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만에 생명의 은인을 찾아뵙다니!
솔향 남상선/수필가
우리기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에‘철들었다’‘철이 났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철이 들기도 하지만 나 같이 우둔한 사람은 철이 늦게 나서 후회의 한숨으로 일관하는 자도 있다. 소중한 걸 잃은 후에 깨달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존재라 하겠다. 소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린 단어를 등에 업고 사는 사람이니 좀 덜 떨어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인생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다듬어지는 존재라 생각한다.‘옥도 쪼아내어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이루어 질 수 없고 사람도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는‘옥불탁불성기 인불학 부지도(玉不琢不成器 人不學不知道)’란 말이 생각난다. 한서‘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그릇다운 용기도 못 되면서 쪼아내고 다듬는 과정이 순탄치 못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괴로웠다. 코피 흘리며 고학하여 대학을 나와 아내를 일찍 보내는 아픔까지 가졌으니 말이다.
아내는 떠났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내의 잔영은 지울 수 없다. 아내의 냄새가 묻어 있는 비망록 속의 단상이 많지만 몇 개만 대충 적어 본다. 아내는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친정엘 갔다. 그런데 5일만 있다 온다던 아내가 10일이 돼도 돌아오질 않았다. 집 전화도 없고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니 답답하기만 했다. 아내가 오기만을 벼르고 있는데 아내가 돌아왔다. 지금 같으면 늦게 오게 된 사유를 물어보고 처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서「아내는 처음에 잡아놓지 않으면 평생 고생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고지식한 바보는 그 말이 진리인 양 인사만 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는 참 괜찮은 여인이었다. 놓친 물고기가 크게 보인다더니 어쩌면 그 말이 공감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7남매의 가난한 장남한테 시집와서 그 엄청난 고생 다 감내해가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린 적 없는 천연기념물 같은 여인이었다.
다른 부부들은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무엇을 집어던지는 소란을 피우는데 우리 집은 정 반대였다. 소위 침묵하는 동안 반성하게 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거였다. 아내는 기류가 이상한 걸 감지했던지 저녁 먹고 울기 시작했다. 돌아온다던 약속 날짜를 못 지킨 건 잘못했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했다. 일할 사람이 없어 연만하신 장모님이 보리 베기를 하시는데 차마 그냥 올 수가 없어 도와드리고 오느라 늦었다는 거였다. 이것이 아내와 평생에 단 한 번 있었던 부부싸움이었다. 사정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냉전으로 일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내는 가난한 집에 시집 와서 엄청난 고생을 하며 살았다. 방광암환자 시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다. 그랬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나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한 번은 내가 대덕고 재직시 우리 반 학생이 대형 사고를 쳐서 밥도 못 먹고 걱정할 때가 있었다. 그 때에 아내는 내가 안 돼 보였던지 응원자가 되어 한 마디 하는 말이,
“하늘이 도와주실 거요. 식사도 하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지금도 아내의 그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숱한 추억들이 때를 알았는지 꼬리를 물고 아는 체하고 있다. 두서없이 적어 본다. 노심초사하던 아들의 서울 대 합격소식을 들었다. 희소식을 듣고 밥상머리에서 우리부부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방송국에서 TJB 교육대상을 받을 때 아내는 그렇게 기뻐했다. 그랬던 과거의 추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마련하기까지 31번이나 이사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이삿짐을 혼자 쌌디. 그래도 아내는 바가지 한 번 긁는 일이 없었다. 내 둔감하다지만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게다가 남편이라는 사람은 고3 담임 한답시고 아침 일찍 학교로 달아나고 야간 자습 감독한다고 가정사를 모른 채 살고 있으니 아내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아내가 출산하려고 강재화 산부인과에 입원허여 딸(보라)을 낳았다. 딸애가 울지를 못했다.
원장님이 부르셨다. 울지 못하는 아기는 인큐베이터에 넣어 관리를 해야 하는데 당신네 병원엔 인큐베이터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가 보라는 거였다. 다급하여 방소아과를 찾아갔다. 마침 그때 우리 반(대전여고) 학생의 아버지가 방소아과 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기가 출산 후 울지도 못하고 숨이 고르지 못해서 왔다하니 빨리 아기를 데려 오라는 거였다.
이렇게 해서 딸아이가 방소아과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지 10일 만에 정상이 돼서 퇴원을 했다. 방소아과 덕분에 딸애를 살린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났다. 고마움에 딸아이를 살려주신 방소아과를 찾으려 했다. 이사를 했는지 소중한 분을 만날 수 없었다.
아내는 내가 학교를 옮겨 다닐 때마다 잊지 않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우리 보라가 시집가기 전에 생명의 은인을 빨리 찾아뵈어야 할 텐데….”
여러 해 동안 수소문 끝에 딸애의 생명의 은인 방소아과 원장님 주소를 알아냈다. 대덕구 도룡동에 사신다는 거였다.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귀인의 거주지를 알아냈다.딸애(보라)를 데리고 31년 전의 딸애 생명의 은인을 찾아 방문길을 나섰다. 운전하는 차 트렁크 속에는 바리바리 싼 검정콩 1말. 마늘 한 접. 참깨 1되가 숨 쉬고 있었다. 거기다 딸애가 신통하게도 저의 엄마를 닮아서인지 편물점 실을 사다가 틈틈이 뜨개질하여 마든 장갑 한 켤레가 검정콩부대 옆 팩 속에 정겨운 자리를 하고 있었다.
‘31년 만에 생명의 은인을 찾아뵙다니!’
그 엄마의 그 딸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딸애의 얘기인 즉은 생명의 은인인 소중한 분을 찾아뵙는데 작지만 보은을 하고 싶어 장갑 한 켤레를 떴다고 했다. 털실 사다 시간 있을 때 틈틈이 뜬 장갑이다. 약소한 정성이지만 마냥 음수사원(飮水思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준 방소아과 원장님의 느꺼운 사랑에 감사를 드린다. 보은으로서는 부족하지만 검정콩 한 말과 장갑 한 켤레로 31년 동안 얼룩졌던 마음을 달래 보았다. 검정콩 한 말과 장갑 한 켤레, 우리 보라의 영원한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심코 마시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그 근원을 생각해 보고 마시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을 실천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생명의 은인에게
겨우 검정콩 한 말과 털실장갑 한 켤레로
보은을 이렇게 해도 되는지 조금은 부끄러웠다.
첫댓글 3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은하신 사모님의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맞아요.
보은의 마음을 잊지않는 따님은 꼭 남상선 선생님의 인품을 닮았군요.
인생을 풍요로운 정신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 입니다.
가슴 따뜻한 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