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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8 강 ‘돌파(breakthrough)’
야고보서 2:21-26절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1-Was not our ancestor Abraham considered righteous for what he did when he offered his son Isaac on the altar?
22-You see that his faith and his actions were working together, and his faith was made complete by what he did.
23-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that says,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and he was called God's friend.
24-You see that a person is justified by what he does and not by faith alone.
25-In the same way, was not even Rahab the prostitute considered righteous for what she did when she gave lodging to the spies and sent them off in a different direction?
26-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Point: 말씀에 생명을 거는 믿음이 상황을 돌파하게 합니다.
Introduction: 이곳 말레이시아의 최고 부자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름은 아난다 크리시난입니다. 이 사람은 미국유학 후에 말레이시아 석유개발사업에서 수완을 보였습니다. 그런 다음 사업영역을 점차 확대해서 이제는 통신 미디어 시장까지 장악하고 있습니다. 위성TV 채널인 아스트로(astro)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저희 집도 이 위성안테나를 달아 CNN이나 영국 프리미어축구도 시청합니다. 말레이시아 거의 대부분의 집이 이 채널을 이용한다고 보면 됩니다.
또 맥시스라는 이동통신회사도 이 사람 소유라고 합니다. 보니까 제가 이용하는 핸드폰도 이 회사번호입니다. 지금 현재 이용자가 8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전체 인구가 2천 6-7백만 정도니까 실제 이용자의 반 이상이 이 회사 통신시설을 이용하는 셈이지요. 또한 지난 번 수상이던 마하티르씨와 절친한 친구이고, 그래서 같이 마음을 합쳐 말레이시아의 랜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쌍둥이 빌딩-이 중 하나를 우리나라 삼성이 건축함.)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현재 자산이 60억 달러(6조원) 이상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명성은 화려하지만, 성격이 아주 조용한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재단이나 종교단체에 기부를 많이 하며, 사회공헌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년 한 해만 해도 무려 600억 원 이상의 기부를 했다고 하네요.
자, 왜 이런 얘기를 하냐하면 오늘 본문의 ‘행함’이란 것을 좀 더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구제나 자선 같은 세상이 요청하는 ‘좋고 선한 일’이라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희생하며 구제하고 자선을 베풀었는가? 물론 하기야 했지요. 전혀 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언급한 사람처럼 엄청 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런 여유가 우리에겐 별로 없습니다. 우리 살기도 바쁘고 빠듯한데! 차라리 선행을 자기 공로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얘기하는 ‘행함’이란 무엇일까요?
Point 1: 돌파
본문의 주제를 담고 있는 2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의 영역에서 ‘행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몸에서 ‘영혼’이 차지하는 역할과 동일시합니다. 우리 몸에서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말로 우리 인간도 고깃덩어리지요. 요즘 각광받는 스키니(skinny) 스타일은 이런 면에서는 건질 게 없는 하품입니다.
좀 곁으로 나가는 얘기이지만 기독교계에서 줄기세포복제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으냐하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동물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이 잉태될 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영혼이 천국에 대기하고 있다가 하나씩 내려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불어 넣어주십니다. 그래서 영혼이 있는 몸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되는 시간이고, 또 창조의 원리이며 언약으로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를 깨고서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복제를 할 때, 이 인간의 언약을 깬 창조에 하나님이 동의하실까요? 그래서 그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을 불어넣어 주실까요? 만약 영혼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그 복제인간은 뭐가 될까요? 인간입니까? 동물입니까? 영혼이 없는 인간이니까 장기를 적출해서 영혼 있는 인간을 위한 희생물이 되어도 될까요? 이런 복잡 난해한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복제인간에 쉽게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조심하자는 것이 기독교의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자, 사도야고보는 지금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의 위치와 믿음에서 행함의 위치를 같은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핵심이 ‘영혼’이듯이, 믿음의 핵심이 ‘행함’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행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놓치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함’의 이해는 너무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 과제를 사도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인 행함이 무엇이냐?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 먼저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일종의 합의로 나타나는 ‘행함’이 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으로 가 봅니다. 여기에 초대교회의 구제문제가 나옵니다. 초대교회가 교인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또 당시는 교회에 몸과 마음과 물질을 전폭적으로 바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파워를 사용하는 문제로 구제가 등장했습니다. 