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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놓고 울기라도 해 봐요 = 마가복음5;35-43(181111)
PW : 믿음 BIW : 울어라 AG : 죽은 소녀의 엄마
TS :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목 놓고 우는 것이다.
토마토들이 소풍가는 이야기
토마토 가족이 온 산에 불긋불긋 물들어 있는 단풍을 구경하려고 소풍을 갑니다.
그런데 자꾸만 아기 토마토가 장난을 치면서 뒤쳐지는 것입니다.
화난 엄마 토마토가 “아가야 빨랑빨랑 가자.
그래도 아기 토마토가 장난을 치면서 계속 뒤처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엄마 토마토가 버럭 화를 내면서 ”넌 커서 뭐가 될려고 그렇게 까부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기 토마토가 무엇이라 했는지 아세요?
“저요. 케찹요....”
그렇습니다.
토마토는 케찹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토마토는 케찹으로 변신하여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은 무엇으로 변신해야 될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변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소서.
우리들도 하나님께, 성도님들께, 가족들에게 행복을 주는 행복쟁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P4.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12살 난 딸이 있다.
유대인의 여자아이는 만 12살이 되면 “바트 미쯔바(Bat Mitzvah ; 계명의 딸, 율법의 딸)”라는 성인식을 거행한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만으로 12살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살이기 때문에 성인식을 했거나 곧 성인식을 하게 될 딸이다.
유대인 여자아이들은 성인식을 하게 되면 여성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오늘날의 초등학교 5∽6학년 여학생이면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 여인으로 가는 길목에 서게 된다.
12살이면 얼마나 예쁘고 단아하고 생기발란하고 씩씩하고 귀여울 때인가.
12살이기 때문에 야이로의 딸은 꿈도 많고 해보고 싶은 일도 많고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사랑을 다 받으면서 자라고 있는 딸이다.
이렇게 생기발랄하게 자라며 집안에 웃음보타리를 풀어놓아야 될 딸이 집에서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야이로의 아내는 그런 딸을 지켜보고 있다.
남편은 요즘 핫하게 잘 나간다는 예수님을 모시고 와서 딸의 병을 고치고 살려야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셨는데, 함흥차사가 되어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
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들어하고 있다.
어린 것이 죽음을 앞에 놓고 이리도 힘들어하고 있는데 애미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너무 속상하고 맘이 너무너무 아프고 저리다.
내가 딸 대신에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내가 딸 대신에 죽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다.
여인은 맘만 있을 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예수님을 모시고 오겠다는 남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고 딸은 더욱 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되는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엄마는 얼마나 아프고 저릴까.
회당장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던 딸은 ‘엄마... 엄마... 너무 아퍼. 나 곧 죽을 거 같아. 아빠가 보고 싶어.’하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사랑하는 딸이 금방 죽은 것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엄마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엄마는 어떤 심정일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고통스러울까?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어린 딸이 지금 너무나 안타깝게도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우리들은 정말 미쳐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들은 정신인들 온전할까?
엄마란 사람은 아이들이 조금만 아파도, 아이들이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자신의 온 몸이 아프고 상처를 입은 것처럼 울고불고 하지 않던가?
병원으로 데려가서 치료받도록 하지 않던가?
다 아는 병, 며칠만 고생하면 다 낫는 병, 조금만 고생하면 치료되는 병을 앓고 있어도 엄마는 안쓰러워하고, 너무 불쌍하다고 안달하지 않던가?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하는 것이 엄마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지금 딸이 죽은 것이다.
내 곁을 떠나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몹쓸 병 때문에 고생 고생하던 딸이 이제 죽었으니까 이제는 더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네.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하는 엄마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나 마음은 아이를 보내고 나서 한참 지난 후에 가지는 마음이지 곧 죽은 딸을 향하여 가지는 마음은 아니다.
금방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하늘 아버지께서는 죽은 소녀의 엄마에게 딸을 위하여 목 놓고 울라고 하신다.
지금 죽어가는 딸을 앞에 두고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딸을 위해서 우는 것 밖에 다른 것은 할 일이 없다고 여겨주신다.
엄마는 용한 의사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좋다고 하는 약은 다 구해서 먹여봤지 않은가?
좋다고 하는 약은 다 먹여봤는데도 딸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더욱 더 악해져만 가지 않았나?
지금 딸은 엄마의 애달파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지금 엄마는 죽은 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통곡하며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회당장 야이로의 아내는 남편을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여인이다.
메시야로 오셨다고 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믿는 여인이다.
엄마는 예수님은 잘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잘 아는 여인이기 때문에 울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너무너무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회당장의 집에서는 죽은 소녀의 장례식을 준비한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1일장을 하기 때문에 곧 바로 장례식을 준비한다.
