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李外秀, 59). 그는 세상을 완벽하게 등진 격외인(格外人)이다. 아니다, 세상을 완벽하게 껴안고 있는 중심인(中心人)이다. 살풍경한 억압의 시대인 70~80년대에 그는 우리들에게, 광장을 떠도는 날이 선 ‘칼’이요, 거침없이 떠도는 ‘들개’였다.
새로운 문화코드의 시대인 2000년 그는 날지 못하는 ‘날다 타조’의 비상을 통한 희망을 담아냈고, 자기를 똑바로 보라는 ‘바보 바보’를 통해 진실과 순수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나 중심의 세계에서 세상으로 나가고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음악회 ‘귀로 본다’를 일주일 앞둔 지난 5월21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그의 집 ‘격외선방’에 들어섰다.
사진설명: 35년간 예술적 순결성만 갖고 ‘격외의 삶’을 살아온 소설가 이외수. “이제 인간 중심의 삶을 벗어던지고 우주와 인간이 함께 상생하는 공동체적 삶을 회복해야 할 때”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외수는 무척이나 천진하고 순수했다. 대추씨만큼 작은 얼굴, 얼기설기 그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긴 머리, 끝없이 입을 축이고 있는 차와 담배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부랑자, 정신병자 등 패배한 자들의 삶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가 내민 답은 간단명료했다. 이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비’와 ‘화엄’에 있다는 것이다.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염화미소에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다가 가만히 연꽃을 드셨습니다. 그 뜻을 단 한사람만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간절한 사랑이 있을 때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계합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입니다. 사랑은 자비요 화엄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미운 짓을 해도 나쁜 짓을 해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 역시 자비요 사랑인 것입니다.”
‘염화미소’는 부처님과 오늘의 우리들을 잇는 중요한 다리다. 그 피안의 다리에 대해 그는 집중하라고 권하고 있다. 달마 혜능 원효 서산 경허 만해로 이어지는 ‘마음과 마음’은 곧 모든 것을 융섭하는 ‘자비’에 있다고 말했다.
꽃도 동물도 성공한 자도 장애인도 모두 주인인 세상으로…
난마같은 사바 세상 부처님의 ‘염화미소’에서 해답 찾아
그는 선방의 수좌처럼 정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루 한 끼 최소한의 공양을 통해 맑고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차와 참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늘 관조하고 있었다. “많이 먹으면 허탈하고 나태해지고 잠이 많아지지요. 맑고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양만큼 좋은게 없습니다.” 노장사상을 통해 동양의 삶과 철학에 천착해온 그는 〈화엄경〉 〈법화경〉 〈법구경〉 등의 경전을 통해 불교적 삶과 노장과 만남을 시도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광스님과의 ‘기행’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와 차를 마시러 오는 도반과도 같은 스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또는 자신의 문학)을 통해 출가한 스님을 위해 선방에 대중공양을 갈 정도로 그의 삶은 넓게 열려있었다.
70년대 그는 소설 〈훈장〉을 통해 문단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어느 날 외진 곳에서 정신을 차린 그가 오로지 ‘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토하며 썼다는 〈훈장〉에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스산한 풍경들뿐이었다. 그때 우리가 살았던 그 시대는 그가 목격했듯 늘상 ‘겨울’이었다. 그가 고민했던 화두는 바로 ‘생존’이었다. 생존은 패배가 아닌 것이다.