당시 교회에 어려운 처지의 미망인들도 많이 나온 모양입니다. 이들이 우선적 구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분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6장 1절에 보면 ‘원망’이 나옵니다. complained against! 자존심이 상하면 도움을 받고도 불평이 나오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돕는 일은 섬세한 작업입니다. 교회가 좋은 일을 하다가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 때 사도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공궤’라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 데, 쉽게 번역하면 ‘푸드 프로그램(food program)을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 여기에 ‘행함’에 대한 사도들의 중요한 인식이 나옵니다. 지금 사람들이 행함의 우선으로 여기는 ‘구제’를 하다가, 거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들이 내놓은 처방은 ‘우리 사도들은 하나님 말씀 연구하여 선포하고 성도들 위해 기도하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하자.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Attention to the ministry of the word! 이것이 사도들의 교회를 살리는 구호가 됩니다. 구제보다 더 중요한 ‘행함’이 교회에는 있고, 교회가 그것에 집중할 때 그것이 교회를 살린다는 인식입니다. 바로 사도들이 다시 집중했던 이 ‘행함’이 교회의 믿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자, 교회는 늘 여기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도는 늘 여기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되고, 성도가 성도됩니다. 교회와 성도는 바로 이 ‘행함’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풍성한 교회와 믿음이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교회의 참된 ‘행함’이라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행할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행함입니다.
믿음의 핵심이 왜 말씀을 전적으로 붙잡는 ‘행함’인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근원적인 접근을 위해 창세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아담과 하와가 왜 문제가 생겼나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시고, 복을 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you will surely die. 이것은 단지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먹지 말게 한 ‘하나님의 심술(?)’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다는 창조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말씀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3장에 가면 하와가 이 말씀을 어떻게 변형시키나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여기를 보세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or you will die. 여기서 뭐가 문제예요. ‘정녕, surely’가 사라집니다. ‘정녕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죽을까. 그래 설마 죽이시겠나. 안 죽이실 지도 몰라.’ 요렇게 바뀌어 버립니다.
말씀이 사람에 의해 이렇게 살짝 바뀌자, 악한 마귀가 어떻게 치고 들어옵니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바로 여기에 죄가 있고, 사망의 기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후로 줄기찬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붙어있는 것이 생명이고 영생이며,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고, 말씀을 붙잡는 것이 가장 근원된 ‘행함’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게 줄기차고 집요하게,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붙어 있는 것이 믿음이고, 그게 행함이다. 그게 인생을 살리는 믿음이고, 인생을 구하는 행동이다.’ 이렇게 줄기차게 얘기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얼마 전에 여기 TV에 나오는 영화채널에서 ‘리버 와일드(River Wild)'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메릴 스트립이라는 유명한 여배우가 주연인 영화인데요. 액션과 가족애가 적절히 섞인 영화입니다. 배경은 급류에서 래프팅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리버 와일드지요. 가족이 탈주범 두명을 만나 위기에 처하지만 래프팅과정에서 이들을 때려눕히고 가족이 다시 뭉치는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여자 주인공이 래프팅을 잘 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계곡으로 래프팅을 하기 전에 보트에다가 자기 발을 아주 꽁꽁 묶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왠만한 급류를 만나도 배에서 떨어져 나오질 않습니다. 배가 자신이고, 자신이 배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급류에서 생존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보면서 ‘아, 저게 내가 사는 길이구나. 바로 저거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 혼자 뭉클 감동했습니다.
히브리개념으로 ‘믿는다’하는 말은 우리가 그냥 ‘난 널 믿어. 잘 해봐’ 이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런 격려차원으로 이해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믿음’이란 말이 좀은 혼동이 생깁니다. 우리가 ‘믿음’을 얘기할 때는 히브리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히브리개념으로 ‘믿는다’는 것은 뭐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자네를 믿기에 이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네.’ 이런 뜻이 ‘믿음’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생활에서 인감도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감도장은 아무에게나 맡기를 않지요. 꼭꼭 잘 보관했다가 가장 필요한 때, 무슨 중요한 계약서나 재산관계에서 사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감도장을 내가 누군가에게 맡겼다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이 됩니다. 내 재산과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맡긴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잘못되면 큰 사단이 나지요. 그래서 곤혹을 겪는 경우가 세상사에 많습니다.
