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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아타나시우스의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함이라"(3)|
육체 되심은 신성을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심
육체 되심으로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졌고 하나님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은 연결되어 신성과 인성이 서로 감소됨이 없이 동시에 공존하는 유일한 한 사람을 산출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시다. 육체 되심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분은 자신의 인간 생활 동안 은혜와 실재를 나타내셨다(요1:14). 그분은 사람이 배운 적이 없고 배울 수도 없었던 공과인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또한 그분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생활의 본이 되셨다(벧전 2:21, 요13:15, 마11:29). 그분은 인간 유혹의 시험을 통과하셨지만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다(히4:15). 이런 것들을 통해 그분은 사람을 위해 죽으시기에 자격이 있는 분이 되셨다. 그분이 사람으로 오심으로 그리스도는 잃었던 것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하셨다(눅19:10). 이 구원은 물론 우리의 구속을 포함한다. 그분은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요1:29, 히9:26, 벧전1:19)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육체 되심 안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 보시고(2:9) 죽음을 통해 죽음을 멸망시키셨다(2:14; 딤후1:10; 고전15:54-56, 26). 이 모든 것은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들은 주로 예수님의 인성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그분의 신성으로 인해 영원한 효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우리의 죄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타락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그는 생명나무의 길을 잃었다(창2:9, 3:24). 생명 나무는 사람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하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안으로 이끄시려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여겨졌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리스도가 먼저 거룩하셔야 했다. 이것이 4세기에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했던 아타나시우스와 다른 이들의 주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이셔야만 했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리스도는 거룩케 하시는 근원인 신성을 거룩케 하시는 대상인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신화와 동의어인 거룩케 하심은 믿는 이들이 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들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본성의 변화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의 본성의 속성인 거룩은 하나님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로 부터 분별함이라고 정의된다. 하나님 한 분만이 거룩하시다(계15:4). 이렇게 말함으로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 가운데 유일하시고 모든 것들로부터 분별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케 됨, 즉 거룩하게 만들어질 때(엡1:4, 골1:22)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따로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거룩에 참여한다. 이 참여가 곧 우리의 신화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과 11절도 거룩하게 됨을 믿는 이들의 아들의 자격과 동일시한다. 10절에서 말하는 영광 안으로 이끌어진 아들들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동일시 또한 신화를 암시한다. 이후에 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의 한 방면은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들로서 우리는 개인적으로(혹은 보다 전문적으로 말해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종류에 따르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모든 생물의 후손들은 인격에 있어서는 그들의 아비들과 동일하지 않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같다. 히브리서 2장에 따르면 우리는 거룩케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 안으로 이끌려지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으로 신성을 인성 안으로 가져오셨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의 최고의 목적은 바로 이 거룩케되심 즉 신화이다.
부활은 인성이 신성 안으로 이끌려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 또한 복합적이다. 유감스럽게도 개신교는 육체되심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관해서도 편협한 관점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그분의 희생의 효력을 입증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기초로 이해된다. 로마서 4장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런 법리적인 목적이 있지만, 법리적인 방면이 부활의 목표의 전부는 아니다. 의롭게 됨은 그 정의로 보자면 법리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로마서 5장 18절은 “생명의 의롭게 됨”이라고 말한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는 이것을 “생명을 주는, 혹은 생명으로 이끄는 의롭게 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의 증거로만 보는 것은 확실히 너무 좁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영역 안에 있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부활의 효력 또한 사람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사려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부활에 대한 더 높은 관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과를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즉 그것이 그분 자신께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와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하신 사람으로서 우주 가운데 유일한 분이다. 신격에 있어서 그분은 독생자로 불리신다(요1:18, 3:16, 3:18, 요일4:9). 이것은 그분을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성령과 구분하는 불변의 칭호이며, 다른 누구와도 나눈 적이 있거나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신분에 참여할 수 없다. 인성에 있어서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리신다(마12:8, 막10:45, 눅9:22, 요3:13, 행7:56, 계14:14). 그분은 온전한 사람이시며 인류를 온전히 대표하신다.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영원히 인류에게 위탁하셨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죽으셨고,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나셨고(마17:9), 사람으로서 승천하셨고(요6:62), 사람으로서 보좌에 앉으셨고(마26:64), 사람으로서 영광 안에서 돌아오실 것이고(25:31), 사람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눅1:31-33). 그리스도는 결코 그분의 인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소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단지 독생자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시다(롬8:29).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와 그 해결책인 성경 안에 있는 하나의 큰 계시에 직면한다. 그리스도는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러한 분에게 형제가 있을 수 없다. ‘독생’이라는 말은 그분이 홀로 태어나셨고, 그분 외에 다른 아들들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제는 형제들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이제는 그들의 아버지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통해 그분은 자기를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갈3:26, 요1:12, 롬8:14).