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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낙천주의 사상의 행복론
반경환의 {행복의 깊이} 1, 2, 3, 4권
{행복의 깊이} 제1권: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2권: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3권: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의 세목에 대하여
{행복의 깊이} 제4권: 사색인의 십계명
{행복의 깊이} 제4권
----사색인의 십계명
사색인의 십계명
1, 깊이 있게 배운다;
우리는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와 함께, 오래 오래 살아볼 필요가 있다.
內面化의 오랜 과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앎에 의한 제이의 천성이지, 앎 이전의 제일의 천성이 아니다.
2, 잘 질문한다;
외디프스가 그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도 스핑크스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오딧세우스가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사이렌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영웅적인 용기와 匕首가 필요하다.
모든 진리는 시간과 장소에 의해서 규정되는 잠정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우리 학자님들, 그대들은 왜 노벨상을 타지 못하고, 한국문학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는 즐거움만을 만끽하고 계시는지요? 도대체가 아무런 명명의 힘도 없는 그대들이 한국 사회의 파산 상태의 주범들이 아니시던가요?
3, 神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조건의 예배와 복종을 강요하지만, 나는 그가 발기부전증의 환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와의 간통으로 예수를 얻었지만, 바로 그때, 치명적인 매독으로 성 기능의 장애를 입었다는 것을 우리 신성모독자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예수 이후, 하나님이 아들을 얻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神正論은 우리 인간들을 개나 돼지처럼 학대하는 관점에 불과하다.
4,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낙천주의자로서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이 말은 나의 범죄 행위가 있고, 그 다음에 세계가 있다라는 뜻이다.
創字에는 칼 도(刀)字가 들어 있다.
나의 사상의 신전, 낙천주의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꿈과 행복이 들어 있고, 언제나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
5,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넓고 깊은 바다에는 모든 강물들이 다 흘러 들어오고 있다.
오늘도 파도와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모든 물고기들은 ‘논쟁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장미 같은 지식, 언제나 충직한 개 같은 지식, 화류계 여자 같은 지식, 기생 오래비 같은 지식, 사이비 학자 같은 지식, 일본병정이나 독일 병정 같은 지식, 유태인이나 중국인 같이 돈만 아는 지식, 단 하나의 진리만을 선호하는 기독교인이나 공산주의자 같은 지식, 공공복리와 애국심만을 떠들어 대는 지식, 언제나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을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식 등----.
우리들이 진정으로 소망하고 있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는 부분을 전체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전체를 부분과 관련시켜 볼 줄 아는 깊이 있고 종합적인 시야를 확보한 지식인일 수밖에 없다.
6,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우리는 실패를 할 때마다 더욱더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7,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세목의 진실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대로, 리얼리티, 혹은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면 우리인간들의 삶과는 무관한 뜬구름 속의 이야기가 되거나 언제나 부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 사색인들의 지식은 언제나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그 줄기를 뻗어가야 하며, 수많은 가지와 무성한 잎들로 넓게 넓게 퍼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이그드라실 나무처럼----.
8, 언제나 낙천적이어야 한다;
고통도 두렵지가 않고 불행도 두렵지가 않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혹은 의지박약한 자들만이 고통과 불행을 두려워 한다.
모든 시와 신화와 종교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9, 더욱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나는 오늘도 나를 더욱더 호된 채찍질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호머, 괴테, 셰익스피어, 니체, 쇼펜하우어, 부처, 예수......,
나는 언제나 더욱더 강력한 적들을 발견하고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10,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낼 능력도 없다.
만인대 일인의 싸움----,
무지몽매한 한국인들과 철학자와의 싸움----,
나는 오직, 고립무원의 단 한 사람의 성실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낙천주의의 사상가로서 지혜, 용기, 성실을 나의 철학적인 화두로 삼아왔다. 지혜, 용기, 성실은 그러나 낙천주의자의 핵심적인 사상이 아니라,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 즉 낙천주의자의 생활의 태도를 말한다. 좋은 생활의 태도는 좋은 학자의 태도를 낳고, 좋은 학자의 태도는 좋은 생활의 태도를 낳는다. 지혜는 이 세상의 만물의 이치를 밝혀주는 빛이며,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두뇌가 명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뇌가 명석하지 않은 자에게는 모든 지혜가 눈 먼 소경 앞의 그것에 지나지 않지만, 두뇌가 명석한 자에게 있어서의 지혜란 그의 두 발에 날개를 달아주고, 그 모든 것을 발밑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종합적인 시야를 가져다가 준다. 보다 큰 그림, 보다 넓은 종합적인 시야는 지혜로운 자의 덕목이지만, 그러나 그 덕목이 곧바로 그를 대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의 지혜가 그 실천적인 용기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의 지혜는 지혜가 아니라 곧바로 그 주체자와 타인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플라톤의 「향연」의 동성애는 고대 그리스 사회 속의 상류계급 인사들의 변태적인 사랑에 불과하며, 좀 더 나쁘게 말한다면, 상류계급 인사들이 ‘애자’와 ‘애소년’의 관계를 통하여 그 지배계급의 구조를 재생산해 내는 사악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진 어른들은 그 美소년과의 사랑을 통하여 그 소년의 미래의 인도자가 되어주고, 또 그 美소년은 미래의 ‘애자’가 되어서 또다른 소년의 미래의 인도자가 되어준다. 나의 이와도 같은 사랑의 의미에 대한 천착은 이미, 앞에서, 제기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모든 문화가 힘에 의해서 구축되고 그 힘에 의해서 성장해 나가듯이, 비평 역시도 힘에 의해서 구축되고 그 힘에 의해서 성장해 나간다. 