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리고 물방울과 물결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석가탄신일입니다. 모든 불자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함께 기뻐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제가 오래 전에 번역했던 [동행]이라는 책의 한 장을 다시 읽으면서 이 내용을 조금 풀어서 여러분들과 나누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행]은 브라이언 피어스라는 도미니코 회 신부가 쓴 책으로 중세기의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와 현대의 불교의 스승, 틱낫한 (그의 존칭이며 애칭이 타이입니다. 그를 타이라고 부르지요.)의 사상을 비교, 연결하면서 종교 간이 대화를 시도하며 양자의 공통점에 주안을 둔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신부가 썼으니까 그리스도교 사상이 더욱 잘 드러나 있고 아주 잘 녹아 있는 책입니다.
제가 번역했지만 정말 좋은 책인데,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용어가 나와도 읽지 않나봅니다. 아마 제가 번역하여 출간한 책 중에서 가장 적게 팔린 책일 거예요.
우리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이들의 종교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하는데, 때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개신교의 어떤 분들 중에는 몰상식하기까지 한 분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어느 스님에게서 그분이 길을 가는데, 길에서 전교하던 개신교 신자가 다짜고짜 그 스님에게 붙어서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님 옷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며 붙들기에 뿌리치는데도 결국 팜플렛까지 던져주더라는 말을 듣고 저도 그 스님과 함께 분개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신학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너무나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라 늘 경계와 관찰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쉽게 말해, 그는 요주의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교회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뚜렷한 신비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주옥같은 강론을 했고 글을 썼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를 살펴보면, 놀랍도록 여러 가지 동양사상, 특별히 불교와 비슷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바다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이 바다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 안에 떨어져 잠길 때, 우리 영혼이 하느님이 된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은 중세 당시의 ‘하느님 관’으로는 아마 예수님이 하느님이 당신의 아빠, 아버지라고 한 것만큼이나 놀라운 말이었을 겁니다.
제가 놀라는 것은 타이가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와 굉장히 비슷한 표현을 합니다.
타이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물을 근원으로 하는 물결이다. 물결로서 서로를 충분히 바라보는데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가 물로 만들어져 있고, 서로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물방울이라고 하는 것을 타이는 물결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신비가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입니다. 브라이언 피어스에 의하면, 불교인들의 영혼 안에 있는 존재의 근원과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안에 있는 존재의 근원이신 그분이 다른 분이 아닙니다. 회교인들이 ‘알라’라고 부르는 신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압바’ (아빠라는 뜻의 아람어)라고 불렀던 하느님과 다른 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존재의 위대한 바다에서 물결이며, 물방울입니다.
타이가 말합니다.
“물결의 고향은 어디인가? 물결의 고향은 모든 다른 물결들이며, 물결의 고향은 물이다. 물결이 다른 물결들을 깊이 어루만질 수 있다면, 물결은 자신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브라인언 신부는 우리가 상상 안에서 타이가 에크하르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면, 우리는 타이가 에크하르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이스터, 당신이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는 물결이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리고 물이 물결의 근원이지요.”
“물결이 물이다. 물방울이 바다가 된다.” 등의 표현은 일반적인 그리스도교 사상과는 다른 색깔의 어법이라 교회의 윗 어른들이 볼 때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지요.
타이는 [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그리스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축소판이라는 개념은 영감을 준다. 이것은 인간이 소우주라고 말하는 아시아의 전통과 유사하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하느님의 본성인 신성에 참여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에크하르트의 ‘하느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라는 표현들을 잘못 받아들이면 정통 그리스도교 사상과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사상이 성서의 전통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표현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숨’, 또는 당신의 얼, 당신의 기, 당신의 얼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의미라고 이해한다면,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성서 전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하느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본성 그대로를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 조금 더 쉽게 말해, 우리가 결국 하느님과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 인간 여정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하느님의 씨앗으로서 자랍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에크하르트나 타이의 이미지처럼 물결이 물이 되고 물방울이 바다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사라지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온전히 잠길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만약 우리가 에크하르트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면, 그는 지혜로운 스승이 지닌 기지로서 미소 짓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은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진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단 말이지요? 간단하지요.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자신을 찾는 것과 하느님을 찾는 것이 하나이고 같은 행동이지요.”
