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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7일 오전 7시 소래문학회원 16명이 ‘봄봄봄, 2019 담양으로 떠나는 문학기행’을 떠났다. ‘언어의 밭을 일구고 꽃 피우는 모임’ 소래문학회는 1992 창립되어 26집을 펴낸 시흥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동아리이다.
장소는 담양 삼다리 대나무숲- 면앙정-대치리 (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와 고려시대 불상-한국가사문학관-소쇄원이었다.
임경묵 회원이 준비한 담양으로 떠나는 여행 안내장에는 가는 장소마다 한 편의 시가 소개되어 있었다. 토요일 길이 많이 밀렸다.
강현분 회원이 밖에 해무리가 떴다고 했다. 밖으로 시선들이 모였다.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에서 멈췄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들처럼 하늘을 보았다. 글과 시를 쓰는 일은 세상 모든 일에 의미를 두고 크고 작은 변화 모두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간 곳은 삼다리 대나무 숲이었다.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전국 대나무 면적의 34%를 차지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토요일이었지만 삼다리 대나무 숲으로 가는 사람들은 소래문학회원들 뿐이었다. 대나무 숲에 들어서자 서늘한 바람이 몰려왔다. 오랜 역사를 말하듯 대나무의 굵기도 다른 곳에서 보던 것들 보다 컸다. 참 아름다운 계절 좋은 곳을 왔음을 알았다.이토록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을 듯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竹篇(죽편)1 – 여행, 서정춘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다음 장소로 면앙정으로 갔다. 중종 28년(1533)에 면앙정 송순(1493∼1582)선생이 관직을 떠나 선비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곳이다. 처음 있던 정자는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효종 5년(1654)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면앙정의 주위에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수령 200년 된 참나무 보호수의 위용은 그 장대함과 곧게 하늘로 뻗은 나무는 선비의 올곧은 기개를 보는 듯했다.
俛仰亭 三言歌 (면앙정 삼언가) | 송순
俛有地 仰有天 부유지 앙유천 /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亭其中 興浩然 정기중 흥호연 /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招風月 揖山川 초풍월 집산천 /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扶藜杖 送百年 /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대치리(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를 보기 위해 출발했다.
한재초등학교 앞의 문방구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화수분처럼 원하는 것이 그곳에 모두 있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한재초등학교로 들어서면서 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강경 회원은 “할아버지 나무시네”라고 했다. 어떻게 할아버지 나무라고 하냐고 물으니 이 느티나무처럼 풍채가 큰 것은 할아버지 나무라며, 수 백 년을 장수하는 동안 마을 분들도 가뭄 등에는 돌봐주었다. 할아버지나무는 액운을 막아준다고 마을 어르신들도 나무 앞을 지날 때는 합장을 해서 예를 표하고 지나갔다.“고 했다. 또한 “할아버지 나무 옆의 작은 나무는 할머니나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나무 주위에서 놀던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이건 할아버지 나무에요. 자세히 보면 눈, 코, 입 할아버지 모습이 있어요,”라면 설명해줬다. 눈 녹은 모습에서 예수님 형상을 찾던 옛날처럼 어린이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600년 된 느티나무에서 얼굴을 찾으니 모습이 보였다. 보물찾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한재초등학교 학생은“우리 반 21명이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안았어요.”라고 했다. 오래된 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자란 분과 한재초등학교 어린이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몸에 스미는 구나 싶었다.
소래문학 회원들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손에 손잡고 나무를 안았다. 어린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웃는 모습들이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린이들과 단체사진을 담았다.
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 / 최두석
새 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가 내쉬는 숨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신다 그네를 뛰고 공을 차던 아이가 반백이 되어 돌아와 행하는 봄맞이 의식이다 이조의 태조 이성계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나무 방방곡곡 제법 돌아다녀본 뒤에 보아도 이 땅에서 가장 웅숭깊은 그늘을 거느린 나무 그 그늘 아래서 글을 익힌 게 은근히 자랑스러운 나무 오물오물 움질움질 새 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의 숨결이 나의 숨결이 될 때를 기다린다 나무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때를 기다린다.
의젓하게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따뜻한 애정을 가진 이 어린이들 중에 또 다른 시인이 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성하고 맛있는 절라도 음식점에서 점심을 들었다. 다음으로 한국가사문학관으로 향했다.
가사는 고려 말에 발생하고 조선 초기 사대부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아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로 율문 (律文)이면서도 서정, 서사 등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형식상 4음보(3·4조)의 연속체인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가사의 주 담당 층은 송순·정철·박인로 등으로 대표되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 다. 그들은 생활의 체험과 흥취 및 신념을 노래했는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강호(江湖) 가사'이다. 이 작품들에는 혼탁한 세상의 고단함과 갈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에 묻혀 심성을 수양하며 살아가는 유학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작품은 자연 (우주적 질서)과 자아의 조화로운 합일을 추구하는 높은 정조를 띠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정적 정조는 이 시기 가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다.
담양군에서는 이 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閨怨歌(규원가) / 허난설헌
가사- 그제 졈었더니 마 어이 다 늘거니. 소년 행락(少年行樂) 각니 일러도 속절업다. 늘거야 셔른 말 자니 목이 멘다.
