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렇게 많이!
박 완 서
나는 한(韓)을 우리의 모교 앞에서 만났다. 칠 년 만이었다.
우리의 모교는 참담한 모습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장차 그 자리에 호화 아파트가 선다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했다. 그 자리에 뭐가 서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었다.
다만 뒤숭숭한 분해의 현장을 보자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안됐다는 느낌은 의외로 절실한 것이어서 온종일 그 느낌의 영향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젠장. 나는 막돼먹은 머슴애처럼 소리내어 내뱉고 어깨를 크게 추슬렀다. 마침 그때 저만치 앞에서 누가 야, 이거 얼마만이냐, 하며 당장 나를 얼싸안을 듯이 달려들었다. 그는 내가 저를 누구라고 알아차릴 틈도 안 주고 급속히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얼싸안지는 않고 악수를 청했다.
손을 아프게 쥐고 들입다 흔들어대면서도 연상 이거 몇년 만이냐를 되풀이했다. 그사이에 나는 그가 한이란 걸 알았다.
오, 칠 년 만이야, 꼭 칠 년 만이야. 마침내 그는 제 물음의 해답을 제 스스로 찾아내고 유쾌하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칠 년 만에 한을 만나서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올 해 서른 살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번개처럼 떠올랐다. 속이 쓰렸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칠 년,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결혼도 못 하고 그렇다고 딴 출세도 못 한 채 남자 동창을 만난다는 건, 나니까 속이 쓰린 정도지 딴 여자였더라면 까무러치거나 당장 그 자리에서 수증기로 화하거나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과 나는 대학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애인끼리였으니 말이다. 내가 더 비참해지기 전에 그래도 한이 나를 구제했다.
“야, 너 시집 잘 갔구나. 귀부인 티가 잘잘 흐르는데.”
잘됐다, 그까짓 거 시집간 척해줘야지 하고 마음을 먹자 한과 만난 게 재미있어졌다.
더군다나 오늘 나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나는 꼭 일 주일에 한 번씩은 가발을 쓰고 거리에 나오는 이상한 습관이랄까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멋있는 가발이었다. 어깨까지 늘어지는 굵고 우아한 웨이브도 좋았지만 그 빛깔이 독특했다. 방 안에서 볼 땐 평범한 검정색이다가도 햇볕에 나서면 갈색으로 보였다. 또 보는 각도에 따라 그 갈색에 화려한 붉은색이 섞여 보이기도 하고 우울한 비둘기색이 섞여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남산 지하 터널을 차를 타고 지날 때였는데 내 가발이 창백한 배추색으로 변해보였다.
그러나 내가 내 가발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까지 하는 것은 우아한 웨이브와 요변하는 빛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걸 쓰면 화장을 하고 싶고, 향수를 뿌리고 싶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싶고, 거리로 나가고 싶어지고, 이렇게 해서 거리에 나와서 맛볼 수 있는 해방감 때문에 나는 내 가발을 좋아했다.
나는 일 주일에 꼭 한 번, 내가 쉬는 날만 가발을 썼다. 가발 밑에는 요즈음 머슴애들보다 더 짧게 커트를 친 내 더벅머리가 있고, 나는 그 머리에 어울리는 티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일 주일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와 내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일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내가 쉴 수 있는 날, 가발을 쓰고 야한 화장을 하고 드레시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오면, 발이 땅에서 붕 뜨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면서 거리의 풍경과 거기서 펼쳐지는 남의 인생들이 즐거운 구경거리로 변한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먹고사는 문제가 구더기처럼 편한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먹고사는 문제가 암초에 붙은 따개비보다 힘들다는 걸 구경하는 게 즐겁다. 나야말로 내 하루하루를 먹고사는 문제에, 따개비가 바위에 엉겨붙듯이 악착같이 밀착시키고 살기 때문에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문제를 남의 일처럼 우습게 여길 수 있는 하루가 달고 소중하다.
