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1월 22일 수요일 맑음
“얘가 창문을 열어 놓고 자네” 안사람이 소리친다.
가슴이 덜컥 거린다. ‘만약 감기라도 걸렸으면.... ?’ 어제 밤 찬바람이 마음에 걸려 방을 따뜻하게 하고 재웠더니 덥다고 창문을 열어놓고 잤으니, 이 건 분명히 탈이 났을 게 아닌가 ? “충희야 괜찮아 ?”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덕지덕지하다. “괜찮아요. 방이 더워서....” “킁킁해 봐. 감기기운이 있나 ?” “킁킁, 괜찮아요” ‘하이구 다행이다’ 중요한 날 전날 밤에 잠을 잘못자서 대사에 지장이 있었던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었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놈의 수능, 빨리 끝나야지.’ 충희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자동차 검사소로 향했다. 집에 딸이 와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더라.
“사장님 이리 와 보세요” 정비사가 차 밑 정비터널에서 부른다. 이젠 어딜 가도 사장님으로 통한다. 선생이란 말이 훨씬 좋은데 언제 또 들어보나 ?
“여기 보세요. 이 게 조인트라 하는 건데, 망가졌잖아요. 검사에는 상관 없는데 자칫하면 큰일 나요” ‘이 거 또 돈 잡을 일 생겼구나’
사륜구동 차의 조인트라 구하기도 어렵다네. “현대서비스에 가서 주문을 하시고, 내일 찾아서 오세요” 시간도 오래 걸린다. 산 속을 헤매고 다니는 차라 철저히 고쳐야 한다. 하라는 대로 했지.
집에 돌아오니 수진이 혼자서 기다린다. 모처럼 부녀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객지에서 혼자 살면서 많이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충희가 예비소집 전에 내일 시험 볼 자리를 보러 간단다. “아빠가 데려다 줄 게” 얼른 쫓아 나왔다. 중앙고등학교, 걸리는 시간도 체크했지. 20분이면 된다. 2학년 3반 교실, 맨 첫 번째 자리가 충희의 자리다. 내일 충희가 땀 뺄 자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속이 시원하다, 오길 잘했지.
수진이랑 병원을 향했다. 큰딸, 둘 째딸이 마련한 자리였지. 아빠의 하지정맥류가 마음에 걸린다고, 저희끼리 예약을 해놓고, 수진이는 강제로 끌고 가는 거다. ‘아닌데, 하기 싫은데’ 생각돼도 자식들이 정성으로 만든 자린 데 실망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엄마로부터 유전으로 물려받은 하지정맥이 큰 속은 썩이지 않았지만, 나이 들며 쉽게 다리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데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굵은 핏줄이 보기 싫어 반바지를 입지 못했었다. 늙어가면서 ‘뭐 어때’ 생각이 들어 내 놓고 다니기도 했지만, 보는 사람들마다 눈이 거북했을 테지.
자식들의 정성 때문에 따라 가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병원에 가기 싫어지는 게 나만의 유별남은 아닐 거다, 모르고도 잘 살아 왔는데, 억지로 찾아서 병을 만들 수도 있을까 봐 망설여지는 거다. 간호사가 탈의실로 안내한다.
“이 거 입고 나오세요” 보니까 치마다. 눈이 둥그레해진다. “다행히 속 옷은 입어도 된단다. 생전 처음으로 입어보는 치마, 엄청 시원하고 자유스러웠다. 여자들이 치마를 입는 이유를 알겠더라. ‘남자들도 다 치마를 입어도 괜찮
겠다 ”오른 다리는 두 군데인데 한 곳은 레이져로 나머지는 절개를 해야 돼요. 왼 다리는 한 군데를 레이져로 하지정맥 근본 치료를 받아야 겠어요. 당일 입원입니다“ 나는 잘 못 알아듣겠는데 수진이는 척척이다. 간호사니까....
“비용은 얼마나 들겠어요 ?” “350만원 정도입니다” “보험은요 ?” “보험회사에 알아 보세요” 여자 분이 상당히 딱딱하다. 감기라도 걸렸나 ?
보험사에서는 당일입원은 애매하단다. 입원을 하지 않으면 약간의 기본만 나온다네.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으라네. ‘억지로 입원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하나 ?’ 또 한군데가 있다. 이번에는 피부과다.
경진이가 내 얼굴과 눈썹 끝에 쥐젖이 있어 떼어내야 한단다. 퍼진다고...
‘쥐젖이 뭐야. 듣기 거북하게.... ’ “쥐젖이 아니라 연성섬유종이라는 겁니다. 유전으로 나타나는 건데, 하나가 생겼다고, 더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귀는 균이라 퍼지기 전에 빨리 없애야 하지만, 이것은 없앴다고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다시 생길지 모르는 것입니다. 수술은 레이져로 하는데 태운 곳에 구멍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전에는 손톱으로 떼어냈는데요. 또 그래도 되지요 ?” “손톱으로는 떼어내지 마세요. 균이 침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는 모습이 떼어버려도 되지만 피부과 수입이 줄어드는 일인데 그러라고 할 수 있나요 ? 하는 것 같았다.
“저도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딸들이 자꾸 끌고 왔어요. 그냥 가겠습니다.” “얘 가자” 수진이는 안 된다고 하고 실갱이를 하니까 “그러면 나가셔서 상의해 보세요” 하네. 그래서 그냥 나왔지.
집에 와서부터는 충희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편안한마음으로 시험에 임하도록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신경 써 주지 못한 점이 늘 미안했었는데....
충희도 누나가 캐나다에서부터 와 준 게 많이 흐뭇했나 보다. 그럴 테지.
저녁을 간단히 먹이고, 불낙죽 찾아 오다가 베스킨라빈스에 들러 아이스크림 사다 입가심을 시켰다. 준비물을 함께 챙기고, 잠자리에 들게 했다.
‘오늘밤 편하게 잠들어야지. 그동안 수고 많았다. 우리 충희야’
누구는 꿈에서 시험지와 답안지를 보고는 대박을 맞았다던데, 그 거 까지는 아니더라도 편하게 잠을 자고,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주기만 하면 된다. ‘잘자라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