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 / 괴테
1771년 5월 4일
훌쩍 떠나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네 ! 절친한 친구여, 사람의 마음이란 어쩌면 이렇게도 이
상야릇한 것일까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며 떨어질 수 없었던 자네를 두고 떠나왔는데도 이렇
게 즐거운 기분에 젖을 수 있다니 말일세.
그러나 자네는 용서해 주겠지. 자네 이외의 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마음
을 지닌 인간을 괴롭히게 마련인 그런 숙명을 타고난 것만 같거든.
레오노레는 정말 안됐어. 하지만 그건 내 책임이 아닐세. 내가 그녀의 여동생의 개성적인 매
력에 끌리어 교제를 하고 있는 동안, 레오노레의 가슴속에 나에 대한 연정이 싹텄다 하더라
도 나로서야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는 해도 나에게는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레오노레의 감정에
기름을 부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레오노레의 꾸밈없는 심정이 드러나는 언동을 재미있어 하
며, 사실은 전혀 우스꽝스럽지도 않은데 나는 남들과 함께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지나 않았
던가? 정말 그러치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아,
자신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으니 인간이란 참 묘한 거야. 친구여, 나는
자네에게 약속하네, 나는 좀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힘쓰겠으며, 운명이 가져다 준 조그만 불
행을 그전처럼 자꾸만 되씹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네. 현재를 즐기고 과거지사는 과거지사
로서 흘려보내겠네.
자네가 말한 것은 정말 옳았어.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여, 만일 인간이 어째서 그런 천성을
타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지런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난날의 불행한 추억을 되새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현재를 태연히 견디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인간의 괴로움은 훨씬 줄어
들 텐데 말일세.
미안하지만 어머님께 말 좀 전해 주게. 어머님이 시키신 일은 될수록 잘 처리해서, 그 결과
를 곧 알려드리겠다고 말일세.
아주머니를 만나봤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네. 떠들썩하
고 괄괄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근본은 선량한 여자일세. 우리 몫의 유산을 아주머니가 움켜
쥐고 내놓지 않는다는 어머님의 불만을 나는 아주머니에게 분명히 말해 줬네. 여기에 대해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조건을 제시한 다음, 그것이 충족되면 언제
든지 몽땅 내 주겠다는 것이었네. 그것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몫을 말일세
이제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네.
어머님께는 모든 것이 잘 돼 가고 있다고만 말씀드려 주게. 친구여, 이 하찮은 용건으로 해
서 나는 새삼스레 느꼈는데, 이 세상의 분쟁은 악의나 흉계보다는 오해와 타성 때문에 일어
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네. 적어도 악의나 흉계 쪽이 수적으로 적다는 것은 틀림없네.
그건 그렇고, 이 곳에 온 뒤로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네. 낙원과도 같은 이 고장에서 고독
에 잠길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에 귀중한 진정제 구실을 해 주고 있다네. 게다가 이
청춘의 계절은 곧잘 겁에 질리곤 하는 내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고 있다네. 모든 나무들, 모
든 생울타리들이 꽃다발일세. 차라리 한 마리의 풍뎅이가 되어 향기로운 꽃냄새의 바닷속을
헤매면서 그 속에서 먹이를 찾는 몸이 되었으면 싶네.
이 도시 자체는 쾌적하지 못하지만 교외에는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네. 이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서, 지금은 고인이 된 M백작이 한 언덕 위에 정원을 꾸몄었네. 그
주위의 언덕들이 가로세로 아롱다롱 아름답게 이어지면서 더할 수 없이 아늑한 골짜기를 이
루고 있는 곳일세. 그 꾸밈새는 단순하네. 그러나 그 속에 한 발짝만 들어서면 곧 느낄 수
있는 것은, 정원을 설계한 사람이 조경학자 같은 이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스스로 즐기려는
심정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일세. 벌써 몇 번이나 나는 이 정원 안의 황폐한 정자
에서 고인이 된 백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네. 그 곳은 백작이 생전에 사랑했던 장소요, 나
도 또한 그 곳이 마음에 드네.
머지않아 나는 이 정원의 주인이 될 걸세. 이제 겨우 2,3일밖에 안 되었지만, 이 곳 정원사
도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고 있네. 내가 이 곳 주인이 되어도 그가 싫은 얼굴을 하지
않으리라 여겨지네.
5월 10일
희한한 상쾌감이 내 영혼에 충만해 있네. 내가 마음껏 음미하고 있는 요즘의 달콤한 봄날
아침과도 같은 그런 상쾌감이었네. 나는 혼자서 호젓이 시간을 보내며, 나 같은 삶의 영혼을
위해서 마련된 성싶은 이 고장에서 내 삶을 즐기고 있네. 나는 정말 행복하네. 친구여, 나는
편안한 심정에 잠겨 있다네.
덕분에 내 예술이 피해를 입고 있는 정도일세.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릴 수가 없네. 한 획의
선조차 그릴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어 본 적은 일찍
이 없었네
나를 둘러싼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드높은 하늘에서 비치는 햇빛은 울창
한 숲의 꼭대기에서 머뭇거리며, 그 속의 성전에는 다만 몇 줄기의 빛살만이 새어 들어올
뿐일게. 그럴 때면 나는 소리내어 흐르는 시냇가의 무성한 풀밭에 누워 대지에 얼굴을 바싹
대고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풀들을 살펴보곤 한다네.
그리하여 풀줄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생물들 세계의 준 동이며, 기어다니는 벌레
와 날벌레들의 무궁무진한 여러 모습들을 가슴 뿌듯이 느끼는 걸세. 그러고는 새삼 우리네
인간을 자기의 모습과 같이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실감하고, 우리를 영원한
환희 속에서 떠돌게 해 주신 지극히 높고 자애로운 분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네. 그러다 보
면 친구여 ! 내눈은 어느 결엔지 촉촉이 젖고, 나를 둘러싼 세계와 하늘이 마치 애인의 모
습과도 같이 온통 내 영혼 속에서 안식을 취한다네
그럴 때 나는 그지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며 생각에 잠긴다네. 아아, 내가 이것을 표현할 수
가 있다면, 내 기슴 속에 이토록 충만하고, 이토록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화면에다 내뿜
을 수가 있다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거울인 것처럼, 그것을 내 영혼
의 거울로 삼을 수가 있다면......하고
말일세
친구여, 그러나 나는 한창 그런 생각에 잠겼다가도 그만 힘이 빠져 버리고 만 다네. 이 장엄
한 현상의 힘에 기가 꺾여 버리고 마는 걸세.
5월 12일
이 곳에는 사람의 마음을 호리는 정령이 있는지, 아니면 성스럽고 생생한 상상력이 내 가슴
속에 깃들어 그것이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이토록 낙원같이 바꾸
어 버리는 건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네. 시내 입구 가까운 곳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인어의
화신인 멜루지네 자매가 물에 이끌리듯, 나는 그 샘에 끌려가곤 한
다네
자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면 동굴이 하나 나오고, 거기서 다시 층층대를 스무 단쯤 내려간 곳
에 그 샘이 있는데, 맑디맑은 샘물이 대리석 바위틈에서 솟아나고 있네. 샘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돌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다란 나무들, 얼굴에 확 끼치는 시원스런 냉기,
이 모든 것들에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 그리고 사람을 전율케 하는 그 어떤 분
위기가 있는 것일세.
나는 거의 날마다 그 샘가에 1시간 가량씩 앉아 있다네. 거시 앉아 있노라면, 시내에서 아가
씨들이 와서 샘물을 길어 가는 걸세.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면서도 가
장 필요한 일이네. 그것을 보고 앉아 있으면, 부족사회 시대의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이나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걸세
마을 어른들이 샘가에서 서로 인사를 트고, 혼담을 교섭하며, 우물가에는 자비로운 정령들이
떠돌고 있는 걸세
아아, 이런 나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여름의 기나긴 여행 끝에 시원한 샘물로
기운을 되찾은 경험이 없는 사람일거야.
5월 13일
내 장서를 보내 주겠단 말인가? 제발 그 짓만은 하지 말아 주게. 나는 이제 이 이상 지도를
받거나 고무되거나 자극을 받고 싶지가 않네. 내 가슴은 스스로도 충분히 소용돌이치고 있
다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진정시켜 줄 자장가일세. 그리고 그 자장가들은 내가 애독하는
호메로스의 시속에 얼마든지 있다네. 나는 설레는 나의 격정을 그 자장가로 여러 차례 달래
어 왔네. 내 마음처럼 이토록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것은 또 없을 걸세.
새삼스레 이런 소리를 자네에게 할 필요조차 없겠지. 슬픔에 잠겼다가는 걷
잡을 수 없는 정신적인 흥분으로 치닫는가 하면, 달콤한 우울에서 파괴적인 정열로 변하여
가는 내 모습을 목격하고 자네가 곤혹스러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말일세.
사실 나는 내 마음을 병든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다네. 어떤 일이건 떼를 쓰는 대로 다 받
아 줄 수밖에 없거든. 딴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하지 말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할 사람
도 있을 테니까 말일세.
5월 15일
이 고장 사람들과도 벌써 낯이 많이 익었고, 모두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여 준다네, 특히 어
린애들은 나를 무척 따른다네. 처음에 내가 이 곳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허물없이 물
어봤더니.
내가 자기네를 놀리는 줄 알고 몹시 퉁명스럽게 대하는 이들도 있었네. 그러나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 다만 내가 여태껏 몇 번이나 느끼고 있던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따름
일세. 다시 말하자면, 다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위엄이 손상
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언제나 냉담하게 서민들을 멀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걸세.
그런 반면에 자기만은 파격적인 체하고 일부러 공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거만 스러
움을 서민들이 한층 더 느끼도록 하는 경박하고 악의적인 사람들도 있는 거라네.
우리네 인간들이 모두 평등하지 않으며, 또 평등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잇네.
그러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이른바 하층계급 사람들을 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
들은 패배가 두려워서 적군 앞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자와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고 나는 말하고 싶네.
며칠 전에 새가 샘에 나갔더니, 거기 젊은 하녀 한 사람이 있었네. 그녀는 물통을 층층대 맨
아래에 놓고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더군. 물통을 머리에 이도록 거들어 줄, 누군가 아는 사람
이라도 없나 하고 살피는 것이었네.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그녀를 보고 말했지
"거들어 줄까요, 아가씨?"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대답했어
"아니예요, 나리"
"사양할 것 없어요"
그녀는 머리 위의 또아리를 바로잡았고, 나는 물통을 이도록 거들어 주었네. 그녀는 고맙다
는 인사를 하고는 층층대를 올라가더군.
5월 17일
나는 모든 계층 사람들과 알게 되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아직 찾
지 못했네. 내가 지닌 어떤 점이 사람을 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나를
좋아해 주고 있네. 그러나 이 사람들과 나는 다만 잠시 동안만 길을 같이 가는 것 뿐이요,
머지않아 서로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슬프다네.
이 곳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냐고 자네가 묻는다면, 다른 고장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네. 인간들이란 대개 어슷비슷한 거라네.
인간들은 대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일에 다 써 버리고서, 자유로운 시간을 살아
가기 위한 일에 다 써 버리고서, 자유로운 시간이 그저 조금이라도 남아돌게 되면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잃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 시간을 없애 버리려고 기를 쓰는 것이라네. 아
아,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련 가!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정말 선량하다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잊고 아직도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는 즐거움을 이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있다네. 훌륭하게 차려 놓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마음놓고 허물없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마차를 같이 타기도 하고, 댄
스파티에 참석하기도 하네.
그런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아주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네. 그러나 나의 내부에는 아직
도 많은 다른 힘이 잠자고 있으며, 그 힘은 전혀 사용되지도 않은 채 퇴장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감추어야만 한다네. 아아,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네
그러나 오해를 받게 마련인 것이 우리의 운명인 걸 어쩌겠나. 아아, 어릴 적 친구였던 그녀
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차라리 그녀를 몰랐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라리지는 않
을 것을 !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네."너는 바보야!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있으니
까"그러나 그녀는 나의 친구였다네. 그 무렵 나는 그녀의 위대한 영혼과 접촉했었네. 그 영
혼이나를 감싸주었을 때, 나자신이 현실의 나 이상의 존재처럼 느껴졌었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가 있었던 걸세. 정말이지
그 때 나는 내 영혼이 지닌 힘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걸세. 그녀와 마주 대하고 있
으면 그야말로 영묘한 감정에 휩싸여서, 자연을 고스란히 내 품안에 안아 들일 수 있었네.
우리의 교제는 더할 수 없이 섬세한 감수성, 비길 데 없이 날카로운 예지의 활동이 아니었
던가. 그 활동이 갖가지 변화를 빚어내면서 나중에는 장난으로까지 번져 갔지만, 그러한 변
화들이 모두 천재의 표시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아아,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무덤으로 가 버리고 만
걸세. 결코 나는 그녀를 잊지 않으려네, 그녀의 그 꿋꿋한 기질과 숭고한 관용을.
2,3일 전에 나는 V라는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솔직한 청년이었네. 그
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으로 자신이 남달리 영리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보
다는 아는 것이 많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상당한
노력가인 모양이야. 예컨대 그는 상당한 지
식을 가진 사람일세. 내가 그림을 꽤 그리고, 그리스어를 안다는 사실(이것은 이 고장에서는
놀라운 일이거든)을 저해 듣고는 나를 찾아와서, 그는 자신의 갖가지 지식을 늘어놓았네.
바토에서 우드에 이르기까지, 드필에서 빈켈만에 이르기까지를 논술하는 거야. 그러고는 슬
이론의 제1부를 독파했을 뿐 아니라, 고대연구에관한 하이네의 강의 필기 본을 갖고 있노라
고 역설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
네.