‘믿음’이란 게 뭐냐하면 내 인감도장을 하나님께 다 맡기는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너무 중요한 행함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망하면 나도 망해야 합니다. 딴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말씀이 잘못되면 나도 큰 화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나의 가장 중요한 행동, 소중한 결단이 포함된 믿음, 이게 바로 본문이 얘기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화적으로 살피면 참고가 됩니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이지요. 동양문화는 보통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가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계약 같은 것에서 그 사람 자체를 믿으면 그 구체적인 내용을 좀 덜 따집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 보증 서는 것을 거절을 잘 못합니다. 특히 가족이나 친지는 더 그러합니다. 물론 요즘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요. 특히 ‘사람 좋다’고 소문난 사람, 밥이 많이 되지요. 그래서 사람 조~은 사람 보면 대체로 보증 섰다가 혼쭐이 난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망한 사람도 많지요. 약싹 빠른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잘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양문화를 보면 짤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약서 중심입니다. 계약서에 있고 그 밑에 싸인이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계약서에 내용이 없고, 자기 싸인이 없으면 누가 뭐래도 ‘I don't know.'입니다. 도덕적인 책임, 이런 것은 일단 이차적인 것입니다. 싸인 했으면 확실히 책임지고, 그렇지 않으면 None of my business입니다.
지금 사도야고보는 목회 현장에서 여러 성도들은 만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지금 갖은 풍파를 딛고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조국을 잃은 이래로 세계 도처로 흩어지고 되었고, 다시 돌아와 겨우 종교적인 자유는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정세는 페르시아에서 헬라로, 다시 로마로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세금은 세금대로 꼬박 꼬박 바쳐야 하고, 권력과 함께 일을 진행하려면 여러 가지 부대비용이 들어가는 그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각박한 현실이지요. 이것이 사도의 목회 현장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 어디에 맡기는 것,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너무도 리스크가 많은 행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히브리 개념의 ‘믿음’은 지금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그 히브리전통의 ‘믿음’은 지금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세상의 현실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챙기고, 내가 잘 간수하고, 내가 요령껏 잘 굴리고, 빠릿 빠릿하게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숨 좀 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런 목양의 현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뭐가 믿음이냐? 네 믿음이 뭐냐?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고, 뭐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냐? 우리가 사는 이 하루 하루에 우리가 받은 믿음은 과연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원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니냐? 그 믿음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지 않았느냐? 그 믿음으로 그들은 고난을 이겨냈고, 그 믿음으로 그들은 현실과 상황을 돌파해 내지 않았느냐? 그 믿음이 우리에게 지금 있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행함의 믿음’이 어려운 걸까요? 왜 믿음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 힘들까요? 자, 생각해 보세요. 행함의 믿음이란 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턱 맡겨 버리는 것이거든요. 하나님 말씀에 다 맡겨서 ‘다~ 알아서 하세요.’ 이게 ‘행함의 믿음’이거든요. 이게 쉬운 것 같지만, 쉬운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책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책임지시오.’하고 맡기는 것이거든요.
사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그분이 너무 크셔서 우리 눈에 안 보이시는 게 문제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것에 맡겨야 하는 데, 하나님은 ‘맡겨라’ 말씀하시고, 그 분은 영 내 눈에 잘 안 보이시거든요.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고, 믿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기게 됩니다.
보세요. 우리 인생들이 사용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살펴보세요. 다 좀 더 뭔가 확실한 것을 찾아서 그것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가끔 뉴스를 검색하다보면 ‘신이 내린 직장’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정시 퇴근에 각종 복지 혜택, 만만찮은 연봉에다가 정년보장! 그래서 신입사원이라도 뽑을 때면 그야말로 울트라 경쟁이 생깁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투자하는 시간을 보세요. 확실한 것을 잡고 싶어서입니다.
또 관계를 보세요. 이성 관계든, 사회생활속의 관계든, 사람들은 확실해 보이는 사람에게 관심을 더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이 꼬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관계라야 내 것이 확실해지고, 거기다가 플라스 알파가 생긴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입니다.