실증주의 비평, 현실주의 비평, 정신분석 비평, 구조주의 비평, 탈구조주의 비평, 현상학적 비평, 그리고 나의 낙천주의 비평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비평이란 모든 분야에서 그 힘을 기르는 수단으로 작용을 하며, 어떠한 총과 칼과 화약 냄새도 없이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이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스포츠, 오락, 심지어는 연애까지도 그 비평의 장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성장해 나갈 수가 없다. 비평만이 위대하고 비평만이 고급문화의 최종적인 심급인 것이다. 신생아의 첫 울음 소리는 그 비평의 장에 내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일는지도 모른다. 아아, 우리 학자들이여, 어서 빨리 그대의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 칼날’(질문의 칼날)을 들고 비평의 장에 나서 보아라! 바로 그러면, 그때에는, 그대는 소크라테스처럼, 플라톤처럼,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만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낙천주의는 이제까지의 통속적인 낙천주의이지, 신성모독자로서의 내가 주창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아니다. 너무나도 쉽고 안이한 결말과 가짜 화해, 그리고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과 그 원인들을 외면하고 무사안일 속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는 낙천주의자들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퇴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이 도덕인 것은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규정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힘으로써 강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퇴폐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도덕을 부정하고 그가 소속된 공동체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낙천주의는 더 이상 내가 주창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아니며, 그것은 하루바삐 퇴폐주의로 폐기처분해 버려야 할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낙천주의는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긍정하는 사상이다. 낙천주의는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나의 사상의 신전, 낙천주의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꿈과 행복이 들어 있고, 언제나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2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진정한 스승은 하늘의 태양과도 같지만, 그렇지 못한 스승은 이내 그 수명을 다해버리는 촛불과도 같다.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의 스승은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덧 우쭐해 진다.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은 스승에 대한 긍정과 그리고 그 긍정을 넘어선 존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의 스승은 기분이 나빠지고 어느 덧 모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스승에 대한 존경은 커녕, 스승의 존재에 대한 강한 부정과 그 부정을 넘어서서 경멸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스승은 간이 크고 대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반박할 수 있는 제자만을 사랑해야 하고,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새싹들을 길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네, 그렇습니다’만을 듣기 좋아하는 스승은 자기 자신의 손바닥만한 권위와 행복을 위해서 제자들의 장래를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하지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를 듣기 좋아하는 스승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여 제자들의 미래의 희망을 길러내는 순교자라고 할 수가 있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2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모든 교육의 목표가 ‘전인 교육’이라면 지금까지의 교육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며,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만을 양산해온 역사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처럼 뛰어난 두뇌와 행운의 여신의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소망했던 문화제국, 즉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지 못했고, 나폴레옹 역시도 그처럼 뛰어난 두뇌와 ‘불가능은 없다’라는 영웅정신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소망했던 ‘유럽연방의 건설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요컨대 보들레르, 랭보, 모짜르트, 반 고호, 폴 고갱, 호머, 괴테, 셰익스피어 등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며, 실패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3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꿈과 그 좌절에는 얼마나 엄청난 아픔이 배어 있었던 것일까? 세계적인 대사상가로서의 투옥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 그 죽음의 위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두 번 씩, 세 번씩 연거푸 시라쿠사를 방문하고, 이미 이승의 생을 다한 것 같은 77세의 몸으로도 또다시 투옥되었던 그의 좌절에는 얼마나 엄청난 아픔이 배어 있었던 것일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는 플라톤이 이상주의자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주의자로 그려져 있지만, 그러나 플라톤은 이처럼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단 하나 뿐인 그의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그는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그 불가능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불가능의 꿈을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의 실패는 그 어떤 승리보다도 더 아름답고 값진 실패일 수밖에 없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3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흔히들 독일 정신은 뿌리로, 이태리 정신은 잎으로 만든 월계관으로, 프랑스 정신은 꽃으로, 영국 정신은 열매로 표상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은 어떻게 표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미국과 중국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꿈꾸고 있는 만큼, 그들의 정신은 이 뿌리와 왕관과 꽃과 그리고 그 열매로 표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영원한 대제국을 꿈꾸고는 있지만, 그 제국을 결코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 정신은 ‘벌레먹은 낙과’로 표상되고,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國號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어떤 목표도 없는 만큼, 그 어떤 새싹도 틔워볼 수 없는 ‘쭉정이’로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 좀도둑질로 유명한 국민의 나라요!