또 한 사람 훌륭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공국의 법무관으로서 상냥하고 성실한 사
람일세. 듣건대 그에게는 아이들이 아홉이나 있는데, 그 사람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보면 흐뭇하다는 걸세. 특히 그 사람의 맏딸에 대한 평판이 자자하네. 법무관이 나더
러 한번 놀러 오라고 했으므로, 일간 찾아가 볼 생각일게. 그는 여기서 1시간 반쯤 걸리는
공작의 사냥별장에 살고 있네. 부인이 죽은 뒤에 허가를 얻어서 그리로 이사를 갔다는데. 이
곳 관사에서 그대로 사는 게 그로서는 견딜 수 없이 슬프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 밖에 두세 명의 괴짜들도 알게 되었는데, 아주 비위에 안 맞는 친구들일세. 특히 친한 체
하는 그 태도들이 딱 질색일세.
그럼 안녕! 이 편지는 자네 마음에 들겠지. 아주 사실적이니까.
5월 22일
사람의 일생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지만,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도 줄곧 떠오른다네. 인간의 활동과 연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속에 갇
혀 있는 꼴이란 말일세.
그런 것을 눈앞에 보게 되거나 또는 인간들의 모든 활동이 목적하는 바는, 결국은 갖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 욕망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가엾은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또 인간의 탐구가 어느 정도가지 이르면 만족해 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를 가두어
두고 있는 감옥의 벽에다 화려한 희망과 밝은 풍경을 그려 놓고서 좋아하는 허울좋은 체념
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거나 하면, 빌헬름이여,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마네.
나는 나 자신의 내부로 은둔하고 거기서 한 세계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또한 표현이나 생동
하는 힘으로서 나타나기보다는 예감이나 막연한 욕망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세. 그리
하여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의 오관 앞에 희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나는 꿈결인
양 그 세 계의 더 깊은 안쪽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네.
어린애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린애들을 많
이 다루고 있는 박식한 가정교사들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네. 그런데 어른들도 어린애나 마
찬가지로 이 대지 위를 정처없이 헤매면서 저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체,
뚜렷한 목적도 없이, 비스킷과 케이크, 그리고 채찍으로 조종되고 있는 것일세
이러한 사실은 아무도 시인하려 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일세.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자네가 뭐라고 말할 건지 나는 알고 있네. 그러니 나도 기꺼이 승복
하겠네. 그런 인간, 곧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별생각도 없이 하루해를 보내며 인형을 안고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과자를 넣어 둔 서랍께로 살금살금 조심스레 다
가가서, 마침내 소망하던 물건을 가지면, 그것을 한입 가득 먹고 나서 "더줘!" 하고 조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일세. 또 자신의 무가치한 사업이나 자신의 욕
정에까지 그럴듯한 명칭을 붙이고서, 그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대사업이랍시고 버젓이 내
세우는 그런 녀석들도 행복한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녀석들은 행복하단 말일세. 그러나 겸허한 마음으로, 이런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네. 그런 사람들은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
는 시민들이 자기네의 조그만 정원을 낙원처럼 가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일이며, 불행
을 안고 있는 자들도 그 무거운 짐에 허덕이면서도 쉬지 않고 제길 을 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단 1 분이라도 더 오래 햇빛을 쬐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간
파하고 있는 걸세
그렇지, 그런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역시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부터 이룩하
며, 또한 행복한 것일세.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일게 인간이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런 사람들
은 아무리 답답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자유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거라네. 그러하여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지.
5월 26일
자네는 옛날부터의 내 성벽을 알고 있겠지.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하여 그 곳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조촐하게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그것 말일세. 그런데 여기서 나는 내 마음에 꼭
드는 그런 곳을 발견했다네.
이 도시에서 1시간쯤 걸리는 곳에 발하임이라는 마을이 있네. 언덕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그 위치가 아주 재미있네. 그 마을에서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별안간 골짜기
전체가 내려다보인다네. 마을 여인숙에서는 나 이에 비해 아주 유쾌하고 활발한 안주인이
포도주, 맥주, 코피 따위를 팔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두 그루의 보리수일세. 사방으로 넓게 퍼진 나뭇가지들이 교
회 앞의 조그만 광장을 덮고 있는데, 그 광장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는 농가와 곳간, 그리고
저택들이 들어서 있네.
이렇게 정답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장은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라네. 나는 여
인숙에서 조그마한 탁자와 의자를 그 광장으로 들고 나와, 거기서 코피를 마시며 호메로스
를 읽는다네. 맑게 갠 어느 날 오후, 내가 처음으로 아주 우연히 그 보리수 그늘 아래에 왔
을 때, 광장은 정말 고요했었네.
모두들 일을 하러 들에 나간 것일세. 오직 4살쯤 된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땅바닥에 앉아서
또 한 아이 태어난지 반 년 가량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제 무릎 사이에 앉히고, 두 팔로 아
기를 안아 제 가슴에 기대어 놓고 있는데, 말하자면 큰 아이의 팔이 일종의 의자 구실을 하
고 있는 셈이었네. 그 사내아이는 검은 눈으로 쉴새없이 사방을 둘러보면서도 아주 조용히
앉아 있었네. 그 광경이 내 마음에 들었다네.
나는 그 맞은편에 놓여 있는 쟁기에 걸터앉아 매우 즐거운 기분으로 이 의좋은 형제 상을
스케치했네. 바로 그 곁의 생울타리, 곳간 문, 그리고 부서진 짐수레의 바퀴 두세 개 등을
있는 그대로 그 속에 넣어 그렸네. 그리하여 1시간 뒤에는 내 주관적인 잔재주가 조금도 가
미되지 않은, 잘 정돈된 재미있는 그림이 완성되었네.
이를 계기로 앞으론 자연만을 근거로 그림 그릴 생각을 더욱 굳혔네. 자연만이 무한히 풍요
로우며, 자연만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걸세. 그것은 세상의 규칙과 범절에 따라 판에 박
힌 행동을 하는 사람이 이웃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몹쓸 악당이 되거나 하는 일이
란 결코 없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러나 그 반면에, 모든 규칙은 아무래도 자연의 진정한 감정과 그 참된 표현을 파괴해 버
리고 마는 것일세. "그건 지나친 말이다! 규칙은 제한을 할뿐이다. 불필요한 덩굴을 잘라 낼
뿐이야" 이렇게 자네는 말하겠지
좋아, 그렇다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네. 그것은 마치 연애와 같은 걸세. 어떤 청년이 한 처
녀에게 홀딱 반해서 매일같이 그녀의 곁에 붙어살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그 처녀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쉴새 없이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과 재산을 다 기울이고
있다고 치세. 거기에 한 사람의 속물, 이를테면 어떤 관직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그 청년
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걸세.
"젊은이! 연애는 인간적일 뿐이오. 따라서 당신도 인간적으로 연애를 해야만 하오.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서, 일부는 사업에 돌리고, 그 나머지 시간은 애인에게 바치도록 해요. 당신의
재산을 잘 관리할 것, 그리하여 필요경비를 따로 제쳐두고 그 나머지 몫으로 애인에게 선물
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왈가왈부 하진 않아요. 다만 그것도 너무 잦으면 안 돼요. 애인
의 생일이나 명명일 같은 때에만 하도록 해요"
그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모 있는 청년이 되겠지. 나 역시 그를 관리로 채용하도록 어느
군주에게나 추천할 걸세. 그러나 그는 애인으로서는 그것으로 끝장일세. 그리고 그가 만일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거야. 아아, 나는 자네들에게 묻고 싶네! 천
재의 분류가 둑을 무너뜨리고 소용돌이치며 밀어닥쳐 와서, 자네들의 영혼을 뒤흔들며 경탄
케 하는 일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드문가?
그것은 그 분류의 양쪽 둑가에 점잖은 신사들이 살고 있기 때문일세. 그 신사들이 자기네
정원이나 튤립 화단, 혹은 채소밭이 망가질까 봐 재빨리 제방을 쌓기도 하고, 배수 공사를
하기도 함으로써 닥쳐올 위험을 미리 막기 때문이란 말일세.
5월 27일
이제 보니 나는 비유와 연설을 늘어놓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 아이들이 그 위에 어떻게 왔는
지 자네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잊은 것 같구먼. 어제 편지에서 자네에게 단편적으로 이야기
했다시피, 나는 그림의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그 쟁기에 걸터앉은 채 2시간이나 그대로 있었
다네. 저녁때가 다 되었을 때 가정주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 아이들에게로 급히 다가왔
네. 아이들은 그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히 있었던 걸세.
그 여자는 한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보고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더
군.
"필립! 너 정말 착하구나!"
그녀는 나에게 눈인사를 했네. 나도 눈인사를 하며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들
의 어머니냐고 물었지.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큰아이한테 흰빵 반쪽을 준 다음, 갓난
아기를 안아 올리더니 어머니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키스를 하더군
그녀는 말했네.
"이 필립에게 아기를 맡겨 놓고서 제일 큰애를 데리고 시내에 갔었지요. 흰빵이며 설탕, 죽
을 쓸 질냄비를 사려고요"
보니 뚜껑이 떨어져서 열린 그 바구니 속에 그 물건들이 다 들어 있었네
"한스(이것이 갓난아기의 이름이었네)에게 오늘 저녁에 수프를 끓여 주려고요. 개구쟁이 녀
석 큰아이가 어제 질냄비를 깨뜨려 버렸거든요. 남은 죽을 서로 먹으려고 필립과 싸우다가
말씀이에요"
그 큰아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물었네. 풀밭에서 두세 마리의 거위를 뒤쫓고 있노라고
그녀는 대답했는데,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큰아들이 뛰어오더니 바로 아랫동생에
게 개암나무 회초리를 선물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그녀는 그 마
을의 학교 교사의 딸이며, 그녀의 남편은 사촌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스위스에 여행중이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모두들 남편을 속이려 한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였네.
"남편이 편지를 몇 번이나 내었는데도 답장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로 떠난 거지요.
언짢은 일이나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남편한테서 도무지 소식이 없어서요......"
나는 그녀와 그대로 헤어지기가 어쩐지 서운해서, 두 아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주고 갓난
아이를 위해서도 1크로이째르를 그 어머니에게 주면서, 시내에 나가거든 수프에 곁들일 흰
빵을 사다주라고 말했네. 그런 연후에 우리는 헤어졌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벗이여, 고백하거니와 도저히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을 때는, 그런
여인은 안달복달하는 법 없이 행복스럽게 정착하여, 애환의 좁은 테두리를 돌며 그날 그날
을 살아 나가는 거라네.
나뭇잎이 지는 것을 보고서도 이제 겨울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뿐, 다른 생각이라
고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지.
그 때 이후로 나는 곧잘 그 곳에 간다네. 아이들은 이제 나하고 아주 낯이 익어서, 내가 코
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는 설탕을 얻어먹고, 저녁에는 버터 빵과 우유를 노나 마시곤 한다네.
일요일에는 그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꼭꼭 주기로 하고 있네. 예배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거기 가지 못했을 때에는 주막집 여주인에게 나 대신 그들에게 돈을 주라고 해 두었네.
아이들은 스스럼이 없어져서 나에게 온갖 이야기를 다 해 준다네. 특히 마을아이들이 많이
모였을 때면 그들의 드센 감정과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나를 즐겁게 해 준
다네.
이 훌륭한 신사에게 아이들이 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해서 애들의 어머니가 무척 신경을 쓰
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느라고 나는 꽤 애를 먹었다네.
5월 30일
지난번에 내가 그림에 대해서 썼던 것은, 시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일세. 멋진 대목을 찾아
내어 그것을 대담하게 표현하면 되는 걸세. 그렇게 하면 물론 적은 말로써 많은 것을 나타
낼 수가 있지. 내가 오늘 목격한 광경을 그대로 묘사한다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가가 될 걸세.
그러나 문학이니 정경이니 목가니 하는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나. 우리는 자연현상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면 됐지,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주물럭거릴 필요는 없네.
이런 서론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그야말로 대단한 일을 기대한다면, 자네의 그 기대는 완전
히 어긋날 걸세. 그토록 세차게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어느 농가의 한 젊은 머슴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내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 자네는 으레 내가 과장
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그 무대는 역시 발하임인데, 이런 희한한 이야기가
생길 만한 곳은 역시 발하임밖에는 없다네. 그 보리수 아래에서 코피 파티가 있었네.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별로 탐탁지 않았으므로, 핑계를 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었네.
농사꾼 차림의 한 젊은 청년이 그 근처의 농가에서 나오더니, 지난번에 내가 걸터앉아서 스
케치를 했던 그 쟁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네. 그 인상이 마음에 들기에 나는 그에게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보았네.
우리는 곧 가까와졌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늘 그렇지만, 곧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떤 과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네. 그 여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면서 칭찬을 늘어놓는 것
을 보고, 나는 곧 이 청년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여주인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아챘지.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여주인은 이제 젊지도 않고, 첫 결혼에서 하도 시달림을 당했기 때문에 재
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네.
그의 말투로 미루어, 그 여주인이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다시없이 아름답고 매력있는 존재
이며, 또 첫결혼에서 겪은 그 쓰라린 상념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도 그녀가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네. 이 청년의 순수한 모정, 그 사랑과 진
정을 그대로 되풀이해야만 하겠지. 여간 위대한 시인이 아니고서는 그의 몸짓이며 표정, 목
소리에 담긴 정감, 눈길 속에 깃들여 있는 정열 등을 동시에 자네에게 전달하기는 불가능할
걸세. 아니,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그의 태도와 표정 속에 어리어 있는 그것을 재현한다
면 서투른 실패작이 될 뿐이지.