옛날 영화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문리~버’라는 주제가로 유명한 영화지요. 여기에 할리(오드리 햅번)라는 사교성 좋은 여자가 나오고, 작가 폴이 나옵니다. 뉴욕의 한 거리에서 아랫집 윗집으로 살게 됩니다. 어느 날 할리에게 푹 빠진 백만장자가 청혼을 합니다. 그런데 할리가 그 청혼을 거절합니다. 세상 상식과 현실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미친 여자 아니면 아주 특별한 여자겠지요. 그래서 남자 주인공 폴이 할리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지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멀쩡하게 건강하고, 나이도 맞고, 믿음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 같지는 않고, 거기다가 백만장자 or 준재벌 2세가 내가 좋다고 프로포즈하면 당연히 Okay 해야지요. ‘너, 어디 숨었다 이제 왔니’ 이러면서. 속으로! 이런 청혼을 마다하고 굳이 선교사(?)하고 결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은 현실에서 확실한 것을 확보하려하고, 추구하는 존재니까요. 주위를 둘러보고, 또 자기를 살펴보세요. 인생들의 많은 시간이 여기에 소요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팩트(fact)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삶 깊숙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할 때도 이렇게 나오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확실해 보이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으로는 믿는데,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는 것은 wait a minute입니다. 뭔가 확실해야 행동할 수 있는데, 확실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지 못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바로 이 부분에서 ‘모든 우상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버리질 않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 가운데서도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를 않습니다. 또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늘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 선포자들이 늘 지적하는 것은 그게 바로 우상의 실체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확실한 것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데, 하나님은 확실해 보이질 않으시면서 자꾸 믿고 맡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보니까 확실하게 보이는 게 자꾸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는 하면서, 그 마음은 ‘확실해 보이는 것’에 가 있습니다. 이러면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지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어이, 자네 들었나? 이번에 두로에서 좋은 물건이 온대. 붙잡기만 하면 10배 남는 장사야. 시칠리 섬의 최상품을 지중해무역 모시기사장이 직접 확보한 물건이래. 물어볼 것도 없어!’ ‘아, 그래. 그렇지만 내가 지난번에 잘못한 게 있어서 양심에 영 걸려서 이번에 예루살렘 가서 소를 잡아 제사를 좀 드리려고 하는데...’ ‘정신 차려. 붙잡기만 하면 10배야, 10배. 일 년치 수익이 한꺼번에 생기는 거야.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왜 청성 맞게 꺼이 꺼이 울려고 이 대박을 왜 놓쳐? 모시기사장이 자기 축제 때 제일 잘 노는 사람에게 선착순으로 물건을 준다고 그랬대. 어서 가자구.’
‘나에게 가장 확실한 것을 누가 책임져 주는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그 분에게 맡겨도 되는가?’ 바로 여기에서 믿음으로 나갈 때, 그 사람은 믿음의 진수인 행함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돌파하는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뭇거리면, ‘영혼이 없는 몸’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만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본문을 다시 보세요. 본문에서 사도는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핵심인 ‘행함’이 뭔지, 그래서 그 ‘행함의 믿음’으로 현실을 어떻게 돌파하는 지를 설명하고자 성경의 두 사람을 사도는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먼저 사도는 아브라함 얘기를 합니다. 21-23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자,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고보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그의 믿음의 핵심은 행함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 행함이 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사도는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행함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처음을 보세요. 어떤 모습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까?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아브라함아. 내가 가라는 데로 가거라.’ 창세기와 고고학이 밝힌 역사를 참조하면 갈대아 우르는 당시 도시 문명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는 이미 그곳에는 수메르 문명이 지나가고 있었고, 이제 고 바벨론 문명이 자리 잡으려는 과도기였습니다. 일종의 권력 교체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는 찬란히 발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설형문자로 된 서책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 촌구석에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라는 곳으로 가거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70년 동안 몸에 배고 익힌 도회지 문화와 문명 세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 편안을 버리고, 말씀 때문에 마치 베두인족처럼 유목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양하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나타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때를 그의 믿음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삭 제물 사건은 그의 믿음의 클라이막스입니다.
그러면 그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은 그냥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내용이자 핵심인 행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그의 ‘행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그의 의로 여겨주시고, 더욱 더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장 6절!
