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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 1976-제랄드 포맨저 |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자. '영화제'란 영화를 일정한 기준에 의해 수집하고 상영하는 행사이다. 적어도 그것이 영화제라는 단어의 정의라고 사전은 말한다. 한데, 어느덧 우리의 인식 범위를 훌쩍 넘어선 영화제들의 범람과 그 실속 없는 운영, 거기에 파행을 거듭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기본적인 정의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다.
과장하지는 말자. 전 국토가 각종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축제로 조각조각 점령되어버린 현상은 비단 영화계만의 것이 아니다. 미술과 공연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서 행해지는 축제들 역시 세력 다툼과 과시를 위한 허울 좋은 경합장이 된 지 오래이며, 예술계에서 '높은 자리' 하나 꿰차고 싶어 하는 사람의 수와 그들을 부추겨 돈 되는 사업을 벌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수가 많은 만큼, 오늘도 새로운 축제는 기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영화계에 한정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축제'라는 꼬리표에 의해 그 정체성이 가장 왜곡되는 영역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세 과시와 허영의 난장
현재 한국에서 영화제가 소비되는 방식은 해외 영화제와 국내 영화제의 경우가 사뭇 다르다. 우선 해외 유명 영화제(이른바 '3대 영화제')와 관련하여 세간의 화제는 단연 어떤 국내 영화가 초청받았는가 하는 것, 특히 경쟁 부문의 진출 여부이다. 그러다 한국 영화가 상이라도 받게 되면 그 감독은 단숨에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며, 배우는 공식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모든 국민과 특히 영화계는 그들에게 예를 갖추고 그들의 작품을 인정해야 마땅해진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분들이 인정해준 영화를 감히 국내 조무래기 평론가들이 비판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의 수상에 대한 이 맹목적 집착이 가져오는 여러 폐해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이는 이러한 권위를 가능케 하는 영화제 특유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요컨대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가 누리는 막강한 권위는 그것이 어떤 영화들을 '우수하다'고 선별하는 기능으로부터 비롯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제에 일종의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영화 평론이라는 것 자체가 피폐해지고 소멸해가는 오늘날, 영화제는 가장 확연한 가치평가 잣대로 대중을 수긍시키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반면 국내 영화제에서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코 수상이나 경쟁 구도가 아니다. 일반인들의 관심은 무엇보다 레드카펫을 수놓는 화려한 배우들과 그들의 드레스, 특히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 정도이며, 이왕이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깜짝 사고 하나쯤은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므로 이번 영화제에 어떤 영화들이 상영되는가, 수상작이 무엇인가 따위는 영화 관계자나 '한가한' 씨네필들의 몫으로 남겨지며, 예컨대 부산국제영화제 '본연의' 목적은 영화 팬들과 부산 시민, 나아가 전 국민에게 흥겨운 볼거리·이벤트를 제공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레드카펫 행사에 대한 관심이 국내 영화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부산국제영화제와 관련된 기사를 검색해보면 곧 알 수 있다. 이는 미술 비엔날레나 공연예술제의 오프닝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요컨대 영화 탄생시부터의 짙은 혐의.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혹은 예술이기는커녕 오락 산업이라는 것.
그렇다면 적어도 영화 관계자와 씨네필에게만큼은 국내 영화제가 '평론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가장 공들여 초청하는 영화 목록은 세계 3대 영화제의 수상작들, 즉 '국제적으로 검증받은' 영화들이다. 영화 관계자와 씨네필들은 부산국제영화제'만'의 독자적 기준과 비평 관점을 경험한다기보다는, 직접 가기 힘든 칸-베니스-베를린의 수상작들을 가장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는 기회로서 영화제를 이용한다. 다시 말해, 명실상부 아시아 최대이자 최고를 자랑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영화제의 어떤 선별적 비평 기능이 아니라, 검증된 예술-상품을 소개하는 '중개상' 역할인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영화관이 소화하지 못하는 '예술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란 매우 소중하고, 이런 기회들이 쌓여서 결국은 한국 영화 부흥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처럼 공인된 영화 프로그램과 거대 필름 마켓, 그리고 대중을 위한 이벤트를 두루 갖춘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례적 성공 사례가 국내 다른 영화제들에 끼치는 영향이다.
흔히 국내의 다른 영화제들도 '모범적인' 부산국제영화제의 사례를 연구하여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은 제안이다. 애당초 이러한 역할을 국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뿐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산국제영화제가 막강한 자원과 권력을 활용해 해외 수상작들을 '싹쓸이'하고 국내 주요 영화들의 프리미어 역시 오롯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영화제들이 부산국제영화제와 동일한 노선을 걷는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전주'의 비극과 교훈
그렇다면 여타 영화제들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가능성과 실마리의 한 사례를 우리는 올해 초까지 이어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발견해왔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독식에 맞서, 열악한 환경을 오히려 기회 삼아, 다른 어디서에서도 보기 힘든 새로운 영화 목록을 개척해온 전주국제영화제의 행보는 대담하고 놀라웠다. 말하자면, 전주국제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놓치고 있는 어떤 '평론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드문 사례였던 것이다. 올해 시작된 게스트 큐레이터 프로그램은 전주국제영화제의 '평론가-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다듬어나가리란 기대를 증폭했다.
이와 더불어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그램으로 대표되는 '제작자'로서의 기능까지 더해져, 전주국제영화제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비록 부산국제영화제처럼 가시적으로 두드러진 성과는 거두지 못했을지언정, 국내 씨네필들의 열렬한 지지와 함께 해외 평론가들에게까지 명성을 높이던 중이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성황'에 비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스타 동원력과 부대 행사가 초라하다고 느낀 지역 기관과 언론의 분노는, 결국 유운성 프로그래머의 해임이라는 극단적 조치로 귀결되었다. "영화제란 영화'도' 트는 곳이 아니라 영화를 트는 곳"이라는 그의 발언으로 압축될 이 사건은 한마디로 영화제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엇갈린 기대가 불러일으킨 비극이다. 그것은 일찍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흥망성쇠를 경험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이들이 일으킨 사태라는 점에서 더더욱 비극적이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영화라는 이 당연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이해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그래, 축제다. 그러나 축제란 것이 꼭 흥청망청 잡동사니여야 한다는 관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물론 막대한 예산을 부담해야 하는 지자체의 고충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 또한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영화제들을 어느 정도 '교통정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영화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전문가 평가와 국가의 장기적 지원이 요구됨은 자명하다. 그러나 설령 이런 자원이 확보된다고 해도 갈등 해결의 길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가령 영화제 정체성과 관련하여 유운성 전 프로그래머와 갈등을 빚고 그의 해임에 동조했던 스태프들이, 최근 새로 부임한 집행위원장에 맞서 그들 스스로 영화제 정체성 운운하며 집단 사퇴한 아이러니는, 정체성이라는 문제의 험난함을 역설한다. 로테르담이나 비엔나 영화제 같은, 규모는 작지만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진짜 제대로 된 '국제'영화제를 국내에서 만나는 것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글 / 방혜진 문화비평가. 연세대 불문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수학했다. 객석예술평론상,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젊은비평가상 수상. 공저 <칼 드레이어>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과 역서 <영화 장르>가 있다. 현재 로젠봄의 <굿바이 시네마 헬로 시네필리아>를 번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