특히 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내가 자기와 여주인과의 관계를 좋지 않게 받아들이고, 여주
인의 정숙한 처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하고, 그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점이었어. 여주
인의 얼굴 생김새며, 젊음의 매력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꼼짝없이 자기를 사로잡는 그녀의
몸매에 대하여 얘기하는 그 청년의 태도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나는 다만 마
음속으로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일세.
나는 출생 이후 오늘날까지, 안타까운 욕정과 뜨거운 소망이 이토록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것을 일찍이 본적이 없네. 아니,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네. 이러한 순수성과 진실
을 생각하면 내 영혼은 그 심중으로부터 불타오른다네. 그 진실과 애정의 생생한 모습은 어
디를 가나 나를 따라오네. 마치 그 불꽃이 나에게 옮겨 불기라도 한 것처럼 숨가쁘고 애가
탄다네. 이런 소리한다고 나를 나무라지는 말게.
나는 될수록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만나 보고 싶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나는
건 피하는 게 났겠네. 애인의 눈을 통하여 그녀를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직접 보면, 지금
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그녀와는 딴판일 우려가 있으니까. 그 아름다운 영상을 무엇 때
문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6월 16일
왜 편지를 하지 않았느냐고? 그런 소릴 묻다니, 그러고도 자네는 학자 축에 끼는가? 그래,
짐작이 가지도 않는단 말인가? 나야 으레 건제하고, 아니, 건제 이상일세. 게다가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운 친지가 생겼는데, 그것으로 내 마음이 가득하다네.
나는, 글쎄,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가 없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한 여인과 어떻게 하여
알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해. 나는 행복하
며 만족하고 있네. 그래서 훌륭한 사실 기록자가 될 수 없는 걸세.
천사라네! 제기랄, 이건 누구나 자기 애인을 가리켜 하는 소리 아닌가. 그걸 알고 있
으면서도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것을 자네에게 설명할 수가 없네. 요컨대 그녀
는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네.
더없이 총명하면서도 순진하며, 더없이 착실하면서도 다정하고, 더없이 발랄하고 활동적이면
서도 차분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여인일세.
그녀에 대하여는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모두가 하찮은 잔소리, 어줍지 않은
추상적 표현이 될 뿐, 그녀의 모습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걸세. 이 다음에 아니지, 이
다음으로 미룰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이야기하지.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일세.
왜냐하면, 그건 우리 사이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뒤로 나는 벌써 세 번
이나 펜을 놓고 뛰쳐나가려 했다네. 나는 오늘 아침에, 오늘은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고 스스
로 맹세를 했던 터일세. 그런데도 자꾸만 창가로 가서는, 해가 어디쯤 떠 있나 살펴보곤 하
는 걸세.
나는 나 자신을 이겨 내지 못했네. 그녀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네. 거기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일세. 빌헬름이여, 나는 밤참으로 빵을 먹고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걸세.
그녀가 귀엽고 발랄 한 어린이들, 곧 8명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보면, 내 영혼
은 크나큰 환희에 젖는다네!
이런 식으로 써내려 가면, 아무리 읽어 봤자 자네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겠군. 좋
아,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내 마음을 가라앉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함세.
지난번에 자네에게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나는 법무관인 S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나에
게 자기 은둔처 라기보다 자기의 작은 왕국으로 한번 놀러 오라고 했었지. 그런데 나는 그
분 집에 놀러 가는 걸 미루어 오고 있었다네. 만일 우연이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 한적한
고장에 숨겨져 있던 그 보물을 발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았을
것일세.
내가 알게 된 젊은이들이 시골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였는데, 나도 기꺼이 거기에 참석했었지.
나는, 마음씨가 곱고 예쁘장하기만 할 뿐 달리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 디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녀에게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네. 서로 협의를 한 결과, 내가 마차를 세내어 파트
너인 그 아가씨와 그녀의 사촌 동생을 태우고 무도회장으로 가되, 그 도중에 샤를로테 S네
집에 들러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합의가 되었지.
"아름다운 아가씨를 알게 되실 거예요"
수풀 속에 널찍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그 사냥 별장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속에서 내 파
트너인 그 소녀가 말했네
"반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하고 그녀의 사촌동생이 덧붙이는 걸세
"왜요?"
하고 나는 물었지.
"그 아가씨는 벌써 약혼한 분이 있으니까요"
하고 내 파트너인 소녀가 대답하더군.
"약혼자는 아주 훌륭한 분인데, 지금 여행중이랍니다. 그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정리할 일도 있고, 또 좋은 일자리를 물색하기 위해서이기도 하
지요"
그런 소리를 들어도 나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15분전에 우
리는 그 집 문 앞에 닿았어. 몹시무더웠다네. 여자들은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지나 않을까 하
고 걱정들을 했네. 지평선 일대에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깔려 있어서 한 소나기 몰고 올 것
만 같았네.
나는 어설픈 기상학의 지식을 둘러대며 여자들의 걱정을 달래긴 했으나, 나 자신도
속으로는 무도회가 소나기로 중단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문간에 나오더니, 로테 아가씨가 곧 나오실 테니 잠깐만 기다
려 달라고 말하더군. 나는 안뜰을 지나서 우람한 안채를 향해 걸어갔지. 입구의 계단을 올라
가서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겨운 광경이 눈에 띄었네. 현관방에 2살
에서 11살 사이의 아이들 여섯이 한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네. 몸매가 아름다운 중키의 그
소녀는 청초한 흰옷을 입었는데, 팔과 가슴에 연분홍 장식 끈이 달려 있었네. 소녀는 흑빵을
손에 들고 자기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각각 그 연령과 식욕에 따라 한 조각씩 잘라 주었는
데, 어느 아이에게나 그야말로 다정스레 그것을 건네주는 것이었네.
아이들은 빵을 채 자르기 전부터 저마다 그 작은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빵조각을 받으면 아주 천진스럽게 "고마와요!"하고 소리를 지르는 걸세. 그러고서 아이들은
각자가 받은 몫에 만족하며, 자기들의 언니인 로테가 타고 갈 마차와 손님들을 보려고, 어떤
아이는 뛰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얌전한 성품인지 천천히 걸어서 대문께로 나왔
다네.
"미안합니다"하고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네.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이렇게 오시도록 하고, 또 아가씨들을 기다리게 해서...... 옷을 갈아입
고, 또 제가 잘라 주어야만 한다고 막무가내랍니다"
나는 그저 상투적인 인사를 했지.내마음은 온통 그녀의 자태와 목소리, 그리고 그 동작에 집
중되어 있었네. 그녀가 장갑과 부채를 가지러 거실로 뛰어갔을 때, 나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 최초의 놀라움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네.
나는 막내둥이에게로 다가갔다네. 그 애는 매우 귀염성스러운 얼굴의 사내아이였는데, 슬금
슬금 뒷걸음질을 치더군. 그 때 로테가 되돌아와서 "루이야, 사촌형님하고 악수해야지"하고
말했네. 그 아이는 시키는 대로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네. 콧물을 흘려 코밑이 약간 지저분
했지만 나는 그 애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키스를 했네.
"사촌형님이라뇨?"하고 로테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지. "나를 아가씨의 친척이 되는 영광
을 누릴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시는 건가요?"
"아, 그건"하고 로테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네."저희들에겐 사촌이 아주 많답니다. 설
마 그들 가운데서 선생님이 가장 나쁜 분은 아니겠지요......
"출발하면서 로테는 자기 바로 아랫동생인 소피에게 아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이른 다음, 승
마산책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인사 못 드리고 떠났다고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하
였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소피 언니를 자기처럼 생각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타
일렀네.
두세 아이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으나 6살쯤 된 숙성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그렇지만 소피 언니는 로테 언니가 아니잖아. 우린 로테 언니가 더 좋단 말이야"
사내아이 둘은 어느 틈에 마차 뒤에 올라타고 있었네. 내가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해서, 로테
는 숲 입구까지 아이들이 그대로 마차를 타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네. 그 재신 아이들은 장
난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지.
우리는 제각기 자리에 앉았어. 여자들은 인사를 나눈 다음, 서로의 옷맵시, 특히 모자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그 날 저녁 무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를 나누었네. 그 이야기 도중에 로테는 마차를 세우게 하고 동생들을 내리게 했네. 아이들은
로테의 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싶어하더군. 큰 아이는 15세 소년다운 정감이 어린 키
스를 했으나, 작은아이는 후딱 해치워 버리더군. 로테는 동생들에게 얌전히 잘 있으라는 말
을 다시 한번 하였고, 우리가 탄 마차는 달려가기 시작했지.
내 파트너의 사촌동생이, 일전에 보내 준책을 다 읽었느냐고 로테에게 물었네.
"아뇨"하고 로테는 대답했네.
"그 책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돌려 드리겠어요. 그전의 책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
어요"
"어떤 책인데요?"하고 내가 묻자 어떤 책이름을 댔는데,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착실한 성품을 감지할 수 있었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 새로운 정신이 그 얼굴에서 번뜩이는 걸세.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자기 말을
내가 이해해 준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점점 더 부드러워져 가는 것 같았다네.
"좀더 어렸을 때는"하고 로테는 말했네.
"저는 소설을 제일 좋아했었어요. 어떻게나 재미있는지, 일요일이면 방 한구석에 앉아서 미
스 제니라든가 그런 주인공의 행운과 불운에 정신없이 빠져들곤 했었지요. 지금도 그런 책
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좀처럼 책을 읽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왕에 읽을 바엔 제 취향에 맞는 책을 읽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란 그
작품 속에서 저 자신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저와 같은 처지의 생활묘사로 친근감이 가
고 흥미 있는 이야기를 쓰는 그런 작가예요. 저희 가정생활이 물론 천국과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의 원천이지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마음속의 감동을 감추느라고 무척 애를 섰다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감추고 있을 수는 없었네. 그녀가 골드스미드의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소설에 언급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아주 정확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러
다가 얼마 후에 로테가 다른 사람에게로 말머리를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네. 다
른 두 여자들이, 그 사이에 줄곧 자기네들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 기가 막히다 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는 사실을 ......
그 사촌동생이란 여자는 몇 번이나 콧등에 잔주름을 지으며 비웃듯이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그런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네.
화제는 댄스의 즐거움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네
"이런 열정이 결점이라고 하더라도"하고 로테는 말했네.
"서슴없이 고백하겠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댄스를 좋아합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을 때
라도,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엉터리로나마 무곡을 치고 있으면 그런 대로 기분이 풀리곤 해요
"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그야말로 홀린 듯이 그녀의 그 검은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네. 그 생동하는 입술, 그 발갛게 상기된 볼이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았네. 그녀
의 멋들어진 말에 넋을 빼앗겨 나는 몇 번이나 그녀의 말을 잘못 듣곤 했다네.
나를 잘 알고 있는 자네니까 능히 짐작할 만하겠지. 아무튼 무도회장 앞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저물어 가는 세계 속으로 꿈결처럼 빨려 들어갔고,
불이 밝혀진 홀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소리도 내 귀에는 거의 들르지 않을 지경이었네.
두 신사, 아우드란 씨와 다른 한 사람 모씨는, 이름 따위를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
겠는가? 우리 마차가 있는 곳까지 와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는데, 그들은 내 파트너의 사
촌동생과 로테의 댄스 파트너로서 각자 자기의 상대 여성을 무도회장으로 인도해 갔네.
나도 내 파트너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지.
우리는 이리저리 뒤얽히며 메누엣을 추었네. 나는 잇달아 다른 여자에게 같이 추기를 청했
었는데,반갑쟎은 상대일수록 한번 어울리면 좀처럼 떨어져 나가려 하지 않더군. 로테와 그
파트너는 영국식 댄스를 추기 시작했네. 이윽고 차례를 따라 그들이 우리 조와 한데 어울려
선회를 시작하였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자네도 짐작할 만하겠지.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녀는 몸과 마음을 온통 춤에만 집중시켜 그 속에 몰두해 버리는 걸세. 몸전체가 하나의
화음일세. 아무런 근심도 거리낌도 없으며, 오직 춤만이 전부요, 춤 이외의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 같다네......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네.
나는 로테에게 두 번째 대무곡의 상대가 되어 주기를 청했네. 그녀는 세 번째 대무곡에
서 상대가 되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고는, 그지없이 사랑스럽고 솔직한 태도로, 자기가 정
말 좋아하는 것은 독일식 댄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네.
"여기서는"하고 로테는 말을 계속했다네. "한 조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은 독일식 댄스를 출
때에도 그대로 짝을 짖는 것이 관례예요. 그런데 제 파트너는 왈츠를 잘 못 추니까, 그
걸 안 춰도 되면 좋아할 거예요. 선생님의 파트너도 왈츠는 출 줄을 모르고 또 좋아하지도
않아요. 영국식 댄스를 출 때 보니 선생님은 왈츠를 잘 추시더군요. 그러니까 독일식 댄스의
상대로 저를 희망하신다면, 선생님께서 제 파트너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의 파트너에게 이야기할께요"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의 악수를 했네. 그리하여
우리가 짝을 지어 춤추는 동안, 로테의 파트너인 그 신사는 내 파트너의 상대가 되어 주기
로 이야기가 되었지.
드디어 춤이 시작되었네. 우리는 얼마 동안 팔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춤을 즐겼지. 그녀의
춤추는 모습은 경쾌하고 매력적이었네. 이윽고 왈츠가 시작되어 천계의 별들처럼 서로의 주
위를 선회하기 시작하자 그걸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므로 처음에는 다소 어
수선했네. 우리는 혼란이 진정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지. 그리하여 서투른 사람들이 물러가
고 홀에 거치적거리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가볍게 춤추기 시작했네, 우리 조와 아우
드란 조만이 오래도록 춤을 추었지. 일찍이 그토록 경쾌하게 춤추어 본 적은 없었네. 마치
꿈속을 해 메는 것 같았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품에 안고 번개처럼 춤추며 돌아가
다 보니,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걸세.
