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은 한평생 유명산천을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오직 염불과 참선수행에만 전념함으로써 눈이 열린 선지식으로 알려진 분이다.
세수로 85세임에도 이날 스님은 간절히 법을 묻는 20여 명의 불자들을 향해 마음을 다스리며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구정녕 일러주셨다. /편집자
▷ 어떤 수행법으로 마음을 닦는 게 좋습니까?
“염불이 근기에 맞으면 염불을 하고 참선이 맞으면 참선을 하면 된다.
염불이든 참선이든 모든 것에 도가 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일념이 되면 부처의 길이 열린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일념으로 가면 도를 이루는 길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다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공부하지 않으면 백천억 겁을 살아도 괴로움에서 못 벗어난다.”
▷ 간화선에는 1700공안이 있는데 어떤 화두로 공부하는게 바람직한가요?
“어떤 것이든 다 중요한 공안들이다.
다만 1700공안 중에서도 이치로 아는 선, 즉 의리선(義理禪)은 곤란하다.
따라서 마땅히 ‘이뭣고’ 공안이나 ‘판치생모(板齒生毛)’,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공안을 들어야 한다.
나머지 공안은 지식과 이치로써 풀어낼 수 있어 궁극의 경계에 도달하기 어렵다.”
염불이든 참선이든 일념이 중요
▷ 화두를 잘 드는 방법이 있습니까?
“화두를 제대로 참구해야 일념도 된다.
예컨대 처음에는 ‘조주 스님이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점차 화두가 ‘왜 그랬을까?’ ‘왜?’로 짧아지게 되고 그렇게 지속되다 보면 의문만이 가득한 일념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일념 또한 번뇌망상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념에는 착도 망상도 없다.
일념인데 거기에 어떤 것이 붙을 수 있겠는가.”
▷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 이후 지금까지,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조주 이전보다도 도인이 나오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믿는다.
공부를 하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초보불자의 경우 믿음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지장경』을 읽어야 한다.
『지장경』을 천독 이상 독송하게 되면 믿음이 견고해진다. 이 바탕 위에서 염불도하고, 참선도 해야 한다. 『지장경』 독경은 일종의 기초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장경』에 대해서는 스님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왜 하필 『지장경』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나오는 소리다.
살생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등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적어 놓은 경을 두고 비하의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아직 기초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사구게를 들려준 들 알아들을 리 있겠는가.
지장경은 세속의 학력으로 친다면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집을 지을 때 터전에 해당되는 경이다.
지장보살은 이 우주에 안 계신 곳이 없다. 우주에 꽉 차 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보살이고 기본이 되는 보살이므로 대원본존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보살이다.”
▷ 이곳에 오다가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을 놓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덕산 스님이 어떻게 했어야 노파에게 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이런저런 사변을 붙이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자리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별심이 자리할 곳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사실 법이란 것이 물을 것도 답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사이에 이미 그르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수행을 통해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과 지식은 서로 상관이 없다. 허깨비일 뿐이다.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도 허깨비 놀음이다.
오직 한 법으로 돌아가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일념이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
▷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한 까닭은 가르침 자체가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착을 끊으려면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일념이 되면 망상이고 착이고 붙을 곳이 없다.
과거 미래 현재 어디에건 마음엔 과거와 안팎이 없다.
내가 질문 하나 던지겠다. 여기에 컵이 있다.
이 컵이 네 마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밖에 있는가?
아는 이 있거든 일러보라.…(침묵)… 마음엔 안과 밖이 없다.”
믿음 견고해야 깨달음도 가능
▷ 염불과 참선의 병행은 어떻습니까?
“염불로 신심을 다지고 화두로 마음을 깨닫는 것이니 공부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안 될 것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는 하나에 전념하는 것보단 못하다.
우물을 파더라도 한 우물을 파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수행을 하면서 경계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공부가 좀 된 사람들은 자칫 교만심에 빠지거나 자기도 모르게 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도가 높아질수록 마장도 거세지는 법이다.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돼 헤매는 것이 무릇 거의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된 병이다.
요즘 보면 간화선만이 최상이고 묵조선은 하급으로 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념의 경계에 오르게 되면 화두건 상이건 착이건 아무것도 없는 의단의 상태가 되어 말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묵조라 했는데 이를 두고 분별심을 갖는 일이 횡행하니 한심한 일이다.
처음부터 비쳐볼 수 있다면 화두가 무슨 소용인가? 날개도 나지 않은 새끼 새가 날겠다고 날치니,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떨어져 죽을 것이 확실해 대혜 스님께서 화두(공안)를 제시한 것인데, 이제와서 화두선이 최상이고 묵조선은 보잘 것 없다고 하니 개탄스런 일이다.