“무엇에건 패배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에건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붙인 이 황무지에서 이 냉혹한 사람들과 기계들과 돈의 시대에서 아버지가 겪으셨던 그 무서운 고독까지 모두 짊어지더라도 나는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훈장’ 中)”
그는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절박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뼈와 살을 녹였다. 그리고 그 빛나는 〈훈장〉을 통해 단 한번의 외도도 시도하지 않고 묵묵히 그 시대를 견뎌냈다. 민주의 시대 민중의 시대는 그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고립시켰지만 그 시대적 흐름에 그는 결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춘천이라는 궁벽진 곳에 30년 가까이 틀어박혀 민주를 넘어 민중을 넘어 디지털시대를 넘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본성’과 ‘마음의 본성’을 올곧게 이야기해왔다. 그런 그에게는 ‘화엄의 정신’을 가진 ‘투사’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글로 밥을 해결해야 하는 글쟁이가 장애인들을 위해 콘서트를 여는 것이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도와주는 사람 없고 나와 주변사람들이 몸으로 때워서 하는 겁니다. 내년부턴 누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요. 아이구 좋은 일 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장애인 콘서트는 문턱없는 집에 사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특이한 방식 중 하나다. 이외수에게 덧씌워진 소설적 신비감을 벗어던지고 세상과 사람들과 ‘예술적 순결성’으로 만나는 것이다. 오직 ‘글쟁이 인맥’만을 동원해도 ‘몇천만원’이나 드는 콘서트를 여는 것은 그에게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세상아 저물지 마라, 지난날 내 저급한 이름위에 뱉어준 가래침도 지금은 격외선당 우담바라 꽃송이로 피어나거늘, 서로가 살아있으므로 눈물겨운 목숨 곁에서 부디 한순간의 증오로 저 하늘을 덮지 마라. 비록 기다리는 날들이 사랑하는 날들보다 아프다지만 날마다 내가 삽질하는 시간의 어두운 터널 건너 언젠가는 그대 마음 사과꽃 눈부신 마을에 살게 하리니.(‘날다 타조’ 中)”
그가 꿈꾸는 세상은 우담바라 꽃송이가 피어있는 사과꽃 눈부신 마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사는 것이다. 오직 ‘예술적 순결성’만 가지고 완벽한 ‘격외의 삶’을 일궈낸 그의 화두는 인드라망 세계에 깃든 생명공동체다. 서로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증오와 고통을 없애는 것은 ‘인간중심의 삶’을 벗어나 우주와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위해 그는 강원도 화천에 동물도 주인이 되고 꽃도 주인이 되고 언제든 찾아온 사람도 주인이 되는 ‘격외의 집’이랄 수 있는 ‘감성마을’을 만들고 있다.
이외수는 더 이상 안개낀 춘천에서 오리무중으로 풍문에 얹혀 들려온 그런 기인이 아니었다. 생명의 근원에 천착해 들어가는 순수한 자연인으로서의 순결성으로 이 시대 자신을 버린 ‘바보’들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세상은 진실과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 진실한 자는 아직 눈물이 남아있고, 눈물이 남아있는 자에게는 고통을 굳게 껴안을 순수가 남아있다. 그 순수가 바로 세상을 지탱하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우치라고, 오늘도 그는 조용히 외치고 있다.
이외수는 누구 /
매니아층 50여만명
선화에도 일가견 있어
194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이외수는 선(禪)적 감수성을 통한 ‘언어의 연금술사’라 평가받고 있는 이 시대 대표적인 소설가다. 25세 때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2년간 강원도 산골에 있는 객골분교에 소사근무를 자청하면서 문장공부에 몰두했다. 그가 말한 당시의 회고다.
“나는 그때 한솥 가득 밥을 지어 바깥에 내다놓았다. 얼음밥을 만들기 위해서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 먹을 수 가 없다. 망치와 못으로 깨트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 먹을 수밖에 없다. 정신뿐만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몇솥째 얼음밥을 먹은 후 묘사적 문체의 핵심에 도달한다. 이른바 그가 문장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외수는 참으로 가난했다. 생라면 하나로 일주일을 때웠던 시절 라면 알맹이를 쪼개어 나흘을 버티고 라면스프를 타마시면서 사흘을 견뎠다. 또한 춘천과 명동 전원다방 앞, 네 알의 감자를 살 수 있는 20원을 구걸해서 하루는 감자를 다음날은 굶고 그 다음날은 번데기를 섭취하며 연명했다. 그는 술을 마시면 무박삼일을 마셨고 취하면 개집이나 쓰레기더미에서 잠을 자며 7년을 보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소외된 자의 영혼과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현실의 물질에만 매달리는 삶의 허약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소외된 이방인들을 결코 패배하지 않게 따스하게 보듬어 안는 ‘자비’를 보여주고 있다. 1987년 첫 장편 〈꿈꾸는 식물〉을 발표한 이래 〈겨울나기〉 〈들개〉 〈칼〉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등 장편소설과 몇권의 산문집, 〈외뿔〉 〈싸부님 싸부님〉 등 우화집도 발간했다. 그를 따르는 독자들은 약 5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누구나 다 알아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셈이다. 그는 박범신 김성동과 도반같은 사이다. 석공예가 곡천 김봉준 가수 이남이와 중광스님 등은 마음공부를 함께하는 도반이다.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그는 선화(禪畵)의 대가다. 중광스님이 그의 학그림을 보고 반해 흉내낼 정도로 그의 선화는 누구나 알아줄 정도로 뛰어나다. “불교는 안과 밖이 없어서 좋습니다. 도반들과 차를 한잔 하면서 마음의 근본은 우리의 사랑에 있다고 말하곤 하지요. 삶의 원천성을 찾는 노력을 한다면 누구나 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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