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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술관에서 ‘근대 일본이 본 서양’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 때 공산당 마크라고도 불렀던 ‘ㄱㅅㄷ’ 을 조형(造形)한,
서울대 정문을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미술관이 있다.
사진: 서울대 미술관
직선이 가진 단순하면서도 강한 힘을 주는 건물을 바라보다가,
얼마 전 세상을 꽤나 소란스럽게 한 책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분이 저기 관장시켜 주겠다며 껄떡댔다고 했다던가?
그 양반 인품 상 그럴 리가 있겠냐는 따위 이론은 나는 믿지 않는다.
그 분이 아니라 세상 없는 분도 때가 오면 ‘혹시’ 하는 마음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인격문제를 떠나서, 서울대 역학 관계상 총장에게 단과대학
-미술대학 밥그릇을 빼앗을 힘이 과연 있을까? 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뭐 약간 뻥 치는 정도는 언제나 가능하겠지.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졌는데, 이제부터 전시회 본 이야기 한다.
전시회는 일본 고베(神戶) 시립박물관의 소장품을 빌려 온 것이었다.
근대 일본이 본 서양
나는 그림을 잘 알지 못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그림 보다 역사(歷史),
개항(開港)을 앞둔 일본 사회의 역동성과 일본인의 지적호기심 이었다.
내가 40여 년 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느 선생님은
우리가 (그리고 중국이) 일본보다 근대화 곧 서구화(西歐化)화에
뒤처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전통문화가 뛰어났고 체제가 안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일본은 문화정도가 낮았고,
또 당시 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사회가 구르기 시작할 때 마침 개항(開港)의 압력이 와서
변화-서구화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 것은
고작 우연(偶然) 내지 요행수라는 소리같이 들리는데,
그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우연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또 아무리 훌륭한 기회가 왔더라도,
내재적 능력이 없다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린 우리가 잘나서 그랬고,
(아무리 밉지만) 남은 우연히 그래 되었다면,
그게 공평한 태도고, 합리적 추론인가?
이번 전시회에서 새삼 느낀 것은
일본의 능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사생도보(寫生圖譜)
사생도보(寫生圖譜), 18세기 중엽, 호소카와 시게다타(細川重賢)의
금수취(錦繡聚), 곤충단화도(昆蟲단化圖) 중에서
도록 그림이 작아서 스캔 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림보다 저게 18세기 일본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하는 의미에 나는 주목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8대 장군(將軍) 요시무네(吉宗: 재위 1716-1736)는
전 일본 산야(山野)의 모든 식물, 광물을 일일이 수집하라는 영을 내린다.
처음 약물(藥物)부터 시작했지만, 곧 조개, 어류, 곤충 같은
모든 자연물에 대한 조사로 확대되어 나갔다.
(*)심지어 우리 조선 자연물에 대한 정보까지 수집한다.
(*) 지금도 우린 일본말 몇 마디 할 줄 알면,
일본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반(反)해서,
일본의 한국연구가 훨씬 체계적이지 않은가?
중앙정부-막부(幕府)가 시작했지만, 전 일본의 다이묘(大名)가 동참하고,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어 공동 연구하는데 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이 일본 박물학(博物學) 전통이고 그 선(線) 상에 있는 것이 위 그림이다.
그림: 조류사생도권(鳥類寫生圖卷) 중 두 컷.
작자미상, 1806-27년, 비단에 채색,
20.5x625.5cm, 25.9x576.0cm (2권)
이것은 네델란드에서 들어온 책을 모사한 것이다.
수입한 책 베꼈으니 별거 아닌 것이 아니라,
일본은 개항 이전 이미 저런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본 실학의 전통은 대단히 뿌리가 깊고 넓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학자가 자연과학 연구를 했지만
정권에서 밀려난 몇몇이 하던 연구일 뿐
국가적 관심사도 아니었고, 정부 지원은 꿈꾸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의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림 : 해체신서(解體新書)
1774년, 목판인쇄, 26.5x17.9x3.5cm
서양 해부학 책을 번역한 책-해체신서(解體新書, 5권) 삽화 중 한 장면이다.
몇 년 전 제목은 잊어 버렸지만 일본 근대의 번역에 얽힌
이런 저런 일화(逸話)를 적은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만났다.
일단의 일본인들이 네덜란드 의학-해부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어찌어찌 얻었지만,
문제는 당시 그 일본인들은 네덜란드 말도 문자도 몰랐다.
그래서 그룹으로 모여 연구하기를,
콩팥 그림 밑에 뭔 문자가 적혀 있으면, 아 이게 콩팥이겠구나,
위(胃) 밑에 적혀 있으면 위(胃)란 뜻이겠지 해 가면서,
발음은 하지 못해도 그 문자를 해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단어 하나 해석하는데 며칠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어학공부가 아니라, 거의 암호해독 수준이었다.