그리고, 빌헬름이여, 정직하게 고백하지. 나는 맹세를 했다네. 내가 사랑하고 갈구하는 이 소
녀로 하여금 결코 나 이외의 사람과는 왈츠를 못 추게 하겠노라고 말일세. 설령 그 때문에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그 기분, 알아주겠지?
우리는 잠시 쉬기 위하여 천천히 걸어서 홀을 두세 차례 돌았네. 그런 다음에 로테는 자리
에 앉았네. 내 몫으로 갖다 놓았던 몇 개의 오렌지가 그 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일이었는데,
그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네. 그런데 그 오렌지를 로테가 한 자리에 앉은 염치없는 여자들
에게 노나 줄 때는 가슴이 쓰리더구먼.
세 번째의 영국식 댄스에서 우리는 두 번째 조가 되었네. 사람들의 대열 속을 누비며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춤추고 있는 로테
나는 황홀감에 젖은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 팔을 끼고 춤을 추었네. 그러다가 어떤 부
인 옆을 지나게 되었네. 그 부인은 이미 젊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애교있는 얼굴이었으므로
그전에도 눈여겨본 적이 있는 여자였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로테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위협하듯이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는 우리가 스쳐 지날 때 의미심장하게 알베르트라는 이름
을 두 번씩이나 입밖에 내는 것이었네.
"알베르트가 누군가요?" 하고 나는 로테에게 물었지.
"묻는 것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로테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커다란
8자를 그리기 위해 서로 떨어져야만 했네. 그랬다가 그 도중에 서로 스쳐 지나게 되었을 때
보니, 그녀의 얼굴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더군
"뭘 숨기겠어요" 프롬나드로 이행하기 위해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네. "알베르트
는 착실한 분으로, 저하고는 약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에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은 아니
었지(오는 도중에 그 아가씨들한테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처음 듣는 소리 같았네. 잠
깐 사이에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존재가 된 이 여인과 그 이야기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았
었기 때문이지. 나는 머리가 혼란해지고 멍청해져서, 엉뚱한 조의 두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
어가 버렸네. 그 바람에 전체적인 진행이 뒤범벅이 되었지. 그런데 로테가 침착하게 나를 이
끌어 주었으므로, 곧 원상으로 회복이 되었네.
댄스가 아직 끝나기 전에 번개 치는 도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네. 벌써 아까부터 지평선 저
쪽에서 번쩍번쩍했는데, 나는 그 것을 기온이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 그런데
이젠 천둥소리가 음악을 압도해 버릴 지경이 되었네. 이윽고 여자 셋이 대열에서 빠져나가
자, 그 파트너인 남자들이 그 뒤를 쫓아갔네. 홀 전체가 뒤숭숭해지고, 음악소리가 그쳤네.
한창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불행이나 공포가 엄습해 오면, 보통 때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앞뒤의 감정적인 대조가 뚜렸
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요, 또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활짝 열려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일세.
몇몇 여자들이 갑자기 얼굴을 기묘하게 찌푸린 것도 그러한 원인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 분별이 있는 한 여자는 홀 한구석에 가서 창문을 등진 채 귀를 막고 있었네.
또 어떤 여자는 그 앞에 꿇어앉아서 상대방 여자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네.
또 한 여자는 그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더니, 눈물을 흘리며 친구를 껴안았네. 이성을 잃고
어쩔 줄 몰라하며, 엉큼한 젊은 남자들의 무례한 행동을 막아 내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었지.
그 뻔뻔스러운 젊은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올려지는 불안에 잠기 여인들의 기도를, 그 아름
다운 입술에서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가로채기에 바쁜 것 같았네.
몇몇 신사들은 천천히 담배나 피우려고 아래로 내려갔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집 여주인이
임기웅변의 제안으로, 덧문이 있고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을 제공하겠노라고 해서 그리로 가
게 되었지. 우리가 그 방에 들어서자 로테는 바지런히 오락가락하며 의자들을 둥그렇게 놓
더니,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뭔가 게임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네.
"키스타는 달콤한 벌을 받게 될 수도 있겠는걸"하고 벌써부터 입술을 쑥 내밀며 시명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
"숫자 세기 놀이를 해요"하고 로테가 말했네.
"자, 잘 들으세요. 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숫자를 세는 거예요. 각자 자기 차례
의 숫자를 부르고 그 다음 차례로 넘기는 거지요. 그걸 도화선의 심지가 타 들어가듯이 빨
리빨리 불러야만 애요. 막히거나 틀린 숫자를 부르는 분은 뺨을 맞게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어요. 천까지예요" 정말 그건 가관이었다네.
그녀는 한쪽 팔을 내뻗고서 돌아가기 시작했네. <하나>하고 첫 번째 사람이 부르고 그 다
음 사람이 부르고 그 다음 사람이 <둘>, 또 그 다음 사람이 <셋>,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가는 거야. 로테는 차츰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네
그러자 누군가가 틀렸네. 찰싹, 로테가 뺨을 때렸네. 와아 하고 웃는 사이에 그 다음 사람도
찰싹! 그러고는 더욱더 빨리 돌아가는 거야. 나도 두 번 뺨을 얻어맞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세게 때리는 것 같아서 무척 흡족스러웠네. 온통 웃고 떠들어 대는 바람
에 천까지 가기 전에 게임은 끝나 버렸지.
가까운 사람끼리 저마다 짝을 지어 자리를 뜨기 시작했네. 소나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거든.
나는 로테를 따라 다시 홀로 나갔지. 그 도중에 그녀는 말했네. "뺨 때리는 데 정신이 팔려
모두들 소나기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 같더군요"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네
"저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네.
"누구보다 겁이 많은 편인데도, 용기가 있는 체하고 다른 분들의 기분을 북돋우어 주려 하
고 있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힘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는 창가로 다가갔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리고 아름다운 비가 조용히 땅을 적시고 있었네. 더할 수 없이 상쾌하고 향기로운
장미냄새가 따뜻한 공기 속에 충만하여 우리 있는 데까지 풍겨 왔네. 로테는 창틀에 팔꿈치
를 괴고 서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네.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이윽고 나를 보았는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네. 그녀는 자
기 손을 내 손위에 얹으며"클롭시록!" 하고 말했네 나는 곧 로테가 생각하고 있는 클롭시록
의 그 장려한 찬가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그녀가 암호와도 같은 그 말로써 나에게 전달하려
한 감정의 흐름 속에 잠겨들었네. 나는 벅찬 감명을 억누를 길이 없어, 몸을 구부려 환희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지 거룩한 시인 클롭시록이여! 이 눈앞으로 다시는
그대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노라!
6월 19일
지난번 편지는 어디서 끝냈는지 생각이 나지를 않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내가 집에 돌아와
서 누운 것이 새벽 2시였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도 아침
이 될 때까지 자네를 붙잡고 지껄였으리라는 것뿐일세.
무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런 이야
기를 하기에 알맞은 날은 아닌 것같네.
그야말로 근사한 해돋이였어. 사방은 온통 이슬에 젖은 수풀과 싱그럽게 되살아난 들판이야.
마차 안에서, 동행한 여자 둘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네. 로테는 나를 보고, 선생님도 좀
주무세요, 하고 권했네. 자기 때문에 체면 차릴 필요는 없다는 거야
"아가씨가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을 응시하였지.
"그 동안엔 나도 졸립지 않아요"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로테네 집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깨어 있었네. 하녀가 문을 열어 주었는데, 로테의 물음에 대하여, 아버님도 애들도 여느 때
와 같이 아직도 자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네. 헤어질 때 나는 그 날 중으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지.
로테는 승낙했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찾아갔지 그 때 이후로, 해와 달과 별들은 물론 변함
없이 그 궤도를 돌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제 낮도 없고 밤도 없어졌다네. 세계가 온통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걸세.
6월 21일
나는 하느님이 성자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 같은 그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네. 설령
앞으로 내 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인생의 기쁨, 가장 순수한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고
는 말할 수 없을 걸세. 나의 발하임을 자네 알고 있지? 나는 그 곳에 아주 정착하였네.
거기서 불과 반시간이면 로테네 집에 갈 수가 있다네. 그 집에 가면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걸세.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발하임을 산책의 목적지로 선정했을 때, 나는 그곳이 그토록 천국에 가까운 곳이라고는 꿈
에도 생각지 못했네.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 나의 모든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 사냥별장
을, 때로는 언덕 위에서, 때로는 강 건너편의 평지에 서서 바라보기 그 몇 번이었던가!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인간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욕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네. 인간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헤매어 다니지.
그런가하면 자진하여 속박에 몸을 내맡기고, 습관이란 궤도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내적 충
동도 간직하고 있는 걸세.
신기한 일이지. 이 곳에 와서 언덕 위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매료하는 거야. 저 작은 숲! 아아, 저 숲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
었으면! 저 산봉우리! 아아, 저기서 이 고을 전체를 내려다보았으면! 연이어져 뻗어 있는 언
덕과 정다운 계곡들! 아아, 저 속에 융합될 수 있었으면! 나는 서둘러 그 곳으로 갔다가 되
돌아왔네.
내가 바라던 것은 그 곳에 없었네. 아아, 저 너머 먼 곳은 미래와 비슷해! 크고도 어렴풋한
것이 우리 앞에 조용히 가로놓여 있지. 우리의 감정도 또 우리의 눈도 그 속에 융합되어 가
네. 그리하여 우리는 동경하는 걸세. 아아! 우리의 전존재를 내팽개치고, 단 하나의 위대하
고 숭고한 감격의 환희에 충만하고 싶구나, 하고 말일세.
그러나 아아! 서둘러 그 것에 가 닿아 <저 너머 먼 곳>이 <여기>가 되고 보면,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인 걸세.
우리는 여전히 비관과 옹색 속에 서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어느 틈에 빠져 달아
나 버린 청량제를 추구하여 헐떡이는 거지. 그래서 아무리 마음을 잡지 못하는 방랑자라도
최후에는 자기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걸세. 자기의 작은 집, 자기 아내의 품, 자식들의
재롱, 처자를 부양하는 일, 그런 것들 속에서, 넓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거라네.
나는 아침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발하임으로 나가네. 주막집 채소밭에서 완두콩을 따 가지고,
걸상에 앉아 그 깍지를 까며 호메로스를 읽지. 좁은 부엌에 가서 냄비를 하나 찾아내어 버
터를 떠 넣은 다음, 냄비를 불 위에 얹고 완두콩을 볶는다네. 냄비뚜껑을 덮고 그 옆에 앉아
서, 때때로 냄비를 흔들어 완두콩을 뒤섞기도 하지.
그러고 있을 때 나는, 오딧세우스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뭇사나이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서 각을 떠 그것을 불에 굽는 광경을 눈앞에 떠올린다네. 나로 하여금 이렇게
평온하고 진실한 감정으로 충만케 해 주는 것은 부족사회 시대의 생활상, 바로 그것이라네.
다행이도 나는 그것을 아무런 꾸밈없이 내 생활 속에 얽어 넣을 수가 있는 걸세.
행복한 기분일세. 내 마음은 순진하고 단순한 인간의 기쁨을 감지할 수가 있네. 그 사람들은
손수 가꾼 양배추를 식탁에 올리고 그것을 맛본다네. 아니, 양배추만이 아니지. 그것을 심었
던 맑게 갠 아침, 거기에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과정을 즐겼던 흐뭇한 저녁, 좋았던
나날의 그 모든 것을, 식탁 앞에 앉은 그 시간에 다시 맛볼 수가 있는 것이지.
6월 29일
그저께, 시내의 의사가 법무관 집에 찾아왔었네. 그 때 나는 로테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놀
고 있었지. 어떤 아이는 내몸에 매달리고, 또 어떤 아이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으며, 나는 또
그들을 간질이면서 한데 어울려 떠들어 대고 있었다네. 그 의사는 줄곧 커프스 주름이나 칼
라 장식을 매만지는 위인인데, 우리가 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
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네. 그의 표정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지. 그러나 나는 그런 것
에는 아랑곳없이, 점잖은 설교 따위 할 테면 하라지, 하고 아이들이 무너뜨린 카드로 만든
집을 다시 지어 주었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의사는 온 시내에 험담을 퍼트리고 다닌 걸세. 법무관네 아이들은
원래 버릇이 없었는데, 베르테르가 들어서 더욱 못쓰게 되어 버렸다는 거지.
빌헬름이여, 이 지상에서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것은 아이들이라네.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
으면, 사소한 일에서도 장차 그들이 지녀야만 할 일체의 덕성과 힘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네. 그들의 거짓 속에 미래의 의연하고 꿋꿋한 성격을 볼 수 있으며, 장난 속에 세상살이
의 위험을 극복해 나가는 유머와 재치를 엿볼 수 있지.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
고 그대로 나타나는 걸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언제나 이류의 스승인 예수의<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
지 아니하면...>이라고 하는 황금 같은 말씀이 생각나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친구여, 우
리와 같은 동등한 존재,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어린아이들을 우리는 마치 예속물처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되는 줄 알
고 있네
그렇다면 우리네 어른들도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단 말인가? 나이가 많고 분별이 있기 때문인
가! 오오, 하느님, 당신의 눈에는 다만 나이 많은 어린이와 나이 적은 어린이가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당신이 더 기뻐하시는지는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벌써 옛날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신의 아들은 믿으면서도, 그 분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제 오늘에 비롯된 일은 아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른의 틀에 넣어서 기르고 있
네
안녕, 빌헬름이여! 더 이상 수다를 떠는 건 그만두기로 함세.