허깨비 놀음에 휘둘리지 마라
▷ 저희 불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수행해서 마음공부를 한 결과라야 끝내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데에 허깨비 놀음에 휘둘려선 안된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영원하다는 생각,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깨뜨리고 그 허깨비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면 성낼 것도, 욕심을 부려야 할 것도 다 사라진다.
딱히 꼬집어 나랄 것이 없는데,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흔들릴 연유가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든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도를 이룬 것이다.”
◇10여년전 정읍 석탄사 인근의 산으로 나가 포행정진중 바위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청소스님.
*약력
·1921년 충남 청양 生
·1951년 예산 수덕사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득도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승주 송광사 등에서 참선 수행
·1991년 정읍 석탄사 주지 취임
·現 정읍 석탄사에 주석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부모보다는 자식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안맞는 일이예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근본을 생각한다면 금방 이해가 갈 겁니다. 부모한테는 많은 빚을 졌는데 오직 자식만 생각한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일체중생을 다 자식처럼 사랑하면 그것이 곧 대자비지요. 자식만 사랑하고 부모를 받들지 않는 건 편중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자비입니다. 따라서 아무 복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부모나 형제 자매, 친지, 이웃들이 가깝다 하여 무심한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가까운 이들일수록 예의를 갖추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예요. 기본 도리인 5계중 한 계라도 파한다면 부처님 말씀을 배반한 것이기 때문에 입적하는 그 날까지 꼭 지켜야 합니다.
나는 5계중에서도 특히 ‘살생을 금하라’는 덕목을 스님뿐만 아니라 평소 신도들에게도 강조합니다. 인간이 내 목숨같이 사랑하고 보호해야할 미물들을 마구 잡아 먹으니 그것 자체부터 틀려진 겁니다. 자신의 생명이 귀중하면 남의 목숨도 존귀하게 여겨야지요.
생명 존중은 우선 스님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스님들은 모든 중생의 부모요 스승이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부모가 고기를 먹는데 안 먹을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스님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일체 걸림없이 본분만 잃지 않으면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부처님말씀엔 그런 것이 없어요.
하지만 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생각끝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계를 잘 지킨다면 그것이 부처지 중생이겠습니까? 참고 또 참으면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 계를 잘 지키는 비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극기를 통한 자기 확신을 가져 마음을 다 잡아야 합니다.
절을 할 때 삼천배를 목표로 잡고 시작하면 이천오백 배쯤 되면 고비가 오고, 천 배를 계획으로 잡고 시작하면 칠백배쯤 되어 고비가 옵니다. 목표가 삼천배였을 때의 천 배는 수월하지만, 천 배를 목표로 했을 때는 같은 천배지만 더 힘듭니다. 즉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천배를 하더라도 아예 삼천 배를 할 작정으로 시작한다면 천 배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란 자기가 다잡기 나름입니다. 극기로 자신을 통제하면 새로운 자신감과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유혹에 빠졌을 때 ‘내가 물리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하려고만 한다면 온 몸에서 솟아나는 힘으로 과감히 뿌리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불자들도 계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생각만 열심히 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망상이 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가와 인연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유년시절을 충남 공주에서 보냈는데 14세 되던 해부터 틈만 나면 수덕사에 와서 지냈습니다. 며칠을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절이 좋아져 시간 가는줄 몰랐지요. 그때마다 나를 찾으러 온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이렇게 사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스님들에 대한 동경과 수행자들의 삶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어요.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수덕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행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50여년의 수행 생활을 돌이켜 보면 특별히 은사스님을 두고 정진하기 보다는 홀로 포행과 참선을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깨우치려고 노력했지요
그래서 유일한 나의 은사스님이였던 수덕사 지선스님의 가르침은 평생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하루는 은사스님이 나를 불러 “남전스님에게 조주스님이 말하기를 ‘마음은 부처가 아니요, 지혜는 도가 아니다(心不是佛 智不是道)라면 허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거든. 그러니 남전스님의 말씀이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조주스님이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하니 남전스님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도가 아니다’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묵묵부답하자 스님이 설명하셨지요. “마음이 부처가 아닐 것 같으면 마음을 내놓고 뭐가 있겠어. 그런데 허물이 있다고 했거든. 그것은 우주 자연 만상이 그대로 도(道)란 뜻이지. 개구즉착(開口卽錯), 즉 입을 열면 틀렸어.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이 아니야.” 그래도 내가 이해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스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지요. “부처님께서 팔만 대장경을 설하였는데 나중에는 한마디도 설한바 없다고 했거든. 그 도리를 잘 파악해야 해. 하지만 우주 자체가 그냥 그대로 도이지만 말을 안하면 어리석은 중생에게 보여줄 방법이 없잖아. 모두가 방편이지. 비유컨데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려면 손에 물이 묻어야 되며 불에 탄 사람을 구하려면 손에 연기도 쐬야 하고 불도 손에 닿아야 하는 것처럼 연기도 불도 모두 방편이야. 하지만 방편이 없으면 중생에게는 보여줄 도리가 없는 거야.” 하시면서 한가지 일화를 더 말해 주셨습니다.