우리가 사실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을 깊이 생각하면 긴장감이 생깁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불합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신처럼 격이 떨어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노년에 낳은 애지중지 아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입니다. 뭘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요즘도 보면 아들을 꽉 끼고 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엄마쪽이 좀 더 그렇더라고요. 그러다가 아들이 장가갔는데도, ‘바보’ 짓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3대 바보 얘기, 첫째가 예순이 넘어서도 집을 늘리는 사람이고요, 둘째가 자식에게 재산 다 물려주고 용돈 타 쓰는 분들이시고요, 셋째가 며느리의 남편을 아들로 아는 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좌우간 그렇게 소중한 것이 자식이고, 아들인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말이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요. 이슬람 공부를 하다보니까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을 엄청 존경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이 ‘순종’이란 뜻이고, 무슬림은 ‘순종하는 사람’이란 뜻이거든요. 비록 바치려던 아들이 ‘이삭’이 아니고 ‘이스마엘’이라고 해서 문제지만요.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이게 엄청난 ‘행함의 믿음’입니다. 왜 순종합니까? 그냥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이삭 안에 만국의 씨앗이 있다는 말씀을 그냥 믿은 것입니다. 어떠하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 오히려 유익(gain)임을 믿은 것입니다. 상황 위에 계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현상을, 그 현상이 어떠한 것이든지, 돌파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행함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야고보사도는 ‘라합’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25절을 보세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의 배경은 여호수아서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인 싯딤이라는 곳에 캠프를 칩니다.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면 바로 만나는 곳이 여리고라는 요새입니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군을 여리고쪽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여리고쪽도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의 동향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했고, 그들 가운데 엄청난 이적들이 일어났고, 드디어 그들이 가나안땅으로 들어오려고 요단강 동편에 진을 친 것을 여리고사람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정보망과 자기 방어조치들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망에 정탐군들의 잠입이 걸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들을 여리고 군사들이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정탐군들은 다급한 걸음으로 노상주막 같은 라합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급박한 상황이지요. 이제 군사들이 이 주막집에 들이닥칩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 라합이라는 주막집 여주인이 두 정탐군을 숨기고, 군사들마저 따돌립니다.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도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그렇게 군사들을 엉뚱한 곳으로 보내고, 실제로는 정탐군들을 지붕 삼대 벌려놓은 곳 사이에 숨겨서 보호를 해 줍니다.
자, 이게 뭡니까? 이게 뭐냐하면 라합이라는 여인이 지금 이 두 정탐군을 살려주려고 자기 동족, 나아가 자기 나라를 배신을 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나라와 세계를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반이자 자신의 가장 소중한 터전에 등을 돌리는 위험한 행동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어떤 행동입니까? 라합이 마음결이 너무 고와서 이들을 보고 동정심이 생긴 것입니까? 그래서 이들을 보호해주고 숨겨 준 것일까요? 동정심 때문에 자신의 민족의 흥망이 걸려있는 이런 중요한 정보원을 감싸 준 것입니까? 동정심 때문에 이런 매국행위를 라합이 한 것일까요? 동정심 때문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는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일까요? 이런 ‘행함’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들었고, 하나님 백성에 대한 얘기들, 소문들을 들었고, 거기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에는 정탐군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들은 하나님 말씀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기반과 자기 동족에 대한 배신일지라도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의 말입니다. 그녀는 객주집 아낙네로서 세상 정보에 밝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지 40년이 지난 시점이니까, 꽤 오랜 동안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얘기들은 어느 틈엔가 그에게 크게 다가왔고, 그의 마음을 가득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픈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회가 주어지자 그들이 따르던 말씀에 자신의 생명까지 걸어버린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바로 이것이 라합의 ‘행함의 믿음’이며 ‘돌파’입니다.
