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카페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읽을 거리를 제공함으로서 카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정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있더라도 제현들의 이해를 구한다. 발전적인 토론이나 토의를 원하면 터놓고 의견을 나누겠다. |
내가 아는 글쓰기
수필은 산문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산문 중에서도 가장 긴 산문인 소설 작법을 참고로 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이하 글은 소설 작법을 동원한 글쓰기에 관한 정리다. 수필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소설의 3요소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이다. 그대로 수필의 3요소로 차용해 와도 무방하다. 비문학적인 글일지라도 주제, 구성, 문체가 글의 주된 요소가 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
1) 주제
(1) 주제란 무엇인가?
주제란 글의 정신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중심생각 또는 사상을 말한다. 주제가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글이 되고 주제가 죽어 있으면 죽은 글이 된다. 주제가 살아 있는 글을 만들려면 글에다가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 작가의 길로 가려면 “생명” “혼” 이란 말에 유념해야 한다.
나의 혼을 글 속에다 불어 넣으면 나는 죽고 글 속에서 내가 다시 부활한다. 글이 곧 내가 된다. 한두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을 묶어서 책으로 발간하면 그 글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나의 중심생각이 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혼이 책 속으로 옮겨가서 담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게 주제고 그게 살아 있어야 제대로 된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예 사조란 당대의 문학적인 조류 곧 문학 작품에 담긴 중심생각의 흐름을 말한다. 한 장의 종의 위에다 표현하는 그림도 고전주의니 낭만주의니 생명파니 야수파니 하는 류파가 있다. 음악에도 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간 화가나 음악가들이 창작해 낸 작품에 담긴 공통적인 중심 사상이 있기에 그렇게 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수필에다 이런 문예사조의 이즘을 붙여주는 평론을 보지 못했다. 우리가 창작해 내는 수필이 한 시대를 이끌만한 생각의 큰 물줄기를 창조하지 못하는 때문일까? 생각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런 생각 없이 수다 떨듯이 마구 써 내는 글인 때문일까? 시인이나 소설가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수필 창작으로 몰려드는데 그들의 중심 생각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나는 무슨 생각으로 수필을 쓰는가를 수필의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수필가라면 깊이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2) 어떤 주제가 좋은 것인가?
어떤 주제가 좋은가 하는 물음은 어떤 형의 인간이 좋은 사람인가를 묻는 말과도 같다. 널리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홍익인간)이 좋은 인간인 것처럼,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주제가 좋은 주제다. 오늘의 시대에만 유익하고 내일의 시대에는 무익한 주제보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유익한 주제가 좋은 주제다. 우리가 읽는 고전은 그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에게 읽힐 것이다. 그런 주제를 글로 담아내려면 작가인 나의 철학과 인생관과 사상이 그러해야 그런 글이 나온다. 나의 사상이 그러하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사상이 몸에 베이도록 생활화해야 한다. 좋은 주제를 만나기 위한 지름길은 생활 속에서의 자아성찰이다. 생활 속의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기르면 비로소 내가 캄캄한 암흑의 길을 밝음의 길인 줄 알고 걷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깨우침을 글로 쓰면 모두에게 유익한 글이 된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 입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는 편식의 습성과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남이 자신을 지적해서 가르침을 주는 것은 싫어하고 배척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쓴 약은 찹쌀 풀로 만든 캡슐에다 담아서 먹이고 말이나 문장의 표현은 문학이란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란 널리 인간에게 유익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섭취하도록(또는 섭취 되도록) 하고자 인간의 감성에다 호소하는(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이유는 문학은 정신레벨이 높은 특정집단만을 상대로 하지 않는 대중성을 지니기 때문) 문학이라는 캡슐에다 담아서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재미나는 이야기에 이끌려서 독자들의 정신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오도록/날카로운 이성이 빛나도록 쓴 글은 명품 중의 명품이지만 대중성이 약한 한계가 있음)
(3)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
주제는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암시적인 표현을 쓸 때는 독자가 읽고 난 뒤 긴 여운이 남도록 하는 기법을 써야 독자 스스로가 두고두고 그 내용을 회상하면서 주제를 찾아내게 된다. 쉽게 주제를 찾지 못하도록 쓰는 이유는 긴 고민 끝에 힘들게 찾아내야 오래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는 고통을 모르면 기쁨도 모르고 깨우침의 진정한 가치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글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글 중에서도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분해해보면 온갖 잡생각과 참 생각이 함께 뒤섞여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푸라기와 돌멩이가 뒤 섞인 쌀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거기서 쌀만 골라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사유다. 보통인들은 하루에 한 번도 사유를 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의 참 고민, 참 생각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니 소란스런 수다 속에 함몰되어 그저 남들과 다투기만 할 뿐인 것이다.