----{행복의 깊이} 제4권, 제3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리얼리즘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공산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을 지나치게 경직되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사회주의의 리얼리즘으로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가 가능한 공산주의는 건설할 수도 없지만, 플라톤이 저마다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서 평민계급, 군인계급, 철인정치가 계급으로 규정한 바가 있듯이, 언제나 그 구성원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서 사회적인 위계질서가 세워진 공산주의는 가능하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사유재산제도는 공동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법률과 제도의 한계 내에서, 가능하면 최대한도로 보장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무모순의 원리로서의 일관성은 나의 리얼리즘의 전제조건이며, 나의 현실주의는 삶의 본능의 옹호로서의 현실주의이다. 신화적 리얼리즘과 역사적 리얼리즘, 그리고 성적인 리얼리즘과 내면 의식의 리얼리즘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적 리얼리즘은 초월성의 세계를 다루고, 역사적인 리얼리즘은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을 다룬다. 성적인 리얼리즘은 우리 인간들의 성적 욕망을 다루고, 내면 의식의 리얼리즘은 우리 인간들의 심리, 즉 내면 의식을 다룬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4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그러나 장 자크 루소는 어느 누구보다도 착하고 선량한 마음씨로 그의 도덕철학을 무장시켰지만, 그 도덕철학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점에서 몹시도 괴로워했던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와 친절은 만인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계약론자로서의 너무나도 당연한 처세술이었지만, 에밀을 출간한 이후, 그가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그처럼 가혹하게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으로서의 독창성과 그 자유를 극대화시킨 결과이다. 사회계약론자가 그 사회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부적격자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역설과 그 비극적인 참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천재성은 인정을 하지만, 때때로 그의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도덕성은 도저히 인정해줄 수가 없다. 그는 “나는 악을 행할 때는 노예가 되며 뉘우칠 때는 자유인이 된다”라고 값싼 도덕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으며, 이런 점에 있어서 그의 제자 에밀은 도덕적인 기계 인간이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 즉 낙천주의자는 신성모독자이며, 그가 악을 행할 때에는 자유인이 되며, 뉘우칠 때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사회계약론자로서의 루소를, 고독한 산보자로서의 루소를, 범신론자로서의 루소를, 그리고 신성모독자로서의 루소를 사랑하고 있으며, 나는 그를 나의 낙천주의 사상으로 더욱 더 크게 끌어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4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의 지나치게 편협한 도덕철학의 산물이면서도 그가 살다가 갔던 동시대의 산물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로서 자살자의 삶을 옹호하지 않고 부처와도 같은 성자의 삶을 옹호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를 찬양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인 지상낙원의 삶을 찬양한 바가 있다. 그의 삶의 본능의 옹호와 지상낙원에 대한 찬양은 그가 거꾸로,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살아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의 염세주의는 낙천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염세주의이며, 그는 영원히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臣民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4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오늘날 세계화는 미국의 이익을 세계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미제국주의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고, 바로 거기에는 선악을 넘어선 강자의 논리만이 횡행을 하게 된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적이다”라는 레닌식의 흑백논리는 영원한 제국의 논리이며,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그 어떤 행위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군사적인 힘에의 의지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그 모든 것이 제 멋대로이다. 이웃 민족국가의 주권은 무차별적으로 짓밟으면서도 자국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자유시장 경제논리를 역설하면서도 철강업과 섬유업,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는 보호무역주의로 일관한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휴머니즘)는 그처럼 역설하면서도 절대적인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3세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항상 국제법의 준수를 주창하면서도 UN의 합법적인 승인없이 이라크를 침략한다. 또, 그리고, 유럽연합이나 유라시아의 통합은 옹호하면서도 언제, 어느 때나 미제국주의의 통치질서를 강요하고, 교토의정서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약에는 끝끝내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제국의 힘은 옳든 그르든 미국의 일방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미국은 자기 만족적인 독트린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5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날이면 날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제국의 꿈을 접을 리도 없고, 어떠한 외교적인 노력으로도 그들의 제국의 꿈을 좌절시킬 수도 없다. 일본의 힘은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이제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의 문턱을 올라 가려고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보다도 더 잘 살거나, 적어도 그 힘이 대등해 지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또다시 식민지배의 치욕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보다도 더 잘 살거나, 적어도 그 힘이 대등해질 때, 바로 그때만이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야욕을 접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무조건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도 사이 좋은 이웃 나라를 위해서 오늘도 전진하고, 또 전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깊이} 제4권, 제5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성실함은 문화적 영웅의 모태이며, 게으름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사기꾼들)의 모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기꾼들의 양성소이며, 그들이 강조하는 근면은 광기가 되고, 또한 그들이 강조하는 성실함은 맹목이 된다. 성실한 자의 목표는 하늘의 태양이며, 그의 약속은 늘 푸른 소나무이다. 게으른 자(사기꾼)의 목표는 언제, 어느 때나 밤하늘의 먹구름이며, 그의 약속은 썩은 고사목枯死木의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여!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근면이 광기가 되고, 성실이 맹목이 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행복의 깊이} 제4권, 제5장 [사색인의 십계명]에서
반경환 전집 {행복의 깊이} 1, 2, 3, 4, 도서출판 지혜, 4X6 각권 값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