세를 몰아 남쪽의 퀴논과 나트랑을 공략하기 시작함으로써 월남정부의 운명을 최악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다남실함은 사이공에서 판?쾅?당부수상에 의해 공식 발표됐는데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다낭에 남은 1백50만 피난민과 10만 정부군 소개(疏開)를 위해 유엔이 베트콩과의 임시휴전을 주선해 줄것을 요청했다.
군소식통들은 공산군이 이날 밤늦게 탱크를 앞세워 다낭에 진입, 치열한 시가전 끝에 시를 점령하고 미 영사관건물에 베트콩기를 게양한뒤 24시간 통금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공산군은 이로써 2주간의 전격작전을 통해 월남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완전장악, 10만 명의 정부군을 퇴각케 했으며 이들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다낭남쪽 1백92km 퀴논과 2백92km의 나트랑에 압력을 가중, 정부군이 긴급구축한 나트랑북방의 주저항선 마저 붕괴시키기 시작했으며 퀴논항은 이미 실함설이 들리는 가운데...(하략)
(1975년4월1일치 <한국일보>)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1973년1월 파리 휴전협정 당시 응웬 반 티우 대통령에게 “북베트남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B-52기를 보내 월남군을 지원하겠다”는 친서를 전달한 바 있지만, 그는 1974년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당한 뒤였다. 후임 포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SOS요청에 따라 ‘월남긴급군사원조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미국인이라면 다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싶었을까? 미 의회는 1975년4월19일 이를 부결시켰다.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4월21일 미국에 섭섭함을 전하는 사임성명을 발표한 뒤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응웬 카오 키 부통령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들이 떠난 뒤 대통령직을 떠안았던 즈엉 반 민은 1975년4월30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월남정부 무조건 항복
1975년 4월30일 상오11시???30년 전쟁에 종지부
독립군에 베트콩기
월맹군, 민 대통령 연행
【사이공30일=외신종합】월남정부는 30일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곧 이어 소제(蘇製)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은 점령군으로서 사이공에 입성, 월남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청홍색 베트콩기를 게양했다. 이로써 월남정부는 고?딘?디엠전대통령의 공화국 선포이후 20년 만에 멸망했고 인도차이나의 대량학살극도 막을 내렸다. 30일상오11시(한국시간) 두옹?반?민월남대통령은 월남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정부군에게 전투를 중지하라고 명령하면서 평화적인 정권인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트콩측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5분간에 걸친 짤막한 방송에서 민 대통령은 평화, 민족의 단합, 국민의 생명을 보전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베트콩에게도 적대행위를 중지하라고 호소했다. 곧 이어 월남정부군 합참의장대리인 구엔후?칸대장은 방송을 통해 모든 월남군장성들은 민 대통령의 명령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면서 월남군에 조용히 그들의 무기를 베트콩에 인계하라고 명령했다.
민 대통령의 항복연설후 2시간 만에 20여대의 소제탱크를 앞세운 공산군들은 사이공에 입성, 독립궁을 점령하고 국기게양대에 청홍색 베트콩기를 게양했다. 이와 함께 사이공국제방속국은 공산군이 독립궁에 진입했다는 짤막한 뉴스를 끝으로 방송을 중단했다.
30여년에 걸친 지리한 전쟁에서 벗어난 수천 명의 사이공 시민들은 앞서 월남정부가 선포한 24시간통금령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쏟아져 나와 녹색유니폼의 점령군을 환영했다.
한편 사이공시내의 모든 경찰서에는 백기가 게양되었고 미국인 철수작전을 막끝 낸 주월미대사관에는 약탈이 자행된 후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미국은 월남정부가 항복하기 불과 2시간 전에 1천여 명의 미국인과 친미 월남인 및 제3국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극적인 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끝냈었다.