“조주스님의 제자가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이 ‘없다’고 했거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자 또 ‘무(無)’라고 대답했어. 또 있어. ‘무엇이 조사가 온 뜻입니까(祖師西來意).‘ 하니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하고 말했어. 어떻게 널빤지 이빨에 털이 날 수가 있겠어. 그런데 바로 이런 두가지 화두가 아주 뚜렷하고 크게 보여주는 소식이야. 그러니까 우리 불법은 무자에 떨어져도 안되고 말머리에 떨어져서도 안돼.” 이 말이 끝나자 나는 무엇엔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내 화두는 ‘판치생모’가 됐지요. 참선하는 사람들이 무엇엔가 애쓰다 보면 의심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의정이요 의단입니다. 바로 그때가 중요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는 철저히 의심해 그 의심을 뭉치고 뭉쳐 의단(疑團)을 형성해야 합니다. 의단은 의심이 크고 견고해 일체의 잡 생각이나 집착, 욕망 등이 조금도 일지 않게 됨을 말하는데, 의단이 굳건해지면 자신도 세계도 하나의 의심덩어리일 뿐 다른 것은 추호도 없게 됩니다. 조주선사의 ‘무’자를 예로 들면, ‘무!’ 하는 화두를 들면서도 조주스님의 말뜻을 여의면 안됩니다. 말머리에 떨어지지도 말고 무에도 떨어지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냥 ‘무’만 가지고 있으면 그건 무기입니다. 무기공(無記空). 그래서는 제대로 공부를 못합니다. 소되고 말되어서 시주빚 갚을 일밖에 없지요. 그러니 항상 조주스님의 뜻을 여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힘이 생기고 말머리가 줄고 그냥 보입니다. 그때가 바로 묵조(默照)의 경지예요. 이렇게 화두를 올바로 들어 참선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그냥 보게 됩니다. 하지만 작은 깨달음과 단계적 수행경지를 인정하지 않는 화두 참구는 ‘중생 아니면 부처’식의 극단적 가치관을 형성시켜 불교의 보살도 정신, 보시정신, 포교의지를 등한시 하게 됩니다.
참선 장소는 꼭 절이 아니어도 됩니다. 자기 마음자리를 잡은 사람은 토굴이나 개인 선방과 같이 혼자 있는 곳이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 자리를 못잡은 사람은 가능한 절에서 훌륭한 선지식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수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참선도 중요하지만 초발심자들에게는 염불 하기를 먼저 권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제대로 된 화두를 들지 않고 참선을 하다가 부처님과의 인연을 끊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드리는 말이예요. 참선이 곧바로 가는 길이긴 하나 어렵고 체득 기간이 많이 걸리는 반면 염불은 돌아가긴 해도 탄탄대로라 최소한 악도에 떨어질 염려는 없어요. 다시 말해 염불은 헛길이 없이 한 만큼 공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염불을 할 때 주의할 점이 있어요. 부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에 의해 기복적으로 염불을 한다면 그 의지하려는 나약한 마음 때문에 원치 않는 불행이 가중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약한 마음을 뜯어고쳐 주는 방법은 오직 고통 밖에 없다는 것을 ‘내면의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처가 되기 위해 염불을 한다면, 그 거룩한 행위는 ‘유유상종의 법칙’에 의해 좋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유유상종의 마음법칙은 같은 성질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예요.
참선과 염불은 깨우친다는 도리에서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참선하다 염불하면 다를줄 알았는데 결국 그 둘의 도리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없이 긴 시간도 한 생각이고(無量遠劫卽一念), 한 생각 또한 한 없는 시간(一念卽時無量劫)이라는 법성게의 도리 그대로죠. 참선이든 염불이든 일념이면 둘이 아닙니다. 목적은 틀리다 하더라도 올바로 관찰해 나가는 것은 같은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생사가 끊어진 자리이자 여래의 자리입니다. 선은 도달하면 깨달아버리는 자체가 있고 염불은 삼매에 들면 모든 티끌이 벗어진다는 것이지요.
흔히 선법문 하는 것을 보면 ‘염불은 관문이 아니다. 선만이 관문이다’하는데 그건 말에 떨어진 것입니다. 염불도 올바로 한다면 관문이 안 나올리 없지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이 한 구절로도 홀연히 깨친 도리를 보면 참선문이나 염불문이나 간경문이나 다 같은 보리의 문이지요.