7월 1일
로테가 곁에 있다는 것이 환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나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서
잘 알 수 있네. 내 불행한 마음은 병상에서 쇠약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용태
라네. 로테는 시내의 어떤 신실한 부인 집에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네. 그 부임인,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임종이 멀지 않았는데, 그 최후의 며칠 동안 로테의 간호를 받고 싶어하고
있다는 걸세.
지난주에 나는 로테와 함께 성......라는 마을의 목사를 찾아갔었네. 산 속으로 1시간 정도 들
어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우리는 4시경에 그 곳에 당도했네. 로테는 둘째 여동생을 데
리고 갔었지. 두 그루의 커다란 호두나무 그늘에 덮여 있는 목사 관의 안뜰에 들어섰을 때.
그 선량한 노목사는 문간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네.
로테를 보더니 노인의 얼굴에 생기가 돌더군. 마디투성이인 지팡이를 짚는 것도 잊어버리고,
로테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려 하였네. 로테는 얼른 달려가서 노인을 앉히고 자기도 그 곁
에 앉아 아버지의 안부를 전한 다음, 목사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동이라는 못생기고 더러운
아이를 끌어안는 것이었네.
로테가 그 노인을 대하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한번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네! 그녀는 반쯤
안 들리게 된 노인의 귀에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뙭?튼튼하면서도 갑자기 죽
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며, 카를스바트 온천물이 좋다는 이야기, 그리고 노인이 이번 여름에 그 곳
에 가기로 결심한 것을 칭찬해 드리고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건강이 좋아 보인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였네. 나는 그 동안에 목사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했
지.
노목사는 그새 기운을 많이 되찾았네. 그래서 내가 시원스러운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는 커
다란 호두나무를 칭찬하자 얼마간 더듬더듬하면서도 그 나무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네
"오래된 쪽 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몰라요. 이 목사가 심었다고도 하고, 저 목사가 심었다고
도 하거든요. 그런데 저 안쪽에 있는 나무는 우리 집사람과 동갑으로, 오는 10월로 50살이
됩니다. 집사람의 아버지, 곧 내 장인이 아침에 저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날 저녁에 집사람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장인은 나의 선임목사였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저 나무를 애지중지했
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지금부터 27년 전의 일입니다만, 내가 가난
한 대학생으로서 처음 이 안뜰에 들어섰을 때, 집사람은 저 나무 아래 있는 재목더미에 앉
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따님은 어디 갔느냐고 로테가 물으니까, 시미트 씨와 같이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게로 갔다더군. 그러고 나서 노인은 그 선임목사가 자기를 무척 아껴 주었고, 그의 딸도 자
기를 사랑해 주었으며, 처음에는 부목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이야기가 막 끝났을 무렵, 그 목사의 따님이, 조금 전에 이야기가 나왔던 그 시미트라는 사
람과 같이 채소밭 쪽에서 들어왔네. 그녀는 진심으로 로테를 환영하더군. 솔직히 말해서, 그
녀는 꽤 매력이 있었네.
갈색 머리에 몸매가 좋고 발랄한 아가씨로, 얼마 동안이라면 시골에서 이야기 상대가 될 만
한 여인이었네. 그녀의 애인(시미트 씨가 곧 그런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태도를 취했거든)
은 괜찮게 생겼으나 말이 없는 남자로, 로테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우리의 이야기에 어울리
려 하지 않았네.
내 마음이 서글퍼진 것은 그가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것이 식견의 부족 때문이라기보
다는 오히려 고집과 심술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일세. 그 사실
은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네. 우리가 다같이 산책을 나갔
을 때 프리데리케는 로테와 짝이 되기도 하고 어쩌다가 나와 나란히 걷기도 했는데, 그런
때면 그렇쟎아도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걸세. 그래서 로테는 기회
를 보아 내 소매를 잡아당김으로써, 프리데리테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네.
아무튼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일,
특히 인생의 한 창때로서 모든 기쁨에 대하여 가슴을 활짝 열어 젖힐 수 있는 젊은이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의 얼마 되지 않는 행복한 날들을 망쳐 버리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네. 그들은 훗날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낭비해 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길이 없음을 깨
닫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늦은 거지.
이런 생각으로 울화가 치민 나머지, 나는 저녁 무렵 목사관 안뜰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우유
를 마실 때, 화제가 이 세상의 고락에 미치자 실마리를 잡고 변덕스러운 불쾌감이란 것에
대해 마구 공격을 해대지 않을 수 없었네
"우리 인간들은 곧잘 푸념하기를, 복된 날은 적고 언짢은 날은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날마다 내려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항상 마음
을 활짝 열고 즐기려 한다면, 언짢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거뜬히 견뎌 낼 만한 힘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하고 목사 부인이 응수하였네. "자신의 감정도 자기 뜻대로는 잘 안 되거든요.
신체의 상태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거예요. 몸이 좋지 않을 때에는 뭘 봐도 마음에 들지 않
는 걸요"
나는 일단 그 말을 시인하고 말을 이었네. "그렇다면 그것을 병이라 간주하고, 그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봅시다."
"좋은 말씀이군요"하고 로테가 말했네."그건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에 비추어서 알 수 있어요. 뭔가 속상하는 일이 있어서 불쾌한 기분이 들면, 저는 벌떡
일어나 나가서 정원을 왔다갔다하며 대무곡을 두어 곡조 노래합니다. 그러면 곧 기분이 가
라앉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하고 나는 말했네. "불쾌한 감정은 게으름과 같다
고 할 수 있죠. 아니, 게으름의 일종이지요. 우리는 선천적으로 게으름에 젖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분발하면 일은 척척 진척되게 마련이요, 활동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데리케는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네. 그러나 시미트라는 그 청년은 이론을 제기하고, 인간
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네.
"지금 문제삼고 있는 건 불쾌감으로"하고 나는 말했지. "그건 누구나 회피하고자 하는 감
정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시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겁니다.
병이 나면 누구든지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괴롭
더라도 절제하고, 아무리 쓴 약이라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성실한 노목사가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나
는, 목소리를 높여 노인 쪽을 보고 말했지. "죄악에 대한 설교는 허다하게 들었습니다만, 불
쾌감을 훈계하는 설교는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그런 설교는 도회지 목사나 해야겠지요"
하고 목사는 말했네.
"농부에겐 불쾌감이란 없어요. 하긴 때로 그런 설교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적어
도 목사 부인이라든가 법무관 님께는 약이 되기도 할 테니까"
그 말에 모두들 웃었네. 노목사 자신도 유쾌하게 웃어젖혔는데. 밭은기침을 쿨룩거리는 바람
에 토론은 잠시 중단되었네.
이윽고 그 청년이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네. "당신은 불쾌감을 죄악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좀 지나친 말씀인 것 같이 생각되는군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하고 나는 말했지. "자기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두루 괴로움을 끼치는 일이 죄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다는 그것만으로도 죄악이라 하기에 충분한데, 우리 각자에게 허용된 기쁨까지 서로 빼앗아
야만 할 까닭이 뭡니까? 자기 자신은 불쾌하지만 혼자 견디어 내며 남들에게는 그것을 나타
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불쾌감이란 오히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속의 울분, 자신에 대한
불만, 그리고 그것들과 결부된 어리석은 허영심에 의하여 북돋워진 질투가 아닐까요? 행복
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불쾌해 하
고, 그것을 용납 못할 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로테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네. 프리데리커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었네. 거기에
용기를 얻어 나는 말을 계속했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
게 솟아나는 단순한 기쁨의 한 순간이 그런 폭군의 질투 섞인 불쾌감으로 인하여 망쳐진 것
을 보상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꽉 메는 기분이었네. 지난날의 갖가지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네. "우리가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타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하고 나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네.
"너는 네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다만 그 친구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고 즐
거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 행복을 더욱 북돋우어 주는 일 이외에는......네 친구의 영혼이 타
는 듯한 정열로 인해 시달리며 고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너는 한 방울의 완화
제나마 그 친구에게 줄 수가 있는가? 그리고 또, 한창때의 꽃다운 시절을 너로 인해 허망하
게 보내 버린 한 소녀가 중병이 들어 가슴아플 정도로 수척해진 채 드러누워 있다고 치자.
소녀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임종의 진땀이 창백한 이마에 자꾸만 번져 나오고 있
다. 그리고 너는 저주받은 자같이 그 병상 곁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다 짜내어도 그녀를 위
해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기운을 돋
우는 한 방울의 약, 용기를 되살려 줄 수 있는 한 가닥의 불꽃이라도 주입해 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다 바쳐도 좋겠노라고, 애끓는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내가 일찍이 당면한 적이 있었던 그와 같은 광경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엄습해 왔네. 나는 손수건을 눈에 갖다 대고는 자리에서 앉아 있었네.
"그만 돌아가요"하는 로테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
돌아오는 길에 로테는, 내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 같은데, 좀 자중하라고 간곡히
충고하는 것이었네. "선생님은 그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될지도 몰라요! 자기 몸은 자기가 돌
보지 않으면 안 돼요!"
아아, 나의 천사여!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7월 6일
로테는 여전히 그 위독한 부인을 간호해 주고 있네. 언제나 변함없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정 많은 로테라네. 그녀의 눈길이 닿으면 고통이 덜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
이 솟아오른다네.
어제 저녁에 로테는 마리아네 와 어린 말헨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네. 나는 그것을 알고
도중에서 만나 함께 걸었네. 1시간 반 정도 산책한 다음 동네 쪽으로 돌아와, 그 샘터에 다
다랐네. 그 샘터는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곳이 되었다네.
로테는 나직한 돌담에 걸터앉고,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엇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네. 그러
자 아아, 내 마음이 그토록 외로웠던 그 무렵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걸세 <그리운
샘터여>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시원한 네 곁에서 쉬지
를 못했구나. 급히 지나쳐 버릴 뿐, 너를 걸들 떠보지도 않았던 적조차 더러 있었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헨이 집에다 물을 떠 가지고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었네. 나는 로테를
보았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새삼 절실히 느꼈다네. 그
사이에 말헨은 다 올라왔네. 마리아네가 그 물 컵을 받으려 하자"안 돼!"하고 말헨은 그지없
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네.
".....로테 언니, 언니가 먼저 마셔요!"
나는 말헨의 그 천진한 애정에 감동되어 얼른 그 애를 안아 올리고 키스를 퍼부었네. 나는
내 감동을 그렇게 밖에는 나타낼 수가 없었던 걸세. 그런데 말헨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
네.
"선생님이 잘못하신 거예요"로테가 말했네.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지.
"저리 가자, 말헨"하고 로테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돌계단 아래로 내려갔네. "자, 솟아나는
이 깨끗한 물로 씻어라. 얼른얼른 씻는 거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어"
나는 거기에선 채로 그 어린아이가 물에 적신 작은 손으로 제 뺨을 열심히 닦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적의 샘물에 모든 부정한 것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서, 보기 흉한 수염이
뺨에 나게 되는 일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네.
"이제 그만 됐다!"하고 로테가 말해도 그대로 계속 닦고 있었네. 많이 하는 편이 효과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빌헬름이여, 나는 일찍이 세례의식에도 이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진 않았네. 로테가 다
시 올라왔을 때, 나는 만민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준 예언자라도 대하듯 그녀 앞에 넓죽 엎드
리고 싶었네.
저녁때, 나는 내 마음속의 기쁨을 숨길 수가 없어서 이 사건을 어떤 남자에게 이야기했네.
분별이 있는 인물이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그 결과는 전
혀 뜻밖이었네. 그는, 그건 로테가 잘못한 거라면서, 아이들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불어넣
어서는 안 된다는 걸세. 그것이 온갖 망상과 미신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라나, 그런 데 빠지
지 않도록 우리는 어린이들을 일찍부터 지켜 주어야만 한다는 거야. 나는 그 사람이 바로 1
주일 전에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네. 그래서 나는 그가 말
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대하듯 어린이를 대
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즐거운 망상속에 사로잡아서 몽롱한 기분에 잠기게 할 때에 우
리가 가장 행복해지는 것처럼>이라는 진리를 되새기고 있었네.
7월 8일
어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눈길을 돌려주기를 바라다니! 어
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단 말인가!
우리는 발하임에 갔었네. 여자들은 마차를 타고 우리는 걸어서 갔는데, 나는 걸어가면서 내
내 이런 생각을 했다네. 로테의 검은 눈동자 속에 분명히......나는 바보일세, 용서해 주게나,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 눈을. 간단히 말해서(지금 졸음이 와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형편이거든) 이런 이야기일
세. 여자들은 마차에 올라타고, 젊은 W군과 젤시타트, 아우드란, 그리고 나는 마차 주위에
둘러서 있었네. 마차 안의 여자들과 바깥에 둘러선 남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지. 모두들
수다스럽고 쾌활한 친구들이거든. 나는 로테의 눈길을 잡으려하고 있었지. 아아, 그 눈길은
다른 사내들에게로만 이리저리 보내졌네. 그런데 나에게는! 나에게는! 나는 따돌려진 채 체
념을 하고 서 있었네.
그 눈길은 나에게는 단 한 번도 돌려지지 않았다네! 나는 마음속으로<잘 가요>하는 인사를
천 번도 더 하고 있었는데 말일세!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보지 않는 거야!
이윽고 마차가 떠나갔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
으려니까, 머리 장식이 마차의 문 밖으로 내비치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는 게 아닌가.
아아! 나를 보기 위해서 그랬을까?
친구여!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네. 아마 나를 돌아다본
것이겠지,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일세----잘 있게나! 아아, 어쩌면 나는 이다지도 어
린애 같을까!