그러니까 가발을 쓴 날은 내가 행복한 날이었고 모든 것에 자신이 있는 날이었고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화장도 옷도 구두도 핸드백도 기분도 서울 장안에서 최고급일 건 없어도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선 최고급이었다. 이런 상태로 옛 동창이자 애인을 만났다는 건 나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은 요란스러운 악수를 끝내더니 이대로 헤어질 수 있나, 다방에나 가지, 했다. 다방에나 가지, 그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자포자기적으로 처량하게 들렸다. 칠 년 만에 만난 걸 크나큰 횡재처럼 설치다가 결국 다방에나로 귀결되는 꼴을 지켜보는 나도 맥이 빠졌다.
그래도 나는 으레 길 건너 학풍다방으로 나를 꼬일 줄 알았다. 나는 지금도 가끔 가발을 쓰고 나오는 날 거기에 들르는 일이 있는데 그곳 내부 장치나 분위기는 우리의 대학 시절과 별로 변한 데가 없었다. 손님도 그때나 마찬가지로 거의가 다 대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주고받는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못하는 채, 무슨 이야기들을 할까, 전에 우리들이 주고받던 이야기와 얼마만큼 달라진 이야기들을 할까를 막연히 궁금해 하다가 나오곤 했다.
한과 나도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한은 ‘학풍’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게 아닌가. 남자가 옛 애인을 만났고, 그 애인과의 추억의 장소가 바로 지척에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을 지나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한이 나처럼 그곳에서의 추억도, 다시 한번 마주 앉아보고 싶다는 감상도 전연 없다는 데 모욕감 비슷한 걸 느꼈다.
한은 느글느글 나를 곁눈질을 하며 자꾸 종로5가 쪽으로 내려갔다. 한은 어느 동네 사냐, 아이는 몇이나 있냐, 남편은 사장족이냐 교수족이냐 정치족이냐, 뭐 그런 너절한 걸 옆에서 자꾸만 물어쌓는다.
나는 되는대로 대답을 하면서 내가 왜 한을 처음부터 한이라고 못 알아보다가 한참 만에야 알아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여러 사람과 구별해서 알아보게 하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눈일까 코일까 인상일까 거동일까 목소리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 역시 한을 할금할금 곁눈질했다.
칠 년 전보다 약간 몸이 난 것 같고 옷도 최고급으로 쏙 빼입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그를 못 알아봤을 것 같진 않다. 그의 사람됨이 확 다르게 보일 만큼, 몸 전체가 마치 더러운 폐유(廢油) 속을 헤엄 쳐 나온 것처럼 추하게 번들대는 그 무엇이 있었다.
종로5가를 다 와서 한은 내 의향 같은 건 묻지도 않고 어떤 이층 다방으로 올라갔다. 삐걱대는 계단은 좁고 지저분해서 기분이 상했다.
마담과 레지가 합창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어머머…… 한사장님 오래간만이에요, 어쩜 그 동안 그렇게 무심하실 수가 있어요, 정말 너무했어요, 하며 간드러지게 애교를 부렸다.
나는 한 방 먹었구나 싶었다. 계획적으로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장소를 택한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서른남은 살에 사장이면 출세가 빠른 것도 같았다. 사장도 사장 나름이겠지만 한의 야심을 잘 아는 나는 덮어놓고 시시한 회사 사장이겠지 하고 얕잡아지지만은 않았다. 아마 뜻대로 된 모양이다. 한은 재벌집 딸을 꼬드겨서 결혼을 함으로써 남이 계단으로 오르는 출세의 길을 엘리베이터로 단숨에 오를 꿈을 줄기차게 추구했었으니까.
막상 마주 앉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예전처럼 반말을 할까 존댓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지도 나에게 반말을 했던 게 생각나 당돌하게 반말로 나갔다.
“보아하니 제법 바쁘신 몸 같은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아니 안 바빠, 오늘이 우리 회사 쉬는 날이거든.”
“오늘이 무슨 요일인데 쉬어? 세상에 금요일날 쉬는 회사도 있어?”
“그래, 우리 회산 금요일날 쉰다. 어쩔래?”
“어쩌긴 어째, 무슨 회사가, 어떤 껄렁한 회사가 그래 금요일 날 쉰담. 별꼴이야.”
우린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이 하는 것보다 더 유치한 입씨름을 했다. 나는 한의 회사가 금요일날 쉰다는 사실에 지나지게 분개하고 있었다. 내 특권을 부당히 침해당한 것 같아서였다.