회당장의 종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달려 나간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이 발생하게 되면 상주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대신 돈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들을 고용한다.
꽃을 가지고 헌화하는 사람들도 돈을 주고 고용한다.
관을 메고 가야 되는 사람들도 돈을 주고 고용한다.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가 완료된다.
상주들 대신에 울어주는 사람들은 울기 시작한다.
꽃을 바쳐야 되는 헌화하는 사람들은 헌화한다.
유대인들은 정결한 물로 시신에 정결식을 거행하고, 향수로 염을 하고 널빤지에 시신을 올려놓고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서 관을 메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된다.
그렇지만 소녀가 죽었지만 아직은 아버지 야이로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지내던 방에 그대로 시신을 두고 그 시신 곁에서 울고, 헌화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이 예수님과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더니 온 집이 시끄럽고 요란법석을 떨고 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대신 울어주던 사람들, 헌화하던 사람들, 관을 들어주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아니 이 양반이 정신이 어찌 된 것이 아니야. 우리가 분명히 딸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헌화하고 울고 있지 않나? 그런데 아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다고... 정신 나간 소리 하는 구먼.’하면서 비웃으면서 야단을 친다.
예수님은 그들을 회당장의 집에서 다 내어 보낸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의 부모님과 같이 온 제자들만 데리고 죽은 딸의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신다.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잠깐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 기도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도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어린 딸의 영혼을 거두어 가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어린 딸의 영혼을 되돌려 주셔서 이들에게 영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옵소서. 이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들려주옵소서. 하늘 아버지여,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메시야로 보내주신 나를 드러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은 딸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소리로 “달리다...쿰. 아이야 이젠 일어나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순간 소녀의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엄마와 아빠는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분명히 딸이 죽었었는데... 이렇게 다시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다니... 이게 어찌 된 것인가? 딸이 다시 살아나다니...”하면서 감격스러워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들도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이 분이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는 분이구나. 정말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로구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죽은 소녀는 죽을병을 지닌 채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죽었던 소녀는 죽을 수밖에 없도록 했던 지긋지긋한 몹쓸 병도 깨끗하게 치료받는다.
이제는 완전한 이스라엘의 딸로, 하나님의 딸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D4.
① 일부러 지체하시고 늦게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듣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길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을 고쳐주시면서 시간을 지체하신다.
집에서 남편이 속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야이로의 아내는 남편과 예수님이 빨리 돌아오지 않고 왜 이리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빨리 돌아오지 않는 남편만 야속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을 고쳐 주시면서 지체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딸을 고치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딸을 다시 살리려고 오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죽어가는 딸이 죽고 사람들이 한창 장례식 준비하고 있는 시간에 오셔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과 주권은 죽을병에 걸린 딸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은 딸을 살려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지체하면서 늦게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장 앞에 놓여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쓰릴 넘치는 일을 해결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생사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작은 것보다는 좀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② 큰 울림과 감동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아이의 아빠, 엄마에게 딸을 다시 살려주심으로 커다란 감동과 큰 울림을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생명을 다시 살려주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서 커다란 감동과 큰 울림을 주신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감동과 큰 울림을 주신다.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나자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모습이 커다란 감동과 큰 울림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사람들이 놀라며 큰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냥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상한 분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다는 메시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에게 사소한 감동에서부터 커다란 감동까지, 감동과 울림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
사람이란 존재는 감동과 울림을 받을 때 변화된다.
사람이란 존재는 큰 감동과 울림을 받을 때 살아갈 소망이 불꽃처람 일어난다.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감동과 큰 울림을 받지 못하면 날카로운 칼날과 가시가 되어 꼭꼭 치르고 상처주고 상해를 입히는 사람으로 바뀐다.
사람이란 존재는 무언가를 통해서라도 감동을 받을 때 일어나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변화받는다.
사람이란 존재는 감동을 받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감동을 받게 되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다.
지금 예수님은 죽은 딸을 살려주심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울림을 입혀주고 있다.
우리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셔서 감동과 울림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
우리들도 감동을 입게 되면 전폭적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으면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앞으로 점점 더 신앙생활하기가 어려워질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절개와 지조를 지킬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실 것이다.
③ 야이로의 아내에게, 소녀의 엄마에게 큰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
딸이 죽을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갈 때는 야이로 부부에게는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사람 사는 기분이 난다.
이제는 사람 사는 것처럼 산다. 이제는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껴진다.
가정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딸이 아프고 죽어갈 때는 야이로의 가정에는 전혀 웃을 수 없다.
항상 어둠의 그림자가 짝 드리워져서 불행한 가정, 지옥 같은 가정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간다.
