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의 출세욕(마 20:20-28)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를 기록한 마태는, 그 심각하고도 중대한 예언은 아랑곳없이 세속적인 출세욕을 드러낸 제자들에 대해 경계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마가복음 10:35-45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기사는【20】“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로 시작된다. “그때에”는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20:17-19) 때를 지시하는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 즉 야고보와 요한(4:21의 주석을 보라.)의 어머니인 살로메(막 15:40, 16:1)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다. 마가복음 10:35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구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어머니와 같이 구한 것 같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뻔뻔스런 청탁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이용하려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의 반응과 그들의 청탁에 대해, 마태는【21】“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하였다. “주의 나라”는 기독교적 의미의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주님 예수의 재림과 관련된 내세적 왕국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교적 의미의 현세적 메시아 왕국을 뜻하는 것이다. “주의 우편”은 왕이 될 주님 다음가는 지위를 의미하고, “주의 좌편”은 그 다음가는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의 청탁은 “주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탐내는 것이고, 또한 충성심의 발로가 아니라 야심의 발로이다”(R. A. Cole).}(막 10:37의 주석).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관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있어서나, 동료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탐하는 정신에 있어서나 예수님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칼빈(J. Calvin)은 “이 기사는 인간의 허영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야심, 또는 어떤 다른 육적 잘못이 흔히 올바르고 경건한 열심 속에 뒤섞여져서 주님의 추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갖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라고 하였다.}(막 10:37의 주석).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세속적 야심을 갖게 한 것이 무엇일까? 첫째는 그들 자신의 영적 무지와 이기적 욕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제자들 중에서도 핵심 요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17:1-, 26:37-, 막 14:33-)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아버지인 세베대가 일꾼들을 고용할 정도의 유복한 계층에 속했었다는 점(막 1:20)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그들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매간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친척간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위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라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그런 세속적인 야심은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청탁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2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는 그들의 청탁은 물론, 그러한 청탁의 배경이 된 예수님과 주의 나라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그릇된 것임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어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셨다. “잔”은 구약성경에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전자는 ‘은혜’ 또는 ‘복’(시 16:5, 23:5)과 ‘위로’(렘 16:7)와 ‘구원’(시 116:13)을 나타내고, 후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고난’을 나타내고 있다(시 75:8, 사 51:17-23, 렘 25:15-28, 49:12, 51:7, 겔 23:31-34, 합 2:16, 슥 12:2). 여기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막 14:36, 요 1:29)을 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의 취지를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그토록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대답은 영적 우둔 또는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은 그 후에 된 일, 즉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깨어 있지 못한 것(막 14:27, 40)과 그 곳에서 체포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한 것(막 14:50)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그들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 대답이 그대로 이뤄질 것을 예수님 외에 누가 알았겠는가!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23】“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왕의 손에 의해 순교하였다(행 12:2). 그러나 요한에 대해서는 순교했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다양하게 전해져 오므로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 형제가 예수님의 예언처럼, 주님 예수를 위해 순교했거나 주님 예수를 위해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장차 메시아 왕국에서의 영예로운 자리인 자신의 좌우편을 주거나 안 주는 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문제임을 밝히셨다. 이어서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러한 자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정해졌기 때문에 자신은 그 뜻을 따를 뿐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 예수를 따르며 섬기는가 함이다. 한편, 다른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열 제자의 분노는 그들 역시 그 형제와 같은 세속적 야심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고 비난할 때에 자신의 추악을 드러내곤 한다. 제자들의 세속적 야심으로 드러난 영적 우둔과 영적 무지 때문에 몹시 안타깝고 서글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온화한 마음으로 가르치신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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