내가 금요일날 쉬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영문과 출신다운 직업을 갖고 있었다. 좀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벌이가 괜찮은 직업이었다. 대학입시 준비생을 위한 영어 과외선생질인데, 대학 재학중에도 아르바이트 삼아 사 년 내내 쭉 했었기 때문에 그 연줄로 졸업 후 그 방면으로 풀리기가 아주 수월했다.
나는 그 방면에 고도로 연마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영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영어시험을 치는 기술을 가르치면 족했다. 나는 특히 여고생들 사이에서 이름난 과외선생이어서 저희끼리 그룹을 짜놓고 나를 모셔가지 못해 안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세 그룹씩이나 일 주일에 두 번씩 과외지도를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루가 비게 되고, 그 비는 날이 바로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을 아꼈고, 낮에 개인지도를 받고 싶어하는 재수생들도 금요일날은 배정하지 않았다.
나는 『정통영어』니 『천이백제』니 하는 이름난 참고서 몇 페이지에 무슨 문제가 있고, 어디에 함정이 있고 어디가 배배 꼬였나에 무불통지였을 뿐 아니라, 입시생이나 그의 부모들을 다루는 데도 능구렁이가 다 돼 있었다. 어떤 맹꽁이도 어떤 맹꽁이의 부모도, 얘는 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은데 노력이 좀 모자란단 소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내 제자를 결코 사랑하진 않았다. 골이 빈 부잣집 딸년들을 경멸하고 미워했다. 심지어 그녀들이 시험을 치른 대학에 합격했으면 하고 바란 적조차 없었다. 떨어졌으면 싶었다. 생전 좌절하곤 인연이 없을 것들이 한 번쯤 좌절을 겪고 울고불고 하는 걸 보는 건 통쾌한 일이었다.
이런 내가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은행에서 온종일 돈 세고 월급 받는 행원이라도 남의 돈 세는 일을 사랑하고 하는 건 아니잖은가. 어떤 직업이고 간에 돈 받을 때 빼고는 지긋지긋할 것임에 틀림이 없고 그럴 바에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제일이잖은가.
더군다나 나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한때 나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내 가정적인 입장 때문에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열렬히 소망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 대학 삼학년 때던가 사학년 때던가 그쯤일 게다.
일이학년 때만 해도 그렇게 치사하진 않았다. 철없고 신선하고 실로 기고만장했다. 적어도 인간의 장래를 위해 고민하면 했지 나 개인의 장래 같은 걸 갖고 시시하게 고민하진 않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기갈이 들린 것처럼 지식을 주워삼켜도 잘 삭고 이내 허기증이 났다. 그 시절 한과 나는 친했고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삼사학년쯤 되자 지식이 잘 소화가 안 되고 체증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차츰 나 개인의 장래를 걱정하게끔 되었다. 한도 똑같이 그런 문제로 고민을 시작했다. 스스로의 고민을 서로 조금도 감추지 않고 털어놨기 때문에 우린 서로 죽은 잘 맞지만, 궁합은 안 맞는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벌써 한은 재벌의 사위되기가 열렬한 소망이었다. 그는 곧 정년퇴직을 앞둔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러 동생을 거느리고 있는 장남이어서 자기 책임에 대한 공포와 아버지가 보여준 월급쟁이의 말로에 대한 공포로 전전긍긍했다.
어떡하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벌의 사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그런데 난 재벌의 딸이 아니었다. 즈네보다 더 가난하고 형편이 한심했다. 과부 어머니와 맨 계집애뿐인 동생을 한 바가지나 거느린 말뼉다귀 같은 계집 애와 결혼을 해서 뭘 어쩌겠는가. 보나 마나 휜한 건 고생문뿐이었다. 한도 나도 고생문인 줄 알고 들어설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면으로도 우린 죽이 잘 맞았다.
나는 한을 경멸하면서도 닮아갔다. 그러면서도 한보다는 좀 고상하게 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를테면 나도 그까짓 거 부잣집으로 시집가줄까보다는 결심을 굳혔지만 그냥 무의미하게 호강만 하고 살긴 싫었다. 교양 있고 기품 있고 존경받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재학중 교지에 투고했던 경험으로 시(詩)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내 남편이 될 사람은 재벌이 아니어도 좋지만 처갓집 식구를 도와주고도 살 수 있을 만큼만 돈이 있으면 됐다. 또 시인인 아내를 위해 이 년이나 삼 년에 한 번씩 또박또박 시집을 내줄 만큼만 돈이 있으면 됐다. 또 시집이 나오자마자 호화롭고 우아한 출판기념회를 해줄 만큼만 돈이 있으면 됐다. 그만큼만 돈이 있으면 됐지 정말이지 재벌 같은 건 안 바랐다.