일본인들이 서양-네델란드 해부학이 동양보다 훨씬 정교하고
사람 몸을 열어 비교해 보아도 딱 떨어지기에,
그 해부학 책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그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와 있던 화란사람 가르침을 받았겠거니 했지,
이런 식으로 암호 해독해 나가면서 한 줄은 몰랐다.
이 정도 열정이 있기에 그렇게 빨리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사회는 개항(開港) 전에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地圖)
18세기 제작 지도가 몇 점 나와 있었다.
고베 시립박물관 소장품만 가지고 와서 그런지,
전시회에 내 놓은 지도는 그리 감명 깊지 않다.
일본에는 우리 고산자
이노우 타다타카 (伊能忠敬)인데, 생몰년대가 1745-1818년이니
1804-1866 년인 고산자(古山子)보다 두 세대 정도 이르다.
이노우는 1800년부터 일본 전역을 3만 5천 km-5천만 보를 걸어서 측량하여,
1816년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 및 도수보(度數譜) 등으로 정리했다.
참고로
지금 용산 국박(國博)에서 그 150주년 기념전시회를 하는데,
플래카드만 그리 걸었을 뿐 평소 전시하던 내용과 별다른 점은 없다.
김정호와 이노우(伊能)에 얽힌 전설은 신기할 정도로 닮았는데
아무래도 이노우(伊能) 이야기 쪽이 모본(母本)인 듯 하다.
대동여지도는 오늘 날에도 쓸 수가 있다.
나도 등산이나 답사 갈 때 해당 지역 카피 떠서 가는데
산의 맥(脈)-줄기를 찾기에는 대동여지도 쪽이 요새 지도보다 편하다.
이노우(伊能)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도 어찌나 정확한지
19세기 중반 열강-영국인가가 일본 침공을 위해 지도 제작을 하려다가
그 지도를 어떻게 구하고 나서는 그냥 그대로 썼다고 들었다.
우리
아니 지원 정도가 아니라 막부의 명(命)에 따라 측량하였다.
외국의 침략이 두려워 지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것은 두 나라가 같다.
고산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렇게 훌륭한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선행연구가 이미 깊숙이 진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일본 이노우(伊能)의 지도도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니며,
서양의 삼각측량법도 배웠던 것이다.
조선통신사 내조도(朝鮮通信使 來朝圖)
조선통신사 내조도(朝鮮通信使 來朝圖)
하네카와 도에이(羽川藤永 1736-1751)
1748-1750년 경, 종이에 채색, 69.7x91.2cm
조선 통신사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그림인데,
이번에 원본(原本)을 처음 보게 되었다.
전시회는 사진 못 찍게 하고, 도록 그림은 너무 커서
부분만 스캔 떴는데 전체를 인터넷에서 퍼 올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통신사 뒤에 붙은 내조도(來朝圖)는 또 무슨 말일까?
조공행렬(朝貢行列)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본에 조공(朝貢)을 바쳤다니 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다들 펄쩍 뛸 테지만, 일본의 기억(곧 역사) 정리가 이런 식이다.
우린 미개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이것저것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조선이 보낸 조공사절(朝貢使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통신사의 ‘신’은 믿을 ‘信’이다.
통신이 붙었다고 코뮤니케이션 이란 뜻이 아니다.
우리 조선왕조는 나라의 관계란 대저 믿음이 제일이다 라는
공맹(孔孟)의 가르침 대로 ‘믿음으로 서로 통하자’는 의미로,
사절단 이름을 통신사(通信使)로 붙여 보냈다.
그러나 일본 덕천막부(德川幕府)는 갓 세운 정권의 위세를 높이는데
우리 사절을 써 먹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로 메우고,
극진한 잔치를 베풀어 ‘보라! 조선에서 이처럼 조공사절을 보내 왔다’
라며, 일본의 모든 제후와 백성에게 눈으로 보여 주는 쇼를 연출했다.
또 우리 통신사에게 자기네 시조 이에야스(家康) 신사에 참배해 달라고
떼를 쓰다가 나중에 협박까지 하는데, 이게 또 결국 성공한다.
이런 목적이 있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우리 조정에 통사정하다가,
때로는 을러대기도 하는데, 우리는 또 나름대로 북으로 후금(後金)-
청(淸)나라와 관계가 점점 심상찮아 지는데, 동쪽에 또 하나의 적을
둘 수 없어 통신사를 보낸 것이다.
마침내 조선 통신사가 오니 일본은 온 나라의 재물을 퍼 부으며 맞이했다.
그러다가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가니 굳이 쇼를 연출할 필요가 없어지고
괜히 돈만 잔뜩 들어가니 그만 둔 것이다.
위에 천황이 있고, 그 아래 쇼군(將軍)이 조선왕과 대등하게 놀았으니
결국 조선왕은 천황의 아랫 사람이고, 그 사신은 조공사절이다
라는 식이 일본의 논리(?) 전개다.
그런데 당시 일본 막부 장군은 대외문서에는 일본국왕으로 자처했다.