부생 모육(父生母育) 신고(辛苦)야 이 내 몸 길러낼 제 공후 배필(公侯配匹) 못 바라도 군자 호구(君子好逑) 원(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오 월하(月下)의 연분(緣分)으로 장안 유협(長安遊俠) 경박자(輕薄者)를 치 만나 잇서 당시(當時)의 용심(用心)기 살어름 디듸 .
삼오 이팔(三五二八) 겨오 지나 천연 여질(天然麗質) 절로 이니, 이 얼골 이 태도(態度)로 백년 기약(百年期約) 얏더니, 연광(年光)이 훌훌고 조물(造物)이 다시(多猜)야, 봄바람 가을 믈이 뵈오리 북 지나듯 설빈 화안(雪鬢花顔) 어 두고 면목가증(面目可憎) 되거고나. 내 얼골 내 보거니 어느 님이 날 괼소냐. 스스로 참괴(慚愧)니 누구를 원망(怨望)리.
현대어-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버렸는가? 어릴 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더니, 전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요, 부부의 인연으로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 들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하였다.
열다섯 열여섯 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나타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 생을 약속하였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다 시기하여 봄바람 가을물, 곧 세월이 베틀의 베올 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님이 사랑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시인 허난설헌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불화, 어린 자녀의 죽음, 등 불행한 삶을 살다 27살로 삶을 마감했다. 남동생인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그녀의 시를 아껴 허난설헌 사후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감탄한 그가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을 발간해서 중국에서부터 큰 방향을 일으켰고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중국과 일본에서 유명해지고 역으로 우리나라로 온 것이다. 좋은 시는 시대를 초월한다. 그녀의 삶은 불행했으나. 시를 통해 그녀의 삶을 보고 함께 공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쇄원으로 왔다.
소쇄원(瀟灑園)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소쇄원은 봄이 절정이었다. 겨자 빛 나무들과 분홍 철쭉은 옛 선비들도 책을 볼 수 없을 듯했다. 그저 자연을 바라보기만 해도 될듯했다. 500년 전의 소쇄원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시를 만났다.
호남을 대표하는 조선 중기 유학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선생의 소쇄원 사랑은 ‘소쇄원의 48영’을 지었다. 김인후는 학자이자 문장가로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으며, 조경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성산 주변의 속칭 정자골에 있는 식영정을 비롯하여 서하당, 환벽당, 소쇄원 등에 수시로 출입하며 시를 지었는데, 소쇄원이 활동의 주 무대였고 소쇄원에 관하여 많은 시와 글을 썼다.
김인후는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에 비하여 7년 수하지만 일찍부터 교우관계가 있었으며, 사돈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소쇄원에 자주 들러 기거하였다. 양산보가효부의 장편을 지었을 때 김인후가 그 운에 답한 일도 있다. 소쇄원 48영은 김인후가 49세이던 1548년경에 읊은 것이다.
소쇄원 48영 중에서 -제1영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
제10영
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하늘 가 저 멀리 이미 사라졌다가
다시 고요한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
바람과 대 본래 정이 없다지만
밤낮으로 울려 대는 대피리 소리
48영
긴 담에 써 붙인 소쇄원 제영
긴 담은 옆으로 백 자나 되어
하나하나 써 붙여 놓은 새로운 시
마치 병풍 벌려 놓은 듯하구나
비바람만은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오
소쇄원을 대한민국 대표적 원림(園林)으로 만든 것은 자연적인 지형에 따라 지은 정자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글과 시로 이곳을 표현했던 선비정신들이 충만했던 분들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소래문학회원 16명과 떠난 ‘봄봄봄, 2019 담양으로 떠나는 문학기행’은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삼다리 대나무 숲의 청량함과 꼿꼿한 선비 정신과 면앙정의 이제 겨자 빛으로 산하를 흔들던 참나무의 위용, 대치리(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의 위용과 600년 된 할아버지 느티나무를 한 학년의 어린이들이 팔을 벌려 안고, 나무를 오르내리고 놀고, 눈,코 입을 찾던 600 년을 이어 교감을 나누는 모습을 만났다. 한국가사문학관에서는 우리 가사로 표현된 아름답고 가슴 저린 가사들을 보았다. 소쇄원의 아름다운 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했다. 하루 동안 만났던 모든 감각을 무장해제 시킴으로 더욱 섬세하게 자연으로 스미게 했던 이 기억들이 또 다른 시어를 탄생시킬 듯했다.
시흥장수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만나는 풍경마다 새로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깔끔하게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정사항 : 맨 마지막 사진 제목 ▲ 사다리 대나무숲 마을 --> ▲ 삼다리 대나무숲 마을
예, 정정하겠습니다. 평강한 오후 시간들 되세요~~~
렌즈에 담긴 사물들이 곱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시대는 흘러가도 예나 지금이나 마음은 세월을 비켜가나봅니다. 그것을 재해석한
심미안에 거듭 감흥을 받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며칠 지났을 뿐인데 오랜시간이 흐른듯 또 다시 그날이 그리워집니다. 이번엔 소쇄원를 거닐수있겠구나 ~ 란 기대감 ,역시 행복했습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많은걸 얻은듯 싶어 고생한 여러샘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