7월 10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바보스러운 거동을 자네에
게 보여 주고 싶네! 누군가가 내게 로테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더구나, 마음에
든다! 나는 그런 말이 딱 질색일세. 로테가 마음에 드는 사람 치고 모든 감정이나 생각이
그녀로 인하여 충만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마음에 들다니! 며칠 전에 나에게 오시안(아
일랜드의 전설적 시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사람이 있었지.
7월 11일
M부인의 용태는 매우 위독하다네. 나는 부인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네. 로테와 괴로
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터이니까 말일세. 내가 그 부인 집에서 로테를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오늘 로테는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네
M이라는 노인은 아주 탐욕스러운 수전노로서, 여태껏 그 부인을 몹시 고생시키고 야박하게
굴어 왔다는 걸세. 그러나 부인은 어려운 대로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 왔다는 걸세. 며칠 전,
의사가 그 부인에게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녀는 남편을 병상
에 불러 놓고(로테는 그 자리에 있었다네)다음과 같이 말했다네.
"당신에게 고백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제가 죽은 뒤에 분란이 일거나 불쾌한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여태까지 최대한으로 절약하면서 집안 살
림을 꾸려 왔어요. 그러나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할 일이 있는데, 그건 제가 30년 동안
줄곧 당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에요. 당신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 부엌살림에 소용되는 경
비와 집안살림의 비용 조로 얼마 안 되는 금액을 결정하셨지요. 그 뒤로 우리의 살림 규모
도 늘고 장사가 확장되었는데도, 매주 당신이 주시는 돈은 변함이 없었어요. 좀더 올려 달라
고 제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당신은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살림 규모
가 가장 커졌을 때에도 1주일에 7굴덴의 돈으로 꾸려 나가라고 말씀하셨던것은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저는 당신 말대로 고분고분 그 7굴덴을 받았고, 모자라는 돈은 매주 가게의
매상금 중에서 따로 떼어 충당해 왔지요. 주부가 매상금의 일부를 훔치리라고는 아무도 생
각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조금도 낭비를 하지 않았어요. 이런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편히 저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 뒤를 이어 살림을 꾸려 나갈 사람이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당신은 또 보나마나 그전 마누라는 그 돈으로 거뜬히 꾸려 나갔
노라고 우기실 테니, 그 생각을 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로테와 이야기를 했네. 대충 2배 정
도의 경비가 소요된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7굴덴으로 꾸려 나가고 있다면 그 이면
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텐데, 그것을 그대로 지나쳤다니......그러나
나는 자기 집에<예언자의 무진장한 기름단지>가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있
음을 알고 있네.
7월 13일
이건 나의 망상이 아닐세!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나에 대한 그리고 나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어리어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네. 그녀는, 아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일세!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네! 그걸 알고부터 내가 나 자신에게 있어서 그지없이 소중한 존
재가 되었다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자네에겐 이런 소릴 해도 괜찮을 테지. 자네는 나를 이해하니까. 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뒤부터!
이것은 나의 지나친 자만일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닐까? 로테의 마음 속에 깊
은 인상을 심어 주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워지는 그런 인물은 없네. 그러나 로테가 그녀의
약혼자에 대해 열의와 사랑을 드러내며 이야기할 때, 나는 명예와 지위를 모조리 박탈당하
고 대검까지 빼앗겨 버린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든다네.
7월 16일
어쩌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거나, 우리의 발이 테이블 아래에서 맞닿거나 할
때면, 아아, 뜨거운 피가 내 혈관속에서 소용돌이를 치네. 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그
손가락이나 발을 움츠렸다가는, 감각의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어 또다시 스르르 앞으로 내밀
게 된다네. 모든 감각이 일시에 마비되어 현깃증이 날 지경이라네. 아아! 그런데도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구김살 없는 영혼은 자기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친근감의 표시가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네. 뿐만아니라, 그녀는 이야기를 한창 하는 도중에 자기 손
을 내 손위에 얹기도 하고, 이야기에 열중해서 나에게 몸을 바싹 대기도 하여 그녀의 순결
한 입김이 내 입술에 와 닿는 일조차 있다네. 그럴 때면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넋을
잃고 스러질 것만 같다네.
빌헬름이여, 혹시나 내가 언젠가 감히 이 천국을, 이 신뢰를......!
내마음 알아 주겠지? 내마음은 그토록 타락하지는 않았네! 다만 약할 뿐일세! 정말 약하단
말일세! 그러나 이 약하다는 것이야말로 타락이 아닐까?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는 신성 불가
침의 존재일세. 그녀 앞에 나서면 일체의 욕망이 잠잠해지네. 그녀가 곁에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떤지조차도 알 수 없어지네. 영혼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세
그녀는 한 멜로디를 천사처럼 소박하고 진지하에 피아노로 연주하네. 그것은 로테가 가
장 좋아하는 곡이지. 그녀가 그 최초의 음을 치는 소리가 울리기만 해도 나는 고뇌와 혼란,
그리고 우울로부터 해방된다네.
나는 이제 음악의 마력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기게금 되었
네. 그 소박한 멜로디가 내 마음을 꼼짝없이 사로잡아 버리는 것을 보면 알 만하지 않은가!
로테는 내가 자신의 이마에 총알을 한 방 쏘고 싶어지는 그러한 때에 곧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네. 그러면 내영혼의 미망과 암흑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다시금 생기를 되
찾아 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네.
7월 18일
빌헬름이여,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산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램프 없는 환등이나
다를 바 없는 걸세! 작은 램프를 끼움과 동시에 갖가지 영상이 흰 스크린에 나타나지. 그것
이 한낱 그림자요, 일시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그 앞에
서서 신비로운 광경에 가슴 설렌다면 ,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일세.
오늘 나는 로테네 지벵 가지 못했네. 피치 못할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하인에게 로
테네 집에 갔다오라고 시켰지. 로테의 곁에 가 있다가 온 인간을 내 몸 가까이에 있도록 하
고 싶었던 걸세. 얼마나 마음을 죄며 그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이윽고 그
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 설레도록 반가왔다네.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
만, 그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 주고 싶었네.
형광석은 햇빛을 흡수해서, 밤이 되어도 얼마 동안은 빛을 발하다고 하더군. 그 젊은 하인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존재였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얼굴, 그의 뺨, 그의 웃저고리 단
추, 그리고 그의 외투깃에 닿았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
로 여겨졌네. 그 순간, 누가 천 탈레르를 준다고 해도 나는 그 하인을 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걸세.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할 수 없이 흐뭇했거든.
제발 비웃지는 말게나. 빌헬름이여,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그것이 한갓 환영일까?
7월 19일
<그녀를 만나야지!>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외친다네. 밝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태양을 맞
이하면서 <그녀를 만나야지!>하는 거야. 그리고 진종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다네. 모든 것이 이 소망 속에 잠겨 버리는 걸세.
7월 20일
나더러 공사를 수행하여 xx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자네들의 의견이지만, 나는 그럴 의향
이 없네. 나는 남에게 애속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게다가 모두들 나를 알다시피
그 공사라는 사람은 비위상하는 인물일세.
어머니께서 내가 활동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자네 글을 읽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지 않단 말인가? 완두콩을 세고 있건 잠두콩을 세고 있건 결국은 그
게 그거 아닌가! 세상만사 따지고 보면 다 하잘것없는 것들일세.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열이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허덕지덕 뼈
빠지게 일을 하면서 돈이라든가 명예 따위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보일
세.
7월 24일
그림 그리기를 등한히 하지 말라고 자네는 충심으로 충고하고 있지만, 그 문제는 잊어버리
고 싶네. 바른 대로 말해서, 그 이후로 나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고 있는 실정일세.
지금처럼 내가 행복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네. 돌멩이 하나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내 가슴 속에 지금처럼 충만했던 적은 없다는 걸세.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나의 표현력은 미약해서, 모든 것이 내 영혼 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 윤곽조차도 포착할
수가 없네. 그러나 진흙이나 백랍이라도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 볼 생각이 들 것 같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진흙을 주물럭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완성되는 것이 비록 케이
크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일세.
나는 로테의 초상화를 세 번이나 그리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네. 전에는 꽤 솜씨있게
그릴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한층 더 울화가 치밀어오르더군, 그 뒤 나는 그녀의 실루엣을 그
렸다네.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7월 26일
잘 알았소, 사랑하는 로테여. 만사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디 일을 많이 맡겨 주이오. 될
수록 자주 일을 시켜 주기 바라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게 서 보내는 편지에는
잉크를 말리는 모래를 뿌리지 말아 주이오. 오늘은 편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더니, 입술이 깔
깔합디다.
7월 26일
로테를 너무 자주 찾아가지 말자, 하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네. 그러나 그게 지
켜질 리 없지. 매일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나서는, 나는 또 엄숙히 맹세를 하는 걸
세. 내일은 찾아가지 말아야지, 하고 말일세. 그랬다가 그 내일이 되면, 나는 또다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찾아 내고는 어느새 벌써 그녀 곁에 가 있게 되는 걸세. 가령
전날 밤에 로테가 <내일도 오시겠어요?>하고 말했다면, 그 누가 가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
가? 그녀가 어떤 일을 부탁했을 경우도 있지. 그러면 내가 직접 가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알려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걸세. 또 어떤 때는 날씨가 하도 좋아서
발하임으로 산책을 나간다네. 거기가지 가고 보면 로테네 집가지는 불과 반 시간이면 갈 수
있거든.
거기서부터 벌써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걸세. 우리 할머니는 곧잘 자석산 이야기를 해 주셨
지. 배가 그 산 가까이 다가가면, 별안간 배 안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그 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뱃사람 들은 가엾게도 산산이 흩어진 널빤지를 잡고 버둥거리다 죽는
다는 내용이었지.
7월 30일
알베르트가 돌아왔네. 이제 나는 이 곳을 떠나야만 하겠지. 비록 그가 기품있고 훌륭한 인물
로서, 모든 점에서 내가 그보다 한 수 처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을 소유하고 있는 그를 눈앞에 두고 본다는 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노릇일
세. 소유!
그렇다네, 빌헬름. 어쨌든 그녀의 약혼자가 돌아온 걸세. 그는 훌륭한 청년신사로, 누구나 호
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세. 다행히 나는 그가 돌아올 때 마중하는 자리에는 있지 않
았네.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걸세.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직 한 번도 로테에게 키스를 한 적이 없다
네. 하느님, 사려깊은 그의 행동에 상을 내리소서! 그가 로테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
서 나는 그를 경애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도 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으나, 짐작컨대 그것
은 마음에서 우러났다기보다는 로테가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인 듯하네. 그렇나 점에서는 여
자란 빈틈이 없으니 말일세. 한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두 남자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
록 할 수가 있다면, 덕보는 것은 언제나 여자 쪽이거든. 하긴 언제나 그렇게 잘 되어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알베르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네. 그의 의젓함은 두드러지
게 침착성이 결여된 내 성격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네. 그는 감수성도 풍부하며, 로테의
가치도 잘 알고 있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는 듯하네. 불쾌한 감정이야말로
내가 무엇보다도 증오하는 죄악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알베르트는 나를 사려깊은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일세. 로테에 대한 나의 애모,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나의 열렬한 기쁨, 그러한 것으로 인해 그가 느끼는 승리감은 더욱
커지고 따라서 그는 더 한층 로테에게 사랑을 쏟게 되는 걸세. 그가 때때로 사소한 질투로
로테를 괴롭히는 이리 있지나 않은지,
그런 것은 덮어 두기로 하겠네. 내가 알베르트의 처지라도 질투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깨
끗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것은 어찌되었든, 로테 곁에 있을
수 있는 나의 기쁨은 이제 사라져 버렸네.
내가 어리석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눈이 멀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뭐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실 그 자체가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
은, 알베르트가 돌아오기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일세. 로테
에 대하여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
지. 왜냐하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한
도 안에서의 사랑이었던 것일세.
그런데 마침내는 그 약혼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빼앗아 가 버리자, 이 바보 같은 인간은 눈
이 휘둥그래져 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나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비웃는다네. 그러나 만일
나더러, 단념해라,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그자를 몇 배나
더 비웃어 주겠네. 그런 정신을 가진 인간은 없어져 버려라!
나는 숲속을 걸어 돌아다니다가 로테네 집으로 간다네. 그러면 알베르트가 정원의 정자
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다네. 그것을 보면 나는 그만 더 이상 자중할 수가 없어져서, 마음껏
장난기를 발동시켜 어릿광대 같은 짓을 하곤 하는 걸세.
"제발"하고 오늘 로테는 나에게 말했네. "어저께와 같은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
런 식으로 지나치게 쾌활하게 구시면 어쩐지 무서워져요"
자네에게만 고백하지만, 나는 알베르트가 일이 바쁜 때를 노리고 있다가 그 틈을 타서 얼른
찾아간다네. 그래서 로테가 혼자 있으면 좋아하곤 한다네.
8월 8일
용서하게나, 빌헬름이여.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에는 얌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그런 인간은 딱 질색이라고 내가 매도했던 것은, 자네를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
네. 자네도 그러한 의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지.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자네
말이 옳아. 그러나 친구여, 내 한마디만 더 함게. 세상 일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딱
부러지게 결말이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문 법일세.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는 실로 다양한 변화와 차이가 있는 걸세. 마치 매부리코와 사자코의
중간에 무수한 변화의 단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내가<이것 아니면 저것>의 중간
노선을 헤엄쳐 나가려 하더라도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게나. 자네는 어느 쪽
이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하는 거지? 로테에게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희망이 있다면 끝까
지 밀고 나가서 소망을 성취하도록 하라.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용단을 내려서, 온 정력을
좀먹는 불행한 감정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지? 친구여! 그 말인즉 지당하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네.