참선과 염불을 통한 정진도 중요하지만 일상 생활속에서 선업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불자로서 꼭 해야될 일입니다. 착한 일을 하되 상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해와 달이 만물을 환하게 비추지만 비춘다는 상을 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컨대 지나가는 사람에게 뺨을 맞으면 황당해 하면서도 사소한 일로 치지만, 자신이 잘해준 사람에게 빰을 맞으면 오래도록 분한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사소한 예지만 내가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는 착이 남은 탓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잘 하되 했다는 상이 남아 있으면 업이 쌓입니다. 아상이 남아있으면 선의 나무를 심었어도 잘못되면 악의 과를 거두게 되지요. 그러니 일체 상을 여의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상을 여의는 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이 법은 그림자 없는 나무로 불을 때서 일체 운해를 말리는 도리입니다. 즉 그림자 없는 나무로 불을 때서 안개, 구름 같은 잡티를 말리듯이 열심히 수행 정진해 모든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가 안되거나 번뇌망상이 들면 혼신을 다해 지장보살님께 매달립니다. 관음기도도 좋지만 지장 기도를 해보니 힘이 많이 생겼습니다. 왜 이제야 지장보살님을 찾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부처님 말씀에도 관음·문수·보현 보살을 비롯해 모든 부처님은 백겁을 두고 모셔왔더라도 한치 앞에 있는 지장 보살을 불러 소원성취하는 것이 빠르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엔 헛된 것이 없음을 깨달았지요.
진언에는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이 있고, 지장보살 멸정업진언이 있는데 그 진언에는 두 보살님 밖엔 없어요. 관세음보살님은 그냥 업장을 멸한다고 했지만 지장보살은 정해진 업도 멸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장보살의 공덕을 안 뒤로는 하루에 십이만번씩 지장보살을 외며 염주를 돌리고 있습니다. 꾸준히 하다보니 틀이 잡히고 힘도 생겨 겉으로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염주를 굴리며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밥을 의식해서 먹는 것이 아니듯 염불이든 기도든 매일 식사를 하듯이 꾸준히 해야 공덕이 쌓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많은 시간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반성하고 선업을 쌓기 위해 하루 한 번이라도 열심히 정진하세요. 꼭 절에 가야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언제 어디서라도 몸을 낮춰 절하고 참선하는 장소가 바로 법당이요 도량입니다. 자기일을 하면서도 틈틈히 마음을 한데 모으고 간절하게 염불이나 참선 기도를 하면 불법의 진리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입니다.
하늘 천(天) 자만 봐도 한 일(一)에 큰 대(大), 즉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라는 거지.
그것은 곧 중생들이 깜깜한 정도로 모르고 있는 우주자연의 진리를 찾으라는 거야."
노장은 석가모니불이 태어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한 것도 스스로 '독존(獨尊)이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갖고 있는 진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발견하면 독존이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각자가 높고 존귀하고 하늘아래는 뜻이다. 또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한 말도 각자 자기의 진리, 곧 '나'의 실체를 찾으라는 말로 해석한다.
큰 신(神)을 믿든 작은 신을 믿든 거기에 의지하면 무당이요,
내가 나를 발견하면 진리고 자연이라는 것이다.
노장은 공부를 하려면 계율부터 잘 지켜야 한다며 오계(五戒)를 하나하나 일러준다. 계를 지켜야 마음이 정해지고 그래야 지혜가 나와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장은 우선 내 목숨이 아까우면 남의 목숨도 아까운 줄 알고 살생하지 말라고 한다.
특히 "육식을 하면 자비 종자, 착한 종자가 사라진다"고 경계한다.
"사람이 만물의 어른이면 미약한 자를 도와줘야지 약하다고 잡아먹으면 되나. 그러면 미약한 놈들은 다 죽을 것 아닌가. 미물이라고 자연에 태어난 건 사람이나 똑같은 거야. 그런데도 도와 주기는 커녕 잡아서 입에 넣어버리니 기가 막힌 노릇이지. 누가 내 살이 맛있다고 먹으면 어쩔 거야?
그 인과(因果)를 어떻게 갚으려고 그러는지. 천당과 지옥이 그래서 생긴 거야."
오계의 두 번째인 '불투도(不偸盜·도둑질하지 말라)'를 설명하려던 노장이 갑자기 낮에 병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낸다. 병원 화장실에 갔더니
휴지를 필요한 만큼만 쓰지 않고 마구 풀어서 그냥 버리더라는 것이다.
"제 것이 아니라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 우주에 내 것 아닌 게 어디 있어. 내 물건 남의 물건 차별해서는 안 되는 거야"라며 나무란다.
'불사음(不邪淫·음행을 하지 말라)'이라는 세 번째 계율에 관련해서는
"불자라면서 미인을 보면 속으로 탐내는 사람이 많다"면서 "바르게 사는 게 도(道)"라고 지적한다.