그렇지만 그게 한일 수는 없었다.
한과 나는 졸업식 후 다시는 안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서로의 소원 성취를 위해선 그게 편할 것 같았다. 하긴 한이 약간 미련 섞인 어조로,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한 사랑이란 어떻게 되는 거지, 했다. 나는 지금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냐고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칠 년 만에 만난 거니까 상대방이 그 동안 얼마만큼 소원 성취를 했나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한이 먼저 다이아가 박힌 백금 반지를 낀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소원 성췬 했겠지? 했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약이나 올려주자 싶었다. 한이 채신머리 없이 또 묻고 또 물었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하니까 행복하냐고 물었다. 행복이란 소리가 당돌하고 신기하게 들렸다.
한에게서 질질 흐르는 저 더러운 기름기가 바로 부티라는 거라면 부자한테 시집 못 간 게 오히려 행복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금요일날 쉬는 회사 이름이나 대보라고 딴전을 부렸다. 문득 한의 얼굴에 천진한 장난기가 돌았다. 그러니까 네댓 살은 더 앳돼 보였다.
“알아맞혀보지 않을래? 내가 지금 뭐 하고 지내고 있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지 말고 좀 성의 있게 알아맞혀봐. 네가 귀부인이 아닌 것처럼 나는 사장이 아냐.”
“그래도 부잔 것 같은데:’
“음, 부잔 부자야, 아주 짭짤한.”
“뭐해서 벌었어?”
“벌긴, 순전히 처덕이야.”
“흥, 집념이 대단하더니 기어코 부잣집 사위가 되긴 됐구먼. 그런데 아직 회사만 하나 못 얻어가졌다 이 말이로군. 그거야 장인 죽는 날만 기다리면 해결될 거 아냐. 장인은 건강해? 젊어?”
나는 갱의 여두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정한 쇳소리로 따졌다.
“순전히 처덕이라니까. 장인 같은 건 없어.”
“그럼 능력 있는 여자겠군. 그것도 나쁠 건 없네 뭐. 대관절 뭐하는 여자야? 돈 많은 과부? 술집 마담?”
나는 심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것이 속에서 거품을 내며 부글부글 꿇어오르는 걸 느끼며 점점 더 한을 얕잡아갔다. 이런 내 흥분에 반해 한의 태도와 말씨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다 아냐, 그냥 장사하는 여자야.”:
“무슨 장살 하는데 그렇게 돈을 잘 벌어.”
“별로 밑천도 안 드는 장사야. 요행, 재수, 희망 그런 걸 팔고 있어. 사람들이란 그런 걸 줄기차게 원하거든.”
“누굴 놀리는 거야?”
나는 여직껏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니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일 주일의 피곤도 아니었고, 별볼일 없이 하루를 쏘다닌 피곤도 아니었다. 한의 불결함을 참고 견딘 피곤이었다.