서서히 악화되어 가는 질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와져 가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보고, 단도로 푹 찔러서 단박에 그 병고에 종지부를 찍어라, 하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환자
의 정력을 좀먹는 질병은 또한 그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용기마저도 빼앗아 가
는 것이 아닐까?
자네는 다른 비유를 끌어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 즉, 우물쭈물하다가 생명을 위태롭
게 하기보다는 상처난 팔을 끊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말일세. 나는 모르겠네! 비유를
끌어다 대면서 논쟁을 벌이는 짓은 그만두기로 하게. 아뭏든 빌헬름, 때때로 나는 모든 고뇌
를 털어 버리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치솟을 때가 있다네. 그래서......만일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되기만 하면, 나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할 걸세.
8월 8일 저녁
얼마 동안 팽개쳐 두었던 일기장을 오늘 무심코 펼쳐보고 놀랐네. 나는 번연히 알면서도
현재의 이런 사태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빠져 들어오고 있었던 걸세! 자신의 입장을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어린애같이 처신해 왔네. 지금도 나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
네. 그러면서도 여기서 헤어나게 되지를 않는군.
8월 10일
어리석지만 않다면 나는 최고로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텐데......한 인간의 마음을 기쁘
게 해 주기 위하여,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환경만큼 갖가지 조건이 결합되어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걸세. 정녕 우리의 마음만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일세.
나는 지금 단란한 가정의 한 식구가 되다시피 해서, 노인들로부터는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
고, 아이들로부터는 아버지처럼 흠모를 받으며, 또 로테로부터도! 그리고 성실한 알베르트,
그도 또한 변덕이나 무례한 언동으로 내 행복을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없다네. 그는 진심에
서 우러나는 우정으로 나를 감싸 주고 있네. 그는 이 세상에서 로테 다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네!
빌헬름이여, 우리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누가 옆
에서 듣는다면 재미있을 걸세. 세상에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또 어
디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나는 때때로 눈물이 핑 들곤 한다네.
어느 날, 알베르트는 로테의 훌륭하였셨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네. 그 임
종의 병상에서 로테의 어머니는 집안 일과 아이들을 로테에게 맡긴다고 말했다는 걸세. 그
이후로 로테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정신적인 자세로 살아 나갔으며, 집안 일에 대한 배려
라든가 그 진지성은 진짜 어머니를 방불케 했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일하며 동생
들을 보살폈는데, 그러면서도 언제나 쾌활하고 상냥한 성품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걸세.
그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길가의 꽃을 꺾어 공들여 꽃다발을 만든 다음, 흘러가는 개울물에
그 곷다발을 던지고 그것이 천천히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네.
자네에게 이미 알렸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알베르트는 이 곳에 정주하여 궁정
으로부터 상당한 급여가 지급되는 어떤 관직에 앉게 될 모양일세. 그는 궁정에서 꽤 호감을
사고 있는 더이거든, 일을 착실히 하고 부지런히 해 낸다는 점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자를
나는 본 적이 없네.
8월 12일
분명히 알베르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인간일세. 그런데 나는 어제 그와 더불어 한바
탕 기묘한 논쟁을 벌렸네.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그의 집에 찾아갔었던 걸세. 말을 타고 산
으로 여행을 하고 싶어졌었거든. 지금 이 편지도 여행지에서 쓰고 있는 것이라네.
그의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으려니까, 권총이 눈에 띄더군.
"저 권총을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여행중의 호신용으로 휴대하고 싶은데"하고 나는 말했지
"좋도록 하세요"하고 그는 대답하였네.
"다만 총알을 장전하는 수고는 당신이 해야만 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저 장신용으로 걸어
놓았을 뿐이니까요"나는 권총 한 자루를 집어 내렸지. 알베르트는 말을 계속하였다네.
"지나치게 경계를 하다가 엉뚱한 사건이 벌어진 뒤로는, 이런 총기를 만지지 않기로 했지요
"
내가 그 사연을 묻자 "시골에 있는 어느 친구 집에"하고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시작하였
네.
"석 달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요, 나는 한 쌍의 소형 권총을 장전도 하지 않은 채 갖고
있었는데, 그래도 밤에는 아무 걱정없이 잘 잤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무
심히 앉아 있노라니까 어찌된 영문인지,문득 강도가 언제 덮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권총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기분, 당신도 이해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하인에게 권총을 내주며, 손질을 좀 하고 총알을 장전하라고 일렀어요. 그런데 그 하인이 하
녀들과 장난을 치느라고 권총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중에 어쩌다가 그만 권총이
발사되었지 뭡니까. 총구 청소용 꽂을대가 꽃힌채 발사되었는데, 그 꽃을대가 하녀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발혀 엄지손가락이 박살이 나 버렸지요. 울고불고 소동이 벌어진데다가 나는
치료비까지 물어 줘야 했답니다. 그러뒤로 나는 총기에는 일제 총알을 장전하지 않고 놓아
두기로 했어요. 아무리 조심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위험이란 예측할 수 없는 거싱거든요.
하긴......"
그러데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알베르트란 인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건<하긴......> 이런 말
을 꺼내기 이전의 그에 한정되는 걸세. 어떤 일반적인 명제라 하더라도 예외가 있는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러데 이 인물은 자기 말이 꼭 정론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세. 약간
경솔한 말을 했다거나, 일반적인 말, 혹은 불확실한 발언을 했다 싶으면, 그는 먼저 한 말을
새로이 한정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며 한없이 늘어놓아서, 나중에는 어떤것이 본론인지
모르게 되어 버리곤 하는 걸세.
이번에도 그는 장황하게 파고들며 변론을 벌이는 것이었네. 결국 나는 그의 말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한 환상에 빠져 권총 부리를 내 오른쪽 눈 위의 이마에다 갖다 대
었다네.
"저런!" 하면서 알베르트는 내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네. "이게 무슨 짓이오?"
"총알도 없는데 뭘 그러십니까!"하고 나는 말했지.
"총알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쏠 정도로 어리석을 수가 있는지......생각만 해도 불쾌해요"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하고 나는 외쳤네.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
은 어리석다, 그것은 현명하다, 그것은 좋다, 그것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만 직성
이 풀리는 모양인데, 그렇게 말함으로서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사정을 다 헤아릴 수 있나
요? 어째서 그러한 행위가 행하여졌겠는가, 어째서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나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들도 그렇게 성급한 판단은 내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시인하겠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어떤 종류의 행위는,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행하여지든간 에 죄악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네. "그렇지만 말입니다"하고 나는 응수했지. "거기
에도 약간의 예의는 있어요. 도둑질이 죄악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당장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아사를 면하기 위하여 도둑직을 했다면, 그자는
동정을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벌을 받아야 할까요? 정당한 분노가 치받치어 부정한 아내
와 그녀의 비열한 유혹자를 살해한 남편, 환희의 한때에 이성을 잃고 억누를 길 없는 사랑
의 환락에 몸을 내맡긴 소녀, 이들을 향해 누가 냉혈적인 기준마저도 감동하여 형벌을 유보
하지 않습니까?"
"그건 별문제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대답하였네. "걱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 인간은 사려
분별이 전혀 없어져 있기 때문에, 술취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과 같이 간주되니까요"
"아아, 당신네 이성적인 사람들이여!"하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네."걱정! 술취한 사람!
미친 사람!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며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하군요. 훌륭한 도덕군자들입니
다. 술취한 사람을 나무라고, 정신착란자를 외면하며, 성직자들처럼 그 옆을 지나서는, 바리
세인들처럼 자기가 그러한 인간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겠지요.
나는 술취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격정에 사로잡혀 거의 제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업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졌던 이릉ㄹ 성취할 비범한 인간들은 옛날부터 모두 주정뱅이라느니 미치광이라느니 하는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유롭고 고결하며 남들의 상상
을 초월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 할라치면, 그 일하고 있는 도중에 거의 예외없이, 저 놈은 미
쳤어, 저 놈은 바보야, 하고 매도를 하니, 이건 정말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정신이 말짱한 당신네 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당신네 현명한 사람들이여!"
"그것 역시 당신의 편력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당신은 무엇
이나 지나치게 과장을 합니다. 적어도 이번의 경우, 당신의 논리는 부당해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자살인데, 그것을 당신은 위대한 행위에 비하고 있으니 당치않은 일이지요. 자
살은 아무래도 의지가 박약한 행위로 밖에는 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인생을 꿋
꿋이 견디며 살아 나가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편이 편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나는 그만 논쟁을 끝맺으려 했네. 남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시덥쟎은 상투적인
문구를 들고 나오니, 그것처럼 못 견딜 노릇이 없거든. 그런데 그의 이런 말은 전에도 여러
차례 들었고, 나도 몇 번 화를 낸 일이 있으므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
쾌활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네.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뇨, 제발 겉만을 보고 오판하지 마세
요. 폭군의 지독한 압정에 시달리고 있던 민족이 마침내 궐기하여 그 압정의 쇠사슬을 끊었
을 때, 그것을 당신은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 할 수 있나요?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놀라서
온몸에 힘이 불끈 솟고, 여느 때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드는 사람이
라든가, 또는 모욕을 당하고 격분해서 여섯 사람을 상대로 맞싸웟 그들을 때려눕히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의지가 박약한 인간이라고 해야만 옳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긴장하고 노
력하는 것이 꿋꿋한 행위라면 지나친 긴장이 어째서 그 반대가 되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알베르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네. "기분나빠하지 말아요. 방금 당신이 든
예는 이 경우에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하고 나는 말했네. "나는 여러 차례 비난을 받은 바 있어요, 나의 연상
이 때때로 엉뚱한 곳으로 뻗어 나간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논법으로 내 의견을
말해 보겠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즐거워야 할 인생을 포기해 버리려고 결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상상할 수가 없는지, 우리 한번 시도해 봅시다.
요컨대,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떤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
는 것이니까요. 인간의 본성에는 어떤 하계가 있는 겁니다. 기쁨이나 슬픔, 고통 등도 어느
일정한 한도까지는 견뎌 낼 수가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서면 파멸하고 맙니다.
이건 사람이 약하다든가 굳세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뎌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나 말입니
다. 그런데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요. 당한 것은, 악성 열병으로 죽는 인간
을 비겁한 자라 함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이겁니다"
"그건 궤변입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알베르트가 외쳤네.
"당신이 생각하듯이 그런 궤변은 아닙니다"하고 나는 응수를 했지. "이런 것은 당신도 시인
하리라 믿어요. 가령 육체가 몹시 병들고, 기력도 기능도 쇠약해져 버려서 어떠한 수단과 방
법을 다 동원해도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할 때, 우리는 그걸 죽을 병이라 함이 마땅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 봅시다. 생각을 외곬으로만 모이며 끙끙 앓는 인간
을 잘 관찰해 보세요. 갖가지 인상이 그에게 작용하여 관념이 고정되고, 마침내 격정이 더욱
항진되어서 냉철한 사고능력이 상실된 끝에 그는 파멸하고 마는 겁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 불행한 인간의 상태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이래라저래라 말을 해 봤자 아무 소
용이 없는 거예요. 건강한 인간이 환자의 병상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기 힘을 그 만분의
일도 환자에게 주입시켜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말은 알베르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연못에 투신자
살한 한 소녀의 일을 그에게 일깨워 준 다음, 그 이야기를 그에게 되풀이해 주었지.
"착한 아가씨였지요. 일정한 집안 일을 돌보며, 지극히 좁은 세계에서 자라났답니다. 낙이라
고는 조금씩 저축해서 장만한 나들이옷을 입고 일요일이면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교
외로 산책을 나간다거나, 큰 축제일에 무도회에 참석한다거나, 남들의 평판이며 뒷 소문 이
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웃집 처녀들과 하염없이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따위가 고작
이었죠.
그런데 이 아가씨의 열정적인 성질이 마침내 좀더 깊은 요구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남자들
이 치켜 주는 바람에 그런 요구가 더욱 부풀어올라 여태까지 낙으로 여겨 왔던 일들이 차츰
시들해졌던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여태껏 알지 못했던 감정에 정신없이 끌려들
어서, 자기의 모든 희망을 그 남자에게 걸고 주위의 세계를 잊어버렸지요. 자기에게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된 상태로, 오로지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만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일찌기 바람이 나서 부질없는 쾌락을 즐기는 따위의 해독에 물든 적이 없는 아가씨였으므
로, 그녀의 소망은 오직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지요. 지금까지 누려 보지 못했던 모든 행
복을 동경해 오던 일체의 기쁨을 그와의 영원한 결합 속에서 찾아 내려 한 것입니다. 희망
의 실현을 보증하는 거듭된 약속, 그녀의 욕정을 더욱더 향진시키는 그의 대담한 애무, 이러
한 것들이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렸지요. 황홀경 속에서 그녀는 온갖 기쁨을
예감하며, 극도로 긴장된 심경으로 마침내 자기의 소망을 품에 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답니
다.
그때 애인은 그녀를 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깊은 연못 앞에 멈춰 섭니다. 사방은
온통 암흑이요,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위안도,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오직 그 남자 속에
서만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으니까요. 자기 눈앞에 있는
넓은 세계도 보이지 않고, 잃어버린 보물을 보상해 줄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도 눈앞
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전세계로부터 버림을 받고, 혼자 외토리가 된 자신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눈앞이 캄캄해지고,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연못에 몸을 내
던집니다.
자기를 감싸줄 죽음 속에서 모든 고뇌를 잔재워 버리려고 말입니다.