노장은 또 거짓말을 하면 불행해진다고 경고하고(不妄語),
술과 함께 담배도 '불음주계(不飮酒戒)'의 적용대상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담배를 피우면 선신(善神)들이 도와주려 해도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 몸을 받아준 부모의 은혜를 귀중히 생각하라는 거야. 제 부모는 대접하지 않고 자식만 귀여워하니 나중에 그 자식들도 제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 하는 거야. 양로원에 보내거나 제주도에 갖다 버리지. 생일이 되면 부모가 날 낳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나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는 못할 망정 술과 고기에 노래나 부르니‥‥.
제 부모한테 불효한 놈이 어찌 공부인, 진리인이 되겠나?"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저녁 공양(식사)이 들어온다. 오후 5시, 산사의 저녁은 무척 이르다. 식구가 조촐해 한 방에 모두 모여 앉아 공양을 든다. 밥과 찬은 보통 밥그릇에 담았지만, 노장의 식사법은 발우공양이나 다름없다.
식사 후에 밥그릇, 국그릇, 찌개냄비까지 물로 말끔히 씻어서 마신다.
"바르게 사는 게 불법이고 도(道)야.
진인(眞人), 도인(道人)이란 바르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
남의 물건 욕심 안 내고, 남 욕하지 않고,
술·고기 안 먹으면 걸릴 것도 없고 시비 당할 일고 없어.
그렇게 않하니 걸리게 되고, 어떻게 하면 안 걸리나 점쟁이나 찾아다니지. 바르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공부가 되겠나? 목이 끊어지는 일이 있어도 바르게 살아야 해."
바르게 살아야 성불할 수 있다는 얘기다.
노장은 공부하는 방편으로 참선보다는 '아미타불'을 염불하라고 권한다. 평생 참선으로 살아온 수행자가 뜻밖이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보니 근가가 달리는 중생들을 위한 배려의 말씀이다.
"참선이나 염불이나 간경이나 다 해탈하는 길이지만
참선은 혼자서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들고 타고 가는 것이고
염불은 남이 만들어 놓은 배를 빌려 타고 가는 거라 더 쉽지.
비유하자면 참선은 자력수행이라 좁쌀만한 돌을 놓아도 바로 물에 가라앉지만 염불은 섬만한 돌이라도 배 위에 얹혀 있으니 가라앉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전라북도 정읍시 칠부면 반곡리 389번지 석탄사, 들길 논길 지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몇 번이나 가로지르고 산길로 들어선 지도 한참, 가도가도 석탄사는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굽이굽이 돌아드는 첩첩산골의 청량한 복을 누릴 수 있음에도 짐짓 볼멘 소리가 기어나온다. “큰스님, 어찌하여 이 깊은 산골에 계시나이까?”
하지만 그 마음은 불자들과 함께 격의없이 말씀을 나누고 계신 청소 큰스님의 아름다운 미소 속에서 깊은 환희심으로 바뀌었다.
스님, 이 얘기 저 얘기 듣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아 이 먼데까지 와서 부처님 법에 대해 물어야지 얘기 들으러 왔어요. 얘기야 얘기꾼이 더 잘 하지. 나는 얘기 잘 못해요.”
스님, 불법(佛法)은 무엇입니까?
“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법을 말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진리의 실상을 말로 듣고 알 수 있겠어요? 불법은 자기가 수행해서 스스로 보는 도리예요.
또 견성(見性)이라 성품을 본다고 하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우주의 실상을 환히 보셨어요. 아미타 부처님도 팔만대천세계를 걸림없이 밝게 보고 두루 비춰 주십니다.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도 중생들의 고통을 다 보시고 구제해 주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량분별하던 중생이 스스로 수행해서 일체를 보고 해결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불법 가운데 중생이 있고 중생 가운데 불법이 있어요.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 모두가 불법을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다고 하신 것을 굳게 믿고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의 힘이 안 생기면 보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공부하는 사람은 힘들지요. 처음부터 볼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행도 생각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다 하다 보면 보여요. 비유컨대 불법은 저 하늘의 해란 말입니다. 말머리(話頭)는 손이에요. 유명한 화두 중의 하나인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 알지요? 어떤 학인이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여쭙자 조주 스님이 ‘무(無)’ 했단 말이에요.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 저 고물고물한 벌레에게도 불성이 있다 했는데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 했는고? 했을 때 말머리(화두)가 손이고, 불법은 해입니다.
염불할 때 ‘나무아미타불‘ 하는 마음도 역시 손과 같아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념으로 염송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眞)과 가(假)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손이 해를 가리킬 때 이게 손이지 해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손을 뚫어지게 보면 해와 손이 둘이 아닌 도리가 나옵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무슨 공부를 하든지 아주 일념이 되면 관(觀)이 나오고 보게 됩니다. 그처럼 불법은 보는 도리예요. 일념이 못 되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지 일념으로 간절히만 하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 ‘환히 보여 주었으니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본다는 것에 집착되어 우리가 사물을 보듯 어떤 경지가 보이는 건지 궁금합니다.
