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도 비렁길에서 만났던 빈집
내가 이곳 남도에 온지가 벌써 35년이 되었다. 처음 5년 정도는 사람 꼴을 못하고 살았고, 90년대 초반 쯤 되어서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근방에서 명소라 해서 처음 찾았던 곳이 돌산 향일암이었다. 지금도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야 향일앞에 오를 수 있지만, 그 때는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서 향일암에 오를려면 밧줄을 타고 올라야 했다. 그때 생생한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아이들 어릴 때 세 놈을 절벽위로 기어오르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놈들을 하나씩 옷으로 몸에 차례로 묶어서 올렸다. 군 시절 유격장에서 배웠던 레펠 타는 솜씨가 그대로 발휘 되었다. 그때가 사십대가 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멀리 뒤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툭터진 바다, 그리고 서쪽의 섬 너머로 사라졌던 일몰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때는 그 서쪽에 있던 수많은 섬들을 잘 몰랐다. 그저 이름 모를 섬이었을 뿐이었다. 그 후에 알았다 그 섬중에 가장 큰 섬이 금오도 였고, 화태도가 있고, 안도, 연도 였다는 것을 향일암에 다녀온 후로는 멀리서 손님이 오면 향일암에 갔다. 이준태 1기 남도여행 코스였다. 한 7-8년 향일암에 다녔을 것이다.
그 뒤로 지인의 소개로 보성 녹차밭에 가게 되었다. 완전 별천지였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풍광이었다. 수십미터 자란 삼나무 숲길을 걸어들어가면 면도로 다듬질하듯이, 곱게 가꾼 녹차 밭이 층층이 피라밋을 이루어 정상까지 오른다. 그리고 사이사이 편백나무 숲길, 맹종죽의 대나무 숲길은 얼마나 호젓했던가.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가꾼 녹차밭이었다. 지금의 주인은 아마 한국인 매니저나 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무조건 항복하고 귀국을 하게 되니 거져 주은 것이다. 그들이 거져 주웠을 때만 했어도 대단한 재산가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땅에서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하는 것을 먼저 셈했을 때였으니. 다만 분에 넘치는 정원 정도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보릿고개를 넘겨 절대 빈곤을 벗어났고, 소득 수준이 높아져 웰빙 라이프를 찾을 때 쯤 녹차밭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관광객이 녹차밭을 찾았다. 녹차밭의 주인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 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이미 거제도 인근의 외도는 개인이 개발하여 상당한 액수의 입장료를 받았을 때였다. 내가 보기에는 보성의 녹차밭은 외도 못지 않은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녹차판매와 녹차밭 공원내에 있는 카페 음식점등의 수입으로도 운영가능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매번 손님을 데리고 녹차밭에 갈 때마다 남도의 훈훈한 인심이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 뒤로는 녹차밭의 몽환적인 배경에서 스님과 수녀님이 만나는 장면이 이동통신 광고로 뜨고 부터는 대한 다원은 남도의 명소가 되었고, 관광버스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남도에 온 손님중에 대한 다원 안 가본 사람은 없었다.
그 뒤로 트레킹 붐이 일면서 제주도에 올레길이 만들어졌고, 전국의 각 지방 자치단체는 앞 다퉈 그 지방의 특색에 맞추어 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근방의 명소는 금오도 비렁길이었다. 쪽 빛 바다와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벼랑, 사철 푸른 동백 숲 길은 세계 어디에 비교해도 빠질 데가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비렁길의 특징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고 섬 사람들의 일상에 있었던 길이었다. 장년이 되어서 내가 남도에 온 손님에게 안내하는 길이 비렁길이 되었다. 올 봄까지 해서 열한번째가 되었다. 전체 5코스로 되어 있는데 아침 일곱시에 들어가는 첫배를 타면 하루에 5코스 까지 종주할 수 있다. 마지막 배는 다섯시 반에 있다. 열 한 번의 방문 중 종주는 세 번 해봤다. 보통 1코스를 걷거나, 경관이 빼어나게 좋은 3코스를 걷거나, 욕심을 내는 사람들은 1.2.3코스를 걷기도 한다.
