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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설맥
진짜 지혜와 기도
야고보서 1:5-8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짝퉁에 속으면 바가지 요금을 지불합니다. 사이비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입니다. 지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다.
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타락을 하였습니까? 하와는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같이 된다”, 이 말을 마음에 받아들인 여자가 다시 나무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였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함께 먹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죄는 어떻게 시작합니까?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보면 죄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어떤 대상이 있습니다.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 것인지, 하나님의 것인지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기준입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를 그어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허락의 영역이고, 여기까지가 금지의 영역이다. 만약, 금지의 영역을 넘어가면 나는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선을 넘어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38선,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어떻게 됩니까? 월북과 월남이 됩니다. 이 선은 누구의 강요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의 의사와 결정됩니다. 넘고 안 넘고는 자기 의지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면 경고했는데, 이 경고의 메시지는 하나님 사랑하느냐와 세상을 사랑하느냐의 기준점이었습니다.
또 16-17절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의 특징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선악과의 특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먹음직하다. 보암직하다. 그리고 탐스럽다에서 수식어가 붙었지요, 지혜입니다. 즉,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선악과를 먹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왜 내가 선악과를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tv채널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리모콘입니다. 그 리모콘을 내 손에 가지고 있으면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정된 영상이 아니라 다양한 영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죄란 바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리모콘을 빼앗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최고의 지혜처럼 보이지만 가짜 지혜이고, 잘못된 지혜입니다. 사망과 멸망으로 가는 가짜 지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 최초의 시험은 진짜 지혜와 가짜 지혜를 분별하고, 그 지혜를 선택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인간은 불행하게도 이 시험에도 실패했고, 지금도 이 시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지혜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려는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삶의 방향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누구에게 밥을 얻어 먹느냐에 따라서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주는 밥을 마음이 먹으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는 밥을 먹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잠언 9:10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고, 잠언 15:33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우리를 훈계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4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 있습니다. 또는 알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힘,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 이르면 지혜롭게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해결책으로 본문 5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어떤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까? 왜 지혜가 부족합니까? 그리고 지혜가 부족함을 안다면 누구에게 구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앞 절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이 이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 땅을 살면서 당하는 다양한 삶의 문제들입니다.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신앙의 문제, 자녀의 문제, 장래의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시험이라고 합니다. 시험을 만날 때, 시험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만날 때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일입니다. ‘온전히’라는 말은 완전히, 퍼펙트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모든’, ‘각각의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시험 앞에서 그 시험에 맞는 다양한 해결책을 가져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 해결책을 아는 것만 배워도 평생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비효율적이고, 지혜로운 방법도 아닙니다. 어떤 시험이든지 무조건 한 가지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최고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낚시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미끼가 필요합니다. 어종에 따라 다른 미끼를 사용해야 합니다. 미끼에는 갯지렁이, 생새우, 조갯살, 소라, 미꾸라지, 크릴새우, 고등어 절인 조각, 오징어, 전어 등이 사용됩니다. 양식과 자연산의 고기를 잡는데 에도 다른 종류의 미끼가 필요합니다. 낚시를 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한 가지 미끼로 모든 어종을 다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만 된다면 낚시는 더 이상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시험을 만날 때마다 기뻐하면 시험은 물러갑니다. 기쁨은 만능 열쇠, 마스터 키와 같습니다. 마스터키는 어떤 방이든지 다 열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스터키와 같은 기쁨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방법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얻는다면, 우리는 백전백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백전백승하고 있습니까? 혹시 백전백패는 하지 않습니까? 백전백패는 아니더라도 한두 번 승리의 맛은 봤지만, 나머지는 모두 실패하지는 않았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승리한다는 것은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잘 알고 있는데, 실제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렇다면, 실패의 원인의 무엇일까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말은 알긴 아는데, 그 아는 것을 실천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실천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우고 넘치게 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많은 비가 와서 저수량을 채우고 채울 때, 넘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물동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채우기 전에 알 것은 나는 어느 정도의 기쁨의 양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그 시험을 이기려면 내 마음에 쌓인 기쁨의 양 만큼 기뻐하고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기쁨의 양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상대적입니다.
문제는 기쁨의 공급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뇨가 있는 분들은 수시로 당을 체크합니다. 기준 양이 초과 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듯이,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4일부터 국내 최초로 코로나19 백신 75만 명분이 공급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7천 5백 만 명이 맞을 수 있는 백신이 공급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공급이 중단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다른 사회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약속대로 백신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된다면 코로나는 종식이 되고, 우리는 자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교육, 문화, 경제, 사회 전반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백신을 기쁨이라고 생각하면 기쁨이 지속적으로 공급만 해 준다면 우리는 어떤 시험을 만나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가진 지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자, 그가 했던 첫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부귀영화까지 덤으로 주었습니다. 잠언 16:16절에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인데, 자기에게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후히 준다는 말은 신약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말로 공개적으로 준다. 성실하게 준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필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를 공급해 주시는데, 공개적으로 알도록, 또 성실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다 안주다 주다 안주다 변덕스럽게 하시지 않고, 신뢰성을 가지고 변함없이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뢰하고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꾸짖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있고, 이해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꾸짖는다고 더 알아 지겠습니까? 우리는 답답하다고 너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밖에 못한다고 꾸짖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생수가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정말 우리가 내가 가진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넘치는 은혜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께 구해야 하겠습니까?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 믿음은 흔들리게 됨으로 원하는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바람으로 마음이 빼앗긴 순간, 의심이 들어왔고, 몸은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소리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의심은 주님의 말씀보다 환경에 집중할 때 생깁니다. 그래서 의심을 이기려면,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의심을 하고, 의심에 머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7-8절을 보면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영적 에너지는 하나님께 집중할 때 오는데, 의심은 마음의 집중을 깨드림으로 결국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게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지성이란 의심없이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제발 이 시간만큼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길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도 정성을 드리지 못하면 언제 정성을 드리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영과 진리는 정성된 마음입니다. 마음이 정성으로 하나가 될 때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고, 그 응답은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만족을 주고, 감사와 찬양을 줍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던 근심과 걱정, 불평과 원망을 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지혜라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진짜 지혜를 주십니다. 시편 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어도, 깊은 웅덩이에 있을 지라도 그 곳에서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갔고, 바로의 추격군이 홍해에서 수장될 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최근 가요계는 트로트가 대세입니다. 영탁의 노래 중에 찐이야!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이 좋습니다.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찐하게 사랑할 거야 요즘 같이 가짜가 많은 세상에 믿을 사람 바로 당신 뿐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에 전부인 사람-
이 가사 중에 중간부터 개사해 보면 이렇습니다. 앞 부분은 같습니다. 요즘 같이 가짜가 많은 세상에 믿을 분은 바로 하나님 뿐,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의 전부인 하나님-이라고 고쳐부를 수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함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무조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넘치는 성령의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함으로 이 찐지혜를 받아,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시험들을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