“경지가 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보인다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알아야지 말해줄 수 없는 것이고, 말로 물어서 알려고 해도 안 되는 도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법을 어렵게 느끼고 대부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불법을 보는 길을 일러주십시오.
“내가 일념이 되면, 생각 생각이 짙으면 보는 도리가 생깁니다. 얘기를 들어서 알려고 하면 되지 않지만 일념으로 하다 보면 보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말머리(화두)를 잡고 자꾸 의심을 하다 하다 보면 보이는 도리가 생기고 또 염불하는 사람은 생각 생각 아미타불을 끊이지 않고 염하면 보입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자나깨나 일념에서 그놈이 주인공이 되어 하면 보는 도리가 나온다는 것뿐입니다. 처음에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하는 것처럼 말머리가 길지만 하다 하다 보면 생각만 하면 척 들어오고, 더 익으면 일으킬 것 없이 비춰보는 겁니다. 그게 조(照)라, 조사묵조(祖師默照)라, 잠잠히 보고 있으면 일월과 같은 도리가 나와요. 물어서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노력으로 알려고 해야 해요. 물어서 알라고 하면 거리가 멀어요. 노력이 세면 나오는 거예요.”
보이게 되면, 즉 진리를 깨닫게 되면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법은 해와 같다고 했지요. 불법을 본 것, 즉 진리를 깨달은 상태도 마치 해와 같습니다. 해가 일체중생을 비추되 비추었다는 상(相)이 없지요. 내 마음도 해와 같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남한테 조금 잘하고서 그 사람이 나한테 서운하게 하면 속상해하는데 불법을 보면 뭇 중생을 비추었어도 비추었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이 잘 하고 잘못 하고에 걸림이 없고 누구한테든지 절대 평등한 마음이 되고 늘 평온하지요.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렇게 나를 대해’하며 서운해하고 또 상대방이 조금 잘해주면 좋아하고 이렇게 희로애락에 젖어 사는 게 중생살이라면 부처는 일월(日月)과 같이 그저 비추었다는 상도 없고 저절로 일체 중생을 비추어 살리는 것입니다. 참말로 불자라면 누구든지 수행해서 불법을 보고 일월과 같은 마음이 되어 세상을 환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가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일월이 되면 이 세상이 그대로 불국정토입니다.”
수행 단계마다 그 경지가 다를 듯합니다. 뒷사람들을 위해서 그 수행 단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내가 따로 설명할 게 없어요. 저 법당에서 심우도(尋牛圖) 봤지요. 그게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단계, 수행 단계를 비유한 거라. 본심을 소에 비유한 것인데, 자기의 본심인 소를 찾아 나서서(尋牛) 소 발자국을 봤잖아요(見跡). 그것도 힘이 조금 생긴 거예요. 나중에는 소가 보인단말야.(見牛), 힘이 더 생겨서 쫓아가서 소를 잡고(得牛), 소를 길들여(牧牛) 오는데 다 공부하고 싸우는 비유입니다. 그렇게 조금 조금 힘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소를 타잖아요. 소를 타고 우리 집에 돌아와서(騎牛歸家), 도망갈 염려가 없으니 소를 잊어버리고 안심한 경지(忘牛存人)가 오고, 다시 소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달아(人牛俱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여실히 보고(返本還源), 중생을 건지기 위해 거리에 나가는(入廛垂手) 그때가 다 성취한 겁니다. 대 성취를 한 거지요.
처음에 발자국 보고 꼬리를 볼 때도 나름대로 힘이 생긴 거예요. 처음 힘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마음도리가 해 같은데 해를 보긴 봤으되 비오는 날 구름이 끼고 안개 낀 날 해가 반짝 났을 때 해를 본 것과 같아서 그것 가지고는 맑은 하늘을 못 만들잖아요. 모든 안개 구름 걷혀서 백일청천을 만들면 그게 부처님 경지와 같은 겁니다. 스스로 수행을 해서 해와 같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부촉하신 불자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도 이 높은 산중에 계신 것처럼, 불법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이끌어주지 않는다고 불만의 소리가 높습니다.
“바르게 살다 가는 것, 옳게 보여주는 것이 포교지 다른 게 없어요. 사실 입전수수의 경지에 가지도 못했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하면 중생에게 도움 될 게 없어요. 말 없는 가운데 평생을 바르게 살면 혼자 있어도 만인과 함께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혼자 있을 때나 시장 가운데 있을 때나 바르게 살면 그 공덕이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바르게 못 살면서 포교한답시고 저잣거리에 나와 휘젓고 다니면 제 차도 못 몰면서 남의 차 고친다고 수선떠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중생에게 빚만 지고 업장만 두텁게 쌓을 뿐입니다. 또 실력이 없는데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그 꼴이 나는 남의 닭 일년에 한 마리씩 잡아 먹는데 너는 왜 하루에 한 마리씩 잡아먹느냐고 탓하는 것과 꼭 같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어요?”
