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자면, 영화에서 그놈. 그러니까, 오대수란 인물이 그다지 멋있을 리 없다. 15년 동안이나 감금당해서 수염은 장발이고, 머리는 분명 깡통이 되었을 거고, 몸이 건강할리 없거늘 이 영화 오대수의 인간적 한계를 깡그리 무시한 채 초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 그런데 그놈의 초인이 사고를 치는거다. 자기를 가둔 이우진이라는 자를 찾아내서 복수하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십명의 조폭을 가볍게 때려눕히질 않나 칼에 찔리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아픈 줄도 모르고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 있는 오대수. 그를 도무지 말릴 재간이 없다. 그런데, 좀 쫄아도 상관없을 법한 이우진이라는 자. 전혀 쪼는 기색 없이 오히려 오대수와 게임을 벌인다. 대체 왜! 뭣 때문에! 대체 넌 누구냐구!
영화제목이 <올드보이>에다 포스터는 어두침침한 색이어서 이 영화 처음부터 질질 짜고 나가야겠다고 섣부른 판단을 했건만, 이 영화 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최민식의 얼토당토 않은 나래이션으로 처음부터 영화를 웃기게 만들어 버렸다. 사실, <취화선>에 실망한 나로서는, 또한 <파이란>에서 최민식의 그 어두운 이미지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가 끌어가는 영화의 초반부가 이렇게도 재미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놈은 15년 동안이나 감금당했고, 또 15년 세월동안 오로지 군만두만 먹었고, 그래서 복수만을 꿈꾸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 초인이 되어버렸지만, 그가 복수를 해 나가는 과정은 초인이 아니라 처절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복수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인 듯 보였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갈 때 즈음, <올드보이>는 예상했던 대로 어두운 분위기로 젖어들었고 결론적으로 기막힌 반전이라고 하기는 부족한 듯 해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대수. 그놈은 멋있었고, 최민식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바꾸어 버렸다.
2. 저놈(!) 참 이상하다.
하지만, 유지태. 그분이 등장할 때면, 난 왜 늘 한석규 아저씨가 떠오르는 걸까. 목소리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캐스팅라인에 그가 있었기 때문일까. 이우진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때, 영화는 약간 어두운 톤의 화면에서 이우진을 차츰 밝은 화면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이우진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대수가 갇힌 이유를 그만이 알기 때문에,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우진이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그가 오대수를 가둔 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신비감에 휩싸여 버린다. 저놈은 뭔 비밀을 또 알고 있는 거야. 저놈은 정말 신비스러운 놈이야. 하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나의 호기심을 자꾸만 자극하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거다. 오대수가 궁금해하는 걸 그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사실. 아, 정말 궁금하다. 대체, 저놈 뭔데 오대수를 가둔거지? 저놈(!) 참 이상하다.
3. 헛갈린 그놈들
오대수의 이름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산다, 래서 오대수란다. 그러면, 이우진의 이름은 왜 이우진일까? 貽憂 + 眞. 에, 그러니까. 변하지 아니하고 근심을 끼치다. 뭐 이런 뜻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변하지 아니하고 근심을 끼치고 싶은 거다. 아,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영화 <올드보이>는 정확하게 말해 가둔자와 갇힌자의 대결이 아니라, 갇혀 있다 풀려난 자와 가두었다 풀어준 자의 한판 도박이다. 결론을 알면 조금 허무해질지도 모르지만, 아뭏든 그들의 대결은 결코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놈은 이상한데, 그놈은 정말로 멋있었다! (고백하는데, 누군가 이 표현이 반어법이라더라.) 영화를 보고나면 어떤 것이 진실인지, 난 다시 헛갈리고 싶다. 그놈이 저놈인지, 저놈이 그녀인지, 그녀가 저놈인지 저놈이 그놈인지. 쉽게 뭐라고 정의내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올드보이>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지만 결말을 너무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설득당하고 적당히 기대하자. 또, 적당히 추리하자. 지나치게 깊은 생각은 당신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자, 그놈이 오고 있다. 우리에게 복수하러. 모두,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