그랬던 가정이 이제는 완전히 달라지고 바뀐다. 삶의 생기가 돋아난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 전과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이후의 삶은 180도로 바뀐다.
딸은 엄마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딸이 살아남으로서 엄마에게는 새로운 친구가 생긴다.
딸은 엄마와 같이 지내면서 엄마의 편이 되어 엄마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준다.
딸이 점점 성장하면서 어엿한 여인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한없이 부듯하고 행복이 넘치게 된다.
12살이기 때문에 성인식을 했거나 곧 성인식을 하게 될 딸이 이제는 엄마와 함께 여인으로 쑥쑥 커가면서 엄마에게는 딸의 혼사까지도 걱정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딸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믿음의 엄마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인은 엄마로서 할 일을 했구나 하는 넉넉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엄마에게 행복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일이라는 믿음의 생각하니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하면서 더욱 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지게 된다.
L4 & B4
야이로의 아내, 죽은 소녀의 엄마는 지금 죽어가는 딸을 위해서, 이미 죽은 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목 놓고 우는 것뿐이었다.
하늘 아버지는 야이로의 아내에게, 죽은 소녀의 엄마에게 하늘 아버지께 목 놓아 울면서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며 울라고 감동을 주신다.
여인이 애원하며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죽은 딸을 살려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들도 하늘 아버지께 울면서 애원하면서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치인들을 향하여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한다한들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겟는가?
그들은 자신의 정권욕과 정당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건국이 되었던 나라들이 망할 때는 동일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권력을 쥔 세력들은 나라와 민족이 망하든 말든 자신의 정권욕을 챙기기 위해서 혈안이 된다.
자신의 정권욕을 지키기 위해서 반대파들은 정적이라는 미명 아래,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숙청, 숙청, 숙청하면서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삼국시대에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할 때도 그랬고, 통일신라가 망할 때도 그랬고, 고려가 망할 때도 그랬고, 조선이 망할 때도 그랬다.
오늘날에도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욕을 쟁취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이들이 아니던가?
자신들의 정권욕을 챙길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떠난 유물론주의자들인 공산주의건, 좌파세력이든, 이단들이든, 동성애자들이든, 진화론자들이든, 무속인, 점쟁이들이든 가리지 않고 자기들의 편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욕망을 챙기려고 하지 않던가?
심지어는 유일한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조차도 자신들의 정권욕에 사로잡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하지 않던가?
소위 잘 난 사람들 때문에, 엘리트라는 사람들, 잘 배워서 지식인이라 하는 이들,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 때문에 순박한 국민들과 성도님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지고 힘들어지고 있지 않는가?
순박하게 살고 싶어하는 국민들과 성도님들이 좀 더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데, 이들 때문에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절부절하고 안정이 되지 않는다.
이런 처지와 상황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우리들이 어떤 이들처럼 잘 난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소박하고 순박한 믿음, 겨우 겨자씨만한 믿음일지 몰라도 그 작은 믿음 하나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통곡하는 것이다.
우리 자유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리 가정과 자녀들, 손자손녀들, 후손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김씨3부자에 의해서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북녘 땅의 주민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김씨 왕국의 공산독재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아직도 모르는 채 종북 세력이 되어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며 우는 것밖에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동성애자들로 인해서 확산되는 에이즈질병과 이슬람난민들로 인해서 벌어질 테러의 위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인권이라는 미명으로 온갖 죄악의 터널로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며 우는 것 밖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루 벌어서 하루하루 온 가족이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야 되는 우리 서민들에게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야 되는 하층민들, 서민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며 우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애원하며 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①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불신앙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주어진 삶의 현장과 현실은 낙심할 수밖에 없고, 좌절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가고 있더라도 믿음의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와주심과 역사해 주심을 믿는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낙심하지 않는 힘을 주는 원동력이다.
믿음은 결코 좌절하여 포기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구심점이다.
믿음은 칠전팔기(七顚八起)로 다시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다.
②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울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41:10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사야43:1-3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백성이라는 확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애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분이다.
③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실 것을 기대하며 울어야 한다.
오늘 야이로의 아내, 죽은 소녀의 엄마가 우는 것은 죽어가는 딸을 고쳐 주실 것을,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통곡하면서 기도하고 매달린 것은 아니다.
그저 엄마니까, 아빠니까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우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은 결실을 여인에게 은혜와 축복으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믿음으로 기대해야 한다.
믿음이란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1:6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곧 믿음은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이로의 아내, 죽은 소녀의 엄마는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울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폭포수와 같은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울어야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와 축복 때문에 칠전팔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목 놓아 우는 것이고, 믿음은 폭포수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는 것이다.
와☺우리교회 (WA☺WOORI)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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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말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