그렇지만 부처님처럼 우주의 실상을 본다는 것은 사실 아득한 일이고 안 만큼, 본 만큼은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인즉슨 옳은 말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공부 열심히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4학년생을 가르치기는 박사보다 나을 수 있어요. 그런데 불법 공부는 일반 공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좀전에도 말했지만 그냥 그대로 자기가 잘 살면 그 공덕이 남에게도 가게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서 사람들이 불교는 포교에 소극적이라고 비판들을 하는 모양인데 진리의 세계는 그런 게 아니에요. 본질을 봐야 하고, 현실적으로 불교가 발전이 되든 쇠퇴를 하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다 안 될지라도 근본부터 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못 받아 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과 수행방법이 많이 나왔지만 결국은 하나인데 그것도 제대로 못 알아 들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어쨌든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너도 성불할 수 있다,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믿고 수행정진해야 하는데 진리는 볼 생각도 않고 부처님 옷자락만 잡고 잘 되게 해달라고 빌어요. 아들 학교나 들어가고 취직이나 하게 해달라고 빕니다. 어린아이가 태산 같은 금덩어리는 놔두고 껌 하나 달라는 형국이에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방편을 써서 중생들 뜻대로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절에 왔다갔다 하면 마음이 차츰차츰 참진리를 찾고 진리를 보고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태산을 보여주고 태산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신 부처님께서 중생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사들 가운데에는 예불을 도외시하는 분들도 있는데 스님께서는 참선수행을 하시면서 기도와 염불을 병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수행해서 힘을 얻기 전에는 내 힘으로 하기 벅차니까 먼저 깨달으신 부처님께 조른 겁니다. 불보살님은 우주에 꽉 차 있어요. 지장보살님도 관세음보살님도 여기에도 꽉 차계세요. 그렇다고 형상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비추어서 봐야 합니다. 형상으로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형상을 보려 하면 전부 마구니 권속이 됩니다. 그런 생각을 내게 되면 마구니들이 먼저 와서 그들의 노리개감밖에 안 돼요. 무당되고 도깨비 고 점쟁이밖에 안 되니 주의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 한 번 부르면 관세음보살과 통화가 된 겁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면 ‘누구야’ 불렀을 때 통하듯이 통한 것입니다.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은 그 위신력이 무변신이기 때문에 한생각이면 통하고 누구든지 기도를 간절하게 되면 불보살님이 가피를 주십니다. 나 역시 수행할 때 장애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를 했고, 불보살님의 가피로 순조롭게 수행할 수 있었지요.”
스님께서는 평생 참선수행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에게 염불을 권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니에요. 가지는 여러 갈래지만 뿌리는 하나이듯이, 다리는 둘이지만 목은 한목이듯이 한 가지에요. 불법으로 가는 길은 참선 줄 잡은 사람하고 염불 줄 잡은 사람 등이 있는 것처럼 길은 여럿이라도 불법은 하나지 둘이 아니에요. 참선을 해서 득력을 했든 염불을 해서 득력을 했든 다 그 소식이 그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소리 들었지요? 십년 공부를 해서 도를 얻고 보니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그냥 도로아미타불이에요.
나는 나름대로 참선해서 조금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중생들은 참선으로 어렵단 말입니다. 참선이 좋기는 좋은데 제대로 하는 이가 별로 없어요. 참선은 불법으로 가는 가까운 길이로되 가는 길이 여럿입니다. 희미한 길을 가게 되기도 하고 헛길을 걷기도 하는 등 참선은 최상승법인 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염불은 하면 한 만큼은 공덕이 있어요. 설사 제대로 못하고 속으로 했다 해도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불자들에게는 염불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많이 많이 해야 합니다. 워낙 생각이 깊은 데 들어가면, 생각이 깊으면 보는 것입니다. 염불은 간절히 사무치게 해서 뇌에 배겨야 합니다. 한 생각 염으로 하면 빠르고 송으로 하며 더딘고로 되도록 염으로 해야 빨리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루에 십만독 이상씩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참선해서 힘을 얻었기 때문에 관(觀)으로 죽 나가니까 십만독을 했지 외우게 되면 삼만 독 하기도 힘들어요. 아미타불 관으로 꿰버리면 십삼만 독도 가능하지요. 불자들에게 적극 권장하다가 내가 말년에 아미타불을 염한 것은 이 세상은 고해바다이기에 극락세계로 회향하기 위해서입니다. 극락세계에 아미타부처님 회상에만 가면 영원한 수명을 얻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너무 어리석은 질문인 듯한데 보통 마음 속의 극락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세상사람들이 승속간에 극락세계를 말하면서도 시인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심극락이라 해서 극락이 마음에 있다 하는 것도 맞기는 맞지만 서방정토 극락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하나도 그른 것이 없습니다. 극락세계를 부인하면 부처님을 부인하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간절한 염원으로 건설해 놓으신 극락에서는 누구든지 다 성불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안락을 누리기 위해 극락왕생을 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진실로 성불하기 위해 극락에 왕생해야 합니다.”