알베르트 씨,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아까 말한 병자의 경우와 이치는 마찬가지
가 아니겠어요? 서로 얽히며 싸우는 갖가지 힘의 미궁 속에서 생명의 탈출구를 찾아 내지
못하여 결국 그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곁에서 보고, <소견없는 여자로군!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시간이 흐르면 절망도
진정될 것이요, 그녀를 위로해 줄 다른 남자도 나타날 텐데 말이야> 이런 소리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할 거요. 그것은 <저 녀석은 바보야, 열병으로 죽다니! 체력이 회복되고
정력이 되살아나서, 광란하는 치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그러면 만사가
다 호전되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텐데 말야>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알베르트는 이 비유도 납득할 수 없는 모양으로, 여전히 몇마디 반론을 제기했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네. 즉, 내가 말한 것은 한낱 무지한 여자의 얘기로, 만일 그렇게 외곬으
로만 치 달리지 말고 좀더 넓게 생각하는 분별력을 가졌던들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
는 걸세.
"알베르트 씨"하고 나는 소리쳤네. "인간은 다 마찬가지랍니다. 얼마쯤 이성을 지니고 있다
고 해도, 걷잡을 수 없이 정열이 고조되어 한계점에까지 몰렸을 때는 거의, 아니 다음 기회
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모자를 집었네. 아아, 내 가슴은 꽉 메는 듯하였다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지.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네.
8월 15일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없을 걸세. 로테는 나를 잃는 것을 두려
워 하고 있다네. 나는 그것을 그녀의 태도에서 느낄 수가 있네. 아이들도 내가 날마다 찾아
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네. 오늘 나는 로테의 피아노를 조율해 주러 갔었는데,
그 일은 건드리지도 못했네.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로테도 아이들의 청을 들어 주라고 했기 때문일세. 나
는 아이들에게 저녁 빵을 잘라 주었지. 아이들은 이제 내가 빵을 잘라 주어도 로테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받아 먹는다네
그런 다음에 나는 골방에 갇힌 공주 이야기를 해 주었네. 그것은 내가 곧잘 해 주는 이야기
로, 공주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천장에서 여러 개의 손이 내려와서 먹을것을 주었다
는 내용이지. 얘기하면서 나는 배우는 게 많다네.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깊이
감명을 받는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이야기 속의 세세한 대목은 창작해서 들려 주
기도 하는데, 먼저 했던 것을 잊고 좀 다른 소리를 하면, 이이들은 곧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
았다고 말하는 걸세. 그래서 지금은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이 정확하게
암송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네.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는데, 저작자가 자신이 지어서 일단 출판했던 책을 개정
해서 재판을 내면, 설령 예술적으로는 더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 저서는 반드시 손산을 입게
마련이라는 걸세.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첫인상이 좋은 법이거든. 인간은 아무리 엉뚱한 이
야기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생겨 먹었단 말일세.
더구나 일단 받아들여진 인상은 곧 머릿속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 걸세.
8월 18일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천이 됨은 불가피한 일이란
말인가? 내 마음 속에 충만해 있는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열렬한 감정은 나로 하여금 기쁨
에 넘치도록 하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낙원으로 변모시켜 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가혹한 박해자요, 고뇌의 정령이 되어 어디를 가나 내게 달라붙어 다니네.
일찌기 바위 위에서 강 건너 저 쪽 언덕에가지 이어진 풍요한 골짜기를 굽어보며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싹트고 생기에 넘치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또 기슭에서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저 산들과 아름다운 숲그늘 아래 구불구불 뻗어 있는 저
골짜기들을 바라모았을 때,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은 소곤대는 갈대 사이를 미그러지듯 빠져
나가면서 다정스런 저녁바람이 일렁일렁 불어 보내는 사랑스러운 구름을 그 수면에 비추고
있었지. 그리고 새소리는 사방에서 기차게 춤추고, 풍뎅이들은 태양의 마지막 섬광을 받으며
풀숲에서 해방되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녔었지.
나를 둘러싼 웅성거림에 이끌리어 땅 위로 시선을 돌리면, 내가 서 있는 단단한 바위에는
이끼가 달라붙어 양분을 빨아들이고, 메마른 모래언덕의 사면에는 저 멀리 아래쪽까지 관목
이 자라 있어서, 자연히 펼펴 보여 주었었지. 그 때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내 뜨거운 가
슴 속에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치는 풍요로움 속에서 나 자신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에 잠기기도 했었다네.
그리하여 무한한 세계의 갖가지 장려한 모습들이 내 영혼 속에서 활기에 넘쳐 약동했었다
네. 거대한 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깊은 연못이 내 눈앞에 가로놓여 있었으며,골짜기
를 흐르는 맑은 물은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려서 내 발 아래를 흘러갔고, 숲과 산
들에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네.
그 때 나는 구명할 수 없는 그 모든 힘들이 대지의 밑바닥에서 서로 뒤섞이며 작용하는 것
을 보았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온갖 생물들이 지금 이 대지 위를 뒤덮고, 하늘 아래서 꿈틀
거리고 있는 걸세. 생명을 지닌 것들이 천태만상으로 이 세계에 가득 차 있단 말일세. 그런
데 인간은 그 조그마한 집에 모여 살면서 몸의 안전을 도모하고, 거기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주제에 넓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줄알고 있는 걸세!
오, 가엾고 어리석은 존재여! 너는 너 자신이 미소하기 때문에 만물을 그와 같이 우습
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창조자의 영혼은 근접할 수 없는 산악에서 인적미답의 황야를 넘어 미지의
대양의 끝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있으며, 그것을 느끼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온갖 생물을, 티
끌과 같은 존재에 이르기까지도 기뻐하시는 거라네. 아아, 그 때 나는 머리 위를 날아가는
학의 날개를 빌어, 망망한 대해의 저 건너편 기슭으로 얼마나 날아가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네. 신의 술잔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넘쳐나는 더없는 생명의 환희를 마시고, 단 한 순간이나
마 만물을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해 내고 있는 지고하신 분의 지극한 행복을 맛보기
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네. 친구여,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이 내 기억을 북돋우어 주
는 일이라네. 형언할 수 없는 그 무렵의 감정을 되새겨 보려는 노력만으로도 내 영혼은 승
화되고 고양된다네. 그러나 이윽고는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불안함을 더한층 절
실히 느끼게 된다네.
내 영혼 앞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 같은 것이 걷혀 버린 듯싶네. 무한한 생명의 무대는 이
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입을 벌리고 있는 깊고깊은 무덤으로 변해 버린 걸세. 모든 것은 흘
러가고, 모든 것은 번개처럼 빠르게 사라져 가네. 그 지극히 짧은 동안의 존재조차 온전히
누리는 일도 없이 변전의 분류속에 휩쓸리는가 하면, 물밑에 가라앉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
혀 으스러져 버리기도 하는 걸세.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이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한순간 한순간이 자네와 자
네 주위의 사람들을 좀먹어 가고 있는 걸세. 한순간 한순간마다 자네 자신이 파괴자가 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도지 않을 수 없는 걸세. 무심코 산책을 할 때만 해도 수많은 벌레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한 발자국을 내딛다가 공들여 쌓아올린 개미들의 전당을 무너
뜨려, 그 작은 세계를 참혹한 무덤으로 화하게 하지 않는가.
어쩌다가 일어날 뿐인 세계적인 대재앙이나, 마을들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 도시를 삼켜 버
리는 지진, 나는 결코 그런 따위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세. 자연의 온갖 사물 속에
잔재되어 있는 잠재력, 이것이 내 마음의 터전을 파헤쳐 무너뜨리는 걸세. 자연 속에서 창조
된 일체의 것은 예의없이 자기의 이웃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걸세. 나는 불안하다
현기증이 난다네.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반추를 하고 있는 괴물뿐이라네.
8월 21일
아침에 가슴 답답한 꿈에서 어렴풋이 눈이 뜨이면,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아 두 팔을 내
뻗는다네. 그녀와 나란히 초원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거기에 수없이 키스를 퍼붓는 착각
에 빠져 한밤중의 침대 속에서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는다네. 아아, 그리하여 아직도 덜 깬
도취경 속에서 손으로 그녀를 더듬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면 미어지는 듯한 가슴 속에서 눈
물의 분류가 솟구쳐 오르는 걸세. 그리하여 나는 절망 속에서 어두운 내일을 생각하며 엎드
려 운다네.
8월 22일
비참한 심경일세. 빌헬름! 내 활동력은 이상을 일으켜 불안스러운 나태로 변해 버렸네. 그렇
다고 언제까지나 이런 허탈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큰일일세.
나에겐 이제 사고능력도 없고, 자연을 감상할 흥취도 없네. 책따윈 더구나 진절머리가 나네.
자기 자신을 상실하다는 것을 뜻하지. 거짓말도 아니고 과장도 아닐세. 때때로 나는 날품팔
이꾼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드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 날 하루의 목표가 뚜렸다고, 자신을
긴장시키는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때때로 알베르트가 부럽다네. 서류 속에 파묻혀 있는 그가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자네와 장관에게 편지를 내어 공사관에 자리를
하나 얻어 달라고 할까 생각했었지. 그런 자리라면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고, 자네도 또한
보증해 줄 걸로 믿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전부터 장관은 나를 아껴 주었고, 어떤 자리에든
앉아서 실무를 보라고 권유해 왔거든.
한순간 그럴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생각이 달라지곤 하네. 어떤 말이,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지겨워져 제 몸에 안장을 언고 마구를 얹어 달래서 사람을 태우고 다니다가, 마침내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 그 우화가 생각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마
는 걸세.
친구여! 환경의 변화를 구하는 마음은 초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
를 가나 나를 뒤쫓아오는 것이 아닐까?
8월 28일
내 병이 고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쳐 줄 사람은 틀림없이 이들일 걸세. 오늘은 내
생일일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베르트로부터 소포가 배달되었다네. 포장을 끄르자 곧 바
로 눈에 띈 것이 분홍색 리본이었네. 로테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가슴에 달려 있었던 것
으로 그 후에 몇 번인가 그녀에게 졸라서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이지. 그리고 12절판의 문고
본이 2권 들어 있었네. 베트시타인 판의 호메로스로, 산책을 하면서 무거운 에르네스티 판을
들고 다니기가 거추장스러워서 벌써부터 갖고 싶었던 책이지. 이런 식으로 이 사람들은 내
소망을 미리 알고서, 알뜰한 우정을 나타내는 조그마한 선물을 찾아 내어 준다네.
이러한 성의는, 보낸 사람의 허영심에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값진
선물보다는 천 배나 더 귀중한 것이지. 나는 그 리본에 수없이 입술을 갖다 대었네. 그리고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 즐거웠던 날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짧은 그 시절의 행복
한 추억들을 되새겼다네.
빌헬름이여, 그러나 불평은 하지 않겠네. 인생의 꽃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 얼마나
많은 꽃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떨어져 버렸는가. 열매를 맺는 꽃은 지극히 적고, 열
매를 맺어도 온전히 익게 되는 것은 더구나 더 적은 걸세. 그렇다고 익은 과일이 전혀 없었
던 건 아니었네. 그런데도......아아, 친구여!
우리가 그 익은 열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맛도 보지 않은 채 썩여 버려도 괜찮은 걸까?
잘 있게. 멋진 여름일세. 나는 곧잘 과일을 따는 긴 장대를 들고 고테네 과수원 나무에 올라
가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딴다네. 그러면 로테는, 그 아래에 서 있다가 내가 떨어뜨려
주는 배를 받는다네.
8월 30일
불행한 사나이여! 너는 바보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미칠 것만
같은 이 끝모르는 정열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나는 이제 그녀에 대한 기도밖에는 모르게 되어 버렸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
의 모습뿐이라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공상에 잠겨 있으면 나는 행복한 몇 시간을 누릴수가
있다네. 그러나 이윽고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려야만 하는 걸세!
아아, 빌헬름이여! 내 마음은 나를 어디로 몰아가려 하는 것일까?----그녀 곁에서 2시간이
고 3시간이 흘러가면, 그녀의 모습, 그녀의 거동, 그리고 그녀의 말의 고상한 표현들에 황홀
해져 있다가도 차차 모든 감각이 긴장되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며, 암살자의
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그리하여 내 심장은 숨막히는 감각을 완화시키려고 세차게 고동치는데, 그것이 오히려
감각의 혼란을 더 가중시킬뿐이라네.
아아, 빌헬름! 그러면 나는 자신이 이 지상에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게 되어 버리는 걸세. 때
때로 가눌 길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있을 때, 로테가 자기 손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어서
가슴 속의 괴로움을 풀어 버리라고 슬픈 위안을 해 주기라도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
쳐 나와 버리지 않을 수 없네. 그리하여 먼 들길을 헤매고 다닌다네. 길도 없는 숲속을 말일
세!
그러다가 도중에서 피로와 갈증 때문에 몇 번이나 쓰러져 눕곤 한다네. 보름달이 하늘높이
떠오르면, 상처입은 발바닥을 잠깐이나마 쉬게 하려고 고요한 숲 속의 구부러진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다가 정신적인 해이와 피로 때문에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꾸벅꾸벅 잠들어
버린다네.
아아, 빌헬름이여! 참회의 수도복에 가시덤불의 띠, 그리고 암자 속에서 혼자 거처하는 일,
그것이 내가 마음 속으로 동경하며 갈구하고 있는 위안인 것만 같네. 잘 있게! 이 비참한
상태의 종말은 무덤밖에는 없을 것 같네.
9월 3일
나는 여기를 떠나겠네! 고맙네. 빌헬름. 흔들리는 내 결심을 자네가 굳혀 주었으니 말일
세. 벌써 2주일 전부터 그녀 곁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주곧 해 왔으면서도 결단을 못 내
렸는데, 이젠 정말 떠나야겠네. 그녀는 시내의 아는 부인 집에 가 있네. 그리고 알베르트
는......그리고......어쨌든 나는 떠나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