자, 보세요. 결국 ‘믿음’이란, 나아가 ‘행함의 믿음’이란 뭔가 하면, 내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태도와 방향성입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는 내가 다룰려고 합니다. 내가 계획하려고 하고, 내가 마련하려고 하고, 내가 보관하려고 하고, 내가 키우려 합니다. 그래서 그게 나에게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것이 되게 하려고 하고, 또 더 큰 것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도전이 뭐냐 하면 그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내게 맡겨라. 그것 한번 맡겨봐. Trust in me!' 이런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믿음에게 도전을 하거든요. ‘니 믿음의 근거는 내가 선물로 주어서 너에게 있는데, 그것을 행함의 내용으로 꽉 채우는지 한 번 봐야 되겠다. 니 고것, 니가 아끼는 고것을 내게 함 맡겨봐라.’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이러면 이제 우리 믿음의 진짜 모습이 들어납니다. 우리 믿음이 야고보사도가 얘기하는 ‘행함의 믿음’인지, ‘행함이 없는 믿음’인지, 어떤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우리 믿음의 밑바닥에 있는 생각이 뭐냐 하면, 나의 이 소중한(valuable) 것을 내가 관리하고 챙기고 그러지 않고, 남에게 맡겨버리면 그것을 잃을(lose) 것 같아요. 그 대상에 하나님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딴 일도 많으신데, 내 것까지 챙기시면 내 것은 좀 덜 관리해 주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내 것은 내가 확실히 챙겨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생각과 이 행동이 ‘믿음의 장애물(hinderance)'로 나타납니다. 돌아보면 바로 여기서 내 믿음이 딱 막혀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내 믿음은 생명력을 잃었고, 행함을 잃었고, 영혼을 잃었고, 그래서 그저 껍데기만 남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란 게 결국 어디서 나오냐 하면 ‘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그냥 딱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 그래서 딴 생각 않고 말씀 따라 그냥 막 쫄쫄 따라가는 것, 설사 잃을 가능성이 생기더라도 그 분 손에 그것을 딱 쥐어 주는 것! ‘하나님, 요것, 요 진로, 요 방향, 요 관계, 요 재정, 요 알토란, 요 금이야 옥이야, 요것 다 알아서 하세요. 하나님 제가 그냥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바로 이 고백에서 생겨나옵니다. 요게 지금 사도가 얘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라합의 믿음이요, 나아가 사도가 반복하고 반복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Conclusion: 저는 뭐 빙빙 도는 것,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그래서 머리가 띵해 지는 것,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이들과 놀이동산에 갔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만난 것입니다. 놀이기구! 그 중에 싸이클론이 있습니다. 가족이 다 타고 초스피드로 오르락내리락, 물론 아이들까지 탈 수 있기에 과격 놀이기구는 아닙니다. 정말 과격한 것, 왜 그런 것을 돈 주고 타는 지 그 이유를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빠가 좀 멈짓 하니까 큰 딸이 그럽니다. ‘아빠, 그냥 몸을 한 번 맡겨봐. 그냥 즐겨. 재미있잖아.’ 아, 목사의 딸! 영감이 퍼드덕해서 메모해 놓았습니다. ‘말씀에 인생을 맡겨봐! 재미있잖아! Isn't it exciting?'
제가 좋아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1장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게 영어 번역이 재미있습니다.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어떤 번역은 ‘Living is for Christ, and dying is even better.' 이렇게 합니다. 뒤엣말 ‘죽는 것도 얻는 것이다.’ 이 말이 굉장히 멋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계속 믿음의 결단, 믿음의 행함, 말씀에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다 맡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이 뭐냐 하면,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것까지도, 믿음으로 하면 ‘얻는 것(gain)’라는 결론입니다. 말씀에 자신을 거는 것은 결국 인생에서 가장 큰 것을 얻는 소득이며, 유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야고보사도가 계속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익이다. Faith is profit, 오팰로스, 그러니까 더욱 더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그러질 않았느냐. 그래서 결국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까지 순종하지 않았느냐. 라합도 그런 것 아니냐. 그러니까 동족을 배신하는 상황이 와도 말씀에 모든 것을 거는 믿음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느냐.’ 이 사도야고보의 이 말은 바울의 고백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 안에 모든 유익이 있다. All the benefits in the faith.'라고 평생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어떤 돌파의 ‘행동과 행함’이 필요합니까? 여러분에게 지금 필요한 믿음은 어떤 모습의 것입니까?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갈 길과 방향과 관계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 그냥 맡겨 버리세요. 그것이 우리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에서 원하시는 행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고, 소득이고, 얻음(gain)입니다. 그 맡김, 그 상실은 오히려 우리의 변치 않는 유업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믿음이 그런 ‘행함의 믿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Prayer: 아버지여, 우리에게 이런 복된 믿음을 주셨는데, 우리의 주저와 우리의 연약이 장애가 되어 이 믿음 안에 행함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로 주의 말씀을 듣고 보게 하시고, 그 말씀에 나를 매고 맡기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득임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내 상황을 돌파하게 하시고, 그 믿음이 풍성한 행함으로 채워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밖에서 읽는다고 프린트했는데 18장 나왔어요ㅋ..돌파..!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
한개 믿음의 수 만가지의 장애와 벽을 돌파할 줄 믿습니다. 제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정말 돌파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