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이란 ‘해방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심신(心身)의 고뇌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이 해탈에 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 목표를 이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無明)을 없앰으로써 해탈의 도(道)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인생 진리로서의 연기(緣起)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이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이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 무명을 없애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道)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해탈에의 도는 중도(中道)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수행(修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涅槃)과 동일시되고 있다.”
(『위키 백과』에서)
“구원(救援)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서 구출되고 해방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신학(神學)에서 쓰이는 용어로서는 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ㆍ천국(天國) 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ㆍ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ㆍ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로 남
신학의 구원론은 이 구원을 연구하는 세부 항목이다.”(『위키 백과』에서)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현인(賢人)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구제 방법들을 아낌없이 남에게 가르쳐 왔다.
그리고 자의로 해탈에 도달하려는 불교마저도 중생을 고해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제도(濟度)하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가톨릭 대사전』에서)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령(聖靈)’을 얻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쁘고 마음에 평화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려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마음이 기쁘고 평화롭게’ 된다.
그러면 ‘새로운’ 사람이 된다. 이것이 곧 ‘구원(救援)’이다.
기복(祈福)이란 한자로 ‘복을 비는 것’이란 말이다. 복(福)이란 무엇인가?
복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얻고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엄청난 위력의 자연에 비해 한없이 연약하며,
막강한 권력에서 나오는 제도에 매여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초라하고 무능한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복은 무능하고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부터 공급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복은 절대자인 신에게 빌고 구해야 얻어지게 되므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정성을 다해 복을 비는 기복행위가 기복신앙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복신앙도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복신앙을 당연시하고 있고 종교인들도
신자들의 이런 여린 마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같다.
종교를 왜 갖게 되었는가 하는 설문 조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른바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종교를 갖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복’은 ‘마음의 평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복’은 물질적인 부(富)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 점에 대하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과의 오강남 교수가 잘 설명하고 있다.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각 전통에는 두 가지 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쉬운 표현으로 하면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라 할 수 있다.
서양 말로는 엑소테릭(exoteric; 대중적인, 종교적 교리·철학적 학설 등이 문외한에게)
개방적인(cf. esoterical), 공개적인, 통속적인(popular), 평범한(simple) )과 에소테릭(esoteric;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밀교는 내적인 또는 숨겨진 견해, 믿음 또는 가르침을 뜻한다. 에서테리시즘(Esotericism, 밀교)은
내부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에소(ἔσω esô)의 합성어인 에소테리코스(ἐσωτερικός esôterikos)에서 유래한 낱말이다.
이에 따라 밀교는 ‘더 내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전적 정의의 밀교의 반대말은 현교(顯敎 · Exotericism)로,
‘외적인 또는 드러난 견해, 믿음 또는 가르침’을 뜻한다.)이라 하는데,
불교적 용어로 현교적(顯敎的) 차원과 밀교적(密敎的) 차원이라 할 수 있을까.
표층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경전(經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경전의 문자적인 뜻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뜻을 깨쳐 나가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불교에도 표층 불교, 심층 불교가 있고, 그리스도교에도 표층 그리스도교,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표층과 심층 중 어느 것이 얼마나 더 두꺼우냐 하는 비율상의 차이점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그 명칭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성불(成佛), 곧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심층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자(佛子)들 모두가 다 성불을 궁극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불자들이 기복(祈福)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심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이라는 심층의 차원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 뿐 아니라 심층을 이야기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이단(異端)이라든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 한 가지는 불교인들의 경우
자기는 아직 표층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깨달음 같은 심층을 목표로 삼고 있거나
심층적인 불교를 받들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定罪)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심층적 차원을 이상으로 여기거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들을 배척하고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오교수의 말대로라면 ‘깨달은 사람’은 ‘이단(異端)’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정통파’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변하고 있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리하여 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한 대로 “우리는 분노와 어리석음과 함께 걸으면서 회한이 뒤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는 『독일인의 사랑』에서 정곡(正鵠)을 찌르고 있다.
“신학자들이 우리들로부터 종교란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이 도리어 신기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신학자들에게 ‘그만하십시오.’하고 말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우리들로부터 종교를 몽땅 빼앗아 가버렸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성직자(聖職者)가 필요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즉 그리스도교의 신부나 목사, 바라문교의 승려, 불교의 승려, 라마승, 바리사이 율법학자 같은
성직자들에 의하여 피해를 입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다투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복음서로부터 성령(聖靈)을 받고 그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을 감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진리를 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바쁩니다.
그러나 그런 증명은 그들이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령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첫댓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성직자들에 의하여 피해를 입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넘 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오메, 지기는 말씀이네요. 보수적 근본주의 교단의 목사님 대부분은, 신자가 교회에서 예수님 환상을 보고 은혜받았다고 하니 정신병자라고 하고 자다가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고 담배를 끊었다고 하니 이단이라고 하더군요. 인간의 눈에 어떻게 예수님이 보이며 성령님 목소리가 들리느냐고요.즉 성직자인 자신의 눈에는 하나님 환상이 보이지 않고 성령님 음성도 듣지 못하는데 교회 나온지 얼마되지도 않은 신자가 바로 그런 체험을 하였다고 하니 위험한 사람이라고 멀리하여 상처를 주어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목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당회의 불투명한 재정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폭력을 행사하고 변호사를 선임하여 교회에 출입하지 말것을 요하는 출입금지가처분소송을 제기하고요.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그런 신자 한명은 교회 장로들이 변호사를 사고 그 변호사가 검사에게 로비하여 이상한 사건을 만들어 구속시킨 사건도 있습니다. 교회의 이런 만행을 가만히 보고 그냥 참아야 하는게 주님의 가르침일까요? (^^) 또는 성도의 도리일까요. 다른 교인들은 그걸 알아도 당회에 찍혀 집사나 권사나 장로를 못할까 싶어 입도 딸싹 못하고 있습니다. ^^ 썩은 생선 냄새가 진동하는 이런 것들이 개혁교회라고 하니...참..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처럼 성경의 구절구절을 꿰고 앉아서 지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무슨 식사기도를 중언부언하며 몇십분이나 하여 판에 있는 삼겹살은 다타버리고...(^^) 기도를 온갖 현란한 언어를 섞어가면서 길게 해야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니고 (^^) 존경하는 담임목사님께서 십일조 헌금 많이 하는 장로나 집사 권사의 집에만 심방가고 산 까꼬막(꼭대기의 부산사투리)에 있는 빈곤한 성도의 집에는 10년이 되어도 심방 한번 가지 않고 교회 직분에도 끼워 주지를 않고,,,, 이런 인간들에게 목자라는 칭호를 붙혀 주어야 할까요?
교회에서 상처받아 안티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완상님의 저서 몇개에 대하여도 이제사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팔아 먹고살고 돈장사하는 인간들, 이런 것들이 목자라고 버티고 앉아 온갖 행패를 다부리고...정말 치밀어 오르는 분노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때가 되면 이런 교회에서 상처받아 교회를 떠난 모든 안티들을 전부 성공회에 모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