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다른 형제가 없고 다른 누구와도 아들의 자격을 공유할 수 없는 독생자께서 어떻게 많은 형제가 있고 그들과 아들의 자격을 공유하는 맏아들이실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최종적으로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는 오직 그분 안의 신성 부분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분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분의 신성의 특성들이 사람이신 그분께 귀속되고, 그분의 인성의 특성들이 하나님이신 그분께 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신학 용어로는 속성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속들은 서술의 수준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의 신성에서도 실재로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성에서는 본질적으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되심으로 더해진 인성의 속성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있다(행20:28). 그러나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인성은 “아들화”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활을 통해 신화되었다는 개념은 아타나시우스의 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육체에 따라 말하자면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영원하신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실 필요가 전혀 없다. 그분은 영원히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인정되심이 있었다. 이러한 인정되심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된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바울은 부활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신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온전히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 이 편에 기록된 것과도 같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아들이시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 이전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을 낳고,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분이 영원히 존재함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간 안의 어느 한 지점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분의 아들로 낳은 “오늘”이다. 여기에서 낳음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퍼져 인성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그분의 인성 안에서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성경 구절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일 것이다. 믿는 이들의 부활에 관해 바울이 해명한 고린도 전서 15장이 이 문제에 관해 분명하고도 가장 간결한 표현을 제공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45절). 마지막 아담은 의심할 바 없이 인류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완전한 의미에서 사람이시다. 생명주시는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고(요5:21, 6:33, 63, 롬4:17, 고전3:6), 신격 안에 두 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개념에 대한 더욱 섬세한 표현을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과 그 영(the Spirit)이 동일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39절). 물론 신격의 제3위격이신 하나님의 영은 영원히 존재해 오셨고, 시간상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람 예수가 영화롭게 되신 것인 부활을 통해 생겨난 그 영의 방면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 예수의 신화로 본다. 이를 통해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이 되시고, 그 인성은 그분의 신성과 함께 생명주는 영에 투자되고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해 (우리와) 소통되신다. 요한복음 6장 또한 비록 덜 분명한 방식이지만 이러한 사상을 포함한다. 53절과 54절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여러분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생명의 근원인 그분의 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대부분에게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입니다”(63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는 인성이 그 영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유용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이 안에서 재차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를 본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가 그분의 부활이 그분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임을 보아 왔듯이, 우리는 이제 믿는 이들의 신화도 그분의 부활이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의 인성이 신화됨을 통해 그분은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이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화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영향을 준 관점에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벧전 1:3).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의 증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아들의 자격을 단지 입양으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을 하나의 출생이라고 말한다(요1:13, 요일5:1).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다만 한번의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요일5:12, 벧후1:4), 진정으로 참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을 통하여 우리는 신성의 범주 안으로 이끌려 졌고,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되고 신화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점, 즉 그분의 비공유적 신격의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화롭게 됨과 신화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분은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하나님의 아들들 중 맏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로서 영광으로 이끌려지고 있다(히2:10).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부활 때 하나님으로 인정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 안에서의 어떠하심과 신화되고 높여진 인성 안에서의 어떠하심 모두에 있어서 본체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즉 그분만이 하나님 자신의 미덕에 의해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신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으로 인식되시고, 그러한 인식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오직 종류 즉 종(種)에서만 하나님이 되며 인격적으로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하나님 신분에 의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나,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신화에 관한 신약의 용어는 간접적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비록 신약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명백하게 불린 곳은 한 군데도 없지만, 그들의 신화의 사실은 믿는 이들이 가진 몇 가지 신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법리적인 효과 그 이상이다. 오히려 부활이기에 그것은 주로 생명의 문제이다. 그 첫번째 효과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었다. 즉 그분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적셔졌고, 그분의 본성은 신화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이러한 분으로서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원형, 창시자가 되셨다(히2:10).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로 신화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도록 신화된다.