만약 우리가 고집스럽게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는 또다시 미소 짓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떨어져서 잠기게 되는 장소는 무(無)입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무(無)란 텅 빈 거대한 침묵의 사막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태어나지도, 비롯되지도, 창조되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세계’이기도 하지요. 태초에 창조는 바로 이 텅 빈 하느님의 무(無)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이 무(無)라는 말의 신비적인 의미는 존재의 근원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이 무(無)는 모든 창조의 근원을 말합니다.
도덕경의 저자, 노자도 비슷한 통찰을 보여 줍니다.
모양을 갖추지 않았으나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부터 존재하는 완전한 존재가 있다.
고요하고, 텅 비어 있고, 고독하다.
변화하지 않고, 무한하며, 영원히 존재한다.
우주의 어머니이다.
달리 부를 수 없어, 도라고 부른다.
도는 모든 것을 통해 흐르지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도는 비어 있으나 아무리 사용해도 늘 가득 차 있고 넘치지 않는다.
깊고 넓어서 만물의 근본이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복잡한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에도 뒤섞이건만
맑고 고요함이 늘 그대로 있다.
무(無)라는 깊은 강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맡겨둘 때, 결국 그 강물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존재의 근원이신 분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마지막 구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로 돌아간다. 하느님이라는 위대한 침묵의 심연 안에서 존재의 근원인 무(無)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하느님의 씨앗이 하느님 안에서 자란다는 이미지이며 타이가 말하는 물결의 이미지도 같습니다. 물방울이 하나로 모아져 바다로 들어갑니다.
제가 번역했던 칼릴 지브란의 시, ‘눈물과 미소’에서도 마지막 행이 우리가 ‘아름다움과 사랑의 바다,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물방울이 바다가 되는 이미지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말합니다.
“당신이 물방울로 바다 안에 떨어진다면, 그 물방울이 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다가 물방울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 영혼이 하느님의 본성을 지닐 수 있지만 하느님이 인간 영혼이 되지는 않는다.”
씨앗의 이미지도 같습니다. 씨앗이 하느님 안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씨앗이 되지는 않습니다.
타이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물과 물결을 혼동할 수는 없다. 서로 인과의 관계가 있지만 분명히 다르다. 물을 물결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는 없다.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차원과 현상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은 분명하게 따로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이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할 때, 당신은 물과 물결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현상적인 세상 안에서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이 모두 이 점에 대해 동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타이의 말처럼 하느님은 현상적인 세계 안에서의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하느님은 이런 저런 분이라고 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어떤 존재로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존재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왜’라는 물음이 없다고 합니다. 타이가 물이라는 이미지로 상징하는 영원하고 궁극적인 차원은 우리가 헤아려서 우리 마음대로 서가에 꽂아 넣거나 상자 속에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하느님에 해당하는 궁극적 진리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말은 ‘진여’라는 말이지요. 진여는 여여(如如),·여실(如實),·여(如)라고도 합니다.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합니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도 같습니다.
에크하르트는 말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이런 저런’분이라고 개념을 부여하여 파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전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스스로 있는 존재’만이 있을 뿐이라면,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에 걸맞은 특성이다.”
우리는 하느님은 이곳에 계시다, 저곳에 계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 4, 20, 23)
물결이 물이 아니지만, 물이 물결의 근원이며, 궁극적으로 물결과 물은 하나라는 이미지나,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바다가 되는 이미지, 인간이 하느님의 씨앗이라는 이미지 등을 통해 우리는 동서양의 신비 음악이 이루는 놀라운 화음과 아름다운 멜로디에 경탄하게 됩니다.
브라이언 신부가 말합니다.
“비록 우리의 길이 서로 다르고, 우리가 섬기는 궁극적인 존재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고, 다른 전통 안에서 그 존재를 이해하지만, 서로가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서로가 지닌 다른 과일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식탁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서로 사이에 이렇게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통점이 더 많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존중해 주고 서로를 나눌 때, 거기 진정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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