스님의 출가 인연 이야기, 수행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저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출가하시기 전에 이미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6·25 후에 절에 들어왔으니 늦게 들어온 편인데 이 법은 늦게 들어오고 빨리 들어오는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전생인연인지 열댓살부터 출가하고 싶어서 절에 드나들었는데 절에만 가면 자꾸 아버님이 끄집어내고 끄집어내고 하셨지요. 그래서 계속 출가가 늦어졌지만 집에 있으면서도 늘 마음은 절에 가있었고 항상 참선하고 기도를 했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49재를 지내드리고 꿈을 꾸었는데 참말로 희한한 것을 보았어요. 향비가 내려서 이 우주의 똥이 싹 씻겨져내리는, 똥이 흔적도 없이 씻기는 꿈을 꾸었는데 그렇게 환희로울 수가 없었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 입산해서 오늘날까지 흔들림없이 살고 있습니다.”
스님 수행하시는 가운데 숱한 체험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많아서 얘기할 수도 없고, 공부 속에서 얘기라 하지 않는 얘긴데, 할 필요도 없고...환골탈태라고 해야 할까. 수행을 하다보며 제 몸을 해부도 해봐지고 뇌수술도 해봐지고… 물론 꿈이지요. 몸이 백골로도 되는 것을 느끼고 다 보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마음은 물론이고 몸 자쳬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내 몸뚱이의 나지만 나중에는 우주의 나가 됩니다. 초보자는 이 몸뚱이가 나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내 마음, 내 몸뚱이 우주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대자연 우주 진리와 하나되고 또 더불어 함께사는 중생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소아(小我)가 대아(大我)가 되고 진아(眞我)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면 수행을 통해 소아를 버리고 대아, 진아가 되었을 때 세상일에 임해서도 수행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일 사장이라면 자기 욕심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공심으로 사원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회사를 운영하게 되고, 사원 또한 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장과 사원, 자연과 사람 등이 세상 만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수행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그야말로 그대로 이 땅에 불국정토가 꽃필 듯합니다. 참으로 행복해지는 그 도리를 모르고 분망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한말씀 더 부탁드립니다.
“바르게 옳게 살아야지요. 도(道)란 다른 게 없어요. 바르게 사는 데에서 도가 나옵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부모를 의지해서 나왔으니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새끼만 이뻐서 죽어요. 부모 위해 쓰는 돈은 아까워하고 자식 위해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아요. 부모에게 빚은 잔뜩 져놓고 돈놀이 같은 자식사랑만 하고 있으니 어디 이치에 맞습니까?
또 내 목숨이 아깝거든 남의 목숨도 아껴주고, 계(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 불음주) 잘 지키고 양심껏 바르게 사는 게 부처지 다른 게 아닙니다.
특히 스님네들은 계율에 철저해야 합니다. 내가 실력이 있어서 계에 걸림이 없다 해도 중생을 위해서 계를 지켜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는 고기 먹으면서 애한테 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 어디 말을 듣습니까? 계는 터전이기 때문에 터전 없이는 집을 못 짓습니다. 막행막식은 터 안 닦고 집 짓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계율을 안 지키면 중생을 포기하고 중노릇 포기하고 부처님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계를 잘 지키면 설사 본지소식이 없다 해도 부처님 권속이고, 설사 본지소식이 조금 들어왔다 해도 계를 안 지키면 마구니 무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기도 염불 참선 등 자기에게 맞는 것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살이가 답답해서 도저히 안 될 때 일심으로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불가사의한 도리가 나오니 사람의 힘으로 안 될 때 지성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스스로 수행해야 합니다. 염념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이 세상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명심하고 오늘부터라도 염불하고 참선하세요. 승속을 막론하고 수행해서 이 자연과 내가 우리 모두가 둘이 아니고 한몸임을 깨달아 부처로 보살로 살아가는 그날, 이 땅에 정토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불제자의 본분사입니다.”
월간 불광 1999년 8월호 전재
청소큰스님께서는 지장경 1,000독을 소리내어 읽어 마치시기를 이 법문뿐아니라 주석하고 계신 석탄사 법회때도 자주 말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장경은 읽는 공덕이 아주 큰 경전이니 지장경 1,000독 봉독을 지장보살염불과 함께 마치시는 분이 많으셨으면하는 바람입니다.
첫댓글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