그렇게 금오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마음을 정하게 네 번 째나 되었을 것이다. 1코스 끝나는 두포에서 직포로 올라가는 고갯마루 빈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쓸쓸한 광경이었다. 문패가 바람에 움직이고 있었다. 3 여(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되기 전의 여천군의 주소였다. 그 느낌을 써서 시 창작반의 숙제로 냈더니 그 동안 써왔던 시 중에 절창이라는 합평을 받았다.
빈집의 주소
이준태
두포에서 직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빈집이 있었다.
아침 해를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낙조만이 위안이 되었을 서향집
돌담은 무너져 뒤안이 드러나 보였고,
스레트 지붕은 나이롱 끈으로 돌을 매달아 바람을 견디어냈다.
큰 방 구들은 파헤쳐 있었고
토방에는 관절약 코살렉스 용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문간방 외벽 페인트는 아직 선명했고,
굴뚝 환풍기만이 살아서 돌아가고 있었다.
여보시오 나그네 양반!
나는 초분에 삼년간 육탈하여, 다시 백골로 할멈 옆에 누워있다오
나에게 처음 숨을 불어 넣어주었던 두포의 흙으로 돌아가는거요.
그리고 우리 자식들 고향집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마시오
자식들만이라도 뭍에서 살게 하고 싶소이다.
전남 여천군 남면 두모리 두포 심의범
초분 : 남도의 해안지방에 남아 있는 장례풍습
입관을 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산 기슭에 널을 놓고 갈대나 볏집으로 이엉을 둘러서 육탈을 2.3년 시킨 후 무덤을 만들어 이장을 하는 장례방법, 풍장의 일종임
그 뒤로 금오도를 갈 때마다 그집을 유심히 봤는데, 어느 날 그 집이 말끔히 정돈되었고, 문간방에 가게를 차려놓고,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놀랄만한 변화였다. 막걸리 한 병과 아이스크림 몇 개를 일행과 같이 나눴다. 그때 그 여주인 아줌마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내가 이집을 소재로 시를 쓴 적이 있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나를 갑자기 격 높은 시인으로 대했다. 그 시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당신이 심의범 씨 며느리냐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그 옆에 새로 지은 펜션을 가리키며 심의범 아들이 지은 집이라 했다. 나를 놔줄 생각을 안하고 계속 말을 하고 싶어했다. 이미 일행에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나를 마을길이 끝나는 데 까지 따라와서 배웅을 하며 아쉬워했다. 다음에 보여 주기로 몇 번 다짐하고 작별을 했다. 나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매조지를 잘하지 못한다. 그때 전화번호라도 받아놨으면 쉽게 내 팬을 확보했을 것인데.
그 뒤로 일 년이나 지났을까, 비렁길을 종주하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 금오도를 갔다. 그 집에서 간식을 청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가득 오디를 따와 우리 두사람에게 주었다. 막걸리 값보다, 라면 값보다 오디 값이 훨씬 더 갈 듯했다. 오디 값은 절대로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손과 입술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정도로 오디를 실컷 먹었다. 그 아줌마는 시인 만났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일을 끄집어내기도 쑥스러웠을 때였다. 그냥 잘 얻어먹기만 하고 그 집을 기분 좋게 나섰다. 그 뒤로 그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전화할 때마다 그 아줌마 안부를 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비렁길을 들릴 때는 마음먹고 내가 썼던 시를 폰에 담았고, 1코스나 중간에 간식을 하지 않고 그집에 들렸는데,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았다. 한번은 교회 갔다고 했고, 한번은 손님 맞을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올봄에 두 번 금오도엘 갔는데, 두 번째는 그 옆에 펜션을 하고 있다는 심의범씨 며느리에게 작정하고 그 아줌마 안부를 물었다. 여수에서
수술하기 힘든 큰 병이 생겨 서울로 갔다고 했다.
첫댓글 비렁길에서 내려다 본 바닷 빛은 그야말로 에머랄드 빛 그 자체였는데... 중간에 준태가 미리 준비한 간식도 맛있었고. 그동안 준태가 추천해준 우리동기들의 여행코스는 단 한번도 실패한 경우가 없었네. 실패가 아니라 모두 훌륭한 코스였지. 언제 또 그곳을 돌아볼 수 있을런지....
보성 녹차 밭 경험도...
남도가 살기 좋은 곳이죠? 더구나 친구가 있으니 더욱 따스함을 느낄 겁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더 좋은 곳을 가든지 아니면 금오도를 다시가든지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