한 월남정부관리는 “미국인 철수작전으로 월남군 고위 장성 및 관리들이 함께 국외로 탈출함으로써 사이공은 공산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무원의 상태였기 때문에 항복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5년5월1일치 <한국일보>)
박정희 정부는 사이공 함락을 반공체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했다. 스크랩엔 1975년5월11일치 <한국일보>의 ‘백40만의 함성…서울시민 안보궐기대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붙어있다. 임택근 MBC 전무(그 유명한 아나운서 임택근, 임재범의 아버지)의 사회로 5월10일 상오10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렸다. 문화계 대표로는 시인 조병화가, 종교계 대표로는 조용기 목사 등이 참여했다. 이날 대회에서 허정 대회장(전 내각수반)은 개회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자기국가의 안보를 남에게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인지(印支, 인도차이나- 필자 주)의 비극은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총화단결을 이루지 못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에 말려들어 패망한 것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모두 최전선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멸공통일하자…미국정부는 월남의 교훈을 명심, 한국의 방위공약을 보강,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공포’가 학습되었다. 텔레비전에선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의 영상이 무한 반복되었다. 월남패망의 교훈은 곡해되어 유포됐다. “국민의 신임을 얻어야 정권이 유지된다”가 아니라 “말 안 듣고 까불면 저렇게 된다”였다.
http://ch.yes24.com/Article/View/19151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
공산세력에게 "적화통일" 되면.....당시 월남 인구 전체 모두가
잔인한(??) 공산당들에게 다 죽기 때문에
월남인들이 저와 같이 너도 나도 보트를 타고 위험한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남한 방송들이 진실왜곡 선전해대며
남한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었지요.
그러나....그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어마어마 하게 많은 인구인 월남 인구들 모두가 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말인가요?
만일 남한이 그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그럼 5천만명 모두가
그와 같이 보트를 타고 무작정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여러분들.....상상해보세요.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얘기인지 말입니다.
가능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 자체는
진실도 아니었지요.
진짜 진실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 위 본문글에도 나오지만.....친미 매국노 행위들을 일삼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매국노 기득권층들은 모두
미국 대사관의 배려로 미국과 함께 탈출했지요.
그러나 군고위장성이나 고위관리가 아니었던 그 하위급 친미 매국노들은
미국 대사관이 구해주지 않고 나몰라라 하며 그냥 떠나버렸지요.
그런데 월맹(=북베트남) 세력이나 베트콩(=남베트남인민해방전선) 세력은
단지 공산주의 세력일 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식민지배 했던 세력들인
프랑스, 미국에 맞서 싸웠던 베트남 무장독립투쟁 세력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프랑스나 미국에 빌붙어 매국질을 했던 세력들이 패망한 월남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거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이겠지요.
실제로 일제가 패망한 직후에도 친일매국노들은 산 속 등으로 들어거
숨었다고 합니다. 독립투사들이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들은 모두 처단당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 등에 빌붙어
매국질을 했던 티우 월남정권이 패망하자 매국질을 했던 세력들 중
미국이 구해주지 않아 버림받은 하찮은 세력들은 무조건 보트라도 타고
바다로 나간 것이지요.
물론,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매우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러나 독립투사 세력, 공산세력이 장악한 패망 월남에 남아 보았자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판단했겠지요.
그렇다면....당시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에는 무수히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을 것인데....사이공의 시민들 모두가 그와같이
보트를 타고 위험한 항해를 하고자 시도했을까요?
소위 말하는 "자유를 찾아"???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면...그는 정말
멍청이이겠지요. 무수히 많은 사이공 시민들 모두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하다니요?
사실은.....보트 피플을 탄 인간들은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었지요. 전체 베트남 인구는 물론이고, 당시 사이공 인구와
비교해서도 말입니다.
즉, 사이공 등 기타 지역의 월남인구 중 매국질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스스로 판단해서....월남에 남아 보았자
처단당해 죽을 것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만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보트를 탔다는 말입니다.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마 고작해서 몇만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수백만, 수천만명의 인구를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적은 숫자란 말입니다.
사이공 함락과 호치민, 베트콩 등 진주군 세력을 환영하는 인파
월남 패망과 미군 헬기를 얻어탈 수 있는 월남 고위층 가족 탈출
패망 월남 해상 탈출 보트 피플
적화통일된 베트남의 요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