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은자의 나라, 그 문을 열다
(고종 황제의 선교 윤허)
한국 선교 개척의 사명을 띤 매클레이는 주일 미국 공사 빙검(J. A. Bingham)과 주한 미국 공사 푸트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마침내 1884년 6월 8일 부인과 함께 요코하마를 출발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통역을 구해 배를 갈아타고 한국을 향한 것이 6월 19일. 그 배는 이튿날 부산 항에 도착해 하루 반을 머물렀는데 그 사이 매클레이 부부는 부산에 내려 그곳 세관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로벳(Lovett)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리고 부산에서 일하던 일본인 매서인과 그의 기도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한국인들도 만나보았다. 다시 배에 올라 남해안을 돌아 제물포 항에 도착한 것이 6월 23일 오후 1시.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도착한 것이 6월 24일 오후 6시. 매클레이 부부는 미국 공사 푸트 부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매클레이의 방한 목적은 분명했다. 공식 경로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선교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 분위기는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임오군란(1882년)이후 불어 닥친 보수화 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으나 아직도 사회 밑바닥에는 급진적 개화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해 있었다. 한 달 전 보빙사절단이 돌아와 서구 국가들의 문명에 대해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이 유리하게 작용하였지만 정작 사절단을 인솔했던 민영익은 귀국한 후 보수 쪽으로 돌아서 개방과 개혁의 반대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클레이는 정부 요로에 있는 인물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1주일이 되도록 뚜럿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참 지난 후에야 매클레이는 그 이유를 알았으니, 나가사키에서 채용한 통역 겸 안내인이 실은 정부 안의 보수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어서 매클레이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쪽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클레이는 외교 통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아직은 종교 문제를 논할 때가 아니라고 여긴 푸트 공사는 내키지 않는 자세로 외교를 담당한 통리교섭아문에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교섭아문에서 나온 실무 담당자가 바로 김옥균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매클레이 부부에게 영어를 배운 제자였다. 당시 김옥균은 우승지로 거의 매일 승정원에 나가 고종과 국사를 논할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매클레이는 당시 김옥균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인간의 극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기회가 된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매클레이의 "우선 병원과 학교 사업부터 하겠다"는 내용의 선교 허락 요청 서한은 6월 30일 김옥균에게 전달되었다. 그 다음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불안하게 기다리던 매클레이는 7월 3일 오전 김옥균을 방문했다. 김옥균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자세한 것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사업을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희망적인 소식이지만 아직은 속단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의 결정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전날 밤 매클레이가 올린 서한을 보고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김옥균이 전하는 말에 희망을 두고 계속 기도하였다.
"국왕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나이다. 그것은 물줄기 같사오니 주님께서 어디로 트시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바로 그날 오후 늦은 시간, 매클레이는 김옥균으로부터 미국 공사관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푸드 집무실에서 김옥균이 전한 소식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날이 1884년 7월 3일. 한국 정부가 기독교에 문을 연 날이다. 비록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범위를 제한하였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의 내한을 허락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날이다. 그날 푸트 공사의 통역으로 현장에 있었던 윤치호는 이튿날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주상께서 미국 상선의 내해 항해와, 미국인들이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일, 전신 설치의 일을 허락하시다."
이로써 고종의 '선교 윤허'를 얻는데 성공한 매클레이는 한국 기독교(개신교) 선교를 개척했다는 감격 속에 7월 8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면서 가우처가 보내온 선교비를 푸트에게 주어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서울에 머문 보름 동안 주일을 두 번 맞았는데, 공사관 식구와 그의 가족이 참여한 '주일 예배'는 이땅에서 이루어진 개신교의 첫 공식예배로 기록되고 있다. 그때 매클레이가 본문으로 택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은 이수정을 비롯하여 기독교에 폐쇄적이었던 많은 동양인들의 마음을 연 열쇠 같은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