사람들이 사유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객관화 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객관화 시키면 쌀도 보이고 지푸라기도 보이니 먹지 못할 것을 골라내고 쌀만 취할 줄 알게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용하다는 도사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쪽 집게 도사의 힘까지 빌려서 쉽게 골라진 쌀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단 한마디의 말로서 미몽에서 깨우침으로 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길이 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겠는가? 시중에 즉문즉설을 설파하러 다니는 어떤 스님도 있더라만 즉문즉설이 쉽게 도로 통할 듯 하여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길을 찾기 위해서 오래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방황한 사람에게만 원-포인트 레슨처럼 뻥 뚫리는 효과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문학에다 주제를 담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따라야 한다. 달리 말하면 주제가 오래 기억되어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피리부는 소년"처럼 독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따라오며 사유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어떤 기법을 쓸 줄 아느냐가 바로 작가적 역량이고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혼을 옮겨 담은 책이 천년 이천년 후에도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작가인 당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4) 주제와 퇴고 작업
초심자들이 쓰는 수필들의 대부분은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겪은 특이한 체험을 쓰다 보니 "저절로 그게 주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로 초심자의 글은 중언부언이 많고,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작가 자신조차도 정확히 모르는 방향 없는 이야기를 이리저리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를 아주 오랫동안 하신 분들도 그런 오류에 빠질 때가 있다. 때문에 누구든지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글의 전개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곳으로 잘 몰아가고 있는지를 100번 이상 읽고 되읽어서 퇴고를 해야 한다. 퇴고의 작업이란 문장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만을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주제를 알차게 담기 위해 문장의 표현이나 구조까지 뜯어 고치고 세련화 시키는 작업이다. 어떨 때는 글 전체를 리모델링해야 할 경우도 있다.
좋은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 중에 더러는 자신은 퇴고를 전혀 안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나는 일반인들과는 질이 다른 천부적인 작가” 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려는 거짓심리 일 뿐이다. 훌륭한 문장, 위대한 문장은 조각가가 자신의 조각품에다 손금이 다 닳도록 사포질을 하듯이 그렇게 보고 또 관찰하고 하면서 미세한 부분까지 퇴고 질을 해야 탄생한다. 퇴고작업은 참으로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러나 퇴고를 많이 한 작품일수록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찬연히 빛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글도 이미 여러 번 퇴고 작업을 거친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퇴고 될 것이다.
* 주: 산문은 운문의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책을 묶으면서 더러는 문학수필이 아니라는 의미로 산문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운문이 문학장르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듯이 산문 또한 문학장르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운문은 리듬이나 운율등의 형식에 구애를 받는 글이고, 산문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쓴 글을 말한다. 산문에는 소설, 수필, 신문기사, 평론, 일기, 희곡, 동화, 우화, 꽁트 등 등이 있다.
(글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썼으니 다음은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 구성이란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오래 전승되도록 할 것이냐?의 숙제를 푸는 구체적인 작업이다.)
첫댓글 읽고 싶은 분만 읽으라고 해도 어제 하루 만에 서른 두 분이 읽었네요. 잠 안자고 글을 써서 큰 돈 들여서 책을 만들어서 출간해도 열명도 읽지 않는 데, 내 글을 읽고 기분이 나쁘지 않을 사람만 읽으라고 했지만 책을 만든 것 보다 더 많이 읽었네요.
현대문명은 전 세계 인류를 하나로 연결하는 소통의 다양한 수단(인터넷, 유튜브, 카톡, 문자 등등)을 개발해 놓고 있지요. 작가와 독자의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고, 더 많은 소통과 정보의 교환이 혼돈을 일으키는 부작용도 있겠지만 인류는 인쇄술과 종이의 발명에 비교될 수가 없도록 빠르게 과거의 無明에서 크게 대오각성해서 자기 자유의지로 광명의 삶을 열어 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 합니다. 묵은 관념의 세상을 수호하려는 무당 모화와 새로운 관념의 세상을 열어가려는 그의 아들 욱이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겪는 인간 정신세계의 갈등을 김동리는 그의 단편 <무녀도>에서 잘 그려내고 있지요. 이 여름 독서 피서법을 택하신 분들에게 김동리의 <무녀도>를 추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