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영국 경찰옴부즈맨(IPCC) 측은 런던경찰 측이 2005년 7월 22일 런던 스톡웰 지하철역에서 한 브라질 청년을 테러리스트로 오인 사살한 실수에 대하여 정밀 조사 수사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영국 경찰옴부즈맨 측은 사건 발생 직후 조사에 착수하고 다음해 조사를 마쳤으나 관련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서 공개를 미루다가 금년 말 공표하게 된 것이다.
런던경찰청장, 즉각 사퇴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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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메네제스 2005년 7월 22일 런던 스톡웰 지하철역에서 런던경찰에 의해 오인사살 당하였다. |
ⓒ 위키피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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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11월 보고서를 접한 이얀 블레어 런던경찰청장은 자못 전투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역대 청장 중 누구도 재임 중 발생한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한 청장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사실 영국 공직사회에서도 이처럼 엄청난 사건이 터졌을 때 당연히 자진사퇴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 사회에서 여러 장차관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사태가 완전히 곤두박질을 쳐서 극도로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용케도 자진사퇴를 피해나가곤 한다.
물론 상당수 해당 인사들은 결국은 자진사퇴 하게 되고야 마는 게 사실이긴 하나, 자진사퇴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다지 갈등 관계에 빠져들지 않은 채 자진사퇴 하는 경우가 많다.
시위나 소요진압 유사케이스
역대 런던경찰청장 중 이번 사건과 유사한 케이스는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셉 심슨 청장의 경우, 1968년 자진사퇴 해야 하는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당시 심슨 청장은 언론이 보도한 대로 당시 100년만에 최대 규모 소요사태로 번진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시위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국무부장관(우리나라 경찰은 내무부로 번역함)이던 제임스 캘러헌 장관(후일 총리가 됨) 측에서는 차라리 시위를 원천봉쇄 하라는 입장을 그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심슨 청장은 런던경찰청 측에서 오히려 원천봉쇄 말고 내버려둬 보겠다고 캘러헌 장관 측을 설득하였으며 그렇게 실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캘러헌 장관은 당시 시위를 원천봉쇄 하지 않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시위대가 차도까지 점령하여 진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시위가 있었던 날 런던경찰청 측의 대처전략은 집회시위의 본 행사가 아무런 불상사 없이 무사히 마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한 명의 모택동주의 운동가의 미국대사관 점거기도를 막는데 그쳤다.
당시 런던경찰은 총을 일체 발포하지 않았으며, 물대포와 최루가스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예컨대 헬멧 등의 폭동진압용 장비조차도 전혀 갖추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날로부터 런던경찰은 시위대처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런던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대중과 민중들로부터 아낌없는 존경심을 받게 되었다.
근원적인 경찰부패근절 방안이 아니라며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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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메네시스 모습 사살 당하기 전날 런던지하철 CCTV에 찍힌 메네시스 모습 |
ⓒ 런던지하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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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로버트 마크 청장의 경우다. 그는 청장 임기 초반에 스파게티 하우스 레스토랑에서 에이레반군(IRA) 측이 인질을 잡고 테러를 기도하던 사건을 겪어야 했다. 당시 마크 청장은 이들에게 당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으니 이제 그만 두고 항복하라는 말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 사건 후 마크 청장은 런던경찰청 수사파트에서 발생한 엄청난 부패사건에 대해 가차 없이 혹독한 색출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마크 청장이 사임해야 했던 실질적인 이유는 부분적으로 경찰비리 조사처리 절차의 변경조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대하여 항의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마크 청장은 부패경찰을 솎아내지 않은 채 조직 내에 남겨두도록 하는 그런 형태의 경찰비리 조사처리 절차를 도저히 용인하며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왕 경호 실패해도 사퇴거부
셋째, 데이비드 맥니 청장의 경우를 보면 나중에 스카아만 청문조사위원회 측이 브릭스톤 소요사태에 대하여 경찰 측의 “이성을 잃은 경찰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는데, 실제 그 당시 런던경찰청장으로 재직하였다.