우리 조선도 일본에 천황(天皇)이라고 또 있다는 것을 알긴 알았다.
그러나 그까짓 토인(土人)들 내부 사정에 별 관심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잔꾀를 부려 어떻게 이용했던, 조선통신사가 문화대국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본땅을 위세당당하게 걸어 간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이상한 해석도 문제지만, 일본이 우리 선진문물을 배우려고
조선통신사를 그토록 꺼뻑 죽게 모셨다는 이해도 ‘참’과는 거리가 있다.
두 나라가 얽힌 역사는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키요에(浮世繪)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797-1858)
에도 100경(名所江戶百景): 사루와카 거리의 밤풍경
1857년, 종이에 목판 채색인쇄 33.3x48cm
빈센트 반
다음은 위 ‘사루카와 거리의 밤풍경’과 그 구도가 비슷하다고 한다.
1888, Oil on canvas, 81 x 65.5 cm
일본 우키요에(浮世繪)가 19세기 후반 서양 그림-인상파(印象派)
특히 빈센트 반
내가 새삼 거들고 나설 일이 아니다.
내가 정작 ‘아 이건’ 하고 느낀 것은 다른 측면이다.
일본 어느 화가와 미술사가(史家) 내지 평론가가
근대 서양화 이해에 대한 대담(對談)을 책으로 엮은 것을 읽었다.
19세기 후반 인상파(印象派) 순서가 되자,
당연히 일본 우키요에(浮世繪)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이 사람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서양 그림에 영향을 미쳤노라고
의기양양해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별거 아니에요.
당시 유럽의 화가들이 그림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다가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에서 힌트를 받은 것뿐이에요.
곧 인상파는 유럽 미술계의 내재적 원리와 자체동력에 의해
발전한 것으로, 우키요에는 거기에 영감을 준 거 밖에 없어요...
이거 정확한 이야기다.
어느 문명(文明)이던 가다 보면 벽에 부딪히고
그럴 때 마다 해결책을 다각도로 모색하는데
그 힌트는 어디서나 올 수 있다.
19세기 말 유럽 화가들은 아프리카 토속조각에서 감명을 받았고,
그 유명한 뭉크의 절규도 페루-고대 잉카의 미이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 (뭉크가 보았다는) 페루의 미이라상
그럼 뭉크가 잉카인의 가르침을 받은 게 되는가?
서양화의 흐름은 서양의 자체동력에 의한 것이라는
그 일본 화가와 평론가의 말은 정곡(正鵠)을 찌른 것이다.
이런 극히 지당한 말씀에 내가 왜 새삼스레 감심(感心)하고 그럴까?
가정(假定)을 해 보자.
우리 그림이 세잔느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쇼, 난리 부루스를 추다가, 누군가 거 뭐 실은 별거 아닌데
라고 할라치면 당장 역적, 매국노로 몰아 붙일 것 아닌가?
샤라꾸(寫樂)와 단원(檀園)
일본에 도슈사이 샤라꾸(東洲齋寫樂)라는 우키요에(浮世繪) 작가가 있었다.
1794년 5월에 갑자기 나타나 이듬해 1795년 1월에 사라졌는데,
그 짧은 동안 남긴 작품이 150 점이 넘고, 하나같이 대단한 걸작이다.
그림: 도슈사이 샤라꾸(東洲齋寫樂)
'다케무라 사다노신'을 연기하는 이치카와 에비조, 1794년
(*) 이번 전시회 작품은 아니고, 샤라꾸 이야기 하려고 다른 책에서
스캔 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우키요에도 꽤 볼 만하다.
그런데 그 샤라꾸(寫樂)가 누구였는지?
그 생애(生涯)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래 놓으니 정체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亂舞)한다.
7-80년대 운동권의 사표(師表)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분과
(발음 상)이름이 같으며, 일본 만엽집(萬葉集) 책도 낸 사람이,
그 샤라꾸가 실은 단원
정조(正祖)의 밀명을 받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도 덧붙이면서.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에 조예까지는 아니라도, 그 발전 과정과 작품을
잠깐이라도 살펴보면,
슥삭 그려서 헤집어 놓고 돌아오고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거늘, 이걸 믿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전시회 이야기 하다가 어째 삼천포로 한참 빠진 듯 한데,
대학 다닐 때, 한국고대사 전공한 어느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들려 주면서 이 글 마무리한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우리가 뭐라고 하면
일본 애들이 잘 받아주는 분위기야.
그런데 실은 이게 더 겁나.
우리하고 싸운다는 것은 둘 다 수준이 비슷한 것 아냐?
그런데 지금은 우리 주장을 다 인정해도 아무 문제없다,
즉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기분이 묘해져.
우키요에(浮世繪)가 인상파(印象派)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본 지식인은 그건 서양 자체운동원리에 의한 발전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키요에 아니라도 일본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이루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 이런 식의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에 비해 우린 어디서 샤라꾸-
그 옛날 당당했던 조선통신사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 진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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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았구요 인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