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나가다가 한쪽 구석에 폐기물이 되어 서있는 가구들을 보곤 한다.
장롱, 냉장고, 침대, 문갑, 책상, 의자, 가전제품 등. 그 중 의자는 특별한 감상을 준다.
어느 주인이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다리가 삐걱거리거나 어떤 부위가 상해서 버려지는 이 가구.
이 의자가 밤에 주는 인상과 낮에 주는 인상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보신 적 있는가?
똑같은 가구 똑같은 장소 똑같은 자태지만 밤에 서있는 것과 낮에 서있는 모습이 주는 느낌이 다르다.
비록 버려지고 비었지만 한낮에 도로 한편에 호젓하게 서있는 의자엔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감회가 돌게 한다.
어떤 감회? 비었지만 비지 않았다. 초라하지만 정감이 있다. 왜일까?
비록 버려지고 빈 것이지만, 아무도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이 없지만 주목하면 뭔가가 있다. 햇빛이 앉아있다.
낡거나 부서지거나 어딘가 주인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도로 한쪽에 버려졌지만,
폐기되기 전에 비라도 내리면 비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은 의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지만,
그랬던 그 낡은 의자 위에 따뜻한 햇빛이 내리면 그 처량한 의자의 처량한 상태,
즉 의자의 낡거나 상하거나 칠이 벗겨진 부분까지를 햇빛이 모두 포용하면서 색다른 의미로 변질시키며
그 빈자리엔 빛이 앉아있는 것이다.
분명히 비었다는 것은 서글픈 것이다. 하지만 햇빛이 앉아있는 의자는 서글픔과는 다른 모습이다.
빛은 색깔과 상태를 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의자만은 아니다.
빛을 받는 들꽃, 빛을 받는 유리창, 빛을 받는 얼굴은 생생하게 빛나는 형상이다.
찬란한 태양이 지고 으슥한 밤이 되었다. 그 빈 의자가 놓인 자리엔 가로등 하나 없다.
그때 어둠 속에 버려져 있는 그 의자 옆을 누군가 지나며 슬쩍 쳐다본다면
그 의자가 주는 인상이 낮에 햇빛 속의 의자가 주는 인상과 같을까?
아니다. 똑같은 가구 똑같은 장소 똑같은 자태지만, 아무도 버려진 의자에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 의자는 낮과는 달리 버려짐과 공허와 서글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냥 버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비어있기 때문이다.
짝이 없기 때문, 쳐다보는 이 없기 때문, 아무도 그것을 찾는 이 없기 때문이다.
의자는 주인 없이 어둠 속에서 비어버린 자기 삶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것이 슬픈 것일까? 혹시 이것이 나의 주관적 감상일 뿐일까?
그런데 왜 모든 사람에게는 버려진 것을, 혼자인 것을, 짝이 없다는 것을 슬퍼하는 본능이 움직이는가?
빈 병, 빈 저금통, 빈 꽃병, 빈 신발, 빈 액자, 빈 가방, 빈 우체통, 빈 집, 빈 교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 없는 캐서린의 비어버린 자리에 몸부림치는 히스클리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목놓아 부르는 김소월의 소리에도 상대의 반응은 공허하고,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라면서 주님을 감지할 수 없어 비어버린 존재의 자리로 말미암아 눈물짓는 욥.
그렇다, 비었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 비었다는 것, 어두운 밤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주인과 분리된 고독한 운명을 감내하는 슬픈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원한 주인, 영원한 상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충만과의 분리를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 그 충만이 누군가?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다.
2017. 3. 19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사람안에 하나님이 내용이 되실 때 사람은 비로서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아멘! 내게 하나님의 빛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빛을 받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