우리가 하나님인 방식
우리는 앞에서 믿는 이들이 누리는 신분들이 최소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시사함을 지적해 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될 것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이것들을 함께 모아야만 한다. 신약이 사람의 신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누리는 신분들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러한 함축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의”라는 가장 신비로운 문구가 암시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끌려져 그분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것은 단지 입양 선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출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기본적인 수단을 소유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받는 신성한 생명 안에는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다. 아버지로부터 난 모든 것이 아버지처럼 되도록 자란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우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요한일서 3장 2절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요한의 사상을 따르면, 하나님과 같게 되는 것의 증거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능력임을 주목하라. 이것은 교회 초부들의 글에서 뚜렷히 나타나는 개념이다. 우리가 보는 만큼 그것이 된다. 물론 육체의 아들이 인격적으로 아버지와 똑같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인격덕으로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종류인 것과 같이 우리도 종류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신성한 생명 안에는 신성한 본성이 있고, 신성한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된다. 베드로도 우리가 참되게 신성한 본성을 소유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고 말함을 통해 단언한다(벧후1장4절). 어떤 이들은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누린다면, 우리가 적어도 종류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존중 한다면, 그렇게 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생명과 본성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종류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불행히도 현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대부분은 그 위력이 거의 빠져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몸’이라는 단어는 ‘관리기관’ 혹은 ‘정치적 통일체’ 정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믿는 이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몸에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보다 오히려 우리의 신체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면에서 우리의 몸의 어떠함은 비밀한 면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함과 같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격과 인격의 실체적 표현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한 구분은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믿는 이들이 몸으로 불리는 데에서 보듯이 신약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몸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동일시되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라며 몸 전체를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분의 충만으로서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유일한 머리이시고, 홀로 경배받으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이 땅에서 나타나고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단지 생명과 본성 만이 아니라 표현에서도 하나님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결국에는 영광 안에 있게 될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영광이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22절)이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에 받으신 영광이 결국 믿는 이들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24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도록 하여주시고,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도록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 헨리 알포드는 여기에서의 ‘(주목하여) 바라보다(behold)’ 를 설명하기를, “바라보고와 참여하다이다. 바로 이 사례가 그것을 추정한다. 단지 구경꾼이 이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1:882)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참여함을 통해 우리가 바라 보는 그것이 된다는 관념과 일치한다.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이 영광으로 변화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총체인 새예루살렘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다(계21:11). 하나님의 변화된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게 될 것”이다(22:4). 다시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개념에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이름이 소유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이름은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 된다.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어린양이 삼일성의 제 2격의 신성한 이름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나타나실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할 것이다.