“놀리긴 내가 누굴 놀려. 정말이야, 우리 여편넨 무당이거든. 놀라긴, 무당이라니까. 무당이라니까 뭐 귀신인지 신령님인지 모셔놓고 빌고 점치고 굿하는 세습적인 무당인 줄 알아? 어엿한 학사 무당이라구. 근사한 사무실에 출근해서 점잖은 손님을 접견하고 그의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신식 무당이란 말야. 그러니까 난 무당 서방이고. 돈 벌 때가 돼서 그런지 무지무지하게 성업중이야. 아침부터 미리 악을 쓰고 장사진이야. 나는 일찌거니 적어도 여편네보다 두세 시간은 일찍 출근해서 번호표를 교부하고 새치기꾼을 잡아내서 점잖게 꾸짖기도 하지. 그리고 세상엔 고민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구나 하고 감탄도 하지. 하루 백 명 이상은 절대로 받지도 않아. 그게 다 상술이야. 백 명에 천원씩만 해도 얼만 줄이나 알아. 그뿐인가, 시원한 소리 들었다고 소매치기 왕초가 계집년들한테 팁 던져주듯이 돈을 마구 쓰는 기분파 손님은 또 얼마나 많다구. 기똥차지, 기똥차. 여편넨 무당이지만 신령님 같은 건 안 믿어. 신령님더러 중개해달랄 필요가 어디 있냐는 거야. 손님과 직접 영통(靈通)을 하면 되지. 여편넨 손님들이 무엇을 바라나를 쪽집게처럼 집어내서 그걸 적당히 부추기는 비상한 재간을 갖고 있거든.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야. 사람 머릿수가 아무리 많아도 바라는 건 두서너 가지로 요약될 만큼 단순하니까. 언제 부자가 되나, 부자는 언제까지 부자를 유지하고 더 불릴 수 있나, 출세는 언제 하고, 진급은 언제 하고, 언제쯤 외국을 갈 수 있나, 뭐 그런 거지. 뱃속의 아이가 아들인가 딸인가를 묻는 머저리도 있지만 우리 여편넨 그런 명확한 담을 요구하는 점은 절대로 쳐주지 않아. 우리 여편넨 학사 무당이거든. 아 참 그 소린 아까 했지. 우리 여편네가 실상은 엉터리라는 걸 나는 알지. 그렇지만 우리 여편네 돈을 아주 잘 벌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아무도 억울하게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면서 말야. 어때, 나 장가 하난 잘 갔지, 안 그래? 참 우리 회사가 금요일날 쉬는 걸 이상해했지? 알고 보면, 그것도 별거 아냐. 여편네의 상술이야. 일요일날 쉬는 건 너무 당연해서 시시하고 그러다가 골라잡은 게 금요일이야. 금요일날을 기피하는 건 뭔가 좀 서구적인 느낌이 들잖아. 서구적인 건 지적(知的)인 거고, 지적인 것은 자못 학사 무당답고 뭐 그런 거지.”
“이왕 쉬는 날이면 동부인해서 나오지 그랬어? 나도 점 좀 쳐보게, 언제나 부자한테 시집갈 수 있나…….”
“우린 쉬는 날은 각자 행동이야. 일 주일의 밤낯을 붙어사니까 냄새가 나거든. 하루만이라도 서로의 자유를 침해 않기로 약조가 돼 있어. 난 오늘 자유야. 연애도 할 수 있어.”
“연애? 어떻게 하는 건데ㅡ”
“한번 해볼래? 재미있을 것 같잖아?”
“무당 서방하고?”
“넌 뭐니? 귀부인이라도 되니? 여염집 여편네도 못 됐잖아.”
나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고 내 정체는 기어코 안 밝히고 다방을 먼저 나왔다. 시집 못 간 게 그럭저럭 탄로나버린 것도 분한데 그것까지 고백할 내가 아니었다. 그런 면으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몇 배 현명한 법이다.
침침하고 사람도 별로 없는 다방에 오래 앉았다 나왔더니 눈이 부시면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거리의 사람들이 꿈속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바로 앞에 육교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지 마치 육교 자체가 사람으로 돼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눈 뜨고 걸어가면서 시시덕대기까지 하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 같지를 않고 죽어 있는 망령의 떼거리처럼 보였다.
저렇게 많이! 나는 망연히 입을 딱 벌린 채 감탄을 했다. 그러자 오래 전에 깡그리 까먹어버린 엘리엇의 시의 한 구절이 주절주절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렇게 많이, 나는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을 멸망시켰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건 밑도끝도없이 단 한 구절만 떠오른 것이고, 왕년엔 한때 시인 지망이기도 했으니 시 한 줄쯤 욀 수 있는 나를 심히 못마땅하고 아니꼽게 여겼다.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나를 망신시키고 골탕먹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길에서 훌러덩 내 가발을 벗어들었다. 한 손에 들고 빙빙 돌리며 나도 육교를 올라 군중 속에 섞였다. 사람들이 나를 웃음거리로 삼아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나에게 주의조차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내가 왕년에 그토록 소망한 고상한 허식(虛飾)의 마지막 잔해인 가발이 내 손 위에서 효수당한 대가리처럼 징그럽게 흔들릴 뿐이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