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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절대 아니다 !!
RiVerPheoNix (sinjc****)
본시 대한민국 역사가 근본 없는 나이롱 역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과거 청산이 단 한번도 된적이 없으니 이긴놈이 정의 인가? ㅋㅋ
김두한(金斗漢)은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혈연관계가 없다.
김좌진 장군은 신민부(新民府)의 의용군을 대규모 병력으로 양성하여 대일전면전(對日全面戰)을 벌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던 시기인 1927년 6월 1일에 임시정부의 특파원 김대지(金大池)의 주선으로 나혜국과 재혼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 딸인 김강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김강자는 지난 2005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법무부와 보훈처에 국적회복 신청을 했던 위연홍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김좌진 장군은 생애에 3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첫번째 부인이 오숙근이고 세번째 부인이 나혜국이라고 한다. 두번째 부인은 바로 대한민국 제3·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한(金斗漢)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이름이 박계숙 혹은 김계월이라고 한다. 오숙근은 딸인 옥남을 낳았는데, 4~5세 때에 불치병으로 죽고 말았다. 오숙근과 나혜국이 김좌진 장군의 아내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름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김두한의 어머니이다.
과연 친박연대 국회의원 김을동의 아버지인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는 것일까? 김을동의 아들인 TV 드라마 연기자 송일국이 김좌진 장군의 외증손자라고 알려진 세간의 소문은 과연 사실일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인『매일신보(每日申報)』1925년 9월 15일자 기사에는 김두한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영고탑(寧古塔)에 근거를 두고 노령(露領)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일과격파의 수령 김좌진이란 자는 정부(情婦) 김계월과 그 사이에 낳은 아들 김두한을 데려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오늘날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바 이번 김계월도 정랑(情郞) 김좌진을 생각하고 항상 매흘히 지내던 중 지난 9일에 자식을 데리고 가산도구를 방매하여 여비를 만들어가지고 경성역을 출발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러 8년만에 부부와 부자가 반갑게 대면하게 되었다더라.’
한편『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30년 3월 17일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김좌진이) 가장 사랑하던 애첩 김계월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이란 아들이 현재 홍성에 있느니 혹은 경성시외에 있느니 하여 그 확실한 소재처를 알지 못하는 터라 애첩 김계월이 원산 쪽에서 요리업을 한다고 보도되었거니와 정작 김좌진의 아들 두한은 아버지가 있는 바람 거친 그곳과는 정반대로 고요한 조선의 도읍 개성에 있다. 그는 목하 개성 서본령 이백오십사번지에서 자기의 조모(祖母)와 같이 쓸쓸한 그날 그날을 소일하고 있다.’
이 같은 신문기사와 김두한의 회고록「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의 다음 내용을 비교·분석해보자.
‘나의 조부는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고 나의 부친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이다. 나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가문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서족(庶族)이다. (중략) 내가 일곱살때 세계전사(世界戰史)에 희귀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 있자 일경(日警)은 즉각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살 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사령관인 부친의 부음을 전해듣고 울었다. 그래서 혁명아가 되겠다고 단신 서울로 백육십리를 걸어 내려왔다’
김두한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김옥균,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옥균과 김좌진은 부자(父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김좌진 장군이 김옥균의 양자(養子)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은 1894년에 상해에서 암살되었고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는데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가? 김좌진 장군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해는 1920년이었으며 사망한 해는 1930년이었다. 김두한은 1918년에 출생했으니 청산리전투가 벌어질 당시 그의 나이는 일곱살이 아니라 세살이다. 말이 안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뒤 열살 때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울었다는 김두한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김두한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 김좌진은 청산리전투가 벌어진 1920년에서 10년 뒤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자주 나온 증언인데 완전한 날조다.
게다가『매일신보』가 만들어 놓은 가족사에서 김두한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기사가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인지 상궁의 딸이었다는 이상한 증언이 나온다. 상궁이 궁궐에서 나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고 설령 그랬다고 해도 김두한이 1918년 출생이니 아무리 멸망한 왕조의 상궁이라지만 궁궐 밖으로 나와 낳은 딸이 몇 살이나 된다고 어떻게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과 연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날조된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매일신보』나『조선일보』는 김두한의 모친을 김계월이라 하고 있으나 김두한은 어머니 이름을 박계숙이라고 증언하고 있어 크게 엇갈리는 부분이다.