넷째로 개인적인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있어 하나님이 된다. 주로 바울의 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표현과 그로 인해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예 중의 하나가 빌립보서 1장 21절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입니다.” 믿는 이들이 무엇이 될 수 있고 없는지에 관한 선입견에 의해 이 구절의 온전한 의미를 회피하려는 의도가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받아들였을 때 바울은 교회들 중에서의 그의 삶과 그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섬기심이었다 라고 말하고자 한 것 같다. 바울은 그가 직면하는 모든 것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가 되었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철저히 표현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는 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믿는 이들 가운데 살았지만, 그의 내적 실재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셨고, 바울의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그분이 실제로 나타나셨다. 물론 바울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리스도 또한 거기 계셨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나의 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그분이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이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대표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우리가 바울과 함께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의 하자면, 변화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수준에서 그리스도인의 변화가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이들의 변화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롬12:2, 고후3: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는 행동이 단지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리차드 C. 트렌치(Richard Chenevix Trench)는변화와 변형을 대조시키면서 변화의 내재적 특징을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만약 네덜란드식 정원이 이태리식 정원으로 바뀐다면 이는 ‘메타시마티즈모스’[변형]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에 정원을 도시와 같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이것은 ‘메타모포시스’ [변화]일 것이다.”(277, 트렌치의 예는 성경이 하나의 정원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도시로 끝나기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변화에 대한 이러한 트렌치의 이해는 메타모포시스의 어근인 모피(morphe)의 의미에 대한 그의 철저한 분석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 기본 단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피는 내적 생명을 표현하는 형태를 의미하고”(276), “어떤 것의 본질을 가리킨다”(278). 그러므로 변화는 단지 변화의 외적인 나타남만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변화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본성을 중시한다. 신약에서 변화는메타모포시스, 즉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우리의 상태에서 거듭나고 높여진 상태로의 바뀜이다. 변화는 믿는 이들을 거듭나기 전의 그들의 어떠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예전에는 타락한 인간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그들의 새로운 존재의 유기적인 실재로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이제는 신성하고, 사람일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분의 자존의 속성에 의해 홀로 참된 하나님이시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구속되고 거듭난 믿는 이들도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그리고 높여지고 신성한 수준에서 그들의 존재를 위해 그분께 온전히 의지함에 의해 하나님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 즉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그분에게서 불경스럽게 빼앗아 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움추러들 수 있으나, 실제로는 성경에서 암시된 진정한 신화는 하나님이 인류 안에서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영광 받으시는 길을 제공한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소유하게 될 때까지 영광에서 영광으로, 즉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다(고후3:18). 그 때에는 믿는 이들이 표현하는 것이 단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영광을 가짐으로서 믿는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고 하나님이 됨으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양한다.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마지막에 대해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고전15:28).”
원출처: http://www.affcrit.com/pdfs/1996/03/96_03_a3.pdf
Notes
1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 54:3. 헬라어로 된 이 논문의 제목에서 가져 온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Α?τ?? γ?ρ ?νηνθρþπησεν, ινα ημει? θεοποιηθωμεν (“For He became/was made human that we might become/be made God”그분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하기 위함이다). 이 논문은 폴 오니카(Paul Onica)와 캐리 로비쇼우(Kerry Robichaux)의 서문에서도 인용됨
2 일부는 번역자가 아타나시우스의 θεοποιηθωμεν 를 “신성하게 되는”(become divine)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다투지만, 그런 번역에 관련된 문제점들을 차지하더라도 바실(Basil’)의 θε?ν γεν?σθαι (On the Holy Spirit 9:23) 를 “하나님이 됨”(being made God) 이외의 다른 것으로 번역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들도 있다.
3 초기 교부들은 신화를 가리키는 다양한 범주의 표현들을 사용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θεοποιω (theopoio) “[어떤 이를] 하나님으로 만든다, 신화한다” 와 θ?ωσι? (theosis)”신화”였다.
4그의에베소교인들에게 보낸 서신, XII, 과 마그네시안( Magnesians)에게 보낸 서신 XIV, 에서 하나님께 도달함(attain to God)이란 표현과 그의폴리캅에게보낸 서한, V, 에서 하나님께 참여함(take part in God)이란 표현을 보라.
5우리는 이 용어를 신약과 초기 교회에서 사용했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 )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안배, 행정, 또는 계획을 가리킨다. 교부들에게는 이 용어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표현 즉 성육신을 통해 사람과 하나되시고 또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삼위일체 안에서 나아가심을 가리켰다.
6 이 단락은 위트니스리의 사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영향력은 단순한 인용 그 이상이다.
7.,예를 들어 “아리안들을 반대하는 네 개의 담화(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I:42, III:48, 53를 보라.
8바라건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확증과비평’(A&C) 과월호인 I권, 1호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캐리 로비쇼우 47-48 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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