당시 버킹검 궁 여왕의 침실에 한 침입자가 여왕 면전에 들이닥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윌리 화이틀로우 장관은 왕궁 경호책임을 맡고 있던 맥니 청장에게 자진사퇴 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맥니 청장은 이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당시 이는 정당한 거부였다고 평가를 받았다.
넷째, 후임 청장인 케네스 뉴만 청장은 케이스 블레이클록 순경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브로드워터 팜 소요사태’ 청문조사를 직접 받지는 않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당시 일선경찰관들은 이렇게 일선경찰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경찰수뇌부가 마땅히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경찰옴부즈맨 보고서로 청장 사퇴논란 뜨거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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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역 오인피살 상황판 런던 스톡웰 지하철역에 설치된 데 메네제스 오인피살 사건 추적 상황판 |
ⓒ 위키피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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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2007년 12월 현재 이얀 블레어 청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실 스톡웰 지하철역 오인사살 사건에 대하여 영국 언론들이 집요하게 추적보도 해오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이 사건에 대하여 일선경찰 측으로부터 대량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온갖 불만들 및 이를 직감한 정치권에 의하여 확대 재생산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청장 비판자들 측은 이얀 블레어 청장이 노동당 정부가 임명한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선경찰들이 저주해마지않는 경찰활동방식과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청장 옹호론자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청장이 지난 3년 동안 재임하면서 청장직을 훌륭하게 잘 수행해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년 전 런던경찰에게 오인사살 당한 데 메네제스 사망사건은 영국 경찰옴부즈맨의 조사결과보고서가 발표된 지금부터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영국 런던경찰조직에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검시 배심원단은 흔하디 흔한 조직폭력배의 과실치사 사건의 제한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설 수밖에 없다. 관련 경찰관 징계 문제도 앞으로 처리가 진행되어야 하게 되어 있다. 사망한 청년의 가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엄청난 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런던경찰청이 재작년 7월 당시, 21세기형 자살폭탄 테러리스트 추정자를 제대로 처리했다는 시민들 칭찬이 하늘을 찌르던 바로 그 순간, 무고한 한 청년이 오인 사살되었다는 이 비극적 실수가 함께 저질러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함께 균형 있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선경찰과 영국 야당, 사퇴요구
야당인사들은 한결같이 모두 청장이 목을 내놔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당시 사건 관련 비밀정보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썼다며 불만을 토로해마지않던 부청장보 브라이언 패딕의 경우, 내년 런던시장 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며 그때쯤 가면 블레어 청장 진퇴문제도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11월 경찰옴부즈맨 보고서가 공표된 다음 날인 11월 7일, 런던시의회(런던자치경찰위원회가 아님) 측은 15대 8로 이얀 블레어청장에 대한 불신임 및 사퇴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노동당 소속의 런던광역시 시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런던자치경찰위원(보수당 및 자유민주당) 소속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해당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물론 런던경찰청장 임명권 및 해임권은 런던자치경찰위원회 측에 있으므로 블레어 청장이 이 결의안에 따라 사퇴하는것은 아니지만 청장직 수행에 대해 주민이 선출한 대의기관(2000년 이후)에 의해 런던경찰청장이 사퇴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최초이며, 이는 아무리 테러리스트 격퇴라는 명분이 있지만 무고한 청년을 오인사살케 한 런던경찰청 측의 책임을 인정한 경찰옴부즈맨 조사보고서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청장에 대해 커다란 타격을 가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블레어 청장은 지금 영국중앙정부,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 런던자치경찰위원회,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절대다수 런던시민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고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경찰옴부즈맨 측의 보고서 발표로 인하여 청장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영국경찰노동운동 역사의 산 증인인 토니 저지는 <폴리스>지 12월 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되도록 빨리 새로운 청장이 들어서서 런던경찰이 시민들의 지지를 굳건히 하며 자신감과 사기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정밀 조사와 처리에 오랜 시간을 써가며 실용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조사와 정책대안을 강구하며 비로소 그 후에 가서야 청장의 책임을 묻는 영국 런던경찰의 풍경은 자치경찰위원회 같은 민주적 경찰 거버넌스는 물론 경찰노조도 없는 우리나라 경찰로서는 매우 생소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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