김두한의 어머니가 상궁의 딸이었다는 주장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이러한 날조가 나온 배경에는 본래 궁녀가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궁궐 밖으로 나올 수 없었는데 구한 말기에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저하시키려는 목적으로 많은 궁녀들을 밖으로 내몰았기에 오고 갈데없는 궁녀들이 재가하거나 부호들의 첩으로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상궁이면 어느 상궁이었는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국내 인문학계 최고의 동양철학자인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순천향대학교 석좌교수는 ‘김두한의 김좌진 친자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모든 정보를 대강 다 흟어보고 난후에 내린 하드 팩트(hard fact)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난 부모를 모르는 고아다. 열살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왕초라는 거지 대장에게 붙들리어 장차구다리(청계천)밑 거지 소굴에서 컸다. 그런데 김두한은 선천적으로 재능을 부여받은 탁월한 싸움꾼이었다. 그 싸움질이란 무슨 일본인의 무술을 배운것도 아니고 조선 전통의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닌 순 경험적 체득의 기술인데, 김두한이 주먹질보다도 발길질에 탁월했다는 것은 그의 싸움질이 조선 전통의 태껸과 무의식적인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움직였다 하면 사람의 키만큼 붕떠서 발길로 상대방의 턱을 질러버린다. 다시말해서 그가 장차구다리 밑의 거지에서 종로일대를 제패하는 깡패 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 수가 없으며, 오로지 싸움꾼의 실력, 그야말로 적나라한 실력 하나로 주먹계의 패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논리도 가식이다.”
안동 김씨 족보에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그저 종로 거리를 주름잡던 건달패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김두한이 8·15해방 이후 우익 인사들의 눈에 띄어 대한민주청년단에 가입하여 반공활동에 참가하고 1960년대에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거짓말이 마치 사실처럼 각색되어 사회에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은 마치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것처럼 이미지가 각인되어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반면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가 분명한 김강자의 딸인 위연홍은 국가보훈처로부터 김좌진 장군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답변만 듣고 ‘쪽방’ 신세를 전전하고 있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열사를 추모하는 우당기념관 측은 위연홍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위해 현재 후원통장을 개설하여 운영하는 중이다. 그러나 김을동이 이끄는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측은 위연홍에 대해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만약 김을동의 아버지인 김두한이 정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면,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이 김좌진 장군의 손녀가 맞다면 어째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항일유격대 토벌에 참전했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지하는 세력인 친박연대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할까? 친일 경력이 있는 군부독재자의 후손과 손잡는 독립운동가의 후손? 이런 모순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필자는 비록 전문 연구자는 아니지만 역사탐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김좌진 장군의 명예가 몇몇 사람들의 권력욕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크게 상심하는 바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역사왜곡과 날조가 불러 일으킨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하고 싶다.
★ 김좌진(金佐鎭) 장군에 대한 일제(日帝)의 모략전술(謀略戰術)
김좌진 장군이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이후 밀산(密山)을 거쳐 노령 이만으로 흑룡강(黑龍江)을 건너갔다가 1921년에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서 독립군의 재건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그의 대중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김좌진이 간도의 일본영사관에 ‘귀순(歸順)’해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모략소문(謀略所聞)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재건사업은 상당한 지장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는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전투 승리로 재만한인(在滿韓人)사회에서 상당한 칭송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독립군의 재건사업을 성공적으로 전개한다면 장차 중국 침략은 물론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모략정보를 만주와 한반도내의 한국인들에게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만주의『장춘실업신문(長春實業新聞)』과 일본 본토의『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 공공연히 보도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박창욱(朴昌昱) 연변대학교 교수는 “항일독립군 사령관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하여 간도 일본영사관 경찰대의 마쓰시마[松島] 고등계 형사에게 공산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화요파에서 김봉환(金奉煥)을 시켜 김좌진을 암살하게 한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일제의 모략전술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으며, 김좌진은 조금도 변절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시종일관하여 독립군의 양병사업(養兵事業)과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에 헌신했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기관지『독립신문(獨立新聞)』의 다음과 같은 1923년의 보도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난번에『대판조일신문』및『장춘실업신문』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씨가 하얼빈 일본영사관에 귀순하였다는 설(說)을 기재하였으나 이것은 사실무근이다. 일본 측은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반간책(反間策)을 꾀하고 있으니 이것에 속을 사람이 없거니와 김좌진씨는 오직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금년도부터 길림성(吉林省) 어느 지방에 둔전제(屯田制)를 대규모로 실행하기로 하고 일방으로는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설립하여 연금 1백여명의 사관을 배출하는 중이라고 하더라.’
이렇게『독립신문』은 김좌진 개인에 대한 일제의 모략전술을 간파하고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강조한 것이다. 김좌진은 태어나서 1930년 피살될 때까지 일생을 무력(武力)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겠다는 신념에 바쳐 항일무장투쟁에 전력했던 독립투사로 일제에게 소위 ‘귀순’하거나 변절한 일도 없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일제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김봉환을 시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첫댓글 어쩐지!!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료 잘 보았 습니다 그리도 잘알려진 사람인데 어찌해서 안동김씨의 족보에 수록이 안되였을까요 의혹 투성이네요
다만 김좌진 장군의 딸이 아마도 중국에서 사망을 하였으리라 봅니다 그 이름은 """""" 김산조""""" 그의 딸이 태어났을때에 장군의 동지들께서 돌아가며 돌보았다는 증언이 있네요